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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29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4

위기 속에서 엔학고레를 경험하라

(사사기 159~20)

 

[들어가는 말]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주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칠 때도 있지만, 힘들고 어려워서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주인 노릇을 할 때가 대부분 아닙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철저히 내 위주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행동하고, 또 내가 좋은 대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이 꼬이고 기쁨과 평안이 사라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해주시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 또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육신적인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믿고 구원받은 크리스천인 것은 맞는데,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이 아니라 육신적인 크리스천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은 요즘 말로 하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때 딱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믿는 사람인데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소위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실 삼손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음악, 미술, 문학, 영화에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삼손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실낙원(The Lost Paradise)>을 쓴 유명한 영국 시인 밀턴(John Milton, 1608~1674)<고뇌하는 삼손>(Samson Agonites)이라는 비극적인 희곡을 썼습니다. 이성의 사도라고 불리는 18세기의 볼테르(Voltaire, 1694~1778)1733년 삼손에 대해 5막의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많은 미술가들도 삼손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렘브란트가 <삼손의 결혼><장인을 위협하는 삼손>을 그렸습니다. 루커스 커라낙(Lucas Cranach the Elder)이라는 사람과 유명한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도 삼손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또한 헨델을 비롯하여 유명한 음악가들도 삼손을 주제로 작곡을 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 중에 <삼손과 들릴라>라는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많이 안 나오지만 예전에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 TV에서 단골로 방영되었습니다. 사실 삼손의 이야기는 흥행의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천하장사로서 액션이 있고, 성이 있고, 죄악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극적인 복수가 있습니다. 영화로서 흥행의 요소를 다 갖춘 이야기가 삼손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삼손의 이야기가 그리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대개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성경 이야기를 들려줄 때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삼손 이야기입니다. 힘이 세서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특히 기둥을 무너뜨려서 많이 죽였다는 정도로 다룹니다.

 

크리스천들에게 삼손의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여자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플레이보이쯤 되는 사람이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로빈 후드나 임꺽정 같은 전설적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가방의 이름에 삼손의 이름이 들어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아주 깊은 영적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시간 삼손에 대해 살펴보면서, 지금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함께 발견하기 원합니다.

 

 

1.  삼손은 누구인가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13장부터 등장하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단 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인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13:2). 여기서 특이한 것은, 마노아와 그 아내가 한나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해주었다는 점입니다(13:3).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13:4-5)

 

보통 나실인은 자기가 기간을 정하여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시체를 마시지 않으면서, 자기를 정결하게 하는 기간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인생 자체가 나실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정해주셨습니다.

 

여기에는 한 개의 명령과 두 개의 이유(약속)가 나옵니다. 먼저 명령은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이고, 둘째는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그를 이끌어주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13장에 죽 나온 다음 삼손이 태어나는데, 14장에 보면 삼손이 아주 이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14:1-3)

 

여기 보면, 삼손이 블레셋 지역의 딤나라는 곳에 가서 블레셋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돌아와 그 여자와 결혼시켜달라고 떼를 쓰는 철없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 저 여자랑 결혼할래. 결혼시켜줘!’ 하고 떼를 부립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원수이며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민족이고, 블레셋 때문에 이스라엘이 40년 이상 고통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방인이며 이상한 우상들을 섬기는 블레셋의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부모가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는 그냥 자기가 좋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구별하신 나실인이 이게 뭡니까?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는 이 여자 아니면 안 되겠다. 저 여자다!’ 이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 여자가 좋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삼손은 하나님에 의해 정결하게 살 나실인으로 구별받았으면서도, 늘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가 원하면 결정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아주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4:4)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삼손이 틈을 타서입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기 위하여 사실은 틈을 타서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통해 자기 민족의 원수인 블레셋을 치겠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학자들에 의하면 잘못된 번역입니다. 여기에는 삼손이 틈을 타서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가 이 틈을 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는 말에 이름이 안 나와 있기 때문에 우리 개역개정 성경은 그것을 삼손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원어로 볼 때는 하나님이 더 맞습니다. ‘하나님이 이 틈을 보셨다.’ 하는 말입니다. 영어성경 NIV는 그것을 정확히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삼손이 틈을 탔다기보다는, 삼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틈을 보셨다는 것이 더 맞습니다. 삼손이 무슨 빅픽처(big picture)를 가지고 내가 이것을 통해 블레셋을 치겠다.’라고 자기가 스스로 계획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냥 자기 좋을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저 여자가 좋다는 겁니다. 딤나에 있는 저 블레셋 여자가 좋으니까 저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는데, 놀랍게도 그가 고집을 부리고 자기 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든 상황의 뒤에서, 하나님이 그의 악함조차 사용하시는 도구로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틈을 보고 계십니다.

