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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1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34

엘리사의 마지막 예언 사역

(열왕기하 13 1~25)



1.   아람에게 패한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영웅 예후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11 왕이었던 여호아하스는, 17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성경의 평가는 아주 부정적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2)


그도 역시 이스라엘의 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갔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은 계속 우상 숭배에 젖어 있었고, 도덕적으로도 부패했습니다. 그러한 여호아하스를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은 무서운 이방 민족을 보내십니다.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아람입니다.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아람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3)


여기에 보면 분명히 ‘하사엘과 벤하닷이 와서 쳤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손에 ‘넘기셨다’고 하며 하나님이 주관하셨음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아람 하사엘은 3 전에 8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병상에 누운 자신의 벤하닷을 죽이고 왕이 야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에 보면 그는 벤하닷 2세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도 ‘벤하닷’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보면 특이합니다. 그는 벤하닷 3세입니다.


하사엘은 나름대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서, 짧은 시간 내에 아람의 기반을 재정비하고 당시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던 앗수르에 대항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대적할 만한 신흥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의 정세도 요즘 못지않습니다. 시리아가 있고, 역사상 최초의 초강대국이 앗시리아가 있고, 이스라엘과 유다도 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도 있습니다.


하사엘의 뒤를 이어 왕이 그의 아들 벤하닷 3세도 자기 아버지 하사엘 못지않게 굉장히 무서운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을 가혹하게 공격하는 적대 정책을 계속 펼쳤습니다.


아람의 하사엘과 벤하닷에게 계속해서 지독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군사력에서 한참 뒤지던 이스라엘은 그냥 당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여호아하스가 어떻게 합니까?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4)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악한 왕인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다니 정말 급하긴 급했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아람의 이런 “학대”와 같은 공격이 없었다면 결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사엘이나 아들 벤하닷 3 같이 지독하고 악한 이방 왕들을 이스라엘의 바로 옆에 두신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지금 삶에 어떤 어려움이 닥쳤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괴롭힙니까? 나를 학대한다고까지 느껴집니까?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히 여길 일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위에 임해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를 괴롭히는 세력이 있거나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내가 간절히 기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지금 오히려 나를 도와주고 계신 겁니다. 그것을 빨리 깨달을수록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그때 빨리 엎드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여건을 주셨는데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정말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입니다. 의외로 그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하시는 어려움인데도 기도하는 사람이 사실은 적습니다. ‘어떻게 되겠지’라고 하거나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찾지만, 기도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삶이 편안하고 모든 일이 풀리면 하나님을 섬길 텐데, 교회 일도 열심히 텐데’라고 보통 생각을 하는데,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급한 일이 터지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질 , 오히려 간절히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그럴 빨리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일입니다. 그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우리가 다급하게 하는 기도도 들어주십니다. 보십시오. 악한 여호아하스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니까 용서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4)라고 되어 있는데, 말은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여호아하스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곳곳에 이렇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최악의 왕이었던 아합도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니까 마음을 누그러뜨리셨습니다. 나중에 유다의 최악의 왕이었던 므낫세도 회개하니까 바로 그를 받아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가끔 이런 하나님의 용서가 별로 마음에 때가 있습니다. 이왕 매를 드셨으면 철저히 끝까지 무섭게 때리시고 공의를 실행하셔서 악인을 벌하셔야 다시는 사람들이 까불지 않고 함부로 굴지 않을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조금만 회개해도 마음이 아주 약해지시면서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뿐 아니라, 아무리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라도, 전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아무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때도 화가 납니다. 어떨 때는 때려서라도 마음을 돌이키시지 저런 사람들을 그냥 두시나 하는 마음도 듭니다.


