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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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6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7 ✦
“절체절명의 순간에 외친 소망의 선언”
(사도행전 27장 13~26절)
[들어가는 말]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즐겨보던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사랑의 유람선(Love Boat)>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온 다음에도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제가 섬기던 교회의 장로님 내외분이 결혼기념일을 맞이해서 어디를 간다고 하시기에, 어디를 가시냐고 물었더니 플로리다에 가서 크루즈를 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 대단하시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크루즈가 대중화되어서 우리 중에도 타본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도 크루즈를 두 번 타보았습니다. 사실은 두 번 다 크루즈라고 하기에는 조금 뭐 한 것인데, 첫 번째는 크루즈가 맞기는 맞습니다. 몇 년 전 LA에 갔을 때 부모님이 한 번 타보자고 하셔서 3박4일로 거기서 멕시코에 살짝 갔다 오는 작은 크루즈 배였습니다. 또 한 번은 ‘갈릴리 크루즈’였는데, 사실은 전혀 크루즈가 아니었고 30-40명 타는 작은 배였는데도 ‘크루즈’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 다 풍랑 같은 것은 없고 잔잔한 물 위에서 잘 타고 왔습니다. 그러나 때로 뉴스를 보면 큰 크루즈 배라도 강한 폭풍을 만나서 고생하다 왔다는 경우도 있고, 화장실이 고장 나서 물이 역류하여 돌아왔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바로 이런 항해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풍랑이 일어나고 문제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돌려서 생각해보면, 삶에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풍랑이 인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병이 나서 아픈 경우에 얼마나 고통이 심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프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아프기도 하고 문제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인생 문제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문제의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힘든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항해 길에서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시고 또 우리의 인생을 정금처럼 단련시키셔서 귀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려는 은혜의 손길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믿음으로 소망을 선포하는 바울의 믿음의 선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항해 길에서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과 직면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광풍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것을 오늘 바울의 믿음의 고백이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1. 갑자기 몰아닥친 광풍 (13~17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3절)
바울은 안 가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선장과 선주는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항이 작아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까, 저 옆에 있는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뵈닉스로 우리가 잘 갈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하며 계획대로 닻을 올리고 출항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배’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생각이 옳고 ‘바울이 괜히 저런 말을 해서 우리 마음을 언짢게 했다.’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조심하기 위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크고 긴 그레데 섬 해안을 끼고 항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죽음의 북동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4절)
항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섬의 내륙으로부터 큰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도 이처럼 모든 일이 우리 계획처럼 순풍에 돛단 듯 잘 나가다가,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이런 광풍이 몰아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바람의 이름을 우리 개역개정 성경은 ‘유라굴로’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풍을 가리키는 헬라어 ‘유로스’(Euros)와 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퀼로’(Aquilo)의 합성어입니다. 선원들(뱃사람들)이 말하는 북동풍, 그것도 아주 강력한 죽음의 북동풍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 잘 표현해놓았는데 “a wind of hurricane force”, 즉 허리케인과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진 바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NRSV, ESV 등 요즘 많이 사용하는 영어성경 번역들은 이것을 ‘유라굴로’라고 하지 않고 ‘Northeaster’ 즉 북동풍이라 불리는 광풍(혹은 허리케인)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그것은 허리케인과 맞먹는 엄청난 파워를 가진 바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큰 상선이나 크루즈 배처럼 강한 추진력의 엔진을 가진 배들도 태풍급 바람이 불거나 큰 파도가 몰아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배들은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이기고 나아갈 수 없는 배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용기가 대단하고 경험이 많은 뱃사람들이라도, 강력한 두 개의 폭풍(북풍과 동풍)이 합쳐져서 몰아치는 역대 최강의 바람이 만든 파도를 뚫고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냥 그 파도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상황입니다. 잘못된 파도에 엉뚱한 데로 떠밀려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파도가 칠 때 아무리 노련한 뱃사람이라도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5-16절)
제가 오래 전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설교를 어느 교회에 갔다가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본문만 가지고는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바람에 계속 밀려가다가 크레타 섬에서 약 23마일 떨어진 가우다라는 섬 근처로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가우다(Cauda) 섬은 지금의 가우도스(Gavdos)라는 섬입니다.
