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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22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5

정직했다가 타락한 아마샤의 안타까운 리더십

(역대하 25 1~28)


 

1.   왕권 초기에 정직히 행한 아마샤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옛날 역사를 그린 사극을 보아도 그렇고, 권력에 도취되어 타락하고 잘못 나가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을 움켜쥐면 사람들을 자기 노예로 부릴 있을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권력의 노예가 되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것을 모릅니다. 리처드 포스터의 제목과 같이, 돈과 섹스와 권력은 사탄의 패키지로 묶여서 움직이며 인간의 야심을 자극하고 결국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을 파괴하고 주변을 파괴하는 괴물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죄의 본성, 그것은 선악과를 먹고 바벨탑을 쌓아서라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무서운 죄의 결과입니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 죄를 방치하고 타협하면, 나중에 그것이 자라 자신과 사람들을 죽이는 괴물이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런 일이 유다 아마샤에게 일어났습니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마샤가 유다의 9 왕이 되는데, 25세의 청년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29 동안 유다를 다스립니다(1). 아마샤가 초기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비교적 정직하게 행하고 선정을 베풀었습니다(2). 여기서 그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은, 그가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행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1절에서 굳이 그의 어머니 여호앗단의 이름이 소개되는 것은, 아마샤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도록 좋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녀를 좋은 리더로 세우는 데에 좋은 어머니의 역할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마샤가 정직히 행하기는 했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았다’고 말씀합니다(2). 같은 내용이 기록된 열왕기하 14:3 보면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전심으로 따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자기 생각을 가지고 믿었고 자만심도 강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만 일이 잘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잘해서 것처럼 자아가 무섭게 살아납니다.


조금 후에 살펴보겠지만, 아마샤가 처음에는 비교적 정직히 행했지만, 나중에는 우상 숭배에 빠지고 그것을 책망하는 선지자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무리한 전쟁을 일으켜서 크게 패하고 자신도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평생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주님의 뜻을 묻고, 잘못을 깨달으면 침상을 적실 정도로 울며 회개했던 다윗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다윗과 아마샤의 차이는 개인적 능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왕이 초기에 아마샤는 마음이 바르고 결단력도 있는 리더였습니다. 그는 먼저 부왕을 배신하여 죽인 신하들을 찾아내어 처형시킵니다(3). 이것은 아람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아버지 요아스를 암살한 사밧과 여호사밧을 가리킵니다(24:26).


부왕을 배신하고 이제 자신의 왕권마저 위협하는 존재들을 살려두고서는 나라의 기장을 잡을 없었기 때문에, 아마샤는 문제를 순식간에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수에 집착해서 이성을 잃고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샤는 반역자들을 찾아내어 처단했지만, 자녀들까지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것이라 오직 사람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4)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를 보면, 옛날에는 반역자의 삼족, 심지어는 구족까지 멸함으로써 후환을 제거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고대 중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반역자의 경우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과 친척들까지도 함께 죽이는 연좌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이 그런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마샤는 반역자의 가족들을 처벌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 24:16)


이러한 점을 , 아마샤가 최소한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일을 처리하는 균형 잡힌 왕이었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3절에서 “그의 나라가 굳게 서매”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샤의 정직하고 지혜로운 리더십으로 부왕 요아스의 암살로 인해 무질서해진 나라의 정세가 안정을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아마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셔서 나라의 힘을 강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2.   유다와 에돔의 전쟁


국가 내부의 안정을 이룬 아마샤는 이제 나라 외부의 일로 눈을 돌립니다. 무엇보다 불안한 국방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특히 수백 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유다 남부의 국경을 침략해 에돔은 모든 유다 왕들의 골칫거리였고, 그래서 아마샤는 에돔 정벌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에돔의 군사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남쪽에 위치한 그들의 본거지는 요새화가 되어 아주 견고했습니다. 에돔을 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했는데, 군인으로 전쟁에 출동하는 것이 가능한 20 이상 남자의 수가 유다와 베냐민을 합쳐 30 명이었습니다(5). 아사 58만이었고, 여호사밧 116만을 동원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유다의 군사력이 많이 약화된 것을 있습니다. 정도로는 아주 힘든 싸움이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아마샤는 이때 무엇을 해야만 했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사명은 큰데 가진 힘이 모자란다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인간적인 도움을 찾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부터 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아마샤는 기도하지 않고 고민만 했는데,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가 뭡니까?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용사 십만 명을 고용하였더니” (6)


아마샤는 북쪽 이스라엘에서 용병 10만을 데려와 자신들의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려고 것이며, 결심이 서자 그는 일을 즉시 실천에 옮깁니다. 결국 돈을 받고 전쟁에 참가하는 이스라엘 출신의 용병들이 유다 군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들은 아주 거칠고 사나운 프로페셔널 병사들입니다.


