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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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9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9 ✦
“멜리데 섬에서 생긴 일”
(사도행전 28장 1~10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한국 KBS의 <역시스페셜>에서 조선시대 시인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정초부’입니다. 정초부라는 사람은 그 당시 굉장한 시인이었지만, ‘초부’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조선시대 최하층인 천민 노비인 초부, 즉 나무꾼이었습니다. 이름도 없는 나무꾼 정씨였습니다.
한시는 운율이 있고 기승전결 구성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와 함께 15가지 정도의 한시 작성법을 알아야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비도 10년 이상 공부를 해야 제대로 시 한 편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비였던 그가 어떻게 그런 한시를 지을 수 있었고, 그것도 조선 후기 최고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이라는 책에 그의 시가 무려 11편이나 실릴 정도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습니까?
그의 시집을 찾아낸 연구 팀은, 노비 정씨의 재주를 알아본 주인 여씨가 자기 아들 여춘영의 글공부에 노비 정씨도 함께 배우게 해주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조선 후기 명문가 양반이었던 여춘영이라는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그를 노비가 아니라 스승으로 대했고, 나이 들어서는 친구로 여겼다고 합니다. 결국 여씨는 정초부가 45세 때 그의 노비증서를 불태우고 면천시켜, 현재 양평군 양근 근처 갈대울에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참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고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시절에, 여씨는 하인을 친구로 여겨 깊은 교분을 나눴을 뿐 아니라, 그의 시를 사대부 시회에 소개했고, 심지어 ‘동원아집’이라는 양반 모임에 가서 시를 나눌 수 있게 기회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때 나무꾼 정씨가 왔을 때 양반들이 ‘아니, 이런 천한 것이 어디 감히 여기를 오는가?’라고 하며 내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시에 감명을 받은 양반들이 그가 살던 월계협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최하층 천민인 노비가 양반들을 뛰어넘는 시인으로 높임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는 이 사실을 보면, 조선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전부 다 꽉 막힌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삶 속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누리는 축복이 자기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못 누리는 사람들도 누리도록 흘려 보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분과 재산과 사회적 위치와 학벌 등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재단하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이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이 시대에, 그런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나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흘려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멜리데 사람들의 호의와 뱀의 출현 (1~6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1절)
안전하게 구조된 후 알고 보니까, 그 섬은 현재 몰타(Malta)로 불리는 멜리데 섬이었습니다. 몰타 섬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시실리(Sicily) 섬과 북아프리카 튀니지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인데, 현재는 전 세계에서 은퇴 후 가장 살기 좋은 곳 중 하나로서 상위권에 올라 있는 곳입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2절)
지금은 개역개정을 사용하지만 이전에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던 개역한글 성경에 오타나 잘못된 번역이 많아서 개역개정으로 바꾸었습니다. 개역한글에서는 섬의 원주민들을 ‘토인’이라는 단어로 번역해서 마치 대충 아래만 걸치고(?) 사는 아프리카 토인들을 연상하게 했었지만, 지금 사용하는 개역개정에서는 ‘원주민’이라고 잘 번역했습니다.
원주민이란 단어가 영어성경에는 ‘islanders’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가 헬라어로 ‘바르바로이(barbaroi)’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어의 ‘barbarian’(야만인)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당시 로마의 라틴어나 그리스의 헬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말하는 민족 출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치 ‘바르바르’ 하고 중얼중얼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로마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다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무시하는 표현입니다. 강한 민족이 약한 민족을 무시하는 겁니다. 실제로 멜리데 혹은 몰타 섬 주민의 다수는 카르타고 출신으로, 페니키아 말을 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에게 무식한 야만인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멜리데 사람들은 풍랑 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난파하여 헤엄쳐서 탈출해 온 이들이 아주 지쳐 있었고, 비바람에 온 몸이 물에 젖어 있는 이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아주 친절하고도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이상의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과 동정의 마음이 있었고, 난파된 외국인들에게 불을 피워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일부 크리스천들,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만 사랑과 친절이 있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인격도 예의도 사랑도 없는 것처럼 짐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데, 특히 시골 같은 데 가보면, 소위 입만 살아 있는 일부 교인들과는 달리, 교회에 안 다녀도 손님 대접을 너무 잘하고 나그네를 환대해주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슬람권에 가면 문화 자체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보는 외국인인데도 자기 집에 오라고 해서 대접합니다. 이전에 갔을 때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들이 가장 크게 환영하는 표시는 음식을 갖다 주는 것이었는데, 특히 2리터짜리 코카콜라를 갖다 주며 마시라고 했습니다.
