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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8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2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방문

(사도행전 2513~27)

 

[들어가는 말]

 

한국에 어떤 목사님이 있었는데, 교회에서 한 아이가 아주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도 잘해 반에서 항상 1, 2등을 차지했고,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에 가서 연습을 했고, 또 발레도 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는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김밥으로 저녁을 때워가며 이 학원 저 학원 다니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러면서 성적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을 본 목사님이 안타까워서 힘들지 않니?” 하고 물어보니까, 그 아이는 자기 능력의 한계를 알지만 엄마 아빠의 기대가 너무 커서, 혹시 실망시킬까 두려워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국에도 바쁘게 사는 아이들이 많지만, 한국에는 정말 많은 아이들이 바쁘고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좋은 동기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살 때는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혹시 여기 부모님들 중에도 내가 못 이룬 것을 내 자녀를 통해 한 번 이뤄보겠다라는 꿈을 갖고 계시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라 집착이기 때문에 빨리 그것을 없애는 게 좋습니다.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해 산다면 그 인생은 아주 불행해집니다. 자기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인 삶이 되고 만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살면 절대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많은 2세들 중에서 부모님의 바람과 집착과 욕심 때문에 의대에 가고 법대에 가고 비즈니스 전공을 하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길을 갔지만, 본인이 하고 싶었던 것은 미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모님의 기대를 다 만족시켜준 다음에 그만두고 다시 아트스쿨로 가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허송세월한 것이 몇 년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살면서 평생 부모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라고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무덤에 묻히셨는데도 부모님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 하고 원망하며 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그런 식으로 남을 만족시키는, 특별히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삶이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남을 만족시키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자 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이 사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또 허영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았지만 행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1.   베스도를 방문한 아그립바와 버니게 (13-22)

 

1)  자기포장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거짓된 인격을 경계하라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3)

 

얼마가 지난 후에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아그립바 2세가 자신의 한 살 어린 여동생 버니게와 함께 신임총독 베스도를 방문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를 찾아옵니다. “아그립바 왕이라고 나온 이 사람은 헤롯 대왕의 증손자였고, 그의 정확한 이름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Marcus Julius Agrippa II)’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지난 사도행전 12장에 나와서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투옥했던 헤롯이고, 나중에 벌레에 먹혀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이 아그립바의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아그립바 2세는 여동생 버니게와 함께 옵니다. 그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면서도 예루살렘 성전 감독권과 대제사장 임명권을 받아서 갖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얼마 전 아나니아에서 이스마엘로 교체한 사람도 바로 이 아그립바 2세입니다. 이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막내동생이 바로 이전 유대 총독이었던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드루실라는 서로 남매입니다.

 

버니게는 지금 이 시대에 살았다면 타블로이드 신문이나 피플 메거진(People Magazine)에 매일 사진이 나올 정도로 복잡한 사생활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이전에 두 번 결혼을 했는데, 한 번 결혼했다고 돌아와서 오빠 아그립바와 살림을 차리고 동거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욕을 먹으니까 다른 사람과 또 결혼하고 사는 척하다가 금방 다시 관두고 와서 아예 내놓고 자신의 오빠인 아그립바 2세와 같이 살림을 차린 근친상간의 불륜관계였습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로마의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정부가 된, 아주 복잡한 여인입니다.

 

그런 버니게를 데리고 아그립바는 신임 총독 베스도를 방문하는데, 며칠이 지나 총독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4-16)

 

분봉왕 아그립바는 새 총독이 왔기 때문에 그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베스도가 가이사랴에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이틀 후에 예루살렘으로 방문을 갔을 때, 대제사장 무리가 신임총독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고소만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정죄하기를요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바울에 대한 유죄 판결을 정해놓고는 베스도 자신에게 정죄해주기를 요청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난번 본문인 7절에는 나오지 않은 내용인데, 베스도의 입을 통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음흉한 속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베스도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만나자마자 그들이 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는 말입니다.

