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2016년 3월 9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4 ✦
“의로운 왕에게서 나온 악한 아들의 실패”
(역대하 21장 1-20절)
1. 살인으로 시작된 여호람의 통치
여호사밧에게는 여호람을 비롯하여 또 다른 여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아들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미리 막기 위하여 나름대로 고민해서 두 가지 방책을 썼습니다. 첫째는,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자신이 죽기 전에 장자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년 동안 섭정을 한 것입니다. 둘째는, 왕위를 이어받지 못한 다른 왕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왕자들에게 보물과 견고한 성읍들을 선물로 후히 주고 흩어져 살게 했습니다(3).
사극을 보아도, 왕자들끼리 권력을 놓고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최고 인기 드라마 중에 “육룡이 나르샤”라는 것이 있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와 아들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들인 이방원은 장자가 아니지만 권력 투쟁을 통해 결국 조선의 세 번째 왕이 되고 맙니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도 오래 전부터 같은 문제가 있었고, 또 재벌가들 사이에서 재산상속 문제 때문에 형제들끼리 원수처럼 싸우는 일도 많습니다. 요즘 모 대기업에서도 형제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호사밧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모든 왕자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으니 상당히 지혜로운 아버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의 이러한 노력은 하루아침에 허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섭정하던 5년 동안은 조용히 있던 여호람은, 부친의 죽음 이후 즉시 본색을 드러내며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여호람이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어 세력을 얻은 후에 그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방백들 중 몇 사람을 칼로 죽였더라” (4절)
권력에 눈이 먼 여호람에게는 핏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왕자들을 지원하던 고위 괸리들 몇 명도 함께 죽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것이 아니라 여호람이 이 끔찍한 일을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은 후를 미리 대비한 여호사밧의 노력은 인간적으로 뛰어난 지혜였지만, 세상의 일은 똑똑한 사람의 계획대로만 풀리지 않는 법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믿음의 사람에게 영적 기초가 없는 인간적 준비는 이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식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성읍을 나눠주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가르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제왕학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특히 왕위를 물려줄 장자 여호람에게는 그래야 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기가 여호람과 함께 섭정을 해줄 것이 아니라, 아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도록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끼고 있다가 결국 그 아들이 실패했습니다.
자녀 교육이란 결국 놓아주는 것이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냥 알아서 살라고 방치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도록 자식을 놓아주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는 권리 포기입니다. 내가 낳았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선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법칙대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다음 세대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유산을 제대로 전수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여호사밧처럼 자식 대에 가서 엄청난 재앙을 맛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말이 통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여기서 ‘불법’이 죄인데, 이 단어는 헬라어로 ‘아노미아(anomia)’로 ‘아’는 ‘무’이고 ‘노미아’는 ‘법,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불법’을 직역하면 ‘무법’이라는 뜻입니다. ‘무법’이니까 법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무법은 ‘자기가 법’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모두 무법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 삽니다. 사사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자기 법대로 사니까 다툼이 일어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자기 법을 주장하니까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예수 믿는 가정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법을 내려놓고 주님의 법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투다가도 예수님의 법대로 하자고 하면 말이 통합니다. 그런데 자녀의 마음에 주님의 법을 넣어주지 않으면 결국 자기 법대로 살게 되기 때문에 무법자가 되고, 그러면 부모와 말이 안 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자기 맘대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하나님의 법을 심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가정교육이 되어야 하고, 교회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하는 것이 바로 ‘올리브 블레싱’입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네 상에 둘러앉은 네 아이들은 올리브 나무의 묘목과도 같다.” (시 128:3, 새)
올리브 나무는 버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올리브 열매를 거두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 만에 다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올리브 블레싱 시간에 자녀가 감사제목과 기도제목을 하나씩 나누면 목장의 어른들이 한 자녀씩 맡아서 축복하며 기도해 줍니다. 올리브 블레싱의 핵심은 부모와 자녀의 신앙의 공유을 통한 신앙의 계승입니다. 부모의 신앙이 대를 이어 계승되려면 부모와 자녀가 신앙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자녀가 서로 생각을 나누고 시간을 같이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함께 신앙을 공유하고 함께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신앙을 배우고 전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한 번의 실수
그런데 그 의로운 왕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이 그토록 악한 자가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6절)
여호람의 악한 길로 간 것은 북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의 딸과 결혼한 데 있습니다. ‘남자가 머리라면 여자는 그 머리를 움직이는 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이런 말도 들어봤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남자이고,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은 그 부모를 닮아서 보통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여호람을 조종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우상 숭배에 푹 빠지게 하며 악한 왕이 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왕조의 악한 리더십을 그대로 전염시켜 버린 것입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 12:4)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행하던 여호사밧이었지만, 아합 집안과 맺은 혼인동맹은 역사적 비극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한 번의 실수로 이제 다윗 왕실과 유다 왕조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5)
이 말씀은 너무나 정확하게 여호사밧에게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나라의 안보를 위해 똑똑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구했다면 결코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설마 이 결정 하나 때문에 이스라엘의 타락과 죄가 유다 왕조 전체를 오염시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과 파괴력은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잘못된 결혼 하나가 온 나라에 임하는 재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익을 좇아 판단을 내린 결정 하나가 두고두고 나와 내 자손들의 영적 올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반드시 기도하면서 모든 결정을 내려야겠습니다.