이런 환대를 바울과 뱃사람들과 장사꾼들과 로마 군인들과 심지어 죄수들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성경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것처럼 나그네를 환대하고 친절을 베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조금이라도 실천해보자고 해서, 목장 모일 때 돌아가며 자기 집을 열어 대접하는 겁니다. 섬김의 훈련을 하자고 돌아가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금요찬양집회가 있는 주에 손님 초대의 날을 해보자고 하는 것도 그런 취지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을 오픈해보고 손님 초대도 좀 해보자고 해도, ‘그런 걸 왜 하나’ 하며 싫어하고 귀찮아하고 회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못하는 것은 괜찮지만, 일부러 싫어하고 회피하고 귀찮아한다면, 그렇게 하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믿는 우리보다 더 잘 대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멜리데 섬 사림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떠내려온 사람들이 죄수인지 군인인지 장사꾼인지 묻지 않고, 폭풍을 만나 난파하고 물에 빠져 추위에 떨고 있는 사림들을 위해 모닥불을 피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아주 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보여주어야 할 일입니다. 보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런 게 나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만인이라고 무시당하던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이런 점을 배워야겠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3절)
아마도 바울은 그들의 친절한 행동을 받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너무나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으며 이전에 고문을 당하는 등 몸도 온전하지 못했지만, 같이 돕기 위해 일어나서 땔감으로 나뭇가지를 한 묶음 모아 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뭇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독사가 불길에 놀라서 나오며 바울의 손을 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뱀이 바울의 손을 물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3절 끝에 “물고 있는지라”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를 보면 바울의 손에 뱀이 붙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붙어 있으니까 사람들은 뱀이 물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4절)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난파선에서 헤엄쳐 나온 많은 사람들이 죄수라는 것을 로마 군인들로부터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독사가 바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이 사람은 살인자가 분명하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뱀이 문 것을 보니까 살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죽음의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지만, 몰타 섬 포에니족의 신화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신 디케에 대한 개념에 의하면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공의가 살려두지 않고 결국 처벌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공의’라는 것은 정의(justice)라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심판하고 처벌하여 질서를 바로잡는 공의의 여신 ‘디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사상은 인과응보적 처벌 또는 복수입니다.
그런 사상적 배경 속에서 몰타 원주민들은, 유대 최고의 율법사에게 훈련을 받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 사도로 세움을 받아 그 동안 복음을 열심히 전한 바울을 살인범이라고 하며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심판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갖는 가장 가벼운 생각은, 어떤 사람이 회를 당하거나 재난을 당할 때, ‘저 사람은 분명히 뭔가 죄를 지었다. 인과응보다. 하늘의 권선징악이다. 정의의 여신이 살아 있다.’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불교에도 인과응보와 업보의 사상이 있고, 성경도 죄의 결과나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업보나 인과응보 개념을 뛰어 넘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의 네 친구가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나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도 사실 불교의 인과응보 개념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특히 유대인 문헌인 탈무드나 미드라쉬 같은 데 보면,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문제에서 랍비들이 가르치는 내용, 유전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태아의 문제에 대한 생각에서 그런 사상, 즉 뭔가 죄나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주 큐티 본문 중 하나가 요한복음 9장이었는데, 9장 2절에 보면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청년을 만나서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것은 율법에 기초한 삶을 살던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깔려 있던 시상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요 9:3, 새)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이게 다 업보나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어떤 일을 당하니까 ‘저 사람이 뭔가 잘못했나 보다. 제대로 못 살았나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때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어서 나자마자 눈이 안 보였던 이 사람의 경우나 구약의 욥의 사건을 보면, 전혀 인과응보 개념과는 다른, 온 우주의 주안이신 하나님의 주권 속에 벌어지는, 그러나 우리가 당장은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관점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좁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이렇고 저렇고, 예수가 이렇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이런 걸 왜 믿는가?’라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열심히 연구한 결과 그런 결론을 얻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말이 안 되니까 못 믿겠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생각이 아닙니까?