 

비록 삼손은 자기 육신의 정욕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며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그의 악함과 죄를 통해서도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철없이 굴며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하고 날뛰는 삼손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지난 40년 이상 괴롭히고 있는 악한 민족 블레셋을 벌하시는 도구로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4장 뒷부분을 죽 읽어보면, 그 후 삼손이 부모와 함께 결혼 준비를 위해 딤나로 내려가다가 젊은 사자를 만납니다. 부모는 저쪽에 있고 삼손 혼자 포도원에 있었는데, 그때 놀랍게도 여호와의 영(성령)이 강하게 임하셔서 그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이는 괴력을 발휘하게 됩니다(14:5-6).

 

시간이 흐른 후 삼손은 자기가 찢어 죽였던 사자가 어떻게 되었나 궁금해서, 사자를 죽였던 포도원 근처를 다시 지나가다가 사자의 시체가 궁금해져서 가봅니다. 그랬더니 사자의 시체에 벌 떼와 꿀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14:8).

 

사실 나실인은 율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꿀을 본 삼손은 지체 없이 손으로 꿀을 떠서 먹고 심지어 부모에게까지 갖다 줍니다(14:9). 사실 사자의 시체에 꿀이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시체에 있는 것을 만지면 안 되는데, 삼손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만지고 또 자기가 좋은 대로 행동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실인의 삶의 방식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시금 여기에 나타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방식보다 사실은 이방의 방식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리타분하게 율법을 지키는 등의 따분한 삶이나 자기를 옭아매는 삶보다는, 자유분방하게 다니고 자유분방하게 파티를 즐기고 성관계를 갖는 이방인의 방식을 더 좋아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믿는 사람이고 그것도 사사인데, 그런 사람이 자기 삶은 전혀 믿는 사람답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삼손이 사실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사사시대를 대표적으로 묘사하는 말이 그 시대에는 왕이 없어서 각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시대를 결정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행동한 사람이 삼손이었고, 그러한 삼손의 모습이 사사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간다고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답답하고 고리타분하고 따분해 보이고 뭔가 나의 자유를 옭아매는 것 같은데, 가만히 보니까 저기 밖에는 신나게 놀고 파티하고 재미있게 자기 마음대로 자유로이 사는 것을 보며, 그것을 동경합니다.

 

사실 늦게 믿은 분들은 그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다 경험해봐서 알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와 같은 모태신앙인이 오히려 그런 데 더 혹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더 좋아 보이고 신기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은 답답해 보이는데, 저 밖을 보니까 재미있어 보여서, 거기에 확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을 사사로 세워주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로 타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삼손은 자기가 좋아한 딤나 여인과 결혼하고 피로연까지 베풉니다(14:10).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고는 블레셋 사람들과 어울리며 재미삼아 내기를 합니다(14:12-13). 블레셋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까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는데, 이것을 풀면 자기가 그들에게 주고 못 풀면 그들이 자기에게 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14:14).

