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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5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3 ✦
“극적으로 등장했지만 안타깝게 끝난 요아스”
(역대하 22장 10절 ~ 24장 27절)
1. 아달랴의 폭정을 진압한 여호야다의 개혁
1) 아달랴의 통치와 죽음
지난주에는 예후가 북 이스라엘에서 아합의 자손들을 깨끗이 처리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예후는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있던 남 유다 왕 아하시야도 죽이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아합의 씨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 유다 왕궁에는 아직도 죽은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남아 있었습니다.
아달랴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악한 아합과 이세벨의 딸입니다. 부모를 닮아서 그런지 그녀 또한 보통 포악한 것이 아니었고, 남편 여호람을 타락시키고 아들 아하시야도 타락시켰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가 패망하게 하는 아합의 집의 가르침을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아합의 집 같이 악을 행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의 가르침을 따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을 상하게 한지라” (22:4-5)
아하시야가 이렇게 악한 길로 나가게 된 원인이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22:3)
아달랴는 자기 아들 아하시야가 예후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슬픔에 잠기기보다는 얼음처럼 냉정했습니다. 그리고 재빨리 움직여 정권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왕족들을 모두 죽입니다(22:10). 이제 다윗 왕조는 그야말로 멸망당할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에서 등불이 꺼지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정말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왕자들이 처참하게 학살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죽은 아하시야의 이복누이였던 여호사브앗(여호세바)이 당시 1살이었던 요아스 왕자와 유모를 빼돌린 것입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요아스는 그 후 아달랴의 6년에 걸친 끔찍한 학정 기간 동안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성전에 몰래 살며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12).
이것은 정말 한 편의 영화 스토리 같은 기적이었습니다. 요아스를 빼돌린 여호사브앗은 6년 후 쿠데타의 주역이 되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였습니다(22:11). 여호야다는 아내를 시켜서, 영적 리더로서 목숨을 걸고 다윗 가문의 씨를 지켜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의 핏줄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기가 막힌 섭리였습니다.
불법적으로 왕권을 장악한 아달랴가 유다를 통치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백성들은 아달랴의 학정에 시달리며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온 것입니다. 아무 때나 막 일어난 게 아니라, 백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거사를 실행한 것입니다.
여호야다는 안식일에 레위 사람들과 유다 무리에게 다윗 왕의 무기들을 주어 먼저 어린 요아스 왕자를 호위하게 합니다(23:8-10). 그런 다음, 성전에서 요아스에게 면류관을 씌우고 왕이 가지는 율법 책을 줌으로써 순식간에 즉위식을 끝내 버립니다(23:11). 모든 순서가 끝나자 모여 있던 무리들은 “왕이여 만세수를 누리소서!”라고 외치는데, 이것은 당시 아달랴의 학정에 지친 백성들의 민심이 요아스에게 모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리의 환호성을 듣고 성전으로 달려간 아달랴는 너무 놀라 옷을 찢으며 외칩니다.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23:13) 그러나 누가 반역을 한 겁니까? 애초에 반역은 아달랴 자신이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다윗의 자손들을 마음대로 학살한 것부터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여호야다의 명을 받아 대기하던 군사들은 아달랴를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처형해 버립니다(23:14-15). 이렇게 해서 유다는 비로소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게 됩니다.
2) 언약의 갱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다윗 왕권을 회복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에게서 정권을 빼앗은 후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나라로 회복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취합니다.
먼저, 여호야다는 자신을 포함하여 온 유다 백성들과 왕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맺도록 인도합니다.