우리 좁은 머리로 어떻게 다 이해합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는, 욥기를 끝까지 읽어보고, 요한복음을 잘 읽어보고, 또한 사도행전도 28장까지 다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함부로 ‘저 사람, 뭔가 잘못해서 저렇다. 신앙생활을 잘 못해서 저렇다. 뭔가 죄가 있어서 저렇다.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 가운데 여전히 암이나 어떤 불치병에 걸렸을 때 그 사람이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이단 시비가 붙었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라는 책이 인기가 있었던 겁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너무 많이 간 내용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근처에 있던 교회에서 아주 젊은 장로님들을 대거 세웠습니다. 40세 전후였던 분들을 한꺼번에 장로로 세웠습니다. 그 중 한 분이 택시 운전을 하던 분이었는데, 강도를 만나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장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들어갈 때 보니까 뒤에서 몇몇 어른들이 수군수군하고 있었습니다. “저 장로님이 요즘 교회에도 잘 안 나오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 했대.”라고 한 겁니다. 어린 마음에 ‘그런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장로인데 신앙생활을 잘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에이, 그냥 죽어라’ 하고 벌을 내리셔서 죽은 겁니까? 그게 성경적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당장 알 수 없습니다. 특히 그 가정에 어린 아기도 있었는데 그 가정에 그것이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겁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하나님과 제대로 관계를 하지 못할 때 만약 나에게 어려움이 온다면,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주님 안에서 정결하게 해주시려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잘 섬기고,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믿음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왔다면, 갑작스런 질병이 찾아오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회사에서 잘렸다면, 이것은 분명히 연단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이것을 통해 훈련시키셔서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시려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만약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 하나님이 지금 나를 훈련시키셔서 더 크게 쓰려고 하시는구나!’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의 올바른 생각입니다.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5-6절)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멜리데 사람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 위험한 뱀을 불에 툭툭 털어 버렸고,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며 쓰러져 죽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죽겠지’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복음의 증인들에게 약속하신 능력에 대한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막 16:17-18, 새)
이 말씀을 의지해서 수많은 믿음 좋은 사람들이 일부러 뱀이 있는 데 손을 넣고 일부러 독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다 죽었습니다. 그 앞을 안 봤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은 문맥을 보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을 주신 것이지, ‘어디 내가 한 번 해볼까’ 하고 시험하는 사람들을 위한 약속이 아닙니다.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 바울을 죽일 뻔했던 독사뱀을 3절에서 분명히 “독사”라고 했는데 4절과 5절에서 “짐승”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뱀을 ‘짐승’이란 단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때보다 훨씬 후에 쓰인 책이지만,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사탄을 용 혹은 옛 뱀이라고 하는데, 하늘 전쟁에서 패한 그 용이 땅으로 내쫓기자(계 12:9),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고(계 12:17) 바다에서 한 짐승을 불러내고(계 13:1) 땅에서도 다른 짐승(계 15:11)을 불러냅니다. 그 짐승을 묘사한 단어가 바로 ‘therion’(짐승)이라는 단어로, 여기 5절에서 뱀을 묘사한 ‘짐승’(therion)과 같은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 후에 흰 말을 탄 분이 나타나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오셔서 짐승과 그 일당들을 유황불이 타는 못에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복음의 증인인 바울이 독사에 물려도 해를 받지 않은 이 일은 조금 전 말씀드린 마가복음 16장을 떠오르게 하고, 그를 죽이려던 뱀을 위험한 짐승으로 묘사한 다음에 그 짐승을 불에 던져 넣는 것은 요한계시록 19장과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고대 사람들은 지식이 뒤떨어져서 대충 기록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할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인 28장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아주 치밀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6절을 보면, 독사에 물린 바울이 즉시 죽지 않습니다. 원주민들은 독에 대한 반응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한참 기다리셨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붓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도 아무 이상이 나타나지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똑같이 생긴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멀쩡하니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신이다”라고 합니다.