유다는 그들에게 100달란트라는 엄청난 거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요즘 돈으로 하면 거의 4천만 달러($40 million) 넘는 엄청난 돈입니다. 당시 유다의 사정으로 이것은 엄청난 출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와서 용병 부대를 전쟁에 데려가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를 왕과 함께 가게 하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에브라임 자손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나니” (7)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가지 이유를 댑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7).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이스라엘 용병과 같이 나가면 패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이유는, 전쟁에서 아마샤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왕이 만일 가시거든 힘써 싸우소서 하나님이 왕을 적군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하니” (8)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숫자나 전투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갈등하지 말고 용병 부대를 포기하고 유다 군대만 데리고 나라가는 것입니다. 말을 들은 아마샤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려워서 용병 부대를 오긴 했지만, 아마샤도 기본적인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의 아마샤는 아직 겸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경솔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며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달란트를 이스라엘 군대에게 주었으니 어찌할까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있나이다 하니라” (9)


막상 용병을 돌려보내려고 하니 이미 100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지불한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작은 나라 살림에서 같은 돈을 주었는데, 사나운 용병들이 환불해줄 리는 없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면 나중에 돌이키려 해도 대가가 큽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기도하고 결정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왕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에 대해 후회만 것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잘못된 것을 빨리 버리는 낫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손해 이상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아마샤를 격려합니다. 실제로 나중에 에돔 전쟁에서의 대승으로 인하여, 에돔 땅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은 용병에게 지불한 100달란트의 손해를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권유를 들은 아마샤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 자신의 초기 결정을 취소한 용병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분노한 이스라엘 용병들이 돌아가는 길에 유다 여러 마을들을 닥치는 대로 노략하고 3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한 것입니다(13). 용병들은 방울도 흘리고 이미 100달란트라는 엄청난 돈을 받았는데,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전리품을 얻을 기회를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말이 되는 일입니다. 자기들이 아무리 강해도,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이쪽도 죽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인데, 전혀 싸우고 돈을 얻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분노하며 죽이고 노략한 것은 정당화될 없는 범죄입니다. 어쨌든 아마샤는 함부로 용병을 샀다가 국가적으로 손실을 입은 셈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머스 잔슨(Chalmers Johnson) <블로우백(Blowback: The Costs and Consequences of American Empire)>이라는 주목할 만한 책이 있습니다. ‘블로우백’이라는 말은 미국 CIA에서 쓰는 용어로, 어떤 공작 또는 요원이 자기를 고용한 주인을 거꾸로 공격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부메랑 효과’라고 있습니다. 냉전 시절에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지원하고 양성한 각국의 전사들이 냉전이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미국을 적대하고 공격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9.11 테러의 주범이었던 오사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에 맞서 싸우도록 미국 CIA 훈련시킨 전사들 하나였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견제하기 위해 1980년대에 미국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미국의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니카라과의 좌익 산디니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훈련한 콘트라 반군이 미국에 코카인을 밀수출해서 엄청난 수입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과거 냉전 시절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잘못된 씨앗들을 뿌렸던 것이 자라서 오히려 미국을 공격하는 적대 세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에돔을 공격하기 위해 함부로 이스라엘 용병을 불러들였던 아마샤가 바로 용병들에게 거꾸로 당한 것도 일종의 ‘블로우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부로 아무 수단이나 동원해서는 된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함부로 아무의 손이나 빌려서는 되겠습니다. 특히 잘못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손을 잡게 되면, 그것은 언젠가 우리 자신을 향해 공격해오는 칼날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처음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정했으면 충분히 예방할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고 함부로 저지른 때문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훗날 돌이키려 해도 치러야 대가가 엄청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히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아뢰며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이제 용병의 도움을 포기한 아마샤는 유다 군대만으로 싸움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텐데, 아마샤에게 이상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그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 이르러 세일 자손 명을 죽이고” (11)


