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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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2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5 ✦
“당당한 죄수 앞에서 당황한 권력자들”
(사도행전 26장 24~32절)
[들어가는 말]
오늘 제가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제가 우리 교회에 오기 전 부목사로 섬겼던 디트로이트한인연합장로교회의 원로목사이신 김득렬 목사님께서 지난주에 소천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입관예배에 급하게 다녀왔습니다. 그쪽에 가면서 제가 부목사 때 뭔가 디트로이트 교회나 김득렬 목사님에 대해 적어놓은 것이 없나 파일을 찾다가, 김 목사님에 대한 것은 찾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그 당시 인터넷에 떠돌던 재미있는 유머를 적어놓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제목은 “교회 광고 속의 부조화”였습니다. 이런 겁니다.
“다음 주에는 여선교회 주최로 각 가정에서 필요 없는 물건들을 가져와 싸게 판매하는 바자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여선교회 회원들은 잊지 마시고 반드시 남편들을 데리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데려와서 뭘 하라는 건지, 남편이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건지 약간 헷갈립니다.
“오늘 목사님의 고별설교 후에 할렐루야 성가대의 특별찬양이 있습니다. 제목은 ‘기뻐 뛰며 노래하라’입니다.”
“내일부터 3일간 금식기도회가 있습니다. 참가비는 5만원이며, 여기에는 숙박비와 푸짐한 식사가 포함됩니다.”
“오늘 아침 김 장로님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두 유가족을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 같이 일어나 폐회 찬송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를 부르시겠습니다.”
“다음 주에 가질 예정이었던 ‘평화와 화합을 위한 기도회’는 회원들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하여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이제 소프라노 이 집사님께서 특송을 해주시겠습니다. 특송 후에는 목사님께서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경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다.”
둘을 따로 놓고 보면 별로 문제가 안 되는데, 합쳐서 보면 약간 이상한 내용들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바로 이런 장면이 보입니다. 당연히 기가 죽어 있어야 할 죄수인 바울은 당당하게 외치고, 그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떵떵거릴 수 있는 권력자들인 총독과 왕은 당황해 합니다. 뭔가가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당당한 죄수 바울 앞에서 당황하는 총독 베스도 (24~26절)
바울은 바로 앞 본문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살아 계실 때는 못 만났지만,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바울은 총독의 청문회장에서, 메시아이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부르시고 사용해 오셨는지,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며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당당하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거기에 놀란 것은 총독 베스도였습니다. 원래 그가 이 모임을 마련한 목적은, 자기보다 유대의 사정을 훨씬 더 잘 아는 아그립바 왕을 통하여 바울을 죄인으로 황제에게 보낼 죄목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 자리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을 전하는 설교의 기회가 되었고 또한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에 베스도가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소리를 지르며 바울의 말을 제지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4절)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단정합니다.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다시 살아난 예수를 바울이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의 명령에 따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종과 증인으로 그 동안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바울은 베스도가 보기에 미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베스도는 총독으로서 바울의 신원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부임했을 때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였기 때문에 금방 파악했습니다. 유대인 최고의 바리새파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배운 바울이 구약성경에 능통한 학자이고 높은 학문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베스도는 이미 파악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방금 바울은, 자신이 증언한 것이 자기 말이 아니라 전부 다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내용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구약성경에 대한 지나친 학문적 열심 때문에 미쳐 버렸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아마도 베스도는 요즘 폐인과 같이 방안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던 사람들이 정신 이상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울도 공부만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자신의 설교를 요약하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5절)
