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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5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5 ✦
“모든 길이 막힌 때도 열린 길이 있다”
(출애굽기 14장 1~16절)
[들어가는 말]
지난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맹렬히 확산되고 있고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보니까 122만 명 가까이 감염됐고, 사망자도 6만 6천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 미국은 전 세계 감염자 수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사망자도 8천 5백 명이 넘었습니다. 최강대국이고 선진국이라 잘할 줄 알았는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나라들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고소해 하고 있는 것도 봅니다.
지금은 마치 사방의 모든 길이 다 막혀 버린 것과 같이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사방이 꽉 막혀서 아무 데도 나갈 곳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상황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불안함을 가져다줍니다.
지금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지금 어디로 가야할지 진로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직장이나 사업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 등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지 알지 못하고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불안함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럴 때일수록 반드시 기억할 것은, 이러한 상황의 저 너머에는 놀라운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믿음으로 잘 극복할 때 저 뒤에서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사실을 함께 확인해보기 원합니다.
1. 사방의 모든 길이 막힌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열 가지 재앙 후에 이집트를 나와 홍해 앞까지 왔는데, 홍해가 딱 앞을 막고 있어서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또 바로의 군대가 뒤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홍해가 갈라진 기적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홍해가 곧 갈라지는데, 그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 사방의 모든 길이 다 막힌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새벽에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엄청난 기적이 곧 일어나게 되지만, 그 직전에는 정말로 죽음의 위기라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1-3절)
지금 이 상황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지금 이때 바닷가에 장막을 친다는 것은, 무슨 놀러온 것도 아니고,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면 바닷가에 장막을 치고 있다가 몰살당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도망가야 할 상황이지, 가만히 장막을 치고 누워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장막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제 바닷가에 진을 치니까 앞에는 홍해이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입니다. 정말로 옴짝달싹 할 수 없이 사방이 다 막힌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방이 꽉 막힌 상황을 만들어내고 계십니다. 오히려 꽉 막히게 하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전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사방이 꽉 막힌 상황 때문입니다. 모든 길이 다 막혀 버린 상황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홍해가 갈라질 이유나 필요가 없습니다. 이 죽음의 위기가 오히려 전무후무한 기적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방이 막힌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가신 것이 하나님이신데, 그러니까 가끔 우리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힘들게 하시고 또 위험한 길로 들어가게 하시는가?
그에 대한 성경의 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이스라엘 백성을 잠시 고통스럽게 하신 것은 결국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어떤 복과 유익을 주십니까?
1)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종살이를 하면서 바로 왕의 능력과 권위를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의 압제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일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 땅으로 자기 조상들을 인도하신 요셉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400년 이상 침묵하시고 안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하나님은 옛날에는 대단하셨던 분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시는 무능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을 바꾸어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홍해 앞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애굽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방이 막힌 상황, 모든 길이 닫혀 버린 상황으로 일부러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 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4-7절)
엄청난 군대, 그것도 병거가 있는 강력한 군대를 바로가 데리고 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정예군대이며 엄청난 군대입니다. 이제 정말 죽음의 위기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라는 시련과 장애물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31절)
이렇게 하나님의 큰일, 즉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15장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면서 온 백성이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전능하신 분입니다. 능치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런 찬양곡도 있지 않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는 분이십니다. 시련을 통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모든 길을 막으신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키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고자 하시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있을 때, 먼저 하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훈련을 시키시고 그들을 단련시키셔서 성장하게 하신 다음에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련이 찾아올 때는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벧전 1:6-7, 새)
그렇습니다. 믿음은 시련을 통해 더욱 강해집니다.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와도 같은 겁니다. 그리고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 요소는 또한 무엇보다 말씀입니다. 저절로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성장합니다. 믿음은 말씀과 닿을 때 강해집니다.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흐르는 곳에 식물이 자라듯, 말씀이 흐르는 곳에 믿음이 자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남이 해주는 설교나 남이 해주는 성경공부에만 의존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실제로 삶 속에서 말씀대로 실천할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납니다. 들을 때 믿음이 자라는 게 아니라, 듣고 실천할 때 믿음이 자랍니다. 이것을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담임목사)이며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정확히 말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약 1:22, 25, 새)
예수님도 산상설교에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안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듣기는 듣습니다. 그런데 행하느냐 안 행하느냐입니다. 네 가지 토양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씨가 떨어졌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받고 행할 때 싹이 나고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은 시련을 통해 강해지고 연단을 받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신뢰하기 힘든 상황에도 오히려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볼 때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근육을 키워주시기 위함입니다.