이것을 보면,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그에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용기를 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용기는 인간적인 보호막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래서 아마샤는 사해 최남단에 위치한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의 군사 1 명을 죽이고(11), 명을 바위 꼭대기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는 대승을 거둡니다(12).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명을 죽이고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왕하 14:7)


아마샤의 군대는 에돔의 수도 셀라까지 점령한 , 그곳 이름을 ‘욕드엘’이라고 바꾸어 버리는데, 욕드엘은 ‘하나님에 의해 정복된 곳’이라는 뜻입니다. 아마샤도 이런 기적 같은 승리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의 마음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승리로 인하여 교만해진 아마샤는 자신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져들게 됩니다.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14)


고대 전쟁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전국에서 진리품으로 그들의 신상을 가져오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왜냐하면 인간들의 전쟁을 신들의 대리전쟁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승전국은 패전국의 신을 포로로 잡듯이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신들의 신전에 전시하며 승리를 과시했습니다. 아마샤도 이러한 의미로 에돔의 우상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되어 아마샤는 희한하게도 자기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패전국 에돔의 신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우상들에게 아무 능력도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면서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마샤의 어리석은 행우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즉시 선지자를 보내어 꾸짖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시니 그가 이르되 백성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15)


선지자는, 에돔의 신들이 백성들을 유다와의 전쟁에서 능히 구해내지 못한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신들에게 경배하고 기도할 있느냐고 지적합니다. 누구나 실수를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으며 잠시 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빨리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리더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빨리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단치신다고 섭섭해 하거나 도망가서는 곤란합니다. 야단치시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직 사랑하신다는 의미이고, 아직 회복시켜주겠다는 마음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다윗 왕도 잘못했을 때는 너무도 아프게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 다윗은 왕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해주시고 그의 왕권을 굳건히 지켜주셨습니다.


아마샤에게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똑같은 기회를 주기 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아마샤의 반응은 다윗과 너무 달랐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의 말에 감정이 상한 아마샤는 오히려 사납게 반발합니다.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선지자가 그치며 이르되 왕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아노라 하였더라” (16)


한마디로, “건방진 놈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하느냐? 죽여 버리기 전에 닥치고 사라져라!”라는 무서운 협박입니다. 얼마 아마샤는 에돔을 공격하려고 이스라엘 용병을 마음대로 고용했을 때도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의 사람에게 책망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겸손하게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했기 때문에, 용병의 도움 없이도 에돔에게 승리를 거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의 승리로 교만이 극에 달해 있기 때문에, 감히 자신을 꾸짖는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참지 못하고 분노한 것입니다.


전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모르는 왕의 모습을 보며 선지자는 기가 찼고, 없이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선포하고 말았습니다. “왕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아노라”(16).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도 이상은 참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결정되었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아마샤 스스로가 심판의 불을 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심판의 길을 자초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것을 보면 있습니다.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표시이며,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   유다와 이스라엘의 전쟁


에돔을 이기고 교만해진 아마샤는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오만하게 싸움을 걸게 됩니다. “오라 서로 대면하자”(17). 말을 들은 요아스는 기가 찼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군사력은 에돔과는 상대가 정도로 강했습니다. 그러니 아마샤가 이전에 거금을 지불하고 1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용병을 사온 아닙니까? 하지만 에돔 전쟁에서의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아마샤는 분수를 모르고 이스라엘에게까지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이전에 다루었듯이, 거대한 아람 제국의 군대를 몰아낸 경험이 있는 북이스라엘의 요아스는 결코 호락호락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실전에서 단련된 정예병이었고, 요아스 자신 또한 무서운 전장을 직접 누빈 장수였습니다. 그러한 요아스는 즉시 아마샤에게 무서운 경고를 보냅니다.


네가 에돔 사람들을 쳤다고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궁에나 있으라 어찌하여 화를 자초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19)


그러나 이미 교만이 가득 있던 아마샤는 요아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잃고서 미친 듯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들어갑니다. 그러자 요아스는 아람과의 오랜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를 지체 없이 출전시킵니다.