요즘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데, 얼마나 악합니까? 실수도 아니고 일부러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를 아무 데서나 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저런 사람들을 그냥 두실까? 의문이 듭니다. 갱들, 살인청부업자들, 조폭들, 뒤로는 돈을 챙기면서 앞에서는 아닌 척하는 추악한 비리 정치인들 , 살인범들,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서 팔아넘기는 악한 자들, 마약 밀매 조직 등등, 얼마나 악합니까?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저런 사람들을 그냥 두십니까?”라고 따지며 기도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너는 내가 죄인들을 벌하기를 원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주님. 그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같았습니다. ‘그럼 내가 너를 벌해야 하겠느냐? ‘아, 나도 죄인이구나. 죄를 벌하셨으면 나는 벌써 번을 죽었어야 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추악한 범죄자들의 죄나 내가 매일 짓는 ‘작은’ 죄나 똑같이 죄입니다. 물론 ‘더 죄’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도 빌라도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런 악인들이 활개치고 다니는지 답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만 보니까 이해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심판을 받을지 몰라서 불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는 있습니다. 죄인을 없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심판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때에 그렇게 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겁니다.


자신이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게 되면 눈물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맛보기를 원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함도 아니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기쁜 소식을 저분도 알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용서할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전하고 싶어집니다.


여호아하스의 회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은, 그의 아버지 예후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 왕가에 대한 심판을 충실히 수행한 예후에게 4대에 걸쳐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10:30). 그래서 예후의 아들 대에서부터 타락하고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여호아하스는 용서하고 구해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인간에게 약속이라도, ‘너는 악하니까 나는 약속을 지켜도 돼’라고 하시고, 번도 당신의 약속을 깨신 적이 없습니다. 여호아하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약속은 반드시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호아하스의 간구를 들으셔서 이스라엘을 구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5)


여기 보시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원자”가 누구인지 여기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구원자가 앗수르 아닷니라리 3세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연대가 같습니다. 그는 실제로 BC 803년에 다메섹(다마스쿠스) 공격하여 아람의 군사력을 약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아람의 압제에서 구원해준 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은 앗수르의 침공 앞에 맥을 추었고, 덕에 여호아하스는 숨통이 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새로운 강대국 앗수르의 등장을 예견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마치 여우나 늑대를 몰아내기 위해 무서운 호랑이를 데려온 것과 같습니다. 바로 앗수르가 수십 후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이때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쨌든 순간만큼은 여호아하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앗수르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아람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나아지니까 여호아하스는 금방 본래의 악한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그와 백성들은 다시 타락하여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안에서 따라 행하며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6)


여로보암은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껴집니다. 왕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처럼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은 너무도 빨리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립니다. 그러니 그가 그때는 간절히 기도했지만, 정말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고 회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그래도 자비를 베풀어주셨는데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함부로 잊어버리고 배신하는 사람에게는 혹독한 심판이 바로 찾아오게 됩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던 보호의 손을 다시 거두셨고, 그러자 즉시 아람의 군대가 다시 무섭게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옵니다.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대와 보병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7)


파괴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했다고 묘사할 정도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초토화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때 100만에 가까운 군사를 자랑하던 이스라엘 군대였는데, 전멸되어서 겨우 마병이 50, 병거는 10, 그리고 보명이 외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정도 군대로 어떻게 나라를 지킵니까? 말이 되는 숫자입니다. 그것도 아람 왕이 조롱하면서 마지막 자비로 남겨준 것입니다.


여호아하스는 회개하고 돌이킨 뒤에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때부터 더욱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만해지니까 옛날로 금방 다시 돌아가서 죄를 지으며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알면서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여서 나아가다가 무서운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2.   엘리사의 마지막을 지킨 요아스