 

삼손은 무지막지하게 힘이 센 천하장사 같고 우락부락한 사람 같은데도, 굉장히 시적인 사람입니다. 시를 자주 읊습니다. 이 수수께끼도 삼손이 사자를 찢어 죽인 후에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얻은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이것을 풀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도저히 못 풀겠으니까 삼손의 아내에게 가서 답을 알아내라고 위협하면서, ‘만약 네가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네 친정집을 다 불살라 버리겠다.’라고 협박합니다(14:15).

 

결국 그 아내가 가서 조르고 또 조르니까 결국은 그 답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래서 그 답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의기양양하게 와서 답을 합니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14:18). 자기들도 나름대로 시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삼손은 블레셋의 다른 도시인 아스글론으로 내려가서 30명을 쳐 죽이고 겉옷을 빼앗아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고 떠납니다(14:19).

 

그 후 삼손은 분노하면서 부모의 집으로 가는데, 삼손의 장인이 보니까 삼손이 화를 내면서 갑자기 결혼식 잔치에서 떠나버리니까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냥 버리고 가 버리는가?’ 그래서 일종의 복수로 결혼한 그 딸을 다른 사사람, 즉 삼손의 친구(아마 블레셋에 와서 친구가 된 사람)에게 그 딸을 줘 버립니다(14:20).

 

15장부터 보면, 삼손은 그 후에 돌아와서 아내의 방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니까, 장인이 급해졌습니다. 깜짝 놀라 삼손을 막으면서 나는 자네가 딸을 미워해서 떠나버린 줄 알고 자네의 친구에게 주었다.’라고 변명합니다(15:1-2).

 

이에 또 화가 난 삼손이 여우 삼백 마리를 잡습니다. 이것도 생각해보면 대단한 일입니다. 어떻게 여우 한두 마리도 아니고 300마리를 어떻게 잡았는지, 놀라운 사람입니다. 300마리를 잡아서 꼬리를 서로 묶고 그 사이에 횃불을 달고 불을 붙여서 여우들이 포도원과 밭에 막 뛰어다니며 전부 불태우게 만들어버립니다(4-5).

 

그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겠습니까? 막 분노가 일어나면서 삼손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고, 그 아내와 장인을 붙잡아서 불태워 죽입니다(6). 참 잔인한 일입니다. 또 이에 분노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에담 바위틈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7-8).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앞까지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2.  레히에서의 큰 승리와 엔학고레의 은혜

 

블레셋의 곡창지대가 불탔습니다. 사람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블레셋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사실 이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밑에 있는 나라인데 감히 자기들을 죽이다니. 이제 삼손은 큰 위기에 빠졌고, 이제 블레셋 사람들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9)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아 죽이기 위해 유다 땅에 진을 칩니다. 블레셋과 유다가 거리도 가까웠고 삼손이 거기 숨어 있으니까 거기 복수하러 와서 진을 쳤습니다. ‘레히라는 지역에 블레셋 사람들이 가득 진을 쳤는데, 갑작스러운 블레셋의 군사 행동에 유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그 이유를 묻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0)

 

복수하겠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너희 유다 지파를 치러 온 것이 아니라 삼손에게 복수하러 왔다.’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겁니다. 아니, 삼손에게 복수하려면 삼손을 치면 되는데, 왜 직접 삼손을 공격하지 못하고 유다 사람들에게 옵니까? 그러니까 유다 사람들을 부추겨서 공포심을 심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삼손을 잡게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절에 기막힌 장면을 보게 됩니다.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1)

 

