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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6일 수요예배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1 ✦
성막: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
(출애굽기 25장 1~9절)
[성막에 대한 새 말씀 시리즈를 시작하며]
코로나19로 인한 교회 현장 예배의 중단이 전 세계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작년 3월을 생각해보시면, 저도 그렇고 우리가 다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때는 코로나가 뭔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조금만 닿아도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손 세정제를 아무 데서도 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장지가 다 없어지는 이상한(?) 현상도 벌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실시간으로 온라인 비대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 수많은 성도들이 일종의 영적인 문화 충격에 빠지면서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되나? 예배를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건가?’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집에서 작은 폰으로 예배하면서 ‘예배를 이렇게 해도 되나?’ 하고 고민해보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사태의 갈등과 충격 가운데 이렇게 해도 되나 하는 고민을 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건설적으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무엇이 참되고 바른 예배인가? 어떻게 예배하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인가? 예배를 정말 예배 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배당에 와서 하는 예배만 예배이고, 집에서 컴퓨터나 폰으로 하면 예배가 아닌가?’ 이런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 동안 예배당에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을 예배라고 여기던 생각이 무너지면서 ‘그러면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것이 어떻게 보면 고난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고 느껴집니다.
이제 미국에서 코로나 사태가 마무리되고 점점 사회가 오픈하고 있는 이 시점에, 어제는 캘리포니아에서 주지사가 접종 완료한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뉴욕 주도 1차 이상 접종 받은 사람이 70%가 넘어서 오늘부터는 규제를 다 풀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반드시 점검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했고, 교회당에서 예배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접종을 받고 나와서 예배해도 되는 시점인데, 나오기가 꺼려진다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나에게 혹시라도 위험하지 않을까?’ 물론 기저질환이 심하거나 연로하신 어르신들이나 접종 받지 않은 어린아이가 있는 가정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괜찮은 사람도 괜히 두려워하면서 교회에 나가 예배하기가 꺼려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그로서리도 가고 사야 할 것도 사기 위해 가지 않습니까? 다른 데는 다 가도 괜찮은데 교회에만 못 가겠다면 이상한 게 아닙니까?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게으름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하는 게 굳어져서 가만히 집에서 예배하는 게 쉽고 편한 겁니다. 일부러 차를 몰고 몇 십 분 운전해 와서 앉아 있다가 한 시간 정도 예배드리고 끝나면 또 집에 가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겁니다. 가만히 집에서 하면 편하고 시간도 절약되니까 영적 게으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편리 위주가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나는 어떤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작년 말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제가 존경하는 유진소 목사님이 <성막에서 예배를 배우다>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예배에 대해 점검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또 요즘 큐티가 마침 출애굽기 성막에 대한 부분인데, 저도 그냥 읽으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함께 살펴보며 그 의미를 잘 깨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기 위해 친히 디자인하시고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을 통해 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진 한가운데 세우셨던 성막이야말로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예배에 대한 고민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보이는 텐트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한복판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의 모든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들어지고 준비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막을 보면 예배를 떠올리게 되고, 예배는 이런 것이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성막은 예배의 가장 심각한 위협 또한 될 수 있습니다. 보이는 그것에 참된 예배가 갇혀 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뾰족한 첨탑과 그 위에 십자가가 있어야 교회라고 생각하는 틀 안에 정말 중요한 교회의 생명력인 공동체가 갇혀 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또한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아야만 기도라고 생각하는 고정 관념에 진짜 기도의 본질이 갇혀 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결코 어떤 건물로 디자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백성에게 성막을 통해 허락하신 감동은 어떤 물건이나 기술에 대한 감동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감동이고 거룩함에 대한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주신 메시지는 건물이나 기구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배의 본질에 있습니다.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성막의 전체적인 디자인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세우는 과정들이 자세히 나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바로 예배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단지 건물을 세우는 내용이라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예배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성막의 핵심은 예배이며 또한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이스라엘 가운데 두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그 성막을 통해 말씀하시는 예배의 본질을 이번 시리즈를 통해 함께 찾으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1. 성전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많은 교회들 특히 한국 교회들이 교회당 건축을 할 때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그곳을 하나님이 거하실 하나님의 집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니까 우리가 사는 집보다 더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기 집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죄송한 줄 알고 헌금을 힘껏 해야 하며, 교회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역시 가장 좋은 것으로 해야 한다고 잘못된 강요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혼동이 생기고 시험에 들고 화가 나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 꼭 잘못된 표현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곳은 모두 성전이니까 교회 건물도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할 때,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이나 열왕기에 나오는 솔로몬 성전, 또는 포로귀환시대의 스룹바벨 성전이나 그것을 개축한 헤롯 성전과 같은 ‘성전’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성전과 교회 건물을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성막이나 성전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교회에 적용하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먼저, 성전은 결코 하나님이 사시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곳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전을 특별하고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장소에만 거룩함이 있고, 거기에 가야만 기도 응답이 되고, 거기에서만 예배가 되는 것이고, 그곳에 인간의 각종 치장이 붙으면서 오히려 성전이 우상화가 됩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으니까 자기들은 괜찮다고 끝까지 주장하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다 망하고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안식월 때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가서 보니까 제일 안타까웠던 것이 성경에서 의미 있는 곳들마다 교회를 세워놓았는데,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교회도 있고, 또 골고다 언덕이라고 추정되는 곳에 세운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장소에다 아주 화려하게 기념 교회를 지어 놓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데 들어가 보면 이건 무슨 성황당이나 절간과 비슷합니다. 이 사진들을 보십시오.