특히 내 자녀에 관한 결정이 그렇습니다. 결혼을 비롯하여, 그 이전에 학교도 그렇고, 운동을 하는 것이나, 음악, 미술을 하는 결정도 그렇습니다. 내 이익을 따라 잘못된 결정을 하나 내린 것이 두고두고 자녀의 인생을 망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여호사밧의 실수와 여호람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다 왕조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7절)
여기서 “등불”은 생명과 소망을 상징하며, 등불을 주겠다고 하심은 여호람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 왕조의 명맥이 지속될 것을 의미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할 때는 하나님의 징계로 가문 전체가 멸망당하여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곤 했는데, 남 유다 왕들은 여호람처럼 패역한 왕이 나와도 왕조의 맥이 끊어지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조상인 다윗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배반하고 타락해도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받을 자격 없는 은혜를 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것은 죄를 가볍게 여기셔서가 아니라, 이미 주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유다 왕조로서는 다윗이라는 신실한 믿음의 조상을 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간혹 악한 왕이 나와도 다윗이 세워놓은 믿음의 뿌리를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멸망을 막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회복시켜주시고 다시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윗 때문에 그 후손들이 복을 받은 것처럼, 나 때문에 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내 자손들에게 이처럼 축복이 되는 다윗과 같은 영성의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나아가야겠습니다.
3. 하나님의 징계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호람의 죄를 그냥 묵과하신 것은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악한 왕 여호람의 죄를 무섭게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먼저 주변국들의 배반으로 시작됩니다(8). 통일 왕국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던 에돔은, 여호람이 통치하는 시기에 자신들의 왕을 세우고 유다에 반기를 듭니다. 이것은 사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반란입니다.
이에 분노한 여호람은 군대를 이끌고 에돔을 정벌하러 나갑니다(9). 그러나 한 수 아래로 평가되던 에돔 군대에게 포위당해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 옵니다. 이렇게 유다가 에돔에게 쩔쩔 매고 있는 사이에 블레셋 지경에 위치한 립나도 유다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여호람은 이 작은 립나의 반란도 제대로 제압할 힘이 없어서 후퇴하고, 이로써 립나는 여호람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어이없는 사태는 결코 에돔이나 립나가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유다 왕 여호람에 대한 심판의 결과입니다.
“이는 그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더라” (10절)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나면 리더십이 파워를 잃어버립니다. 나를 존경하고 어려워하던 존재들이 하루아침에 내게 칼을 들고 일어납니다. 그게 화가 나서 여호람처럼 인간적으로 진압하러 달려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코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사용된 징계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패역한 하나님의 자녀를 징계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일으키실 때는 누구도 그 기세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유다에게는 그것을 막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하는 이유는 바로 불순종의 죄입니다. 죄는 영적 능력을 감소시킵니다. 거룩이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만약에 자꾸 주변 사람이 두렵다면, 최근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게 되면 두려움이 떠나고, 사람들이 함부로 도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돔과 립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여호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하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하게 하였으므로” (11절)
이것을 조금 더 정확히 번역하면, ‘나라 곳곳에 우상 숭배를 하는 산당들을 세우고, 수도 예루살렘 사람들을 성적 타락에 빠뜨려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뜻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가지고 들어온 이스라엘의 악하고 패역한 모습이 유다에서도 그대로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우상 신들을 섬기는 행위는 대부분 폭력적이고 음란했습니다. 음란과 폭력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의 대표적인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왕이 앞장서서 저지르게 했으니, 당시 유다 사회가 얼마나 혼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패역한 행위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하나님은 즉시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오직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음행하게 하기를 아합의 집이 음행하듯 하며 또 네 아비 집에서 너보다 착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들과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시리라.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3-15절)
이때는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기 얼마 전으로 생각됩니다. 노 선지자 엘리야의 마지막 예언 사역이었던 셈입니다. 이 심판의 말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람의 악행들을 너무나 자세하게 지적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다고 해서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의 길을 가는데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고 그냥 다 잘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모르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 다 정확히 파악하고 계십니다. 다만, 심판이 임하기 전에 빨리 돌이키라고 오랜 시간 동안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람의 우상 숭배와 그가 음란한 문화를 백성들에게 퍼뜨린 일, 형제들을 살해한 일을 모두 지적하십니다. 아무리 골방에서 은밀하게 계획하고 행한 죄라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왕조의 영적인 뿌리와 흐름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12절)
하나님께서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는 다윗과 여호사밧과 아사가 세워놓은 영적 흐름을 왜 따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남들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하기도 하는데, 너는 계속 이어서 달리기만 하면 되는, 믿음의 조상들이 깔아 놓은 그 좋은 영적 고속도로에서 왜 벗어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호람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합도 한 번은 겸비하게 행했는데, 여호람은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가 선포한 심판이 그대로 성취됩니다.