서로 당한 대로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삼손도 안 믿는 사람들, 악한 블레셋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유다 사람 3천 명이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 삼손을 원망하면서 너는 왜 그랬냐?’라고 하며 설득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기려고 합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도 대표적인 지파입니다. 가장 큰 지파이고, 나중에 다윗도 유다 지파에서 나오며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도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아주 기가 막힙니다.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저 밑엣 사람들이고 블레셋이 우리를 다스린다.’라고 하며 블레셋의 압제와 다스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몇 명입니까? 한두 명, 몇 십 명, 백 명도 아니고 3천 명입니다. 지금 3천 명이 모여 있으면 삼손을 설득해서 잡으러 올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가서 블레셋과 마주 싸워야 맞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동족, 그것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삼손을 잡아서 원수인 블레셋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사 시대의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은 이처럼 바닥을 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싸우자. 우리 동족을 우리가 보호하자. 나가서 싸우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잡아서 넘기겠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기울고 쇠락하는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의 특징이 뭡니까? 바로 이런 겁니다. 유다와 비슷합니다. 적을 쳐야 하는데 자기편을 친다는 겁니다. 사탄과 싸워야 되는데,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를 공격하고 가족을 공격합니다. 영성이 바닥난 것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사탄이 기뻐할 일입니다. 사탄을 공격하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니까, 사탄이 박수치고 춤추며 좋아할 일입니다.

 

이 기막힌 상황에서 삼손이 저항하지를 않았습니다. , 자기를 죽이지 않겠다고만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12-13)

 

삼손은 동족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동족의 손에 죽기는 더더욱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바위틈에서 나와, 유다 사람들에 의해 새 밧줄들로 결박을 당합니다. 사실 삼손을 묶은 것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밧줄이 아닙니다. 사실은 동족의 배신이라는 밧줄이었습니다. 물론 지파는 다릅니다. 삼손은 단 지파이고 이들은 유다 지파이지만, 그래도 같은 이스라엘인데 동족에게 배신을 당하는 밧줄이었습니다. 결국 삼손은 동족에게 묶여서 적에게 넘겨지는 처지가 됩니다(13).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4)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끌고 레히에 오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막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무슨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 하면서 기쁨의 소리, ‘삼손이 잡혀 끌려오고 있다.’ 너도 이제 한 번 고통 속에 죽어봐라하는 저주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삼손은 계속 배신당하고 버림받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죽은 블레셋 아내 딤나 여인과 장인도 삼손을 속이고 배신했습니다. 이제는 자기 민족인 유다에게까지 버림을 받았습니다. 삼손의 인생은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가 그를 불쌍히 여겨주겠습니까? 누가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겠습니까?

 

이렇게 버림받아 홀로 비참하게 죽어야 되는 그 순간에 놀랍게도 하나님이 역사해주셨습니다. 성령이 갑자기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14b). 여기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짜로 갑자기 임했다기보다는, 능력으로 임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삼손은 원래 타고 난 천하장사가 아닌데,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자를 찢어 죽일 때도 그랬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갑자기 임했습니다.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5)

 

놀랍습니다. 나귀의 턱뼈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집어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이 레히인데, 삼손이 잡은 턱뼈가 히브리어로 레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레히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삼손이, ‘레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는 이 순간, 삼손은 또 안타까운 모습, 뭔가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6)

 

이게 지금 누가 한 일입니까? 여호와의 영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그가 힘이 나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내가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참 특이한 사람인 게,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지쳤겠습니까? 천 명과 싸워서 다 물리쳤으면 얼마나 피곤할 텐데 시를 읊고 있습니다. “한 더미, 두 더미...” 그런데 결정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내가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지 않고 내가 했다고 합니다.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7)

 

