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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0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8 ✦
“나아만의 치유”
(열왕기하 5장 1-19절)
1. 어린 소녀 종에게서 들은 복음
한 사람의 인생은 겉으로만 봐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재산, 학벌, 외모, 가족, 명예,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누구나 다 가슴속에 아픔이나 고민 하나씩은 다 가지고 삽니다.
아람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지금으로 하면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합친 것 같이 아람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1절)
이 1절을 보면 여러 가지 정보가 나옵니다. 먼저, 나아만은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권력의 실세였던 사람입니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또는 ‘빽’으로 높은 자리만 차고앉았던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과 충성심으로 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된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라는 말씀을 보면, 나아만이 하나님에 대해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와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그때는 그것을 몰랐지만, 하나님을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토록 존귀한 자였고 권력의 핵심이었던 나아만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나병환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의학으로 이 병은 치료가 불가능했고, 나병환자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는데,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던 권력자 나아만이 덜컥 나병에 걸려 버린 것입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큰 용사도 나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구원의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2절)
이스라엘과 아람이 전쟁을 하다가 아람군이 포로로 잡아 온 이스라엘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의 하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적국으로 끌려와 노예가 되었으니 참 딱한 처지 아니겠습니까? 아람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있고, 아람 군대의 총사령관인 나아만을 향해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의 고통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3절)
이 소녀는 이스라엘에 살 때 능력의 선지자인 엘리사가 많은 기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들었던 것인데, 엘리사라면 얼마든지 주인의 나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의 구원과 치유는 이렇게 보잘것없는 한 노예 소녀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포로로 어린 나이에 잡혀 가 이방 나라에서 종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신세 한탄만 하다 끝날 수도 있고, 복수의 칼을 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방인 주인의 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주변 사람의 고통에 민감했고, 결국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역사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평소에 나아만과 그의 아내가 이 소녀 종을 친절히 대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 집에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의 병을 보고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만약 자기 여주인이 못되게 굴었으면 말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아주 무서운 주인이었다면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아만과 그의 아내가 평소에 이 이스라엘 출신의 어린 여종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좋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소녀는 주인의 병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입니다.
역시 평소에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웃을 위한 말씀일 뿐 아니라 자신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2. 치유를 위해 이스라엘로 가는 나아만
이제 나아만은 아람 왕에게 나아가 이 사실에 대해 말을 하고(4), 왕은 기꺼이 나아만을 돕겠다고 나섭니다.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5-6절)
왕은 즉시 은 10달란트와 금 6천 개와 옷 10벌을 나아만에게 주어 이스라엘로 가게 합니다. 은 10달란트는 무려 750파운드나 되고, 금 6천 개도 150파운드가 넘는 엄청난 재물입니다. 의복 열 벌도 왕족들이나 입는 화려하고 값비싼 최고급 옷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람 왕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의 병을 고쳐달라고 편지까지 써서 보냅니다. 그러나 협조를 구하는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 (7절)
아람 왕은 진심으로 나아만의 병 치료를 위해 이스라엘 측에서 도와주기를 바라며 편지를 보냈는데, 이스라엘 왕은 이것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은 뭔가 피해의식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이 평화의 시대라고 해도, 아람과 이스라엘은 언제나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라이벌 관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아만의 명성은 이스라엘에도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으니까 이제 이스라엘에서 좀 고쳐달라고 하는 편지를 보았을 때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시비를 거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나병은 아무도 못 고치는데 나아만처럼 중요한 장군의 나병을 못 고쳐낼 경우 그 책임을 물으며 아람 왕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람 왕은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다고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협조를 구한 것뿐입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의 이름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냥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3)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유명한 선지자라면 당연히 이스라엘 왕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주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왕에게 고쳐달라고 한 게 아니라, 그 유명한 선지자에게 나아만이 갈 수 있도록 다리를 좀 놔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자기에게 고쳐달라고 한 것이 아닌데 그것을 완전히 오해하여, 아람 왕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며 전쟁을 벌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소리부터 지른 것입니다. 그는 자기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대해사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옷을 찢고 고함을 지르는 못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가 만약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이었다면 당장 엘리사를 떠올리며, ‘과연 우리나라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고 하며 나아만을 엘리사에게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메말라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닥치자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3. 나아만에게 일어난 치유의 기적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사람을 왕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8절)
그만한 일로 일국의 임금이 옷은 왜 찢느냐는 것입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 큰 죄를 회개할 때나 국가의 엄청난 재앙 앞에서 회개할 때 하는 특별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왕은 이것이 전쟁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엘리사는 그게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이 두 사람은 똑같은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보입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이렇게 다르게 보입니다. 한 사람은 큰일이라고 보고, 다른 사람은 괜찮다고 보는 겁니다. 외부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도 많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내면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상태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것을 보고, 똑같은 말을 들어도 다른 것을 듣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봅니다. 똑같은 말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듣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듣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습니까?