유대 사회 최고의 율법학자에게 제대로 교육받은 바울을 유대인들은 반율법주의자이고 반성전주의자로 몰아서 죽이려 했습니다. 멜리데 섬 주민들은 살인자라고 여기더니, 이제는 신이라고 합니다. 아주 극과 극을 달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가벼움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렇게 가볍지 않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 특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도 그렇고,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도 그렇고,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미디어에 나온 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의 관점을 통해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전체를 다 알지 않고는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 사람은 잘못됐고 저 사람은 잘못됐다고 얼마나 판단하고 재단하고 그럽니까?
신앙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나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을 제대로는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 아니라 안 믿는다. 성경은 가짜다.’라고 하는데, 사실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냥 대충 내 생각에, 내 얄팍한 경험과 지식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아주 일부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이런 게 나왔다고 하는데, 이전에는 손으로 하트를 그리거나 머리에 손을 올려 하트를 만들었지만, 요즘은 손가락 두 개로 하트를 만듭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볼 때마다 ‘네가 아는 건 요거 밖에 안 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
하나님을 어떻게 내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진짜 조금입니다. 그래서 정말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 함부로 이건 이거다 저건 저가다 말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얄팍한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남들을 쉽게 정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6절에서 멜리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응보와 정의의 심판이란 개념에서, 이제는 신이라고 언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극단에서 극단으로 뛰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에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데,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원자)는 고난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야단치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는 아주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최악의 말을 들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데, 베드로 차례가 되니까 “절대 못 씻기십니다.”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럼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몸까지 다 씻겨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극단적인지...
그런데 가끔 그런 분들이 보입니다. ‘이거다’라고 하다가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저거다’라고 합니다. 극에서 극을 달리는데, 그런 경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을 신이라고 여기는 생각과 그런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문제를 언제나 지적합니다. 지난 사도행전 12장에서 본 것처럼, 헤롯(아그립바 1세)이 사도 야고보를 죽인 후에 빛나는 왕복을 입고 멋진 보좌에 앉아 연설을 할 때 사람들로부터 ‘이것은 신의 소리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으로 벌레에게 먹혀 죽은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또 14장에 보면, 루스드라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던 장애인을 사도 바울이 일으켜준 사건에서, 그곳 사람들이 바나바를 제우스 신이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며 제우스 신전 제사장들이 소를 끌고 와서 이들에게 제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끝까지 말렸던 장면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멜리데 사람들에 의해서 신이라고 추앙을 받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지면 세상 사람들은 신이라고 여기고 숭배하려고 하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역사에 보면 많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을 보면 그 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일으킨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려는 경향은, 가벼움을 넘어 어리석음이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사람들의 우상숭배입니다(롬 1:19-25). 성경은 그것을 우리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해줍니다.