 

정치꾼은 정치꾼을 알아봅니다. 상대방의 속셈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 자신의 이득을 따라 계산법에 의해서 슬쩍슬쩍 눈감아주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다 웃으면서 인사하지만,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막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내게 유익한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베스도에게 이야기하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고, 베스도는 금방 부임했기 때문에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면서도 또 어떻게 하면 자기가 유대의 총독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이끌어갈지 계산을 돌리면서 대화를 한 것입니다.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6-18)

 

지금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피고에게 변호의 기회도 주지 않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로마법에 어긋남을 내세워,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베스도가 이전 총독인 벨릭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입니다. 훨씬 유능하고 일도 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볼 때, 베스도도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가 아무리 유능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유대 총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2세 앞에서 자기를 굉장히 포장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애쓰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베스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소가 있었을 때, ‘나는 그 증거를 확인하고 피고가 원고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법치국가인 우리 로마의 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로마 총독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일종의 생색을 내고 자기포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은 지난번 25장 앞부분을 보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고, 베스도는 바울이 헤롯 궁 안에 잡혀 있고 자기도 금방 가이사랴로 돌아갈 테니까 거기 와서 재판하자고 말한 것뿐입니다. 로마법에는 이게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편의상, 그리고 기 싸움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요청을 거절하고 가이사랴로 온 것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10-11절을 보면 로마 법대로 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바울이었지, 베스도가 알아서 해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요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베스도가 전임자 벨릭스와는 달리 자기는 아주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같은 표현을 보면 자기가 굉장히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부각하지 않습니까? 자기포장입니다. 그래서 재판을 열어 바울을 법정에 세웠는데 바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그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보십시오.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18) 자기 예상대로 되고 있으며, 자기가 신속히 일을 처리하고 또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베스도는 계속해서 자기가 법적으로도 완벽했고, 정의로웠고, 굉장히 열심히 일을 했고, 심지어 조금 후의 일까지 잘 판단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총독과 같은 권력자든지 아무 권력이 없는 낮은 사람이든지, 가진 게 많은 사람이든지 적은 사람이든지, 사실 사람들은 다 남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게 좋지, 무시하는 게 좋겠습니까? ‘저분은 훌륭한 분이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 사람 형편없어.’ 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쁩니까?

 

그러다 보니까, 남이 오해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인정을 받기 위해서 과장을 하고 자기포장을 하고 생색을 내고,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가 원래 의도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인정받고 자기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거기에는 거짓말이 끼어들게 됩니다. 아무래도 사실이 아닌 게 거기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게 될 때 망신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잘못이 명백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일이 없다.’라고 하면, 조사를 해도 잘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진짜 망신을 당할 상황이 되어도 어떻게 또 다른 것을 부각시키면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뭔가를 잘못했을 때 거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복이지, 그것이 밝혀지지 않고 망신당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 것이 절대 복이 아닙니다. 그것이 절대 좋은 게 아닙니다.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만 슬쩍 속이고 살짝 덮고 포장하여 넘어갔는데, 그것이 밝혀질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갔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럴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내 인격으로 쌓여 버립니다. 그게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쌓이면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정말 안타까운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것에 슬쩍 속이거나 살짝 자기포장을 하거나 살짝 바꾸거나 살짝 덮는 것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이건 별 거 아니니까 괜찮겠지’? 아닙니다. 괜찮지가 않습니다.

 

차라리 드러나서 망신당하면 괜찮습니다. 그러면 별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 드러나고 넘어갈 때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그것이 자꾸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또 속이고 또 포장합니다. 그러면 아예 내 인격이 포장하고 생색내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인격으로 굳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놀랍게도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내가 알아서 하겠다하며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들에게 벼락을 내리셔서 벌하시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그렇게 해보고 싶어? 그럼 해봐.’라고 놓아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을 빨리 눈치 채고 빨리 회개하고 빨리 돌아오는 게 축복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라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19-22)

 

베스도의 19절의 말을 통해 성경은 바울이 핍박 받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로마가 볼 때 사회 정치적인 문제는 전혀 없고, 오직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 관한 것이며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베스도의 자기포장이 또 시작됩니다. 베스도는 완전히 나쁘고 탐관오리에다 타락하고 돈만 밝히는 정치인은 아니었습니다. 벨릭스와는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 자리에 올라오면서 자기포장, 과대 포장, 속임수, 거짓말이 자꾸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인격이 되면서 완전히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겁니다.

