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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7일 수요예배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4 ✦
등잔대: 영혼을 밝히는 은혜의 빛
(출애굽기 37장 17~24절)
[들어가는 말]
요즘 세계에서 가장 빨리 높은 접종률을 기록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국기에 그려진 국가의 상징은 삼각형 두 개를 반대로 겹쳐 놓은 ‘다비드(다윗)의 별’입니다.
이것의 출처와 유래가 무엇인지, 또 왜 이것이 이스라엘의 상징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을 ‘마겐 다비드’(다윗의 방패)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다윗 왕가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봅니다.
‘다비드의 별’이 유대인의 상징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897년 1차 시온주의 운동 때였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해진 것은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해 홀로코스트라고 하는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유대인들의 가슴에 이 노란별을 붙이면서입니다. 그래서인지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되면서 국기에 이 별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다비드의 별’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문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과 유대교의 진짜 상징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유대인들의 모임이나 조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상징인데, 바로 ‘메노라’라고 하는 등잔대입니다.
이것은 ‘다비드의 별’과는 달리 성경적 근거와 영적 의미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소에 있는 세 가지 기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백성의 상징은 바로 이 ‘메노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메노라’ 즉 등잔대를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특히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자로서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비밀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예배는 빛으로 인한 밝음의 역사다
먼저 기억할 사실이 있는데, ‘등잔대는 무엇으로 만들었든지 그리고 어디에 있든지 등잔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금으로 만들어지고, 특별한 꽃 형상을 조각해 넣고, 일곱 개의 가지로 되어 있는 등 여러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곱 개의 등잔을 올려놓는 등잔대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메노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빛’이라는 뜻의 ‘오르’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등잔대는 ‘빛’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등잔대가 주는 메시지는 ‘예배를 통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역사는 빛으로 인한 밝음의 역사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빛으로 나오는 것이고, 예배를 통해 모든 심령이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가 어둡고 침침하며 예배자들이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밝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든 심령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예배는 빛의 역사이기 때문에 밝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통곡하며 회개하는 예배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회개의 예배라도 예배는 통곡과 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그 예배 가운데 어두움이 물러가고 밝게 빛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눈물로 통곡하고 회개하며 예배를 드리게 되면 죄가 물러나고 주님의 의를 덧입게 되기 때문에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여 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배를 통해 밝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밝음이 우리 마음과 삶 속에 어떤 역사를 일으킵니까? 등잔대는 성소의 등잔대이니까 그 밝음은 하나님의 빛이며, 오직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심령을 밝게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인간에게 여러 번 빛이 비추어 밝아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밝음의 대부분이 결국에는 인간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계몽주의나 발달된 현대 문명을 보십시오. 현대 문명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밝아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인간을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의 밝음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눈이 밝아져 스스로 벌거벗은 것을 보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린 후 두려움에 숨어야 했던 그 역사의 반복입니다. 밝아져서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두려움에 떨게 되고 이기심과 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이 지성을 무조건 거부하는 반지성주의는 아닙니다. 다만 그 밝음은 인간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참된 밝음이라는 것입니다.
2. 구약에 약속된 메노라(등잔대)의 은혜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밝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옵니까?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저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어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이 그러하며, 등잔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19-20절)
등잔대는 순금으로 살구꽃 형상의 등잔 받침을 조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하필 살구꽃일까요? 그냥 예뻐서 그런 것은 아니고, 거기에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살구꽃은 사실 우리말 번역이고, 정확히는 영어 번역 그대로 ‘아몬드 꽃’입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말에는 ‘아몬드’가 없었기 때문에 살구꽃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몬드입니까? 아몬드에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어서입니까? 히브리 대학의 한 유대인 교수는 아몬드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에 생명과 능력을 상징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아몬드라는 히브리어 단어에 있습니다. 아몬드는 히브리어로 ‘샤케드’인데, 이 ‘샤케드’라는 단어는 ‘경계하다, 밤샘하다, 방심하지 않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단어를 그대로 이름 붙인 것이 아몬드 곧 ‘샤케드’이고 그 형상을 새긴 것이 바로 메노라입니다.
우리를 위해 경계하시며 지키신다는 뜻을 생각하면 어떤 성경 말씀이 생각납니까? 바로 시편 121편 말씀이 떠오릅니다. 조금 전에 불렀던 찬양곡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1-8)
하나님의 불은 꺼지지 않는 불이고, 우리 인생을 지금도 그렇게 지키고 살피시는 하나님의 빛이며, 그분의 성품과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경계를 서주고 계시다는 뜻의 ‘쇼케드’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샤케드’(아몬드 나무)를 등잔 받침 모양으로 새긴 것입니다.
1) 예레미야
이 ‘샤케드’ 단어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예레미야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저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바로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보고 있다.’” (렘 1:11-12, 새번역)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보느냐고 하시니까 ‘샤케드’를 본다고 대답했고,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쇼케드’ 하고 있다.”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때 그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우리 위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 심령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바로 빛의 역사이고 밝음의 역사입니다.