먼저 블레셋과 아라비아 연합군이 여호람을 공격합니다(16-17). 이들의 공격으로 여호람은 여호아하스를 제외한 모든 아들들과 아내들을 빼앗기고 왕궁의 재산까지 다 탈취를 당합니다.
이것은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선왕 여호사밧 시대에는 유다에 예물과 조공을 바치던 블레셋인데, 여호람이 하나님을 저버리니까 블레셋은 겂 없이 유다를 침략한 것입니다.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 역시 아사 왕 때 100만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가 전멸 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들도 블레셋 군대와 연합하여 유다에 패배를 안깁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유다가 잘나서 적들이 공격을 못한 게 아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산성, 방패, 요새,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때는 아무리 많은 적들이 에워싸고 치려고 해도 안전합니다. 그러나 여호람처럼 하나님을 버리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보호 장치가 끊어지면서 모든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여호람에게 닥친 재난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엘리야의 예언대로, 여호람은 창자에 병이 들어 2년이나 고생하다 죽게 됩니다(18-19). 그의 병은 하나님의 징계 때문이었으므로 어떤 의원들도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회개의 기간이라 할 수 있는 2년의 투병 기간이었지만 여호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그래서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을 잘 보면, 주어가 다 “여호와”입니다. “여호와께서....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16).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들게 하셨으므로”(18). 엘리야를 통해 분명히 심판을 경고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은 여호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축복의 말씀은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붙잡아야 하고, 책망의 말씀 앞에서는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람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더욱 비참한 것은, 백성들이 왕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백성은, 왕들이 죽으면 으레 향을 피웠으나, 여호람에게만은 향을 피우지 않았다.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덟 해 동안 다스리다가, 그의 죽음을 슬프게 여기는 사람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으나, 왕실 묘지에 장사하지는 않았다.” (19b-20절, 새)
그 누구도 여호람 왕의 죽음을 애통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8년이나 나라를 다스린 왕의 죽음을 어느 국민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호람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끝난 셈입니다.
게다가 여호람의 시신은 왕들이 대대로 묻혔던 왕실 묘지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이 말은,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도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살아생전 리더십이 얼마나 악하고 형편없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버지 여호사밧과는 달리 너무나 악한 길을 걸었던 여호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여호람의 악행에 원인을 제공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토록 훌륭한 왕이었던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이었습니다. 악한 왕 아합의 우상 숭배하는 딸을 며느리로 들인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략결혼을 통해 나라의 안정을 가져오겠다는 한순간의 인간적 계산 때문에, 왕조 전체를 병들게 하는 영적 바이러스를 수입해 버리고 만 셈입니다.
여호사밧은 아들들을 위한 인간적 계획은 다 세워놓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호사밧이 죽은 뒤, 아들들끼리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위해 단행한 그 수많은 개혁과 업적들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지만, 내가 한 실수 때문에 자녀가 잘못된 기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 얼마나 통한할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녀가 영적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목숨 걸고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행했던 여호사밧도 실패한 것이 자녀 교육이니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녀들을 영적으로 바로 서게 가르치며 돕는 데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대로 살며 순종하는 모범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겠습니다.
그럴 때 다음 세대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다음 세대도 신앙을 계승해나가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