 

여기서 또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로마의 총독으로 행정관인 자기가 보니까, 특정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정치적 문제도 아니고, 그냥 유대교의 종교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리를 받겠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자기는 이 일이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일이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겠느냐?’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또 이런 사람의 특징은 겸손한 척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20절에서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라고 합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잘 몰라서 바울에게 물어봤습니다.’라고 하니 얼마나 겸손해 보입니까? 이것도 다 계산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실은 예루살렘에 갔을 때 바울을 그곳에 데려와 재판해달라고 하는 유대 종교지도들의 요청이 있었고, ‘나는 금방 가이사랴로 돌아가니까 불필요하게 여기서 할 필요가 없고 그냥 당신들이 와서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하자.’라고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가이사랴까지 와서 바울 사건을 처리하기 원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보면서, 총독으로서는 지금 막 부임했기 때문에 자기가 다스리게 된 이 지역의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유리합니다


그러니까 이 유대인 높은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고, 또 그들의 비위도 맞춰주어야겠고, 그런데 바울이 로마 시민이니까 재판도 정확히 하기는 해야 하겠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은근히 떠 본 것이 9절에 나온 사실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데려가서 하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유대인들 앞에서 정치적 제스처를 분명히 보여준 겁니다단순히 종교 문제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고 지금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고 자기가 총독으로 부임했으니 좋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제스처였지, 정말로 종교 문제라는 것을 자기가 다 파악하고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하겠느냐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다 숨겨 버리고 자기는 굉장히 공평하고 죄수를 굉장히 배려하는 것처럼 포장해서 아그립바에게 말합니다


솔직히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치인들만 이렇게 합니까? 우리 삶에도 이런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요청대로 예루살렘으로 보내게 되면, 바울은 암상 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 40명 이상 있는데, 숨어 있으며 매복했다가 바울을 암살하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위험한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로마가 보호해줄 수 있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거절함으로써 베스도의 정치적 제스처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건의 진실입니다.

 

사실 세상은 서로 속입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뒤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앞에서 속아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도 고도의 정치적 계산입니다. 음흉한 계산법으로 자신의 속내를 가린 채 껄껄거리고 파티를 하고 먹고 마시며 거래를 하면서 살아가는 게 세상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것이 누가인데, 누가가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다 알고 있었겠습니까? 높은 가능성은, 재판할 때 누가가 방청석에 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아니면 나중에 바울에게 자세하게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겉으로 이런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르게 하는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깊은 속까지 다 통찰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에게 숨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을 그리스도인은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데 그렇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심판주이시며 결국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정말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겉 다르고 속 다르고, 여기서 말이 다르고 저기서 말이 다른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서 혹시 사람은 속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딴 말 저기서 딴 말을 하겠습니까? 어떻게 겉으로는 다른 말,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갈 때 다 드러난다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모든 것, 즉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생각과 말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과장되거나 자기포장을 하거나 생색내거나 속이거나 거짓말하거나 술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정직하게 살도록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야고보서에서도 그렇고, 맹세하지 말고 할 때는 하고 아니오할 때는 아니오라고 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2.   허무한 인생들 앞에 선 진짜 인생 (23-27)

 

1)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돌아보는 인생

 