이제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12 왕으로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됩니다(10). 그런데 유다의 요아스와 동명이인입니다. 둘을 혼동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요아스는 유다 요아스의 통치 말년(40 37)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유다의 요아스는 끝에 좋아지긴 했지만, 여호야다의 도움 아래 여러 좋은 일들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요아스는 자기 아버지 여호아하스처럼 처음부터 우상 숭배의 길을 갑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운데 행하였더라” (11)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요아스는 신기하게도 선지자 엘리사에게만큼은 아주 각별했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유 때문에 그는 아람에게 빼앗겼던 땅을 일부나마 회복하는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80세가 되어 죽어가는 선지자 엘리사의 마지막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불꽃같은 선지자로서 번씩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던 엘리사는,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사자와 같은 용기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며 여러 기적들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로 가득한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심지어 왕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엘리사가 이제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람의 무서운 압박에 눌려 국력이 많이 약해진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지금 순간은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요아스는 모든 국정 업무를 뒤로 하고서, 호위대를 이끌고 엘리사에게 달려옵니다. 엘리사에게 와서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요아스의 얼굴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의 눈물은 엘리사에 대한 요아스의 각별한 애정인 동시에,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의 장래를 걱정하며 흘리는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14)


장차 나라에 어떤 선지자가 나와서 왕인 자기에게 엘리사처럼 바른 조언을 해주고 나라를 제대로 이끌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겠는가, 하는 마음이 겁니다. 자기 아버지 여호아하스의 어리석음으로 형편없이 축소되어 버린 이스라엘 군대의 전력으로는 무서운 아람 군대와 싸울 수가 없는데, 그것을 생각하니 요아스는 더욱 기가 막히고 답답하여 눈물을 흘린 겁니다. 특히 눈이 아니라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는 것은 얼굴 전체에 눈물이 가득할 정도로 펑펑 울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말이 놀랍게도 오래 엘리사가 엘리야의 마지막 하늘로 올라갈 때의 장면을 목격하며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왕하 2:12)


엘리사는 요아스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적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병거와 마병”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강한 힘과 영적 능력을 말합니다. 그만큼 엘리사는 이스라엘에서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능력 있는 어른을 잃게 됨으로써 자신의 조국에 찾아올 위기에 대해 염려하는 요아스의 처절한 심정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엘리사는 병문안을 하러 요아스의 눈물을 보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비인 여호아하스의 죄로 아람 군대에 의해 전멸되어 버린 이스라엘의 군대를 생각하니 엘리사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나라를 위해 해줄 있는 일을 합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소서 하는지라 활과 화살들을 그에게 가져오매,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하매 그가 손으로 잡으니 엘리사가 자기 손을 왕의 위에 얹고,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15-17)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창을 열고 동쪽을 향해 화살을 쏘라고 했습니다. 동쪽으로 쏘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동쪽에 위치한 아람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전포고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를 설명해준 다음에 엘리사는 다른 이상한 명령을 합니다.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집으매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18-19)


엘리사가 화살을 들고 땅을 치라는 명령을 하자 요아스는 땅을 치는데, 3번만 치고 내려놓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엘리사는 요아스가 땅을 번만 쳤다고 해서 이토록 심하게 화를 것입니까? 그것은 아람을 쳐서 이길 것에 대한 상징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람의 침략 앞에 패하여 두려워하던 이스라엘과 요아스 왕에게 승리의 약속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요아스가 이것을 몰라서 번만 쳤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17절에서 엘리사가 이미 그에게 화살을 가리키며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아스가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것”이라고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아스도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화살들을 집고 땅을 치라고 했다면, 요아스는 어떤 마음이 들어야 했습니까? 화살이 부러질 정도가 때까지 계속 땅을 쳤어야 마땅합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누구나 있는 일입니다. 정말로 승리를 원했다면 치고 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아스는 번만 땅을 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번만 쳤는지 정확히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3 완전한 숫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건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평소에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경건함을 따지지도 않는 사람인데, 그가 이때 하나님의 완전한 수를 생각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을 했었더라도 그것은 그냥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만일 요아스가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확신했다면, 엘리사가 그만하라고 때까지 계속 땅을 쳤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사람들이 완전한 수라고 생각하던 3번만 치고 그쳤습니다.