이렇게 자기자랑을 한 삼손은 턱뼈를 툭 내던지고는, 그곳 이름을 라맛 레히라고 짓습니다. 턱뼈의 산이라고 짓습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이 아닙니까? 턱뼈를 집어던지면서 시를 읊고 이름을 지을 것이 아니라, 턱뼈를 탁 내려놓고서는 그대로 무릎 꿇고 하나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게 나실인이고 이스라엘이 아닙니까? 지명도 턱뼈의 산이 아니라 은혜의 산이라든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말로 지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또 학자들에 의하면, 이 나귀의 턱뼈라는 게 대략 25센티미터(10인치) 밖에 안 됩니다. 아주 작습니다. 또 무게는 1파운드도 안 되는(0.9파운드) 것입니다. 게다가 나귀는 초식동물이 아닙니까? 보통 육식동물이어야 뼈도 튼튼하고 강하지, 초식동물의 작은 뼈가 무슨 무기가 된다고 천 명과 싸워서 죽일 수 있습니까? 연약한 나귀 턱뼈를 들고 나가서 싸워 천 명을 죽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나귀 턱뼈는 사실 사람 천 명이 아니고, 한두 명을 죽이기도 힘든 것, 무기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뭡니까? 여기 나오는 나귀 턱뼈가 강해서 이긴 게 아니라, 그게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겁니다. 삼손이 무슨 수퍼맨처럼 강하거나 무기가 강력해서 이긴 게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힘을 주셨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고, 그 상징적인 도구가 연약한 나귀 턱뼈였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 하나님이 내게 승리를 주셨다.’가 아니라 내가 다 죽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승리의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 앞에 은근히 자화자찬하는 모습, 자기의 공로를 남기려는 모습이 삼손뿐이겠습니까? 바로 부끄러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천 명을 죽인 후에 자화자찬했습니다. 그곳의 지명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업적이 드러나게 지었습니다. 그때 너무 힘을 썼는지 아주 극심한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당연히 이렇게 싸우고서 얼마나 목이 말랐겠습니까? 그런데 그 목마른 순간에 그래도 삼손이 한 가지 잘한 게 나옵니다. 하나님을 찾았다는 겁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8)

 

이것은 삼손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은 모습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행하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심지어 자기가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삼손이 드디어 처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장면이 성경에 나온 겁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 삼손에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를 짓고, 베풀어준 은혜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나실인으로서의 거룩함을 내던졌습니다. 블레셋 이방 여인을 취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개인적인 복수에 사용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께서 방금 레히에서 죽을 위기에 긍휼을 베풀어주셨는데도 감사하지 않고 내가 죽였다.’라고 하며 자화자찬하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니까 주여,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관둬라. , 이제 찾냐?’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삼손에게도 긍휼을 또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19-20)

 

하나님께서는 레히의 우묵한 곳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솟아나는 물을 마시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부르짖은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부르짖을 사람의 샘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부르짖는 사람의 샘도 아니라, ‘부르짖은 사람의 샘입니다. ,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샘을 경험한 사람의 말입니다. 삼손의 기도가 터졌을 때, 그가 부르짖었을 때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엔학고레', 부르짖은 자의 샘이 되었습니다.

 

 

3.  위기 속에서 부르짖어 엔학고레로 나아가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한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다들 이야기합니다. 지도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괴롭고 힘든 자리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벌벌 떨고 저 사람, 바이러스 있는 사람 아닌가?’ 경계하고, 그러면서 그냥 이러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최대한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이러스가 옮겨지지 않도록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르짖는 것!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에이, 내가 평소에 기도도 안 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도 제대로 못했는데, 나 같은 것이 무슨 기도를 하겠나? 미안해서 못하겠다.’

 

그럴 때 삼손을 기억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래도 삼손보다는 나으십니다. 삼손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왜 우리가 그렇게 기도를 못합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딸이 아빠, 이거 줘. 저거 줘.’라고 하는 건 미안한 게 아닙니다. 당연한 겁니다. 자녀의 특권입니다. 왜 자녀의 특권을 포기하려고 하십니까?

 

삼손도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목이 말라 죽겠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고 저주하며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이때는 정말 믿음의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지금 우리에게 사사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고, 그래도 그가 믿음의 계열에 들어간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이상한 삶을 살았어도 결정적일 때 하나님을 붙들어서, 그는 믿음의 반열에 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삼손과 같이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지금 부르짖을 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삼손처럼 우리가 간절히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망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흘러나오는, 위기 속에서의 엔학고레를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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