베스도가 바울에게 ‘네가 미쳤다’라고 한 것은 ‘네가 지금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You are out of your min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말은 “참되고 온전”하다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미치거나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아그립바까지 대화 속으로 초청하며 계속해서 말합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6절)
우리말 성경에 이 말은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말은 바울이 계속해서 베스도 총독에게 한 말입니다. 베스도에게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아그립바) 왕께서도 이 일에 대해 알고 계시기에, 내가 그에게 거리낌 없이 말씀드린 것입니다. 나는 그가 이 일 가운데 무엇 하나 모르는 게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어느 구석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베스도에게 아그립바를 가리키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청문회는 신임총독 베스도를 방문한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진술을 들어보기 위해 베스도 총독에게 요청하여 개최된 것입니다. 그래서 청문회가 시작될 때 아그립바 왕은 26장 1절에서 본 것처럼 바울에게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라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이름을 부르면서 23절까지 계속 그를 쳐다보며 그에게 자기변호를 한 겁니다. 특히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거리낌 없이 예수님의 죽음과 다시 사심을 증언한 것은, 아그립바가 그 모든 사실에 대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임 당하심과 다시 사심에 대해 아그립바 왕이 모르는 것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여러 번 왔다 가셨고 사람들에게 가르침과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것을 모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임명권자인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공식적인 보호자였던 아그립바 왕이, 그 예수님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때는 이 아그립바가 없었고 헤롯대왕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그립바는 한참 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한 이야기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이 아그립바 2세가 알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아그립바 왕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밝힌 자신의 증언은 미친 소리가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미쳤다.’ 저는 없습니다. 혹시 여기 공부벌레인 분들은 그런 말을 들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공부벌레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에 미쳤다’는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네가 미쳤다’고 소리친 베스도에게 바울은 모든 면에 걸쳐서 이해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베스도의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자기가 이해가 안 가니까 ‘너는 미쳤다’고 단정하며 소리쳤습니다.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겁니다. 자기가 이해가 안 가면 항상 상대방이 틀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 그렇습니다. 내가 이해를 못하면 ‘너는 미쳤다’고 합니다. 베스도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어둠의 노예로 살아가면서도 자기가 어둠의 노예인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베스도 총독이 어떻게 빛의 세계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분의 종과 증인과 사도로 살아가는 바울을 이해하겠습니까? 그 바울이 가지고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 복음을 향한 열정,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베스도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런데 이해가 안 가니까 ‘네가 미쳤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가끔 젊은이들 사이에 누구와 사귄다고 하는 소리가 들려서 친구가 와서 “야, 너 그 사람과 사귀어?”라고 하니까 “내가 미쳤냐, 사귀게?”라고 합니다. 또는 “너, 미쳤어? 그러면 안 돼!”라고 하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미치다’라는 단어는 ‘무언가에 몰두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주 깊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운동에 미쳤어’, ‘저 사람은 드라마에 미쳤어’, ‘저 사람은 쇼핑에 미쳤어’라고 할 때, 정말 미쳤다는 뜻이 아니라 거기에 푹 빠졌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런 관점에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한 베스도의 표현은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바울이 정신 나간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 정말로 미친 사람이라는 의미로 베스도는 ‘네가 미쳤다’라고 소리 질렀는데, 그런 의미로는 틀린 말입니다. 누가 비정상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아니라 베스도 총독이 비정상 아닙니까? 또 거기 있는 ‘높으신 분들’이 비정상 아닙니까? 그러나 자신들이 비정상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놀라운 인물인 바울이 미쳤다고 보이는 겁니다.