여러분, 요아스는 분명히 엘리사의 말에 순종해서 땅을 쳤습니다. 아닙니다. 분명히 쳤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요아스를 통해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순종을 하기는 하지만, 생각대로, 방식대로, 계산대로 순종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편리할 때에만 순종하는 문제입니다. 순종하긴 하는데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관습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제한해 버립니다.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22:37)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정말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마음과 목숨과 뜻은커녕, 최대한 적게 드리는 방향으로 계산하며 사랑을 합니다. 최소한으로 합니다.


둘째 계명이 “네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22:39)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할 있는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도 적당히 있을 만큼만, 최소한만 사랑을 실천합니다.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번을 용서해줘야 합니까? 일곱 용서하면 됩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끝없이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럼 정말 그렇게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흔 , 아니 일곱 번도 아니고, 번만 내게 잘못하면 찍어버리고 쳐다보지도 않거나 일부러 멀리 합니다. 아니면 말씀을 알기 때문에 겉으로는 웃으며 대하지만 속으로는 용서를 못합니다.


생각대로, 방식대로, 계산대로, 편리대로 하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여러분, 공부에서 말을 기억하십니까? “순종하지 않으면 잡종 된다. 그런데 정말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이상해지고 아주 잡스럽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약수가 있어도 작은 병을 하나만 들고 가면 정도 밖에 담아 수가 없습니다. 축복은 믿음의 그릇 만큼 담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엄청나게 주려고 하시는데 나는 요만큼만 하겠다고 하니까 정도 밖에 누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겨우 정도인가?’라고 오해하게 되는 겁니다.


엘리사는 바로 때문에 요아스에게 화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복이 엄청난데, 겨우 치고 마니까 화를 것입니다.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으니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25)


실제로 나중에 요아스는 자기 믿음의 크기만큼 아람을 상대로 3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토록 무섭게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아람의 벤하닷 3세는 그 3번의 패배로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요단 동편의 성읍들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아버지 여호아하스 때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던 이스라엘 군대를 생각하면 이것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말대로 아람은 세력이 약해졌을 뿐이지 뿌리가 뽑히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골칫거리가 됩니다.

 

어쨌든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군사적 업적은 이것뿐이 아니었습니다. 12절을 보면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그의 업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뒤의 14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유다의 아마샤는 이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여 교만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도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아마샤에게 함부로 경거망동하면 큰 코를 다칠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결코 허풍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샤가 유다 군대를 데리고 쳐들어오니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던 요아스 군대가 유다의 아마샤 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맙니다. 요아스 군대는 유다의 아마샤 왕까지 포로로 사로잡고 예루살렘으로 밀고 들어가 유다 왕궁을 휩쓸고 성전의 엄청난 보물들을 전리품으로 취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강대함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요아스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엘리사의 나라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 패역한 나라였지만 엘리사는 평생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왕들과 지도자들을 무섭게 질책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 이상으로 늘 눈물로 나라를 위해 기도했고 나라를 축복했습니다.

 

우리도 부족함이 많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한국이 소위 ‘헬조선’이라고 해서 살기 힘든 나라라는, 그런 부정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친구들에게도 유학을 나갔으면 돌아오지 말라고 합니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도 돕니다. 온갖 비리도 많습니다. 바로 엊그제 19세 정비공이 지하철에서 말도 안 되는 사고로 죽었습니다. 선진국으로 좀 갈만한 것 같은데 이상한 사건들이 많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넘쳐납니다. 물론 잘못된 것은 당연히 비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비판과 동시에 우리 크리스천들이 할 일은 눈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사처럼 우상 숭배에 푹 빠져 있던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가졌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너무 안타깝고 밉고 분노가 일어나지만, 사랑하는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 엘리사의 마음입니다. 엘리사 때문에 그 나라가 그래도 이 정도로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조국을 위해서, 또 이 미국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매순간 철저히 100% 순종하면서,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 임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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