“여호야다가 자기와 모든 백성과 왕 사이에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 한지라” (23:16)
이것은 오래 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으로서,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은 그들의 주님이 되셔서 돌보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호야다는 새 왕이 된 요아스와 백성들에게 이 언약을 다시 가슴에 새기고 입으로 맹세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나라의 영적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아달랴의 영향을 받은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통치 아래, 그리고 지난 6년 동안 직접적인 아달랴의 통치를 받으면서 그들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거스르고 살았습니다. 따라서 불의한 권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운 이 시점에, 그들은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로운 헌신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요아스 왕과 백성들은 서로 언약을 맺는데, 왕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고 백성들은 그러한 왕에게 충성한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악한 권력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개혁을 하겠다며 들어선 새 정권도 이전의 악한 정권과 똑같은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권력을 잡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잡고 나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뭔가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된 다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어떤 목표로 나아갑니까? 의사, 변호사, 비즈니스, 엔지니어 등, 좋은 위치에 올라가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된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좋은 목표를 이루고도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3) 바알 신당의 파괴와 성전 의식의 갱신
언약의 갱신에 이어 여호야다는 아달랴의 통치 아래 온 유다에 퍼진 바알 숭배를 없앱니다. 우상 숭배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나라의 영적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아달랴가 퍼뜨린 바알 숭배를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야다는 과감하에 바알 신전과 제단들과 우상들을 부수고, 바알의 제사장을 처형합니다.
“온 국민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부수고 그의 제단들과 형상들을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23:17)
우리가 물을 마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컵인데, 금잔이나 은잔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물을 담을 깨끗한 컵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더러운 영혼에 성령의 역사를 부어주지 않으십니다. 우리 삶 속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 만한 것, 은근히 하나님 이상으로 우리의 시간과 돈과 정성을 빼앗아가던 것들을 모두 청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며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보다 내 관심을 더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뜻이 아닌 데에 내 시간과 돈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새로운 축복이 임합니다. 버리지는 않으면서 자꾸 축복을 부어달라고만 하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또 마음을 깨끗이 했으면 그 빈자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즉시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혹이 올 때 넘어지고 다시 시험에 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작년 오늘 딱 이 시간쯤(수요일 밤) 저희 가족은 이스라엘에 도착하여 첫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안식월을 맞아서 이스라엘에 방문한 것이 딱 1년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때 저희가 도착한 날이 그날 따라 굉장히 더웠습니다. 다른 날들은 80도 대였는데 그날은 110도였습니다. 그래서 제 아들은 바닷가에 나가 지중해에서 수영을 했고, 감기가 걸렸던 저는 바닷가 의자에 앉아 지중해 바닷물을 보는데 너무 아름다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저는 요즘 그것을 생각하며 소름이 끼쳤습니다.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그 기억이 너무나 생생한데, 벌써 1년이 지난 겁니다. 정말 시간이 빠릅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식으로 1년이 지나고 또 2년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우리는 떠나는 겁니다. 생각보다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지 모릅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쓸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티격태격할 시간은 더더욱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빨리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악한 일이 아니라 ‘좋은 일’, ‘괜찮은 일’들입니다. 우리는 적당히 괜찮은 일들을 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해야겠습니다.
이제 여호야다는 바알 신당을 파괴함과 동시에 성전의 의식을 새롭게 정비합니다.
“여호야다가 여호와의 전의 직원들을 세워 레위 제사장의 수하에 맡기니 이들은 다윗이 전에 그들의 반열을 나누어서 여호와의 전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다윗이 정한 규례대로 즐거이 부르고 노래하게 하였던 자들이더라.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슨 일에든지 부정한 모든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3:18-19)
특별히 성전을 지킬 관리들을 임명했는데, 성전 봉사를 맡은 제사장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의 직분을 회복시켜, 율법에 따라 활발하게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도록 했습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이렇게 거룩한 습관이 새롭게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와야 하니까 의무감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습관,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의 시간과 재능과 돈을 헌신하는 습관이 불길처럼 일어나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 요아스의 개혁
아달랴를 처형하기 위해 중단되었던 요아스의 즉위식이 온 백성이 기뻐하는 중에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그 후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리게 되는데, 통치 전반기에는 거룩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훌륭하게 다스립니다.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요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24:1-2)
요아스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성전을 보수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 지 100년이 훨씬 넘었기 때문에 성전은 낡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바알 숭배자엿던 여호람과 아하시야와 아달랴가 통치하던 30여 년 동안 성전은 방치되었고, 아달랴의 아들들은 심지어 바알을위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약탈까지 일삼았습니다(24:7). 그래서 요아스는 전격적인 성전 보수를 결심하고 지시합니다.