<걸리버 여행기>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걸리버가 소인국에 가면 자기들이 다 작은 사람들이니까 엄청나게 큰 걸리버를 보며 비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대인국에 가면 자기들이 다 큰 사람들이니까 작은 걸리버를 보면서 비정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 자기 기준에 맞춰서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정말로 올바른 기준, 성경적인 기준, 하나님 보시기에 맞는 기준이면 괜찮은데, 자기감정에 근거한 기준일 경우 문제가 됩니다. 특히 베스도와 같이 상대방이 진짜로 틀리거나 미쳤기 때문에 미쳤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결론을 낼 수 없는데, 사실은 자기가 정상이 아닌 것을 모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 바울이 ‘무엇인가에 푹 빠지다, 몰두하다’라는 의미에서는 미쳤다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특히 그분의 교회를 그토록 박해하고 심지어 사람들을 죽는 데까지 몰아간 바울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래서 그분께 자신의 생명을 드린 삶을 살았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맞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께 미쳐서 살았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빌 1:20, 새번역)
그리고 그 전 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로마 교회에게 보낸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살아도 주님의 것, 죽어도 주님의 것,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다 뭔가에 미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진짜로 미치고 정신이 나가면 안 되겠지만, 뭔가에 몰두한다는 의미로 모든 사람은 뭔가에 미쳐서 살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당신은 예수에 미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욕이 아니라 칭찬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에게 “바울아, 네가 미쳤다!”라고 했을 때, 바울은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야, 내가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데 욕이 아니라 칭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미쳤다고 하면 그것이 부끄러워서 우리는 슬쩍 숨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공공장소에서 식사할 때도 기도하면 너무 티가 나니까 안 하는 척하거나, 하더라도 속으로 1초나 2초만 기도하거나, 뭔가를 떨어뜨리고 줍는 척하며 기도한다든지,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 척하면서 기도한다든지,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도 너무 푹 빠지면 안 되고 적당히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마지막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어디를 갑니까? 하나님 앞에 갑니다. 그 앞에서 ‘너는 어떻게 하다가 왔느냐?’라고 하시면 ‘너무 부끄러워서 뭔가를 떨어뜨리는 척하면서 살짝 1초만 기도하다 왔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에게 미쳐서 살지 않으면 다른 뭔가에 미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학벌이든, 성공이든, 남들의 인정이든, 취미생활이든(드라마, 스포츠, 운동), 또 안 좋은 것들로 도박이나 술 등에 빠져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미쳤다’라고 하니까 약간 어감이 이상한데 ‘푹 빠져 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기에 완전히 몰두해서 사는 것, 완전히 정신이 빼앗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뭔가에 미쳐서, 다시 말해 푹 빠져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에 미쳐서 살고 있는가? 무엇에 빠져서 살고 있는가?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게 뭔가? 그것만 생각하면 입 꼬리가 슥 올라가는 게 뭔가? 그게 그겁니다. 거기에 푹 빠져 있는 겁니다.
예수님 외에 어떠한 다른 것도 끝은 결국 멸망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것에 푹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중독이 됩니다. 중독이 되면 이제는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노예가 되면 그것이 자기를 옭아매고 허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끝은 멸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미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 푹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선하신 분, 완벽하게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께 푹 빠지고 중독이 되어 버리면 그게 바로 헌신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종과 증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이제 예수 믿으시죠. 교회에 나오시죠.’라고 하면 ‘조금만 더 놀다 오겠습니다. 조금만 더 재미있게 놀다 오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조금 더 자유롭게 놀다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자유롭게 하고 그쪽에서 놀수록 빠져들고 중독되고 노예가 되고 결국 멸망입니다. 허무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푹 빠지면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천국의 상급도 받습니다.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중독되어도 괜찮은 분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결국 끝이 좋지 않습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 번 해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으로도 조금 해봐서 알지 않습니까? 해봤는데 별 것 없지 않습니까? 너무 좋아서 해봤는데 별 것 없습니다. 조금 지나면 그렇게 좋았던 것도 싫증납니다. 그런데 완전히 빠져버리면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것이 자기를 완전히 컨트롤해버려서 아주 힘든 삶이 되는 것을 종종 경험하지 않습니까?
2. 당당한 죄수 바울 앞에서 당황하는 아그립바 왕 (27~29절)
이제 베스도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그립바를 향한 바울은 그에게 다시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7절)
본문의 아그립바 왕은 정확히 이야기하면 헤롯대왕의 증손자입니다. 예수님 태어나실 당시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 아기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던 사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했던 사람이 헤롯대왕입니다. 그 헤롯대왕의 증손자가 바로 본문의 아그립바(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헤롯대왕은 원래 이두매 사람입니다. 이두매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지나면서 이두매가 되었는데, 이것이 원래는 구약의 에돔(에서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를 로마제국이 보호해주고 황제들과도 친분을 쌓음으로써 유대인의 왕좌에 올라 헤롯 왕조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의 가정사는 아주 복잡합니다. 그는 이두매 출신이고 부인이 여러 명 있었는데, 유대 땅이 잠시 독립을 누리며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웠을 때 그 하스모니안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네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은 유대인의 피가 흐르게 된 겁니다.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아리스토불로스이고, 그의 아들이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으로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도 잡았다가 놓치고 죽이는 데 실패한 사람, 결국은 벌레에 먹어 죽은 그 사람이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오늘 본문의 아그립바 2세입니다.