성전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성전 우상화’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할 때 이사야 56장 7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사 56:7, 새번역)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하는 시편 69편 9절 말씀을 기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성전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전은 중요합니다. 그곳을 향한 열심이 주님을 삼켜 버릴 만큼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처음 성전을 세우고 봉헌할 때 이미 확실하게 밝혔습니다(왕상 8:27-30). 솔로몬도 성전을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와서 기도하면 들으시는 기도의 집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다윗도 자기는 좋은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초라한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초라한 곳에 계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궤가 그렇다고 했고, 그래서 성전을 짓겠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을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라고 되어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8-9절)
이 말씀에 성막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떤 물리적인 거하심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고, 형상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하시기 위한 어떤 공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성막이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아주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스케일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성막은 겨우 가로세로 10×30규빗, 즉 5×15미터(약 22평 = 800 sq ft) 정도의 천막인데, 아무리 순금으로 치장해서 황금의 집이라고 불린다 해도, 애굽의 가장 작은 왕의 무덤의 경비실만도 못한 수준인 사이즈는 너무나도 실망스럽습니다.
다음으로, 성막이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백성이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을 거두어 그것으로 백성의 천막 한가운데 가장 호화로운 천막을 세우는 것은 못된 왕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고대 근동의 많은 독재자들이나 잡신들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비록 표현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를 지으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거하실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 중요한 영적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막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2. 나의 삶 중심에 성막을 세우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8절)
이 말씀에서 성막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 삶 가운데 계신다
성막은 어떤 저 높은 신비한 산 위나 바다 한가운데나 땅 속 깊은 곳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그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하신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레바논의 백향목이나 다른 먼 나라에서 수입한 건축 자재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아서 그들의 거처와 같은 천막의 모양으로 지어졌습니다.
종종 하나님의 공동체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떤 산 위나 광야 한복판과 같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곳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집단으로 함께 촌을 만들어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이단입니다. 그렇게 따로 떨어진 곳에 신앙촌을 만든다고 거룩함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훈련을 위해 별도의 장소에 가서 잠시 머물며 훈련받을 수는 있고 건강한 공동체들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한복판이고, 그 삶 전체가 거룩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나쁜 태도는 삶의 여러 방식들을 만들고 때에 따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의 모습과 일터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다 달라서, 각각의 상황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렇게 살면서도 전혀 갈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갈등조차 안 한다는 것은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이고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 그리고 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바로 ‘너의 모든 삶 가운데 내가 함께 있겠다.’라고 하시는 말씀이고, 바로 그 모든 곳이 하나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이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어울려 노는 오락의 현장에서도 똑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막의 메시지입니다.
2)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계신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분이 언제나 우리 삶의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주변에 계시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성막의 위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한복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진 배치를 보십시오.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바로 성막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진정한 공동체는 이렇게 하나님이 삶의 한복판에 계셔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그 삶의 중심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시라면, 거기에는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존재의 이유와 목적입니다.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지, 그 목적과 이유가 있을 때 그것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삶의 지침 또는 원칙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해야 하는 것들과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것을 정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을 중심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힘의 공급입니다.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 그것을 이길 힘이 어디서 옵니까? 그 힘이 오는 곳이 바로 중심입니다. 의욕이 나타나며,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바로 중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 당신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목적과 이유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기를 원하십니다. 왜 살아갑니까? 하나님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삽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원칙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에너지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위로와 격려, 의욕, 기쁨, 감사, 도전, 결단과 같은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3.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모든 곳이 성막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중심에 거하시는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이것에 대해 성막은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이 되십니다.
성막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기독(그리스도)론은 성막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교회론은 성막을 교회의 모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막에는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제사, 곧 예배입니다. 성막은 예배를 위해 디자인되고 만들어진 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과 함께 제사장의 복장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디자인이며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성막은 예배의 장소인 동시에 예배 자체를 뜻합니다. 정말 영적인 예배란 무엇인가, 어떻게 드리는 것이 바른 예배인가에 관한 영적 원리가 성막에 다 들어 있습니다. 즉, 성막의 구조 하나하나가 예배의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올바른 예배, 참된 예배에 대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안 드리는 것보다 잘못 드리는 것이 신앙에 더 심각한 피해를 가져옵니다. 성경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신앙을 망치는 가장 큰 위협이 우상 숭배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 역시 예배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대상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배는 너무 많이 드립니다. 그러나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라고 하면서 자신의 온갖 욕심과 아집과 과시와 야망을 가지고, 인간의 더러운 교만과 욕심을 거룩함으로 포장해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말라기의 시대에 하나님이 많은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10)
잘못된 예배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며, 심각한 영적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막은 예배일 뿐 아니라 예배자 자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배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중심이라면, 예배와 예배자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막은 예배자인 우리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비하게도 성막의 구조는 우리 인간의 구조와 너무나 똑같습니다. 성막이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도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라는 2개로 보기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막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막은 예배인 동시에 곧 예배자 자체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참된 예배자, 진짜 예배자로 설 수 있는지 이야기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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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성소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네 가운데 있으면서 네 삶의 중심이 되고 싶다. 너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라. 그리고 함께 온전한 예배 공동체를 이루어라.’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이 거할 처소가 될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참된 예배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