살인자라고 여겨지다가 단번에 신이라 불린 바울은 신이 아니라 신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사도라고 부르지만, 사도라는 말도 위대한 인물을 뜻하는 교회 내의 어떤 계급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순교자와도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요즘은 쓰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부흥회 같은 때 잘못된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주의 종’ 뒤에다 ‘님’ 자를 붙여서 ‘주의 종님’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국문법 파괴입니다. 아주 잘못된 표현이고 없어져야 합니다. ‘주의 종’이면 종이지, 그게 어떻게 ‘님’이 되겠습니까? 높여질 수 없는 존재가 종입니다. 남들 앞에서 존경받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지나쳐서 숭배하는 식으로 가게 되면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종은 하나님의 영광을 헤롯처럼 자기가 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림들의 잘못된 신관을 통해 자기가 증언해야 할 복음의 기회, 사역의 기회로 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2. 바울을 통한 병 고침의 기적 (7~10절)
이렇게 바울이 독사에 물리고도 해를 받지 않은 것은(6), 마가복음 16장 18절 앞부분에서 독사를 손으로 집어도 괜찮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마가복음 16장 18절 뒷부분처럼 안수할 때 병이 낫는 사건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의 다음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은 주인인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눅 4:40), 연약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치유해줍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7-8절)
멜리데 섬에서 가장 유력한 지주였던 보블리오라는 사람은 바울 일행에게 사흘간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친절을 베푼 대상을 “우리”라고 했으니까, 276명 전원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그 외 몇몇 사람들 정도를 초대해서 사흘 동안 머물게 해주었고, 또 바울이 사흘 동안 다른 사람 집에 가서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은 책임자인 백부장이 그것을 허락해서 된 것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백부장과 몇몇 군인들도 거기에 함께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누가 있었든지, 그렇게 여러 명을 사흘씩이나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고 음식을 베풀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블리오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집에 머물며 보니까,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아파서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그에게 가서 기도하며 안수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병이 나았습니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9-10절)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고쳤다는 소식을 들은 섬 주민들 가운데 병든 사람들이 와서 또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섬 주민들의 선의에 대해 치유의 기적으로 답한 바울에게, 그들은 다시 더 큰 호의로 화답을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이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바울에게 살인자라고 했다고 신이라고 하며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또 이교도였고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원주민들이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의 우리보다 더 후하게 베푸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절에서 풍랑에 지친 나그네를 영접하고, 10절에서 후히 대접히는 환대에 이어, 떠날 때에도 쓸 것까지 실어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환대하라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연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로 하여금 돌아보게 해줍니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내에서 전시장을 경영하는 어떤 분이 있었는데 믿는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크리스천인 친구가 와서 요청하기를, 자기가 아는 친구 중에 아들이 예술가인 친구가 있는데 그 아들의 작품 전시회를 해야 하지만 마땅한 전시장이 없고 또 돈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료로 대관해줄 수 있는지 요청해서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도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허락을 받은 젊은 예술가가 와서 보고, 자기가 그 동안 기도하면서 원했던 전시장과 똑같은 전시장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다고, 너무 기뻐하고 감사하며 전시장 주인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그 전시장을 무료로 빌려준 전시장 주인에게는 단 한마디의 감사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자기가 기도한 전시장과 똑같은 전시장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갑자기 자기에게 어디서 뚝 떨어진 겁니까? 사실은 그 전시장 주인을 통해서 온 게 아닙니까? 전시장 주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준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예술가를 위해, 그의 미래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사실은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인데도 일주일간의 대관료를 안 받고 해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젊은 예술가는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당연히 감사해야겠지만, 동시에 자기를 위해 기꺼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어 준 전시장 주인에게까지 진심으로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뭘 믿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전시장 주인이 이 젊은이를 이제 겪었는데, 다음에 또 전시회를 해야 해서 해달라고 하면 오라고 하겠습니까? 다른 데 전시장을 알아보니까 그 전시장 주인이 이쪽 주인에게 연락을 합니다. 그 사람 괜찮으냐고, 믿을 만하냐고 할 때 ‘사실은...’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젊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를 겪어 본 사람들이 또 다시 그를 위해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잘된 것 같아도 결국 자기 손해가 된 겁니다. 그런 사람의 삶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실제 일어난 일인데, 그 젊은 예술가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그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통해 그것이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해주신 일을 누군가가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 주었기 때문에 나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 은혜의 통로가 되어 준 사람이 누구인가? 사실은 이런 것을 연말에 꼭 해야 합니다. 이미 새해가 되었지만, 혹시 작년에 또는 올해 한 달 동안 나를 위해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준 사람이 있었는데도 내가 혹시 그분들에게 감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건 아닌가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있는 분이면 찾아가서 커피나 차 한 잔 따뜻하게 대접하며 감사하고 교제하며,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제 2020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11개월 가까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그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 준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그래서 ‘통로’입니다. 우리는 통로가 되어야지, 우리에게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왔는데, 사해처럼 나에게서 끝나버리고 나가지 않으면 죽음의 바다가 되는 것처럼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갈릴리처럼 받은 은혜를 계속 내보내줄 때 생명이 넘치는 바다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계속하여 그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가 되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또 통로가 되고, 그럼 이것이 계속 이어져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새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