총독 베스도의 설명을 들은 아그립바는 바울의 말을 직접 듣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이튿날 즉각 바울에 대한 청문회를 엽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그리고 그를 수행한 그의 대신들, 총독 베스도와 천부장들, 그리고 가이사랴 시의회 의윈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바울이 불려 나옵니다.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3)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겉으로 보면 왕과 왕비입니다. 그들은 청문회장에 크게 위엄을 갖추고왔습니다. ‘위엄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판타지아(fantasia)’입니다. ‘과시’, ‘허식’, ‘허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그립바가 유대 지방에 새로 부임한 신임 총독 베스도와의 첫 대면을 위해 가이사랴에 왔는데, 신임총독 앞에서 얼마나 자기 위엄을로 과시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왕복 중에도 가장 위엄스러운 자주빛 왕복을 입고, 머리에는 머리띠 모양의 금 왕관을 쓰고 나온 것입니다. 버니게도 아그립바 왕의 그런 모습에 맞추어서,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옷과 관을 입고 쓰고 나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그립바 왕을 수행한 그의 신하들도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들을 맞이한 총독 베스도도 아무 옷이나 입고 나왔겠습니까? 그도 역시 로마제국의 총독임을 과시하는 주홍색 예복을 입고 나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가이사랴에는 당시 로마군 다섯 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다섯 개 사단의 우두머리인 다섯 명의 천부장들도 눈부시게 번쩍이는 제복을 입고 참석했을 것입니다. 시중의 높은 사람들도 왔는데, 가이사랴 시의회 의원들입니다. 이들도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날 청문회장은 마치 패션쇼 같이 저마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들의 자기 과시용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바울이 나옵니다.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지난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바울의 옷차림이 어땠겠습니까? 화려하게 입고 나온 이 높으신 분들에 비해서 바울의 옷차림은 정말 누더기와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2년 동안 감옥 안에만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얼마나 초췌했겠습니까? 몸도 그랬고 머리나 수염을 제대로 자르거나 가다듬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교회 전승에 의하면 키가 작은 바울은 대머리였고, 눈썹은 일자였고, 코는 매부리코였고, 다리는 안짱다리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모습으로 바울이 나타난 것입니다. 원래도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던 바울이었지만, 그 옷차림과 수염과 머리와 피부 등 모든 것들이 정말 형편없고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다들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온갖 화려한 옷을 입고 나온 사람들이 죽 있는데, 그 앞에 완전히 이상한 모습의 바울이 마치 거의 거지와 같은 모습으로 나와 있는 장면입니다.

 

그것을 보통 눈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눈으로 그 자리를 보고 계시겠습니까? 그들의 화려한 옷, 위엄을 갖춘 엄청난 예복과 왕관, 그들의 화려하고 멋진 모습, 피부 관리를 받아서 번들거리는 피부 등에 하나님이 , 이 사람들 참 대단하구나!’ 하고 감탄하셨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을 보시면서 아이고, 꾀죄죄하네. 형편없네.’라고 하셨겠습니까? 그 반대가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예복이 화려한 것이지 그들 자신이 화려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심령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십니다.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이 사람들의 모습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은 참으로 더럽고 악한 자들이다.’ 하고 보셨을 것이고, 바울을 보실 때 형편없는 모습이었지만 누구보다 화려하고 누구보다 찬란한 사람으로 보아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그런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그에게서는 생명의 향기가 진동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향기, 복음의 향기, 기도의 향기, 말씀의 향기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게 입은 사람들은 온갖 썩은 악취가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썩은 쓰레기를 제일 비싼 옷으로 덮어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화려합니까? 금방 썩은 게 밖으로 베어 나옵니다.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겉이 별 볼 일 없어도 속이 진짜이면 그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보셨던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다 실패한 인생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4)

 

베스도는 이 청문회장을 마치 국빈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회장인 것처럼 말을 합니다. 여기서 12장에 나왔던 헤롯, 즉 바로 이 아그립바의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생각납니다. 멋지게 차려입은 귀빈들,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유대왕 아그립바 그리고 버니게, 또 아무리 고위 군 장성과 도시의 높은 사람들이 큰 위엄을 갖추고 왔어도, 아무리 그렇게 멋지고 화려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여동생을 이내로 삼은 악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이 으스대며 들어오니까 베스도는 바울을 불러와서, ‘이 사람은 너희 유대인들이 살려

둘 수 없는 사형감이라고 예루살렘에서만이 아니라 여기까지 와서 고발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25-27)

 

문제는 로마 제국의 대행자로 온 총독 베스도 자신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런 악한 혐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황제에게 상소를 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인 그를 로마로 보내야 하는데, 확실한 죄목이나 혐의도 없이 황제의 법정으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황제가 누군가 하면 그 악명 높은 네로 황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 유대 통치자들 앞에, 특히 아그립바 앞에 세웠다고 일장 연설을 합니다.

