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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2일 수요예배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5 ✦
다윗의 분노: 억울할 때 주님께 나아가라
(시편 109편 1~15절)
1. 머리끝까지 화가 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모세가 하나님께 이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반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 즉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정말 많이 받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께 그토록 사랑을 받은 다윗에게는 분노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우리보다 훨씬 더 분노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을 들었다면, 과연 그는 그 분노를 어떻게 다스린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긴 세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죽이려 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임박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무엘 선지자를 대신하여 함부로 제사를 주관했다가 그 직후 도착한 사무엘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삼상 13:13-14)
그 후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그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기름지고 좋은 짐승들은 남기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들은 모두 진멸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다시 불순종한 사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삼상 15:26-28)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이미 다른 사람을 왕으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사울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왕으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왕위를 빼앗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울의 관심은 온통 누가 자기를 대신하여 왕이 될 것인가에 쏠렸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국민적 영웅으로 등장하여 백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다윗은 신속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이 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 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삼상 18:7-9, 새번역)
그 후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승리를 거두는 다윗을 두려워하여 죽이려고 한 사울 때문에 다윗은 무려 13년 이상 쫓기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광야로 도망 다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되자 결국 적국인 블레셋으로 망명까지 하게 됩니다.
이제는 블레셋에 들어와 안전하게 되었으니까 다윗의 마음이 아주 평안했겠습니까? 이제는 먹을 것이 풍족하니까 더 이상 걱정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국에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의 상황을 보며, 사울과 그 장군들을 향한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붙잡히지 않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분노에도 붙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언제든지 내 마음을 흔드는 상황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만일 다윗이 분노에 사로잡혔다면 13년이나 도망 다닐 수 있었겠습니까? 분노에 붙들렸다면 그는 사울의 군대와 맞서 싸워 결판을 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분노에 사로잡히는 대신 참으로 놀라운 결단을 합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인 사울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놀라운 점입니다. 1~2년도 아니고 13년이나 도망 다녔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종료시키고 싶었을 텐데도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상황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분노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분노하게 하는 그 사람마저 들어 쓰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보통 사람과는 너무 다르고 훌륭한 사람이라 분노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그 어떤 사람보다 더욱 엄청난 분노를 가졌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가지고 다시 보십시오.
“5 그들은 선을 오히려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습니다. 6 그러므로 악인을 시켜, 그와 맞서게 하십시오. 고소인이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고발하게 하십시오. 7 그가 재판을 받을 때에, 유죄 판결을 받게 하십시오. 그가 하는 기도는 죄가 되게 하십시오. 8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9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 10 그 자식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마저 쫓겨나서 밥을 빌어먹게 하십시오.” (5-10절, 새번역)
이 얼마나 끔찍한 내용입니까? 얼마나 화가 나는지, 원수의 자식들은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엄청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 자녀가 고아가 되고 아내가 과부가 된다는 것은 다윗이 저주하는 그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보면 그가 적들을 얼마나 노골적으로 저주하는지 모릅니다.
“11 빚쟁이가 그 재산을 모두 가져가고,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재산을 모두 약탈하게 하십시오. 12 그에게 사랑을 베풀 사람이 없게 하시고, 그 고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자도 없게 하십시오. 13 자손도 끊어지고, 후대에 이르러, 그들의 이름까지도 지워지게 하십시오. 14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주님이 기억하시고, 그의 어머니가 지은 죄도 지워지지 않게 하십시오. 15 그들의 죄가 늘 주님에게 거슬리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잊게 하여 주십시오.” (11-15절, 새번역)
어떻게 성경에 이런 내용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읽기만 해도 민망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적나라한 내용이라도 버리지 않고 남겨 놓았습니다. 후대의 우리가 이 시를 읽을 줄 알면서도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전달해줍니다.
다윗의 이 시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를 격동시킨 사람에게 분을 쏟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 속에서 들끓고 있는 분노를 전부 다 쏟아놓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다윗의 시인 109편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사실 이 시를 읽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합니까? 내 입을 열어 직접 저주하지 않아도 마음껏 분노를 쏟아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대적을 욕하며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분노를 이런 방식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도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이것입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하나님 앞에서 전부 다 솔직하게 쏟아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죽여주십시오. 저 사람의 다리 좀 확 부러뜨려 주십시오. 저 사람의 아들딸이 빌어먹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다윗의 마지막 고백을 잘 보아야 합니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30-31절)
다윗은 아무에게나 이런 저주를 퍼부으며 욕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는 ‘궁핍한 자’이고 약한 자입니다. 강한 자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궁핍하고 약한 자인 자신의 오른쪽에 하나님이 서 계시며 지켜주시기 때문에 감사하며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정을 다 쏟아놓고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윗처럼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수없이 겹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분노를 쏟아놓는 것이야말로 가장 건강한 분노 처리 방식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원수 갚는 일을 내게 맡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분노를 건강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쌓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또한 사울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제거하면 언젠가 자기와 자기 후손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사울이 아주 형편없는 악인이었지만, 그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아 세워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 그 사람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한다는 놀라운 분별력과 절제를 발휘했습니다.
2. 무엇을 먼저 볼 것인가
우리도 화가 날 때 이렇게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립니까? 솔직히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다윗과 우리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쏟아내지 못합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합니까? 사람에게 합니다.
