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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8일 수요예배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4 ✦
모세의 분노: 하나님을 사랑하면 죄에 분노한다
(민수기 20장 6~13절)
1. 다른 사람을 위해 분노할 줄 아는 사람
모세는 어떤 면에서 평생 분노를 간직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분노가 하나님을 위한 분노로 바뀔 것을 기다리셨다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모세의 분노는 그의 나이 40세에 저지른 살인으로 가장 처음 나타납니다. 당시 그는 이집트 왕자였습니다.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아니었지만 평생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출 2:11-12). 왕궁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던 모세는 노예로 전락한 동족 히브리인의 처참한 처지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인데, 그럼에도 이런 분노를 의로운 분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중심적인 분노였더라도 하나님은 모세의 그러한 열정을 귀하게 보셨고, 그의 자기중심적인 분노가 자신을 살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는 열정으로 변화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 12:3)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인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입니까? 과연 온유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그것도 이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모세는 살인을 저지른 후 도망자 신세가 되어 광야에서 떠돌게 됩니다. 그러던 중 동쪽으로 가다가 미디안에서 십보라를 만나 결혼하고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목자는 천한 직업 중에도 가장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해 한탄하는 마음이 모세의 아들 이름에서 느껴집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출 2:22)
모세에게 미디안 목자의 삶이 얼마나 한탄스러웠으면 첫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나그네’라는 뜻의 게르솜이라고 지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들의 이름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입니다.
이렇게 천한 목자로 살아가면서 모세 안에 자리 잡고 있던 폭발적인 분노와 사람을 죽일 만큼 사나운 성질이 사라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40년 동안 모세를 지켜보시던 하나님이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셨을 때 모세는 세 번이나 거절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분노의 표현이었고, 모세의 거친 성질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거절 이유는 ‘바로가 나 같은 사람의 말을 들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는 입이 둔해서 조리 있게 말할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나는 못하겠으니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세 번이나 거절하는 모세가 어떻게 온유한 사람입니까?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니 말이 됩니까?
모세가 그렇게 완강히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를 부르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오게 됩니다. 모세가 지휘한 출애굽 사건은 200만 명이 넘는 민족의 대이동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어도 출애굽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물도 식량도 없이 광야의 온갖 위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외치는 백성의 불평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 20:3-5)
이때 모세와 아론은 회막 문으로 가서 엎드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6).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8-9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고서 회중을 모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바위 속에 있는 물이 밖으로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잡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0-11절)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다고 심히 불평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팡이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모세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12-13절)
모세는 이전에 이것보다 더 크게 분노한 일이 있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갑자기 두려움에 빠진 백성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의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직접 돌판에 새기신 계명입니다. 모세가 그것을 받아서 내려오다가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대로 돌판을 던져 깨뜨려버립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출 32:19)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것을 그렇게 던져서 깨뜨립니까? 그런데 모세는 그대로 던져서 깨버렸으니, 그가 얼마나 강한 성격입니까? 그때 모세는 백성에게 금송아지를 갈아서 물에 뿌린 것을 다 마시라고 명령합니다. 그러고 나서 레위인들을 불러 우상숭배자들을 치라고 하는데 그날 3천 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하루에 3천 명이 죽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참혹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때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를 가리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의 분노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의 분노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노의 동기를 보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분노하는 것이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데 조용히 있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돌판을 깨뜨린 모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두 번째로 돌판에 계명을 새겨서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영광을 위해 분노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2. 하나님 때문에 분노하는 사람
다윗도 하나님을 위해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 거인 골리앗이 온갖 조롱으로 이스라엘을 멸시했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한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합니다. 그래서 갑옷도 입지 않은 채로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 적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분노했는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알려줍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삼상 17:45-47)
다윗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골리앗에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서 너를 죽이고 네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겠다.’라고 노를 발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원래 다윗이 이곳 전장까지 온 것은 단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큰형 엘리압은 다윗이 전쟁터에 온 것이 못마땅해서 전쟁을 구경하러 왔느냐며 화를 냈습니다(삼상 17:28). 그러나 그때 다윗은 엘리압의 멸시와 분노에 대해 맞받아서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일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분노해야 할 때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한 것이 부부싸움하려고 한 겁니까? 부모가 된 것이 자식에게 화내려고 그런 겁니까? 원수를 만들려고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합니까? 교회에서 서로 다투려고 직분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사소한 일에는 너무나 쉽게 분노하면서도,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점잖게 있으며 입을 다물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보통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에 있으면서 그곳의 살벌한 분위기를 주도했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겠다는 일념으로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의 분노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이 구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행 9:1-2, 새번역)
바울의 그런 불같은 성격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바울이 아테네에 갔다가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과 장터와 광장에서 사람들을 붙들고 토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붙잡혔을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의 입을 치라고 했을 때 “회칠한 무덤이여!” 하면서 발끈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분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분노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슬퍼하거나 울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슬퍼하거나 분노할 따름입니다. 가장 최근에 슬퍼하거나 화를 낸 적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은 자기중심적인 슬픔이고 분노였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와 다윗과 바울처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분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 때문에 분노하는 사람입니다.
