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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0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6 ✦
“엘리야와 엘리사가 보여준 리더십 승계의 모범”
(열왕기하 2장 1-25절)
1. 엘리야의 승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힘든 사명을 감당했던 엘리야는, 이제 그의 때가 다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나라로 데려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도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하늘로 올리는 방법을 택하십니다(1).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 가고 있음을 알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기 위하여 길을 떠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한 것 외에도, 여러 곳에 선지자 학교를 세워서 차세대 영적 지도자들을 기르는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승천하기 전에 길갈을 떠난 것은, 마지막으로 벧엘과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 학교 학생들을 돌아보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치 없는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달라붙어 동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해진 엘리야는 길갈을 떠나면서부터 이 고집스런 제자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2)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늘로 불러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데, 다른 사람이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2)
엘리사도 엘리야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를 끝까지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직접 보고 엘리야와 운명을 함께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보통 집념이 아닙니다. 단순히 엘리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안다고 이런 행동이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벧엘의 선지자 학교 생도들도 엘리야의 승천이 가까웠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나아와 묻습니다.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3절)
이 말은,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실 시간이 오늘로 다가왔는데, 왜 철없이 이별을 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붙느냐고 꾸중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학교 생도들도 하나님의 지식이 가득한 사람들이라 엘리야의 승천이 다가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그냥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었고,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사는 이 한마디로 선자자의 제자들을 침묵시킵니다. 자기도 그걸 몰라서 엘리야에게 바짝 붙어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승이 마지막 길을 가시도록 놓아드리는 에티켓도 중요하지만, 엘리사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강한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너희만 똑똑한 것처럼 떠들지 말라’는 것이 엘리사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조금 후에 드러납니다.
엘리야는 벧엘을 떠나 여리고로 가면서 다시 한 번 똑같은 말로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하지만, 엘리사도 똑같은 대답을 하며 끝까지 따라 붙습니다(4). 엘리야는 할 수 없이 여리고로 엘리사를 데리고 가는데, 여리고의 선지자 학교 생도들도 벧엘의 생도들처럼 똑같은 말을 엘리사에게 하고, 엘리사도 똑같은 말로 대답합니다(5).
엘리야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자신을 요단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엘리사를 떼어놓으려 하지만, 엘리사는 포기하지 않고 똑같은 말을 하며 따라갑니다(6). 그러자 엘리야도 이제 엘리사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그와 함께 길을 갑니다. 이제 두 사람은 마침내 첫 출발지였던 길갈의 동쪽 맞은편인 요단에 도착합니다.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7절)
오래 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처럼, 요단 강물은 높이 흘러넘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어떻게 합니까?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8절)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서 둘둘 말아 강물을 내리치자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길을 냅니다. 모세를 통해 홍해를 가르시고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강을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엘리야에게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을 건넌 후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승천하기 직전이 된 것을 알고 엘리사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고 합니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9절)
멀리 서서 바라보기만 했던 다른 선지자의 제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충성스러운 제자 엘리사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끝까지 따라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엘리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이유가 뭔지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요청을 들어줄 때까지는 스승을 결코 하늘로 떠나보낼 수 없다는 엘리사의 집념을 엘리야는 높이 평가했고, 하나님도 그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구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바로 이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영광과 거룩한 리더십을 구했습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갑절이나”라고 표현한 것은 장자의 몫을 구한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신 21:17)
장자에게는 두 배를 줍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이런 요청을 한 것은 엘리야보다 갑절이나 뛰어난 능력을 받아서 두 배의 영광을 누리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가 악한 시대 속에서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며 어려운 사역을 감당해 왔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역이 자신에게 넘어오려고 하자 자기 능력으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갑절의 능력을 구한 것은, 스승보다 뛰어나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떠나는 시점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고, 생명을 건 절박함으로 엘리야를 붙잡은 것이고, 실제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붙잡은 것입니다. 벧엘과 여리고의 선지자 제자들이 몰랐던 것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즘도 교회에 다닙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닌다고 다 똑같은 은혜와 똑같은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주님을 만졌지만, 정작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를 받은 것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뿐이었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절박함입니다. 그 여인에게는 다른 선택 사항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아니면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그 힘없는 몸으로 군중을 뚫고 들어와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 절박한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5-26)
얍복 강가에서 밤새 주님의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마음도 바로 이런 절박함이었습니다. 야곱은 환도뼈(허벅지 관절, hip bone)가 부러지는 엄청난 고통 중에서도 끝까지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르던 야곱으로서는,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야곱은 원하던 복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2)
엘리사의 절박함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다른 선지자의 제자들처럼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면,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신앙 연륜이 깊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절박함입니다.
우리도 자신에게 질문해봐야겠습니다.
나의 기도는 얼마나 절실한가?
나는 얼마나 간절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가?