계속 항해하기에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배 뒤에 끌고 다니는 “거루” 즉 작은 거룻배들을 끌어올렸습니다. 이 거룻배들은 얕은 해안가에 상륙할 때 사용되는 작은 배들이고 때로 구명정처럼 사용되었는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 거룻배들이 날아와서 배에 부딪치면 거룻배들도 깨지고 모선도 해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풍과 파도에 날아와서 부딪치고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룻배들을 끌어올려서 밧줄로 꽁꽁 동여매었습니다.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7절)
위험에 빠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스르디스에 걸리는 게 뭐고 연장을 내리고 쫓겨 간 것은 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스르디스”는 ‘시르티스’(Syrtis)라는 단어입니다.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크레타 섬의 남쪽 에게 해 건너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부터 밀려드는 모래톱(모래언덕)을 말합니다.
‘연장을 내렸다’는 것은 어떤 무거운 짐이나 도구를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바람에 빠르게 밀려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내리는 일종의 닻 같은 것을 말합니다. 너무 빨리 밀려가니까 무거운 닻을 내려서 천천히 밀려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갔다’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밀려서 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을 보면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으로 밀려들까 두려워서, 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가고 있었다.” (14절)
지중해 남쪽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리비아 해안이 있는데, 그 당시는 북아프리카를 주로 ‘리비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 속에 ‘모래언덕’으로 불리는 ‘스르디스’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배든 그 바다 속에 있는 모래언덕에 탁 걸리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고 붙들리는 겁니다.
그레데 섬 미항을 출항한 이 알렉산드리아 배가 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남서쪽에 위치한 가우다 섬으로 휩쓸려갔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자칫 배가 남쪽으로 밀려가다가 결국 리비아 해안까지 밀려가서 바다 속 스르디스(모래언덕)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래언덕은 선원들에게 아주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 번 걸리면 누가 와서 구해줄 때까지는 꼼짝없이 있어야 하고, 망망대해에서 그런 데 걸리면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고작 돛을 내리고 그냥 휩쓸려 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처음 출항할 때는 순풍이 불어서 ‘우리가 바울의 말을 안 듣길 잘했지. 전문 뱃사람을 포함한 다수의 의견대로 한 것은 참 잘했다.’라고 생각했겠지만, 바로 조금 후 급작스럽게 돌변한 사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금 바울을 태운 이 배가 겪고 있는 일은 마치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작은 비유와도 같습니다. 때로는 세상 일이 순풍처럼 보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와서 아주 잘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경 내용도 그렇고, 교회에서 설교나 성경공부나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 등을 통해 ‘그렇게 하면 안 좋다.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데...’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그래도 내 경험과 지식으로 볼 때는 다르게 하는 게 낫다.’ 하며 나아갔을 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내가 알아서 했는데 일이 잘 풀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생각을 아주 잘한거지.’ 하며 의기양양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풍이 광풍으로 변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나 사람으로부터 예상 밖의 광풍이 불어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조금 살아보면 그런 것을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알아서 했을 때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다가, 중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Icarus)의 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미노아 문명과 관련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바로 이 그레데 섬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날개를 달고 날아서 크레타 섬을 탈출하고자 했던 이카로스의 꿈이 막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태양의 열에 녹아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는 것이 이카로스의 신화입니다.
인생이 그것과 참 비슷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뭔가 열심히 해서 날아오르며 잘되는 것 같지만, 뜻하지 않은 불행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그 위기를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진실함을 증명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든 대충 하는 사람이든, 다 좋은 일도 찾아오고 위기도 찾아옵니다. 그런데 좋은 일보다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진짜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풍이 순풍으로 바뀔 때는 누구나 감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분 좋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풍이 광풍으로 바뀔 때 진짜 신앙이 어떠한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쉽게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혹시 내가 불순종하여 광풍을 초래한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다 불순종이나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때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죄 때문은 아니더라도, 욥과 같이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어려움이 올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어려운 순간 낮아져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혹시 제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추며 돌아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위기 상황도 벗어나도록 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입니다.