“그 후에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보수할 뜻을 두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해마다 너희의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되 그 일을 빨리 하라 하였으나 레위 사람이 빨리 하지 아니한지라” (24:4-5)
요아스는 성전 수리를 위한 재정 마련을 위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매년 유다 여러 성읍들에 가서 성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열왕기하에 보면, 성전으로 들어오는 모든 헌금을 성전 보수에 투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빨리 하라고 지시한 일이 생각만큼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참다못한 요아스 왕은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야단을 칩니다(24:6).
요아스가 야단 친 내용이 열왕기하서에 조금 더 자세히 나옵니다(왕하 12:7-8). 거기에 보면, 지금까지 제사장들이 회계에게 돈을 타다가 성전을 보수하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또 제사장들이 사적으로 백성에게서 돈을 받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서 돈을 빼돌리는 제사장들도 많았고, 제사장들이 게으르게 되면 일이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러니 왕이 명령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성전 보수 공사가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것입니다.
원인을 파악한 요아스는 즉시 해결에 들어갔습니다. 이제부터는 보수 비용을 걷을 때 제사장들을 거치지 않고 곧장 회계로부터 공사를 맡은 감독관들과 기술자들에게 넘어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들이 백성에게서 사적으로 모금하는 것도 멈추고, 궤를 만들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두어 백성이 직접 그 궤에 돈을 넣도록 했습니다.
“이에 왕이 말하여 한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게 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정한 세를 여호와께 드리라 하였더니,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마치기까지 돈을 가져다가 궤에 던지니라” (24:8-10)
이렇게 헌금을 드린 궤가 차면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함께 열어 계산하고, 궤에서 나온 돈은 감독관을 통하여 바로 일꾼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게으르고 불의한 이득을 챙기던 제사장들의 부정을 처음부터 봉쇄해버리는 투명 경영 시스템을 도입한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언제든지 궤를 메고 왕의 관리에게 가지고 가서 돈이 많은 것을 보이면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에게 속한 관원이 와서 그 궤를 쏟고 다시 그 곳에 가져다 두었더라 때때로 이렇게 하여 돈을 많이 거두매, 왕과 여호야다가 그 돈을 여호와의 전 감독자에게 주어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여 여호와의 전을 보수하며 또 철공과 놋쇠공을 고용하여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더니, 기술자들이 맡아서 수리하는 공사가 점점 진척되므로 하나님의 전을 이전 모양대로 견고하게 하니라” (24:11-13)
이렇듯 지혜롭게 일을 해결한 요아사는 모금된 헌금을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오직 성전 보수에만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성전 보수 공사는 깨끗이 마무리 됩니다.
“공사를 마친 후에 그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 앞으로 가져왔으므로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곧 섬겨 제사 드리는 그릇이며 또 숟가락과 금은 그릇들이라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 (24:14)
3. 여호야다의 죽음과 요아스의 타락
하지만 이렇게 훌륭하던 요아스 왕의 통치에 불행하게도 어두움이 임하게 되는데, 그 시작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죽음입니다.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백삼십 세라.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24:15-16)
아달랴의 무서운 통치 속에서도 어린 요아스를 지켜내어 왕위에 올렸던 경건한 영적 리더 여호야다는, 그 후에도 끊임없이 요아스 왕 곁에서 그를 이끌어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요아스가 스스로 통치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여호야다는 계속해서 요아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영적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야다는 권력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거룩한 리더십을 가지고 요아스를 도왔습니다.
이처럼 혼란스럽던 시기에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지혜로운 여호야다 같은 사람이 요아스 옆에 있었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정말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서로에게 바로 이런 여호야다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서로에게 아달랴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서로에게 여호야다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서로에게 여호야다처럼 되어야겠고,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여호야다와 같은 사람이 되어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영향력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지만, 특히 우리 자녀들이 이 여호야다 같은 영적 멘토를 만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지금 youth/college pastor를 찾고 있는데, 바로 이런 분을 만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여호야다 같은 영적 멘토를 만나야겠지만, 요아스가 여호야다에게 의존했던 식이 되면 곤란합니다. 단순히 훌륭한 영적 스승만 만난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자라도록 도와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왜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가 생각해보았는데, 좋은 영적 스승을 구하는 데에만 신경을 쓴 것이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좋은 목회자를 구해서 그분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기들은 손을 놓는 겁니다. 부모가 역할을 제대로 안 합니다. 그러다 그 목회자가 떠나면 또 자녀들이 방황하게 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요아스는 여호야다에게 너무 의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24:17-18)
지금까지 요아스 왕의 멘토 역할을 했던 여호야다가 죽자마자, 요아스는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 방백들과 교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180도로 바뀔 수가 있습니까?
