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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3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7 ✦
“모압과의 전쟁에서 거둔 절반의 승리”
(열왕기하 3장 1-27절)
1. 여호람의 통치와 연합군의 모압 원정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하시야는 아버지 아합과 똑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하게 행하다가 2년 만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인 요람(여호람)이 왕위에 올라 12년 동안 다스립니다. 남 유다 여호사밧의 아들이자 아합의 사위인 여호람도 있으니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여호람의 통치에 대해 뭐라고 평가합니까?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2절)
성경은 아주 간단히 그가 악을 행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여호람이 악을 행하기는 했어도 그 정도가 자기 부모인 아합과 이세벨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아합이 만들어 세운 바알 주상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여호람은 그래도 아주 최고로 악한 케이스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한 이전 왕들에게서부터 내려오는 악한 패턴을 그대로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절)
그러니까 여호람은 여로보암이 세워놓은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 우상 신전을 그대로 두었고,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을 그대로 이어 갔습니다. 그래서 악한 왕이라 평가됩니다. 인간의 평가는 상대 평가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그래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절대 평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이나 좋은 평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언젠가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텐데, 그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정받을 삶을 살아야지, 함께 하지도 못할 사람들에게 잘보이려고만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호람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보면, 다윗 시대 이후 계속 이스라엘을 섬겨 오던 모압은 해마다 새끼 양 10만 마리와 숫양 10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칠 정도로 경제력이 있는 나라였는데(4), 아합이 죽고 이스라엘의 국력이 약해지는 것 같으니까 반역을 합니다. 아합의 뒤를 이은 아하시야는 즉위한 지 2년 만에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모압의 배반에 대해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했고, 그 뒤를 이은 여호람에게 책임이 넘어온 것입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모압 정벌 계획을 세운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도움을 청하고 허락을 얻습니다. 아합의 딸인 아달랴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아 이스라엘과 혼인동맹을 맺은 여호사밧은, 즉시 여호람의 모압 정벌 전쟁에 함께 참전하기로 결정합니다(7). 사해 동쪽에 위치한 모압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다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여호사밧은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모압 정벌 작전을 의논하다가 여호람은 여호사밧에게 어떤 길로 공격하는 게 좋을지를 묻습니다(8). 이스라엘이 모압을 침공하는 길은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 길은 사해 북쪽을 통해 요단강과 아르논 강을 지나 모압 북쪽 지방으로 쳐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은 이스라엘과 국경이기 때문에 모압이 철저히 경계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사해 남단을 돌아서 에돔과 국경을 이루는 모압 남쪽 지역으로 가는 에돔 광야 길로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남쪽 길은 군대가 이동하기에 아주 어려운 산들이 많았고 또 험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적의 경계가 느슨할 것을 노린 것입니다. 게다가 이 길로 가면 에돔 군대까지 합세시켜 연합군의 전력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길에서 연합군은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뜻밖의 시련에 직면합니다.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9절)
이스라엘과 유다와 에돔의 연합군이 행군을 시작한 지 7일째 되면서 물이 떨어집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문제가 아니라 아주 뜻밖의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연합군이 이동한 길을 까라가 보면 그들이 도달한 곳은 ‘와디 엘 아시’라는 계곡 부근이고, 이곳은 언제나 물이 충분히 흘러드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도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물 걱정은 전혀 안 한 채 이 길을 택한 것이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이곳의 물이 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많은 군대와 말들이 적과 싸우기도 전에 목말라 죽게 될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주 심각하고 급한 상황인데 해결책은 전혀 안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기회입니다. ‘위기’란 ‘위험하지만 기회’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어려운 일은 인간이 노력하면 해결할 수도 있지만, 불가능한 일은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자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은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왕의 반응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먼저 입을 엽니다.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10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모압 원정이라는 큰일을 계획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 한 번 하지 않던 그가, 정작 어려움이 닥치자 하나님부터 원망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수준이 낮은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일은 자기가 다 저질러 놓고 그 일이 잘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판단하며 객관적으로 상황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먼저 하나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의 원인 제공은 자기가 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유다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절)
여호사밧은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라고 묻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갑작스런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분 앞에 먼저 엎드리며 주님의 뜻을 구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음성 앞에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위기의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중요한 말씀을 해주시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때 귀를 세우고 하나님께 여쭈며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선지자를 찾아, 여호람의 신하 한 사람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니, 어떻게 해서 엘리사가 지금 이 연합군과 같이 있습니까? 이게 기적입니다. 왜 그가 여기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이 닥칠 것을 미리 아시고, 엘리사에게 미리 말씀을 하셔서 그를 연합군과 동행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필요를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어떤 위기를 맞이해도 놀라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모르고 여기까지 왔어도, 하나님은 이미 해답을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이 연합 원정군 사이에 엘리사가 섞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처럼 하나님은 가까운 곳에 구원의 손길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며 기도할 때 그것이 보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손길이 우리의 어떤 문제보다 항상 더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여호사밧은 즉시 뭐라고 합니까?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12절)