2.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황 (18~20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8절)
‘풍랑으로 심히 애썼다’는 표현은 ‘폭풍우로 심히 괴롭힘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폭풍을 견디는 데 힘을 보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아리스다고 등 일행이 거기 탄 사람들과 같이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 이튿날이 되었지만, 광풍의 위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광풍 속에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상식량을 제외한 하물들을 모두 바다에 내버려야 했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서 실은 거대한 양의 곡물, 또 많은 하물주들이 실은 온갖 하물들을 다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선주의 돈이고 선장의 돈이고 또 하물주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미항에 있지 않고 조금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뵈닉스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항해의 위험에도 바로 옆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뵈닉스로 가자고 주장해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광풍 앞에서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광풍 속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곡물과 하물들)을 다 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19절)
지금 누군가가 내버린 게 아닙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째가 되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은 침구, 의자, 테이블 등 “배의 기구”도 바다 속으로 버리게 되었습니다. 배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할 기구들마저 바다 속으로 버릴 정도로 상황이 아주 위급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0절)
“여망”이라는 말은 ‘남을 여(餘)’에 ‘바랄 망(望)’, 즉 ‘남은 희망’이라는 뜻인데, 이제 남은 희망도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시적으로 ‘햇님, 별님’이라고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굳이 여기서 해와 별을 쓴 것은, 그 당시 뱃사람들이 해나 별을 보면서 방향도 알고 시간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볼 수 없으니 측정하여 알아낼 수 없는 상황,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단어들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을 왜 이들은 바다 속에 버려야 했습니까? 배에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기구들까지도 왜 바다에 다 버려야 했습니까? 그렇게 해야 혹시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했지만,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날들만 계속될 뿐, 죽음의 풍랑 유라굴로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는 겁니다. 실날같은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입니다. 이제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해도 별도 보이지 않으니까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 알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바람은 강하게 불고 거대한 파도는 쉬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삼키려 막 몰려옵니다. 그냥 배를 타서 조금만 흔들려도 배 멀미를 하며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물이 쏟아지고 물을 먹어야 하는 상황, 또 바람이 불고 배가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이리 밀려갔다 저리 밀려갔다 하며 쓰러지고 부딪히고 피가 나고 팔다리도 부러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이런 상황이 조금 후에 멈추면 그나마 다행인데 멈출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조금만 견디면 좋은 일이 생길 거다.’라는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얼마나 힘듭니까? ‘이제는 그냥 놓아야겠다. 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해도 별도 달도 다 안 보이니까, 지금 어디로 가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배에 있는 사람 숫자가 바울까지 합쳐서 276명입니다. 지금 이러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괜히 왔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괜히 미항을 떠났다가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그런데 누가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면했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위기 속으로 자신들을 몰아넣은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왜 미항에 머물지 않고 뵈닉스로 가자고 하며 무리해서 떠났습니까? 자신들의 피와 같은 돈, 소중한 돈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돈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다, 생명보다 돈이 귀하다.’라고 여겼습니다. ‘돈이면 생명도 지킬 수 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돈이 중요하다. 그래서 미항이 아니라 뵈닉스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려 했던 바로 그 돈 때문에, 결국은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이 지금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돈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도구이어야 할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돈이 오히려 우리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수없이 많은 곳에 돈에 대한 경고가 있지만, 지금 이것을 겪고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썼던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성경에서는 돈 자체가 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돈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돈은 중립적(neutral)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합니다.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썼을 당시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돈에 넘어가서 믿음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돈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자기에게 좋을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를 찌르고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뿐이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학위나 사회의 성공이나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맨 끝에 가보면 다 돈입니다. 아무리 유명해지더라도 돈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유명해질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량상품을 만들어냅니까? 돈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졌는데, 부실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지난번 세월호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무리하게 한계를 넘는 화물을 실었다가 배가 돌 때 넘어져 침몰하는 일이 왜 일어납니까? 돈 때문입니다.
이 콜럼버스는 그래도 괜찮지만, 제가 오래 전에 살던 애틀랜타에는 이상하게 유흥업소가 많습니다. 옛날에도 많았고 나중에는 뉴욕 쪽에서 온 사람들이 큰 식당도 세우고 또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를 세웠습니다. 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도박 산업이 왜 안 없어집니까? 도박이 나쁘다는 건 다 아는데 왜 안 없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또 지금도 아주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가 왜 벌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테러도 결국 돈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기는 조금 덜하지만, 한국은 좁은 땅인데도 부동산 투기가 지금까지도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사기 치고, 횡령하고, 대기업이 하청기업에 횡포를 부리고, 사람 간에도 갑질을 하는 일이 왜 계속 일어납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벌려고, 내가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그런 모든 행동들을 통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내가 사는 겁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국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의 생명까지 스스로 찔러서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돈이든 무엇이든 그쪽으로 가다가 어느 날 이런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이 갑자기 우리를 덮칠 때, 우리의 돈이 그 죽음의 광풍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 다급해서 이제 돈을 다 포기하고 살고 싶다고 한들, 그 광풍이 조용히 사라져주겠습니까? 우리의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학벌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겠습니까?