8절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라고 소개합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다른 사람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황을 자기 시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까? 늘 하나님과 함께 하고 교제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니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엘리사는 지금 이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지 이미 감을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나아만)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처럼 위대한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될 거요.’라고 하는 게 아니라, 참 선지자의 존재는 참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우상으로 가득한 아람에서 온 나아만에게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기별을 받고 너무 좋아서 부하들과 함께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앞에 도착을 합니다. 엘리사의 문 앞에 섰습니다(9). 자기처럼 중요한 인물이 오면 엘리사가 맨발로 뛰어나와 환영해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어떻게 합니까?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0절)
엘리사는 환대는커녕, 집 안에 들어오게 하지도 않고, 직접 나와서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을 내보내 요단강에 7번 목욕하면 나을 것이라는 말만 전합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1-12절)
분노했다는 것이 여기서 두 번 나옵니다. “노하여 물러가며” 그리고 “분노하여 떠나니”. 자기 같은 대단한 국가의 VIP가 왔으면 당연히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자기를 맞이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나와보지도 않고 기껏 사람을 보내서 한다는 말이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하니, 이게 참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까?
게다가 다메섹의 아바나 강이나 바르발 강은 아주 아름답고 깨끗한 강인 반면에, 이 요단강은 진흙 색깔을 띤 탁한 물이 흐르는 강입니다. 그러니까 병을 낫게 하는 데에 강물이 효험이 있다면, 자기 나라의 아름답고 깨끗한 강에 가서 씻으면 되지 어떻게 이런 더러운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말이냐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왜 엘리사가 나아만 같은 국가의 VIP에게 이처럼 야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지금 ‘영적 리더십’을 주로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4장을 건너뛰었지만, 4장에 보면 엘리사가 인간적으로 따뜻한 일들을 많이 합니다.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가 죽어 과부가 된 여인이 두 아들과 같이 굶어 죽게 되니까 그 집에 기름이 넘치게 해서 먹고 살게 해주고, 수넴 여인을 위해 기도하여 아이를 낳게 해주고, 그 아들이 갑자기 죽었을 때 자기 몸을 겹치기까지 하며 기도로 그 아이를 살려냈을 정도로 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또 길갈에 흉년이 들었을 때 선지자의 제자들에게 국을 끓여 먹이다가 독이 있으니까 독을 제거해주기도 했고, 보리떡 20개와 채소로 무리를 먹이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 또 6장에 보면 한국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의 “금도끼 은도끼”처럼 그 비슷하게 도끼가 물에 뜨는 기적도 일으킵니다.