엘리야와 엘리사의 명성은 이미 남 유다에까지 알려져서, 하나님의 사람인 여호사밧은 엘리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엘리사가 사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은 그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심지어 그가 거기에 함께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이웃 나라 왕인 여호사밧이 엘리사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런 사람이 함께 한 것을 기뻐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영적인 보물이 바로 앞에 있어도 그 가치를 모릅니다. 가치를 모르니까 무시하고 방치합니다. 그래서 큰 위기에 빠져도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가치를 모릅니다. 교회는 자기가 원해서 가거나 안 가거나 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이고,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연습하며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져 가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임이 목장인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여러분은 교회와 목장의 가치를 잘 알고 계십니까? 기도의 가치를 잘 알고 계십니까? 말씀 묵상의 가치을 알고 계십니까? 예배의 가치를 알고 계십니까?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열심히 해서 그로부터 큰 유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하지 않아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2. 곤경에 처한 연합군을 구한 엘리사
이제 여호사밧은 선두로 세 왕이 엘리사에게 나아갑니다(12). 하지만 엘리사는 세 왕을 보자, 먼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엄히 책망합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하니 이스라엘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니라” (13절)
악한 부모의 본을 받아 하나님을 거역하고 바알을 섬겼으니, 아쉬우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로 갈 것이지 왜 자기에게 오느냐는 것입니다. 여호람은 그 책망을 듣고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만 원망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여호람은 계속해서 모든 책임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이 불러 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병든 사람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합니다. 자신의 죄와 실수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은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다 자기가 날나서 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렘 29:11)
여호람의 말을 들은 엘리사의 마음이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당장 이 뻔뻔하고 무지한 여호람에게 등을 돌리고, 거기를 떠나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하나님의 사람 여호사밧을 보며 말합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14절)
연합군이 큰 위기에서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입은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왕 여호사밧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처럼 의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함께 산 예가 많습니다. 또 제대로 된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한다는 말씀도 많습니다.
우리 삶에도 여호람이 있고 여호사밧이 있습니다. 특히 사역을 하다 보면 그렇습니다. 여호람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집니다. 여호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 보기도 싫고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함께 해주기 때문에 계속 힘을 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역자이신 여러분, 여호람을 보기보다 여호사밧을 보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지치지 않고 계속 섬기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바로 그 여호사밧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에 앞서 거문고 연주자를 불러오라고 합니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15절)
이것은 무슨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엘리사가 하나님을 먼저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전에 먼저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찬양할 때 하나님의 신, 성령님께서 엘리사를 감동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1)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16).
2) 바람이나 비를 못 보더라도 골짜기에 물이 가득할 것이다(17).
3)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18).
중동 지역에서 물이 있으려면 비가 와야 하고, 비가 오려면 반드시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나 바람의 징후가 없어도 골짜기에 물이 가득할 것이니 걱정 말고 개천을 많이 파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말이 쉽지 큰 믿음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객관적인 증거가 전혀 안 보이더라도, 골짜기의 물이 가득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믿음으로 마른 땅 파는 수고를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 그래도 지금 목이 말라 기진맥진한 상태인 병사들을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그 응답을 주실 때 믿음과 순종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주십니다. 믿음과 순종의 그릇을 준비해서 나아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응답을 담아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응답을 못 받는 이유는, 그 그릇을 준비하지 않고 받기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내려주시는데도 그릇이 없어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처럼 마른 땅에 물이 가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18). 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19절)
하나님은 당장 마실 물이 없어 죽겠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자들에게 모압 정벌의 성공까지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엘리사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됩니다.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0절)
비가 올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 상황에서 아침 소제(희생제)를 드릴 때, 즉 아침 예배를 드릴 때 에돔 산지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와 그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 물은 그야 말로 생명수였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이처럼 예배 때 하나님의 축복의 생명수가 흘러듭니다. 순종하는 사람만이 예배를 통한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그렇게 많이 드려도 별 감격도 없고 혹시 감동을 받아도 변화되지 않습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며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수를 맛보게 해주십니다.