요아스는 단순히 존경하는 어른인 여호야다의 조언을 따랐을 뿐이었지, 그 가르침을 깊이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만 바라보았지, 여호야다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깊이 의지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아무리 영적 스승이 좋아도 그 사람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요아스 왕은 스승 여호야다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영적으로 홀로 서기를 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야다가 죽고 나니까 두려움을 느낀 요아스는 방백들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이 권하는 우상 숭배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아스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24:19)
결국 여호야다의 아들로 제사장직을 이어받은 스가랴가 성령에 감동되어 백성 앞에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4:20)
그러나 이미 강퍅해진 요아스는 스가랴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경고에도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무참히 죽여 버립니다.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24:21-22)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인 곳이 어디입니까? “여호와의 전 뜰 안”입니다. 여호야다는 악한 아달랴를 성전에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이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성전 뜰에서, 요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제사장을 죽이는 끔찍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어릴 때부터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왕위에 올려주었으며 평생을 돌봐준 그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무참히 죽였습니다.
이 일에 있어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21) 스가랴를 죽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유다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요아스의 악한 명령을 따를 만큼 타락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남의 신앙을 따르는 것에 머물렀던 요아스는, 급속도로 타락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죽어가면서 스가랴는 기도했습니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이 일을 보시고 갚아달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즉시 징계의 칼을 요아스와 유다에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아람이 유다를 침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일 주년 말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려고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백성 중에서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24:23)
열왕기하 12:17-18에 보면, 여기 나오는 아람 군대 침공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벤하닷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아람 왕 하사엘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데 그치지 않고, 가나안 남서쪽까지 밀고 내려와서 남 유다를 위협합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까지 진군해 옵니다. 몰려온 아람군은 유다의 모든 지도자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수없이 많은 물건을 노략질합니다.
23절에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라고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 방백들이 바로 요아스를 우상 숭배의 길로 빠지게 한 자들이고, 스가랴를 죽이는 일을 함께 꾀하여 죽인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의 손을 통해 그들을 응징하신 것입니다.
하사엘의 진군 소식을 보고받은 요아스는 감히 그를 대항해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대신 그는 겁에 질려, 왕실 창고와 성전 창고에 소장되어 있던 금을 모두 모아 하사엘에게 보냅니다. 그 많은 재물을 갖다 바치고 수치스러운 평화를 얻었지만 불안한 평화였습니다. 사실 하사엘이 이끈 아람 군대는 그렇게 막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패배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24:24)
아람은 별로 강하지 않은 군사력으로 왔지만, 하나님을 버린 유다를 하나님도 버리셨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유다를 마음껏 유린하고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적이 강해서 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약해져서 지는 겁니다.
많은 뇌물을 받은 하사엘의 아람 군대가 물러갔지만, 요아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람의 침략으로 부상을 당해 누워 있던 요아스는 비참하게도 자신의 심복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이런 비참한 최후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요아스가 크게 부상하매 적군이 그를 버리고 간 후에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반역하여 그를 그의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24:25)
하나님을 저버린 리더는 영적 능력을 잃어버리고, 영적 능력을 잃어버린 리더는 영적 권위를 상실합니다. 그러면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거느린 사람들도 나에게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나가는 말]
그토록 극적으로 왕이 되었고 멋지게 시작했던 요야스의 통치는 너무나 비참하고 안타깝게 막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겸손하던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영적 멘토가 죽은 뒤부터 급격히 타락하게 된 요아스는, 용두사미 통치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 받던 그날의 감격을 평생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늘 겸손히 스스로 돌아보며 매일 받은 은혜를 업그레이드 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 멘토를 사랑하고 도움을 받지만, 스스로 져야 할 영적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렇게 한 결 같이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