우리 삶이 진짜로 어두운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진짜 고통스러운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신고 생각될 때,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그럴 때는 정말 인생이 캄캄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이 빛의 역사이며, 이것이 곧 메노라(등잔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소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을 열어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신 역사와 섭리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맘의 눈을 여소서>(Open the eyes of my heart)라는 찬양곡이 있는데 이 곡도 두 주 전에 불렀지만 오늘 또 불렀습니다. 왜나하면 바로 오늘 말씀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이 곡을 부르면서 깨닫는 것은, 우리가 예배 중에 눈이 떠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를 보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찬양곡의 가사에 계속 반복되고 있는 가사가 “주 보게 하소서”입니다. 그런데 원래 영어 가사에는 “I want to see You” 즉 “주님을 보기 원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정말 주님을 뵙기 원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을 열어서 바로 지금도 나를 지키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며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2) 모세
이 등잔대의 직접적 근원이 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빛으로 밝아지는 역사의 비밀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애굽기 3장에 등장하는 호렙 산의 떨기나무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메노라’의 근원이 바로 ‘호렙 산의 불붙은 떨기나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 3:10, 12)
호렙 산의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미디언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면서 아무런 삶의 목적도 의미도 열정도 없이 죽지 못해 살아가던 모세는 바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고, 또 그들에게 율법을 전해주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으로 변화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등잔대(메노라)의 역사입니다.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었던 사람들, 그래서 그 마음에 어떤 열정도 의미도 목적도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죽어 가던 인생이, 그저 숨을 쉬니까 사는 인생이, 자신을 찾아오시고 기억하시고 만나주시고 거룩한 사명을 맡겨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언약의 말씀 때문에 아름답고 놀라운 인생으로 변화되는 바로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등잔대의 역사입니다.
3) 아론
‘샤케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그 살구나무가 바로 아론의 지팡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7장에서 사람들이 아론의 리더십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 하나님은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신 후 레위 지파에 속한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살구 열매가 열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거궤 앞, 즉 지성소에 두게 하셨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민 17:8, 10)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에 대해서 보증이 되어 주시며, 그 사람을 세워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등잔대 메노라의 은혜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바로 그 은혜를 받게 되면, 세상에서의 어떤 공격이나 비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며 나를 지켜주시는데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시며 나를 지켜주시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신데 마귀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등잔대 메노라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4) 야곱
‘샤케드’와 연결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 축복을 가로챈 후 형의 보복이 두려워서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가는 길에 빈들에서 하룻밤을 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는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임한 두려움과 불안함과 외로움은 칠흙 같은 밤보다도 더욱 어두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힘들게 빈들에서 자고 있는데, 그때 꿈에 하늘에까지 닿은 사다리(층계)가 보이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층계 위에 서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확인해주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3-15)
그 순간 야곱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 28:16-19)
야곱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그곳에서 자신이 베고 잤던 돌베개를 가져다 기둥으로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으며 그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곳의 옛 이름이 ‘루스’(Luz)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벧엘의 옛 이름이 루스였다고 굳이 알려주는 것입니까? 바로 이 ‘루스’가 ‘샤케드’와 같은 뜻의 ‘아몬드나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곳에 붙인 새 이름 ‘벧엘’은 ‘성막’과 같은 뜻의 ‘하나님의 집’입니다. 따라서 이 ‘아몬드나무’ 등잔대가 보여주는 대로 빛이신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야곱이 체험한 벧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21세기 새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입니다. 그 찬송가의 2절 가사에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야곱이 체험한 역사입니다.
이 찬송가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지은 사람은 엘리자 휴잇(Eliza Edmunds Hewitt)인데, 독신의 몸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주일학교 사역에 헌신했고, 그녀의 찬송시의 대부분은 주일학교를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녀가 일하던 학교에 성격이 비뚤어진 불량 학생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녀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소년을 타이르고 있던 중 그 아이가 갑자기 큼직한 기왓장으로 휴잇 선생의 등을 때려서 척추뼈가 부러지는 엄청난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6개월 동안 온 몸을 석고 붕대로 감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했고, 이제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이렇게 만든 학생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에는 분노와 원망과 증오가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병실을 청소하던 흑인 청소부 아주머니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일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당시 흑인으로서 그렇게 청소하며 사는 인생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데 찬송을 흥얼거리는 것이 너무도 이상해서 “청소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찬송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게 닥친 어려운 형편이 찬송으로 바뀔 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주셨으니 즐거울 수밖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 휴잇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때 그녀의 마음에 빛이 임하면서 이제까지 불평과 증오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낸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든 찬송시가 바로 <주 안에 있는 나에게>(1898)입니다. 결국 그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마음속에 먼저 밝음이 찾아왔고, 나중에는 몸도 회복되고 가해 학생도 용서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메노라(등잔대)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바로 이 등잔대 메노라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캄캄하고 어두웠던 마음이 예배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신실하신 언약을 다시 한 번 붙들 때, 빛을 비추어주셔서 밝고 힘 있고 담대하게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예배할 때, 기도할 때마다 바로 이 등잔대 메노라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