우리는 나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직접 욕을 하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욕을 쏟아놓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우리는 다 쏟아버리지 못한 분노를 품고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복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오히려 분노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거나, 누군가 내 스마트폰을 훔쳤다면 1차 피해입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내가 분노에 사로잡히면 2차, 3차 피해가 발생합니다. 사기를 당해 돈을 잃거나 폰을 잃어버린 상황은 물질적인 피해로 그냥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한 분노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거기에 묶여 버리게 되면 그 피해가 2차, 3차 피해로 더 넓게 번져 갑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나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내 가족과 자녀에게까지 그 영향이 가게 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2차, 3차 피해는 늘 1차 피해보다 큽니다. 그래서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분노를 신속히 처리했던 다윗에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어느 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삼하 1장). 뿐만 아니라 사울의 아들이지만 서로 깊이 사랑했던 요나단도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아말렉 청년인데, 그는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챙겨 와서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늘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큰 상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왕을 감히 살해한 자라고 하면서 그를 죽이고 통곡을 하며 조가까지 지어서 부릅니다.
요즘 정치인들이라면 그 장면을 보면서 모두 정치적인 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의 모습이 그저 정치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은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다윗에게는 그런 식으로 쇼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사울이 죽고 게다가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인 요나단까지 죽었다면 다윗으로선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통곡을 하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다윗은 이후 유다로 돌아와서 유다의 왕이 됩니다. 그토록 자기를 죽이려고 지독하게 쫓아다니던 사울이 죽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다윗이 블레셋에서 망명생활을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사울의 군대 사령관인 아브넬이 나머지 열한 지파를 모아서 왕국을 세우고 사울의 다른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7년간 두 나라로 나뉘어 공존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넬이 제 발로 다윗을 찾아와서 나머지 열한 지파도 바치겠다고 하며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합니다. 다윗은 무력으로 통일을 시도하지 않았고, 서두르지 않으며 기다렸습니다. 다윗은 분노하지 않고 상황이 반전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브넬이 자신이 세운 이스보셋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으로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왕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겁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다윗의 경호대장 격인 요압이 다윗과 조약을 맺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아브넬을 쫓아가서 암살한 것입니다. 과거에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한을 품고 있다 아브넬을 살해한 것입니다. 다윗의 심복이라는 사람이 평화적인 이스라엘 통일 직전에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갑자기 몰아닥친 정치적, 국가적 위기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압에게 분노하고 책임을 물으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이 그때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이 위기를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었을 때와 같이 아브넬의 죽음을 애곡하며 눈물을 쏟고 통곡하면서 아브넬을 위한 조시도 짓습니다(삼하 3:33-34).
그 상황에서는 어떤 왕이었더라도 일을 그르친 요압을 책망하고 징계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물러나게 하거나 살인죄를 물어 사형을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일을 그르친 요압이 아니라 죽음을 맞은 아브넬에 집중합니다.
다윗은 광야를 그냥 떠돌아다녔던 게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의 불같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사람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쉬운 해결책은 요압을 죽여 버리고 성난 민심을 수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진심 어린 애곡으로 백성들의 분노의 불길을 가라앉혔습니다.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선택과 결단은 오랜 훈련과 믿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재난과 위기에 훈련된 사람은 이렇듯 차분하게 행동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피해 광야를 떠돌아다니며 받은 훈련은 바로 이와 같은 분노 처리 훈련이었던 것입니다.
주차해놓은 내 차가 긁힌 것을 발견하면 어떻습니까? 화가 납니다. 범인을 반드시 찾아 그 책임을 따지고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런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이미 벌어진 1차적인 상황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2차적인 피해를 안겨주는 분노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광야로 몰고 가셔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시키신 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왔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셨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시는 왕이라는 이유로 그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후에 다윗은 반역을 일으킨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게 됩니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다급하게 기드론 시냇가를 건너는데 또 한 번 충격적인 일을 겪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을 따라와서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이때도 다윗은 분노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가 분노해서 시므이를 죽여 버리자고 하자 다윗이 오히려 말립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0-11)
다윗은 이때도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아비새가 화가 나서 당장에 죽이겠다고 분노할 때 다윗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사건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의 저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나중에 압살롬의 죽음으로 반역이 실패로 끝나자 그토록 악랄한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가 벌을 두려워하며 왕궁으로 귀환하는 다윗을 찾아와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이때도 아비새가 분노하며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저주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삼하 19:21). 그러나 다윗은 분노에게 곁을 내주지 않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은 들어라. 나의 일에 왜 너희가 나서서,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내가 오늘에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날에,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처형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삼하 19:22, 새번역)
급박한 처지에 놓였던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를 살려두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놀랍게도 시므이를 살려주면서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반전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위대하고 놀라운 인격의 소유자였던 다윗이 전혀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다윗은 죽음을 앞둔 어느 날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는데,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요압을 용서하지 말 것과, 압살롬에 쫓겨 도망갈 때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를 살려두지 말라고 합니다(왕상 2장).
다윗은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지만 죄악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솔로몬을 위태롭게 할 사람으로 요압과 시므이를 꼽은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따라 이 두 사람을 처단합니다.
사람은 온전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윗조차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죄를 용서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온전한 용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지은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용서 받아야 합니다.
잘못했을 때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는 사는 날까지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분노하게 하지 말고 모두와 화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분노에 사로잡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분노하게 했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 내 안의 솔직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십시오. 그럴 때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