본문의 아그립바 2세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요단강 동쪽)의 분봉왕이었지만,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의 공식 보호자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직책상, 그는 이두매 사람의 후손이면서도 동시에 유대인의 피가 흘렀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 앞에서는 자기도 유대인임을 크게 강조하면서 유대인들의 동정을 사고 환심을 샀던 기가 막힌 정치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이 어떻게 보면 아주 담대하고도 당돌하게 질문을 합니다.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아그립바 왕은 그의 직책상 성전의 보호자이고 대제사장도 임명하는 사람이니까 ‘선지자를 믿는다’라고 대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뜻 그렇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만약 선지자를 믿는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곧 예수라고 증언한 바울의 말에 공개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인들과 대적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아그립바가 ‘나는 선지자를 안 믿는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부정하면, 그것도 역시 선지자를 믿는 유대인들과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를 믿느냐’는 바울의 질문은 아그립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그립바 왕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바울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어서 바울은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줍니다. 선지자를 믿느냐고 한 자신의 질문에 바울이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는 말을 덧붙여 줌으로써, 아그립바 왕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 겁니다. 빠져나갈 길을 터주었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당신이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므로, 이 예수를 믿으십시오.’라는 선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를 간파한 아그립바 왕이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8절)
이 말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적은 말”이라는 데에 주가 달려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적은 말로, 또는 짧은 시간 안에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라고 아그립바가 말한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아주 애매하면서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답변입니다. 그는 아주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유대 분봉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쪽이든 반대하는 쪽이든, 어느 쪽에게도 걸려들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정치인답게 여기서 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이렇게 노련한 말재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의 고백과 실천으로 얻는 것이지, 말재주가 좋다고 얻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청문회의 결론을 내립니다. 놀랍게도 이 청문회장에서 마지막 결론을 내린 사람은 총독인 베스도 아니고, 아그립바 왕도 아니고, 죄수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29절)
지금 여기 청문회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바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방청하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높은 사람들 중에는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신분부터가 다릅니다. 아그립바 왕과 그의 부인 버니게는 사실 남매로서 근친상간 관계에서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그의 일행, 또 베스도 총독과 다섯 명의 천부장들, 가이사랴 시의회 의원들 모두 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유대 땅에서 최고 권력자들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유대 땅에서 그들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그들이 옷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화려한 관복과 예복을 입고, 왕관을 쓰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그들 앞에 서 있는 바울은 얼마나 초라했겠습니까?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 이제 나와서 청문회를 하고 있는데, 마치 거지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겉으로만 보면 상대도 안 됩니다. 바울이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저 ‘고상한 분들’을 보면서 ‘야, 나도 저런 옷 한 번 입어봤으면...’ 해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저도 이제 저 사람들처럼 저런 것 좀 누리며 살게 해주세요. 그 동안 너무 고생했는데, 이제는 좀 누리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지금 거지와 같은 모습의 바울이, 이 땅을 다스리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 권력자들 앞에서 “내가 이렇게 잡혀 있는 것, 죄수인 것 외에는, 여러분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선포합니다. ‘원하나이다’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지금 바울에게는 세상의 명예나 금이나 은이나 돈 같은 건 없었어도,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부르셔서 사도로 삼아주신 직분이 있었고, 주님의 종과 증인으로서의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청문회장에 앉아 있는 저 ‘높으신 분들’을 향해 “여러분이 지금 내가 갇혀 있는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 없는 사람의 인생이 아무리 이 땅에서 화려해 보여도 결국은 무엇입니까? 결국은 죽는 길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옮겨주는 역할과 사명을 받은 주님의 사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당당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도 사회에서 꽤 괜찮은 위치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아무리 괜찮은 위치에 있어도 위에 또 누가 있습니다. 아주 높은 사람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비굴해지거나, 그렇다고 객기를 부려서도 안 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돈이 없는 것 빼고 여러분이 나를 본받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학식이 조금 부족한 것 빼고는 여러분이 나를 닮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이 부족한 게 무엇이 있습니까? 부족한 게 하도 많아서 셀 수가 없다 하실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중 하나만 잡으셔서 ‘이것 빼고는 여러분이 나를 본받기를 원한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당당한 죄수 바울에 대한 권력자들의 무죄 선언 (30~32절)