애벌레가 고치를 뚫고 나와서 나비가 되는 장면을 아마 티브이 같은 데서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나오는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여서 사람이 그것을 열어주며 도와주었더니, 나비가 되어서 날아가야 하는데 날개에 힘이 없어서 날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그냥 죽어 버렸습니다.
나비가 애벌레의 시기를 거치며 그 힘든 고치를 스스로의 힘으로 뚫고 나오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마침내 날객가 힘을 얻고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나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시련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오히려 강한 믿음의 근육이 만들어집니다. 오히려 시련과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신자는 참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주신다
고통은 지혜를 가르쳐주는 위대한 스승이라고,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그러면서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고통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지혜는 죄에서 떠나는 지혜입니다. 바로 얼마 전 했던 큐티 말씀인 신명기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 4:6)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때 지혜로운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세계의 모든 민족 위에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세우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또한 그래서 큰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시며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이 지혜를 배우고 믿음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을 통해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 지혜는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지혜입니다. 복을 나누어주는 지혜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시련에는 바로 그러한 목적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2. 모든 길이 막힌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방에 길이 다 막힌 것 같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이 막힌 상황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자기들이 처한 환경만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8-10절)
이스라엘은 사방의 모든 길이 막혀 벌린 환경을 보았습니다. 지금 자기들을 죽이려고 쫓아온 애굽 군대를 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그 상황만 보고 있으면 좌절하고 두려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상황만 보고 있으면 또 찾아오는 것이 두려움과 불안함과 더불어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러나 사방의 모든 길이 막힌 상황에서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상황에 계속 몰입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을 들어서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함께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세도 적군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보았고 모세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라고 외칩니까?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3-14절)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것을 잘 보십시오. 우리 인생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겁니다. 당연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우리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뭘 보고 있는가?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바꾸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또 원망하고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백성이 외치니까 모세가 백성을 위해서 불뱀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놋뱀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놋뱀이 들렸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살아나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리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살아난다는 것을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뱀에게 물린 사람은 그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낫는다는 것입니다. 보면 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놋뱀을 본 사람들은 살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뭡니까? 안 보고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삽니다. 그런데 그걸 안 봐서 죽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사람들입니까? 그 쉬운 일을 하지 않아서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건데...
사실 그만큼 쳐다보는 것, 자기가 그 동안 보던 것에서 눈을 들어 보는 것을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항상 보던 것에서 눈을 떼는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나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가? 그냥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뭐냐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늘 보는 것을 생각합니다. 보는 것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과거에서부터 눈을 떼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 또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그런 과거의 것들을 너무 많이 생각하며 산다는 겁니다. 너무 집착하며 산다는 겁니다.
또 과거의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성공에 너무 붙들려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왕년에 내가 이랬던 사람인데. 왕년에 한국에서 내가 잘 나가던 사람인데.” 과거의 실패도 그렇지만, 성공도 계속 과거의 일만 바라보며 삽니다. 그러니까 지금 힘듭니다. 신앙생활도 과거에 잘했던 것은 참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붙드니까 지금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편 1편이나 여호수아 1장을 보면, 참으로 복된 사람, 참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대로 지켜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돈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기 명예와 성공과 자기 가족과 자기가 원하는 욕망 같은 것을 주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돈이나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두려움과 걱정입니다. 그런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게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것들을 다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잘 안 되면 안 된다고 걱정하고, 또 잘되면 혹시 이러다 잘 안 될까봐 걱정합니다.
우리는 보는 것에 사로잡히고 보는 것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계속해서 명령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를 옭아매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살 길을 제시하는 겁니다. 상황을 바라보면 죽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라는 겁니다.