3. 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
예수님도 성전에서 분노하셨습니다. 장사꾼들이 성전 뜰에서 비둘기와 양을 파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상을 엎으며 분노하셨습니다. 지금껏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와서 약탈한 적은 있지만, 유대인 중에서 이처럼 무섭게 꾸짖으며 성전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람은 예수님이 유일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에 건물이 없거나 또는 작거나 사람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문제입니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아야 할 일에는 분노하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지금과 같은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됩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진짜 위기는 부부가 서로 싸울 때가 아닙니다. 배우자가 뭐라고 해도 무관심으로 반응할 때가 진짜 위기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이 조롱과 멸시를 받아도 그리스도인이 분노하지 않을 때 옵니다. 사랑하면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분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됩니다. 물론 세상을 저주하고 증오하며 분노하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손상이 올 때 분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단순히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교회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는 목소리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하나님이 그런 조롱을 받으시도록 원인을 제공한 교회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분노는 사실 그들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다고 하시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하는 그들을 모두 쳐서 없애버리고 모세를 큰 나라가 되게 해주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제발 그러지 마시고 그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모세는 주 하나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출 32:11-12, 새번역)
그때 모세의 그 사랑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상숭배를 하는 백성에게 분노하여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던져 깨뜨렸을 때 그것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의 모세의 분노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그와 아론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모세의 분노가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분노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로 명령해서 물을 내라 하셨는데 모세는 지팡이를 두드려 물을 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 같은 행동을 ‘믿음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12절, 새번역)
사실 모세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모세는 믿음으로 홍해를 가른 사람이고, 믿음으로 광야 40년 동안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모세더러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라고 하십니까?
출애굽기 17장에서 모세는 지팡이를 두드려 물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출애굽한 지 2개월 15일이었는데, 오늘 본문은 40년이 거의 지날 때입니다. 모세는 그때처럼 이번에도 지팡이를 두드리면 물이 나올 것으로 여기고 반석에 명령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물은 나왔지만 모세의 그러한 행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믿지 않고 이런 일을 했다.’라는 하나님의 지적은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치면서 화를 낸 것은, 분노의 동기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임을 드러냅니다. 모세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 안에 고개를 든 교만으로 인한 분노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자리에서 밀쳐놓지는 않았는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에서 영적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를 만들어야 하는데 내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닌지 조심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모는 자녀를 대할 때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지 늘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줬는데,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왜 너는 아직 이 모양이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속히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내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내 자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랬듯이 우리의 분노가 하나님을 위한 분노가 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분노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분노가 올바르게 바뀌기를 기다리십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분노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남다른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실 때 분노하고 이웃이 고통당할 때 분노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분노하고, 자연재해를 당하여 울부짖는 백성들을 보며 분노하고,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때문에 분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매일의 삶에서 무엇을 위해 분노하며 살 것인가 생각하며 결단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결단으로 주님 앞에 설 때 교회가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며 나 자신이 회복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 우상이 가득한 것 때문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또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우리가 분노하고 슬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때, 그러한 우리를 통해 세상이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