이스라엘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아마샤와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21)


유다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인 곳은 유다의 벧세메스였는데, 이곳은 헤브론에서 욥바에 이르는 길에 위치한 유다의 평지 성읍으로서, 이곳을 거점으로 군대를 몰아가면 유다 중심부를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런 곳을 전쟁터로 잡은 것만 봐도, 이스라엘의 요아스가 얼마나 무서운 지략가인지를 있습니다.


결국 아마샤의 유다 군대는 요아스의 이스라엘 군대에게 참패를 당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게 됩니다(22). 아마샤가 에돔을 정벌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너무나 달라져 있었습니다. 상대의 전력이 훨씬 강한데다, 에돔을 정벌할 때의 아마샤는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했던 반면, 지금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돔의 신을 숭배하며 교만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아마샤마저 이스라엘군의 포로가 되어 버리고 유다는 크게 패합니다.


이스라엘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여호아하스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하나님의 안에서 오벧에돔이 지키는 모든 금은과 그릇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 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23-24)


요아스의 군대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가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23)이나 되는 부분이 순식간에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성전과 왕궁 안에 있는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수많은 유다 백성들을 묶어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잡아서 끌고 갑니다.


이때 함께 끌려간 아마샤는 요아스가 죽을 때까지 치욕스런 포로생활을 하다가 풀려납니다. 오래 유다 아비야 왕과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재위 시절 있었던 전쟁에 이어, 유다와 이스라엘이 번째로 치른 전면전에서 이번에는 유다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수도가 점령당하고 왕까지 포로로 잡혔으니, 거의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까지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뒤에도 15년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포로로 잡은 북이스라엘의 요아스 왕보다도 훨씬 오래 셈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에서 장수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여겨졌지만, 아마샤의 경우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오래 시간 동안 그는 수많은 음모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반란 무리의 손에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아마샤가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으므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반역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그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27)


말씀을 보면, 이것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또는 우연히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반 음모는 아마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때부터,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가가 와서 경고했는데도 아마샤가 그것을 무시하던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반란의 원인 제공을 아마샤 자신이 겁니다.


반역은 아마샤의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심판이 당장 임하지 않는다고 아예 임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때부터 이미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시한폭탄처럼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며 심판의 불이 어느 정도 시간까지 쌓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마침내 심판의 불길이 떨어집니다. 그때 가서는 어찌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한 아버지 요아스처럼, 아마샤도 내부의 반란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백성들이 무정한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한 왕의 리더십이 문제였습니다.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면, 내가 이끄는 사람들도 나를 거역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경받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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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엘리사의 마지막 예언 사역 (왕하13:1-25)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4 (6/01/16) kpccoh 2016.06.02 2659
51 극적으로 등장했지만 안타깝게 끝난 요아스 (대하22:10-24:27)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3 (5/25/16) kpccoh 2016.05.25 2051
50 예후를 통해 이루어진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 (왕하 9장-10장)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2 (5/18/16) kpccoh 2016.05.18 3668
49 하나님의 절묘한 타이밍 (왕하 8:1-15)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1 (5/11/16) kpccoh 2016.05.11 4802
48 불가능한 상황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 (왕하 6:24-7:20)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0 (5/04/16) kpccoh 2016.05.05 2824
47 하나님의 사람, 능력의 사람 (왕하 6:1-23)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9 (4/27/16) kpccoh 2016.04.27 4450
46 나아만의 치유 (왕하 5:1-19)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8 (4/20/16) kpccoh 2016.04.20 5096
45 모압과의 전쟁에서 거둔 절반의 승리 (왕하 3:1-27)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7 (4/13/16) kpccoh 2016.04.13 5372
44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마 6장 9-13절) - 이기환 장로 kpccoh 2016.04.06 665
43 엘리야와 엘리사가 보여준 리더십 승계의 모범 (왕하 2:1-25)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6 (3/30/16) kpccoh 2016.03.31 4616
4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의미 (요 12:20-33) - 성금요예배 (3/25/16) 이준원 2016.03.26 2605
41 불신앙과 불순종의 비참한 결말 (왕하 1:1-18)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5 (3/16/16) kpccoh 2016.03.16 3841
40 의로운 왕에게서 나온 악한 아들의 실패 (대하 21:1-20)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4 (3/09/16) kpccoh 2016.03.10 2002
39 찬양으로 거둔 승리 (대하 20:1-37)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3 (3/02/16) kpccoh 2016.03.03 3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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