이제 청문회 형식의 재판은 끝났는데, 베스도는 그가 원하던 로마 호송의 이유를 사실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바울이 여기 왜 잡혀 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의 씨가 분명히 떨어졌습니다. 이후로 이 사람들은 나오지 않아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이라도 이때를 계기로 나중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는 분명히 한 명 이상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의 가족 중에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에 가서 목이 잘려 죽었을 때 천국에 갔을 텐데, 최근에 나왔던 영화 <바울>에 보면 바울이 목이 잘려 죽는 순간 바로 천국에 서 있습니다. 이전에 자기가 박해했던 스데반과 사람들이 그를 맞아줍니다. 꼬마가 그를 맞아줍니다. 자기가 죽이고 박해했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얼마 후 바울이 천국에 있는데, 바로 이 청문회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또는 그들의 가족들 중에 바울이 있는 천국으로 들어와 바울이 ‘잘 오셨소. 어서 오시오.’라고 맞아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게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를 하다가 전도가 안 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안타까워합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믿게 하려 했는데 결국 믿지 않은 채로 이곳을 떠나 한국이나 다른 주로 간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놀랍게도 그분들 중에 ‘어서 오세요!’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가 있는데 올 수도 있습니다.
선교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갔는데 갑자기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와서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당신이 누군데요?’ ‘아, 왜 저 선교사님에게 당신이 선교헌금을 보내줘서 그분이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어 제가 믿고 여기에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땅에 떨어진 작은 씨앗의 역사를 결코 무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문회에 참석한 이 사람들이 바울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0-31절)
사형이 아니라 결박을 당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복음의 씨가 심어졌을 때 분명히 나중에 어떤 긍정적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이후의 이야기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는 분명히 떨어졌고 또 전파되었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들뿐 아니라 아그립바 욍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는 베스도에게 이런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32절)
사실 우리는 그 동안 죽 읽어왔으니까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무죄라는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제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유 없이 잡힌 것이고, 이유 없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고난은 사실은 바울 개인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왔습니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기회인 총독들 앞에서 증언하는 기회, 즉 벨릭스와 이제 베스도에게, 그리고 또 아그립바 왕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복음이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와주어서 복음을 이렇게 마음껏 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바울이 당했던 고난이 오히려 복음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저번부터 계속 강조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안 좋은 일, 슬픈 일, 괴로운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이 주님 안에서 꼭 안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벌어졌더라도 그것이 주님 앞에서는 꼭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역사가 이 일을 통해 일어나느냐 안 일어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에게는 너무 힘든 경험이고 너무 괴로운 일과 슬픈 일이었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며 쓰임을 받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일이 잘 안 풀리고 안 된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것도 없고, 또 일이 잘된다고 너무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항상 ‘과연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를 물어보며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축복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고난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제 다음 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도 마무리 부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유대 땅을 떠나기 전 마지막 청문회장에 예수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신분도 달랐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그의 일행과 베스도 총독과 천부장들과 시의회 의원들 모두 거기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너무나 초라한 죄수였습니다. 그러나 죄수 바울이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또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고, 오히려 권력을 쥐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던 그들은 아주 당황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몸은 죽일 수 있어도 나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일을 생명 걸고 끝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러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매일매일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늘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과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는 삶,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축복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