상황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는 것은 걱정과 불안과 원망뿐입니다. 그런 데서 눈을 떼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평안이 오고 기쁨이 옵니다. 상황은 똑같이 어렵지만,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홍해 앞에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와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 군대를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기에서 눈을 떼고 눈을 들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14).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2)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사방이 막혔을 때, 모든 길이 막힌 것 같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두려움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냥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심히 두려워”했습니다(10).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입니까?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엄청난 열 가지 재앙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면 믿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는데, 그들은 믿음보다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믿음의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상황이 와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엄청난 비극을 만나도 전혀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상황이 아주 어려우면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 굉장히 슬픈 상황을 당하면 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두렵긴 두렵지만, 슬프긴 슬프지만, 하나님을 그래도 의지하는 믿음이 내 두려움보다 내 슬픔보다 더 큰 사람, 그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씀해줍니다. 두려움보다 믿음이 더 큰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서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곳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상황을 보고 두려워하게 되면 두려움과 함께 오는 것이 바로 원망과 불평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1-12절)
사실은 자기들이 다 좋다고 따라온 겁니다. 그런데 이제 어려워지니까 모세에게 분노하며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상황만 보면 이렇게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지만,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은 두려워하게 되고, 그럴 때 자기 책임을 회피하면서 누군가에게 지금 상황에 대한 잘못을 뒤집어씌울 대상을 찾습니다. 그 사람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소리 좀 보십시오. 얼마나 참 안타깝고 비참합니까? 두려움이 오니까 그들은 애굽을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노예생활에서 고생하고 힘들어하며 벗어나고 싶어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그 땅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죄악 된 삶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여기서 지금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12) 한 말은, 모세가 바로에게 처음 가서 몇 번 이야기하니까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 심하게 했을 때 했던 말입니다. 떠나올 때 한 말이 아닙니다. 떠날 때는 신나서 좋아하며 이집트 사람들에게 선물까지 다 받아서 나와 놓고는, 이제 힘드니까 교묘하게 전혀 다른 상황에서 했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죽는 것이 사실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아닙니까? 애굽에서의 삶은 노예로서의 삶입니다. 자기 삶이 없습니다. 죄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조금 힘든 것 같아도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섬기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다시 돌아갑니까? 그래서 옛날에 하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것은 상황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정복해야지,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려면 결국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그 말씀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3) 조급해하지 말고 침착하게 기도하며 기다리라
사방이 막혔을 때 조급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침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급해지면 당황하게 되고, 당황하면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두려움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우리의 생각, 우리의 해석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딱 막고 있는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두려워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두려운 상황이지만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확신할 이유는 더 충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금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눈으로 그것이 보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매일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들과 늘 함께 하고 계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몸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보다도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모세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그가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왜 두려워했습니까?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찾아올 때 우리가 할 일은 침착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조용히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일수록 자꾸 다른 데를 쫓아다닐 게 아니라,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는 급한데 하나님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시고 정확한 때에 이루십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21절)
여기서 어떤 단어가 중요한가 하면 “밤새도록”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확 한 번에 바다가 그대로 갈라지게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밤새도록 바람이 불게 하셔서, 그 바람이 몇 시간 동안 불어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다는 겁니다.
단번에 홍해를 가르실 능력이 없어서 시간을 끄신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인내를 훈련시키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얼마나 다급합니까?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는데 구름기둥이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단번에 마르지 않으니 얼마나 다급합니까? 이제 조금씩 말라서 건너가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의 군대가 뒤에 쫓아옵니다. 얼마나 다급합니까?
이런 걸 통해 인내를 배우라는 겁니다. 우리는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때에 당장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이 보여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정확한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며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4)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전진하라
하나님의 음성이 고요하게 들려옵니다. 특히 모세가 조금 전에 한 말(13-14)을 보면 계속해서 “가만히”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다윗도 굉장한 믿음의 사람인데, 시편 62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시 62:1-2, 새)
마음을 잠잠히 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뜻을 알려주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5-16절)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라고 하신 것은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예배하고 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나가서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은 가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반드시 길을 열어주십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지금 모든 길이 막힌 것 같은 때에도, 길이 안 보일 때에도, 사방이 막힌 때에도, 사실은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길이 안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보입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십니다. 위에 계셔서 우리에게 안 보이는 것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위로 올라가면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면 그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게 필요한 겁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 안 보인다고 다 막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들어주십니다. 나는 여기만 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거기만 보고 있느냐고 하십니다. 옆에 길이 있는데, 왜 거기만 보며 막혔다고 그러느냐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가까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어떤 문제보다도 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만 붙들면 됩니다. 그분만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지금 이렇게 사방이 막히고 모든 길이 막힌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결단하고 나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