결국 이런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올 때 우리는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 결정을 하지 말 걸...’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때 주님을 붙들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를 하지 않는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안심하라 (21~26절)
이렇게 죽음의 풍랑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기는 사실 죽음의 풍랑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기가 뭔가 하면, 이것이 너무 힘드니까 ‘이제 끝이다’ 하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덴마크의 크리스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엄청난 외부적인 풍랑이 몰려오고 불행이 일어나는 것이 최대의 위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 그런 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토리는 이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1절)
지금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친 후로 며칠이 지났는데, 27절에 보면 “열 나흘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누가는 날짜를 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2주 동안 이 엄청난 폭풍에 계속 시달린 겁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가운데 서서 외칩니다. 바람이 불고 배가 흔들리고 몸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어떻게 먹겠습니까?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바울이 말을 하는데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볼 때 어떻게 들리는가 하면, ‘내가 뭐랬어? 거봐.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라고 들릴 수 있는데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고 이것을 면했으면 좋을 뻔했다.”라는 것은 ‘꼴좋다. 거 봐라.’ 하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제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내 말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비난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말입니다. 이제 죽음 앞에서는 돈이 자기를 살려줄 수 있는 게 아님을 일깨워주며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그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2절)
우리말 “안심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사실은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기뻐하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여망이 다 사라지고 살 소망이 없으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라, 안심하라’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비록 돈은 날렸지만 생명에는 아무 손상도 없을 것이며 돈은 살아서 다시 벌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바울이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가 나오는데, 이때 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뱃사람이고 엄청난 파도에 힘들어하며 괴로워하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안심하라! 기뻐하라!” 하고 말합니다. 그때 얼마나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는 느낌이 들었겠습니까? 이 상황에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자기들에게 경고한 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귀가 번쩍 틔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3-26절)
얼마나 대단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대단한 선언입니다. 지금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그 근거가 있습니다. 근거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 관광을 위해서 지금 무슨 알렉산드리아 크루즈 배에 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것은, 베스도 총독의 법정에서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그리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또 로마로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고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위대한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라굴로 광풍이 바울을 비켜간 것이 아닙니다. 광풍이 불었는데 바울이 서 있는 곳만 조용하고 옆에만 폭풍이 몰아친 게 아닙니다.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다 휩쓸려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이 젊은 때도 아니고 노년에 접어든 나이이며 몸도 아주 허약합니다. 그런데도 이 폭풍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넘어지고 뒹굴고 하는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이때만 이야기하신 게 아닙니다. 이때는 천사를 보내어 이전에 주신 말씀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인데, 23장 11절에 보면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데, 아무리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어도 바울은 분명히 ‘나는 괜찮다. 살아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동역자 누가와 아리스다고 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하고 있는 273명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여기서 새롭게 추가해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살아나서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내용입니까? 정말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2020년이 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늘 벌써 1월 마지막 주일로 1월이 다 갔습니다. 그럼 이제 11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오늘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물론 예배는 매주 있고 주중에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말고 그냥 다음 주에 가지.’ ‘그 다음 주에 가지.’ ‘삶 공부는 이번에 관두고 다음에 또 있을 테니 다음에 하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있을지 없을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그때까지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탄 배에 엄청난 광풍인 유라굴로가 불었습니다. 꼼짝없이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타고 있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선주와 선장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거기에는 화물주들이 많이 타고 있었습니다. 보따리 장사꾼들로서, 돈을 벌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던 사람들, 그래서 자기 화물을 꽉 붙들고, 이것이 곧 돈이기 때문에 가서 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로마 군인들이 있습니다. 강한 군사력을 지닌 로마의 군인들입니다. 또 백부장이 그 배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가장 높은 사람으로서, 지시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죄수 바울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이지만, 그 배에서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배에는 다른 죄수들도 있고 다른 여행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바울은 죄수였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결국 276명 모두를 살린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아니,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돈도, 권력도, 군사력도, 육체의 강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보다 강하신 주님, 광풍도 다스리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순간조차도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리더십은 이제 주님을 섬기는 바울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뒤에 보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절망 속에 있던 273명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작은 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이처럼 큰 유라굴로가 불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부느냐가 문제이지, 반드시 옵니다. 그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유라굴로가 불지 않고 있을 때 빨리 결단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무엇을 목적으로 살 것인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 주님의 소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해야 되겠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붙들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어떤 상황이 우리 삶에 닥치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낼 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살려내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