이처럼 엘리사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기적을 일으킨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사가, 멀리서 병 때문에 찾아온 나아만을 왜 이렇게 홀대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적국의 높은 장관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늘 최고의 대접에만 익숙해져 있는 권력자 나아만에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순종할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시험하신 것 같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잘 보십시오. 나아만이 뭐라고 합니까? 그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 생각에는....” 사실상 이것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내 생각에는...”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 생각대로 치유해줬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지금껏 경험했던 주술사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그것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한다고 화가 난 겁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엘리사가 그런 주술사 같은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 역시 그들이 섬기는 이상한 우상이나 거짓 신이 아니라 참 신이심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치유를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치유해주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고 그분 앞에 겸손히 나아오는 것이 먼저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강력한 나라의 높은 군대장관이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조건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단순히 몸의 병을 치료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적인 복입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의 병을 통해서 바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있던 나아만은 엘리사의 조치에 화가 났습니다. 나병환자로 고침을 받으러 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존심을 세우는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생각에는” 하며 자기를 내세우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자가 다 “내 생각에는” 하고 주장해보십시오.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도 ‘내 생각’, 저 사람도 ‘내 생각’, 여러 사람이 다 ‘내 생각’을 주장하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입니다. 공통적으로 우리가 다 ‘주님의 생각’을 구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주 어떤 상황에 닥치면 ‘내 생각에는 이렇다’, ‘내 지식으로는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내 경험으로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중요합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3절)
이제 자기 생각과 안 맞는다고 화내며 그냥 돌아가려 하는 나아만을 종들이 설득합니다. 아주 어려운 일을 시켜도 했을 텐데, 강에서 씻는 이 쉬운 일을 왜 못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나아만은 참 인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녀 종도 그렇고, 또 충언을 하는 이 종들도 그렇고, 참 좋은 종들을 많이 두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종들을 많이 두었다는 말은 나아만 자신도 좋은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이 종들의 말을 듣고 마음을 돌이킵니다. 이것이 대단합니다. 자존심 막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데, 나아만은 들어보고서 그 말이 맞는다고 판단되니까 흥분만 하지 않고 그대로 행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4절)
여러분, 이것을 보십시오. 아까 11절에 왜 노하며 물러갔습니까? “내 생각에는”이라고 하니까 화 밖에 안 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했습니다. 이제 ‘내 생각’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니까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만약에 끝까지 ‘내 생각에는’이라고 했으면 고침도 못 받고 화만 나며 그냥 가는 겁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 잘못됐구나’ 하며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순종하니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나병이 단 7번 요단강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완전히 나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에는”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다가는 화만 나고 일도 해결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말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4. 나아만의 신앙고백
이제 깨끗이 나음을 입었으니 나아만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감사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엘리사에게 다시 찾아옵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5절)
보통 사람이라면 엘리사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데서 그쳤을 텐데, 나아만의 관심은 이제 자신을 고쳐주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호위하고 온 부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개의치 않고 큰소리로 외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이것은 공개적인 신앙고백입닏. 이 공적인 고백은 나아만에게 육신의 치유와 함께 영혼의 구원이 일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영적 의미를 그가 깨달은 것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사람입니까? 육체의 회복과 영혼의 구원이 함께 일어나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 감사했던 나아만은 하나님의 복을 자기에게 전달해준 엘리사에게 감사의 선물을 합니다. 치료에 대한 대가라기보다는, 너무 고마워서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16절)
엘리사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단호히 거절한 것은, 이 치유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감사의 뜻으로 전하는 선물이라도, 그것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신 역사의 본질이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그 선물을 받게 되면 사람들이 “야, 엘리사가 아람의 높은 양반의 나병을 고쳐주고 팔자 고쳤다더라.” 하는 소문을 낼 수도 있습니다. 아람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겠습니까? 엘리사가 선물을 거절하자 나아만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다른 것을 청합니다.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7절)
이제 나아만이 단순히 몸만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엘리사가 믿으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알아서 믿고 헌신의 삶을 살겠다고 서약합니다. 이것은 정말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다만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한 가지만 양해해달라고 구합니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8절)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서 공적인 일과 관련하여 우상에게 제사하는 의식에 참여할 때가 있는데, 이때 아람 왕이 림몬 신당에서 경배할 때 그를 부축하는 공식적 임무를 해야 하니, 자기가 림몬을 섬겨서가 아니라 주인을 부축하느라고 굽힌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그것을 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나아만은 참으로 제대로 은혜를 받고 제대로 믿은 사람입니다. 이런 정도의 타협은 적당히 넘어가도 누가 뭐라 하지도 않을 텐데, 주님의 은혜를 받고 새롭게 된 사람으로서 작은 일도 그냥 넘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삶의 가장 작고 예민한 부분까지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이런 진실함을 우리도 본받아야겠습니다.
[나가는 말]
하루 전만 해도 전혀 하나님을 모르던 나아만이 이처럼 변화된 모습을 보면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지 못하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아만처럼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부르심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그저 ‘내 생각’대로만 살게 되면, 나아만 같은 사람이 올 때 이스라엘 왕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인 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옷이나 찢는 엉뚱한 짓을 하게 됩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며 깨어 있지 않으면, 나아만처럼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우리에게 붙여 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반응을 보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처럼 성령 충만하여 늘 깨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타이밍에 하나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나아만 같은 사람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통로로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이 나아만 같은 사람을 보내주시기를 계속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지 바로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곳임을 깨닫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기도하며 나아간다면, 분명히 나아만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아만을 만나게 되면 제대로 알아보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는 우리 개인과 각 가정과 목장과 온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