 

그런데 총독이 볼 때 혐의가 없으면 풀어주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황제가 왜 귀찮게 나에게 보냈느냐?’라는 책망을 받을까 두렵고, 그렇다고 풀어주자니 자기가 막 와서 통치하게 된 유대 땅의 지도자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간에 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그립바 같은 사람 앞에 바울을 세우는가 하면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26)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27)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려고 한다.’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냥 보내면 자기가 혼나기 때문에 죄목을 확실하게 붙여서 보내기 위해서, 어떻게든 무슨 죄라도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불렀다는 것이 자신의 속마음입니다. 역시 여기서도 포장하며 가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도 다 높은 자리를 바라보며 합니다. 미국 대통령들의 사진이 나온 것들이 있습니다. 취임 전과 임기 후 사진을 보면, 각각 다른 사람들이 거기 있습니다. 취임 전에는 아주 생생하고 젊은데,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나서는 폭삭 삭아버린 모습입니다. 그렇게 되는데도 다들 하고 싶어 합니다. 높은 자리인 대통령을 하겠다고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결정권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게 꼭 좋은 게 아닙니다. 올라가면 이전에는 없었던 위험한 일들, 힘든 일들이 생깁니다. 특히 많은 고위직 사람들이 자기 권세를 휘두르며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이쪽저쪽 다 눈치를 봐야 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만족을 시켜주어야 하는데 안 되니까 힘들어 합니다. 그러면 원래 반대하던 사람들은 계속 반대하고, 원래 찬성하던 사람들조차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며 반발해서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혹시 우리 삶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사는 삶이 아닌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인생은 얼마나 피곤합니까?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쉼이 없는 인생의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라는 이스라엘 권력자와 또 유대인 고위층인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을 다 만족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막 부임했으니까 얼마나 의욕적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죄한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 한 번 괴롭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다시 한 번 굳이 세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26장에서도 보겠지만, 이렇게 법정에 세우면 책임지는 사람이 총독인데, 아그립바가 나도 듣고 싶습니다. 나도 알고 싶습니다.’라고 했다고 잠시 재판권을 넘겨주는 식이 되고 맙니다. 원래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정직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다 보면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눈치 보고 저 사람 눈치 보고, 특히 높은 사람이나 나에게 이익을 주고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보려 살다 보면, 그 결과로 자기도 피곤한 인생이 되고, 그 사이에서 죄 없는 사람, 힘없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결과가 나올 때가 정말 많습니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히트 상품을 개발해서 팔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이 많은 사업가는 그것이 허황되다고 충고해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여성지를 만드는 사업가가 있어서 그것으로 돈을 벌겠다고 한다면, 어린이부터 80대까지 다 만족할 수 있는 여성지를 만들겠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것과 함께 20대 여성을 위한 월간지를 만드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성공 가능성이 높겠습니까? 반지 하나를 디자인해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자기의 부모, 더 나아가 선생님들이나 친구들 등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삶을 삽니다. 그러다 보면 너무 피곤하고 힘들며, 자기도 불행하고 주변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한 삶이 되고 맙니다. 결국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다 보면,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자기 자신조차도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도한 사람이 바로 베스도입니다. 베스도가 그렇게 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오늘 핵심은 25절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입니다. 결국 성경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죽일 죄가 없었지만 로마 당국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 바울도 지금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사도행전이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로마 총독 베스도의 입을 통해서 내가 볼 때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로마 백부장을 통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이들이었도다”(15:39)라는 고백을 여기서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처형할 때는 자기들의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서 고발하여 이스라엘 땅 안 예루살렘에서 사형을 시켰지만, 이번에 바울에 대해서는 그 전략이 실패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바울을 그 당시 땅 끝으로 여겨지던 로마로 보내셔서 이 세상 한복판에서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은 로마 시위대 안에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시위대는 거기서 황제도 나오는 군대인데, 거기서 놀라운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매일매일 항상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길과,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길이 있습니다. 사실은 자기의 이익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길은 참으로 좁게 보입니다. 그러나 들어가 보면 넓고 결국 끝은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길, 사실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길은 넓어 보이지만, 들어가 보면 결국에는 멸망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자기 이익을 따라 살기보다, 딱 한 분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결국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그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선택권을 주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매일 매 순간 내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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