3. 절반의 승리
파놓은 도랑에 물리 가득하게 된 기적은 연합군에게 기적의 식수를 공급해주었지만, 모압에게는 결정적인 패배 요인을 제공했습니다. 모압은 일찌감치 연합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동원 가능한 모든 인원을 데려다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21). 그만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압군도 와디 엘 아시 골짜기의 물이 말라버린 것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쳐들어오는 연합군이 물 때문에 엄청나게 힘들어할 것을 예상하며 약간은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은 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치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22절)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멀리 보이는 연합군의 진에 핏물이 가득한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비가 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계절이기 때문에 이 계속에 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붉은 물을 피로 알고 성급한 결론을 내립니다.
“이르되 이는 피라 틀림없이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23절)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핏물이 아니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 웅덩이에 가득 찬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붉은 빛을 띤 것인데, 모압 군사들의 눈에는 피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합군이 서로 싸워 죽이고 몰살했다고 짐작하고 신이 나서 공격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양식과 물을 풍족히 먹고 마신 후 사기충천해 있던 연합군의 창칼이었습니다(24-25).
깜짝 놀란 모압군은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연합군의 총공세에 도주하고 맙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그때부터 모압 군사들은 수도인 길하레셋까지 정신없이 쫓겨 가며 필사의 항전을 벌입니다. 길하레셋은 당시 모압의 수도로서 사방이 깊고 좁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위치했기 때문에 군사작전상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승세를 굳힌 연합군의 진격 앞에 이 요새도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끝부분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집니다.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찬 군사 칠백 명을 거느리고 돌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가지 못하고,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26-27절)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에 수도인 길하레셋까지 몰려 포위당한 모압 왕 메사는, 사태가 절망적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연합군 중 가장 약해 보이는 에돔 진영을 택하여 돌파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합니다.
그러자 모압 왕은 아주 끔찍한 일을 행하고 맙니다. 자기 맏아들을 성문 위, 적과 자기 군대가 모두 보는 앞에서 죽여 희생 제물로 바쳐 버린 것입니다. 모압 왕은 자신들의 패배를 자신들의 신이 진노한 결과로 생각하고, 그 화를 달래기 위해 맏아들을 불에 태워 희생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끔찍한 우상 숭배 행위이며, 그야말로 광기 어린 마지막 발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석이 굉장히 어려운 구절인데, 모압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죽여서 자기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왕의 필사적인 행위를 보고 다 눈이 뒤집힌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자는 비장하고도 격렬한 분노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독기 오른 적의 기세에 연합군이 움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 물러갑니다. 그래서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합니다. 그냥 이 정도에서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만족하고 전쟁을 중단한 것입니다. 완전히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세를 가지고도, 적의 독기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후퇴를 해버린 것입니다.
연합군은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승리를 얻지 못하고 스스로 공격을 중단함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기사회생한 모압은 그 후 더욱 독기를 품고 일어나 두고두고 이스라엘에 화근이 됩니다.
항상 문제는 적이 강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불완전한 순종을 하는 데 있습니다. 끝까지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2-14)
하나님께서 분명한 약속을 주셨더라도, 믿음으로 끝까지 순종하지 못하면 주어진 은혜를 다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악의 세력은 궁지에 몰리면 갖은 발악을 다할 것입니다. 그 독한 기세에 놀려 우리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을 중간에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만하면 됐지”라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끝까지 마음을 놓지 말고,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저항과 반대가 아무리 거셀지라도, 결코 그 기세에 눌려 마지막 순간에 움찔 거리며 물러나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능력만 믿고 끝까지 순종하며 나아가 승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