지난 주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때 많은 분들이 나와서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다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기회에도 나와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 없이도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마음, 하나님 말고도 다른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그다지 절박하지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간절히 기도를 안 했지만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된 게 아니니까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그 좋은 일이 자기 신앙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교만만 늘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점잖 빼고 폼 잡으면서 고상한 척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세상 욕심은 버려야 하지만, 영적인 욕심은 내야 합니다.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고의 은혜를 사모하고, 최고의 영적 파워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엘리사의 그런 요청을 듣고, 그것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0절)
영적 능력은 엘리야가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목사가 와서 기도를 해주기를 원합니다. 목사만 특별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도의 삶> 공부를 통해 여러 분들이 중보기도자가 되어 보자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며,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연결시키는 통로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승천하는 것을 엘리사가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대화를 하는 도중 갑자기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회오리바람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립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1절)
이 장면을 거기서 직접 봤다면 정말 대단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2. 엘리사의 사역의 시작
그렇게 순식간에 일어난 엘리야의 승천을 엘리사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슬픔을 표현합니다.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12절)
“병거와 마병”은 나라를 지키는 힘을 말합니다. 아합의 통치 아래서의 암울했던 시절에 우상 숭배로 가득한 나라, 주변 적국들의 침략으로 항상 불안하던 나라를 지킨 힘은 바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영적 리더십이었습니다. 아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운 영적 스승,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던 영적 지도자 엘리야가 사라진 지금, 엘리사는 위대했던 스승이 다시는 이 세상에 자기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며 슬퍼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떠났지만 그의 겉옷은 엘리사의 손에 남겨졌습니다(13). 그 겉옷은 모세의 지팡이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엘리사에게 남겨졌다는 것은 엘리야와 함께 했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이제 엘리사에게 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영적 리더를 준비하셨습니다. 이 겉옷을 가지고 엘리사는 엘리야처럼 요단 강물을 치며 외칩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14절)
아직 엘리사는 자신이 구한 것이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떠나고 혼자 남은 데 대한 불안감과 절박함에 겉옷을 붙잡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강물이 갈라지고 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을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그 지역의 선지자 학교 생도들은 엘리야의 영감과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한 것을 인정하며 그 앞에 엎드립니다.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15절)
엘리사는 엘리야가 남긴 영적 유산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았기 때문에, 떠나라고 했어도 끝까지 엘리야를 따랐던 것입니다.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싼 다이아몬드를 가짜 큐빅이라고 속이면, 잘 모르는 사람은 그런 줄 압니다. 하지만 정말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가치를 알아봅니다.
엘리사는 다른 수많은 선지자의 제자들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여러 선지자의 제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엘리야의 영감을 받기 원한 열정과 절박함으로 능력을 받았습니다.
다른 선지자 제자들 중 더 뛰어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 멀찍이 서서 따라왔고, 그러한 선지자 생도들은 엘리야의 승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들이 스승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16-18절)
참 이상합니다. 그들이 엘리사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하며 존경을 표했다면 그의 말을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엘리사가 가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했습니다. 즉, “그들이 하도 성가시게 간청”하니까 엘리사가 그럼 찾아보라고 했고, 그래서 그들은 50명을 보내어 실컷 찾다가 결국 헛고생만 하고 돌아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영적 통찰력이 무디어지면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이렇게 헛고생만 하게 됩니다.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과 항상 삶을 가까이 나누며 동행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러지 못했기에 간절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이성적으로, 자신의 경험으로만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죽음을 통하지 않고 곧장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들려올라간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영적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상식과 경험의 한계에 묶여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은 많이 하는데 영적 열매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하나님의 일을 보려고 하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질 뿐입니다. 자신의 지식으로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해석하려고 하면, 자기가 하나님보다 잘 안다는 교만에 빠지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3-25)
어떻게 하나님께 어리석음이 있고 약하심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해하도록 그렇게 표현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3. 새로운 영적 리더 엘리사의 기적들
하나님은 새로 영적 리더가 된 엘리사의 영적 권위를 세워주시기 위해 두 가지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첫 번째 기적은, 물이 좋지 않아 고통당하는 여리고 주민들을 위해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 때부터 저주받은 땅이었습니다. 경치는 아름다웠지만 물이 좋지 못해서 과일도 제대로 익지 못하고 사람들이 병에 많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고통 받던 사람들은 엘리사에게 간절히 매달렸고(19),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물에 소금을 뿌리며 고쳐줍니다(20-22).
이 사건은, 아무리 힘들고 죄악 된 상황 속에 있어도, 누구든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영적 리더십은 하나님의 회복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두 번째 기적은 자신을 조롱하는 아이들을 징계한 일입니다. 여기에서는 아이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10대 중후반의 젊은이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조롱합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3절)
그들이 엘리사를 에워싸고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반복하며 조롱하는데, 이것은 머리숱이 적은 엘리사의 신체적 결함을 놀리며 엘리야처럼 하늘로 승천해 보라고 놀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여리고 지역은 대표적인 우상 숭배의 성읍입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왕상 16:34)
이것이 아합 시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얼마나 악한 시대이며, 또 얼마나 악한 성읍입니까. 이 지역 젊은이들(아이들이라고 해도 상관없는)의 조롱은 이곳의 타락한 영성을 반영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는 악한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엘리사는 그러한 그들에게 저주를 합니다.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4절)
엘리사는 자기를 조롱한다고 화가 나서 개인의 울분으로 저주한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저주를 선언한 것이고, 그때 두 마리의 곰이 나와 42명의 무례한 아이들을 즉시 쳐 죽입니다. 이 저주와 징계는 자신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경고입니다.
이처럼 축복과 저주의 두 가지 기적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엘리사의 사역이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고 또 심판을 행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엘리야의 시대가 저물고 엘리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엘리야에서 엘리사로 이어지는 영적 리더십의 승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일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영적 리더십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리더십의 타이밍과 방법은 온전히 주님께 달렸습니다.
우리도 어떤 사역을 할 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 두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하라고 하시면 하고, 이제 그만 하고 다른 것을 하라고 하시면 그만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도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영적 유산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절박함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오는 우리들 위에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여 얼마나 간절합니까? 지금 받은 직분이나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얼마나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리더로 세워주셨는데, 엘리사와 같은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능력을 구하며 나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절히 주님의 능력을 구함으로 응답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답게 사용되는 사역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