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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MQgkST50jWA?t=1704

 

 

2021728일 수요예배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7

널판: 거룩함과 성결함으로 세우는 예배자의 삶

(출애굽기 2615~30)

 

1.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하라

 

성경은 성막을 만들고 세우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널판입니다. 이것은 대충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널판이 없으면 성막은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막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널판은 그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으로 하고” (15-16)

 

하나님은 성막을 세우기 위해 널판으로 벽을 만들게 하십니다. 그 사이즈는 10×1.5규빗(500×75센티미터)입니다.

 

너는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되 남쪽을 위하여 널판 스무 개를 만들고” (18)

 

성막 다른 쪽 곧 그 북쪽을 위하여도 널판 스무 개로 하고... 성막 뒤 곧 그 서쪽을 위하여는 널판 여섯 개를 만들고, 성막 뒤 두 모퉁이 쪽을 위하여는 널판 두 개를 만들되” (20, 22-23)

 

널판을 남쪽과 북쪽을 위해 각각 스무 개씩, 또 서쪽을 위해 여섯 개, 양 모퉁이용으로 두 개를 만들어 성막을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널판으로 벽을 만들어야 비로소 성막이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예배라고 한다면, 이 널판을 세우는 것은 예배에 대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제가 애틀랜타에 있는 신학교에 다니던 1991년 여름, LA 토요찬양모임이라는 그룹이 전국 투어를 하면서 애틀랜타에도 왔습니다. 3-4년 전쯤부터 한국에서 두란노 경배와찬양 그룹의 목요 찬양 집회 때문에 한국 교회에 찬양 열풍이 불던 때였는데, 미주에서는 그 그룹이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학창시절 전혀 신앙적이지 않았던 제 교회 친구가 LA에 유학을 왔다가 변화되어 그 그룹의 핵심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 이름을 팔면서(?) 그때 그 형제자매들과 따로 교제할 기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그룹은 주로 1.5세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국 찬양곡과 미국 찬양곡을 섞어서 했는데, 집회 때 모든 곡들이 다 좋았지만 특히 제 마음에 굉장히 와 닿은 곡이 하나 있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는데 너무 좋았고, 그분들이 떠나면서 자기들 집회를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주고 간 것을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도 그 곡이 나왔습니다. 그 곡을 부르며 젊은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크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곡의 제목은 <I Stand in Awe>였고, 조금 전 우리가 불렀던 <아름답고 놀라운 주 예수>가 바로 그 곡입니다. 그 곡의 후렴을 보면 주님 앞에 내가 서 있네. 주 앞에 내가 서 있네.”라는 가사가 반복되면서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말 가사도 그렇지만, 영어 가사는 정말 반복적으로 “I stand”를 강조하고 있고, 그래서 원래 영어 제목도 <I Stand In Awe>입니다. 내가 경외함으로 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볼 것은, 왜 찬양의 절정인 뒷부분에 주님 앞에 내가 서 있네라고 반복되는지, 왜 그것이 그렇게 은혜가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을 예배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예배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주님 앞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찬송에도 그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의외로 예배하는 모습, 특히 감동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할 때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의 집에 서 있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 중 다섯 구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134:1-2)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135:2-3)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33:10)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대하 20:1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14:1)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정말 중요한 요소를 그대로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2.   하나님 앞에 머물러 예배하라

 

성막의 널판을 세우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서서 드리는 예배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널판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으로 벽을 만들어 성막을 세우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참된 예배를 이렇게 드리라는 말씀인 동시에 예배를 세우라는 아주 강력한 명령인 것입니다.

 

성막을 세운다고 할 때 세우다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벽을 건축하여 세우는 것입니다.

 

둘째는, 버티고 서는 것입니다. 일단 세웠으면, 어떤 무게나 하중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어야 합니다. 다리나 건물이 무너져서 큰 사고가 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세워졌는데 그렇게 무너지면 정말 큰일입니다.

 

예배를 세우는 것도 똑같습니다. 예배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막의 벽을 세우는 것처럼 그렇게 일어서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 가운데 서서로 번역된 말씀의 많은 부분이 일어서다’, 즉 영어로는 ‘rise up’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예배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이 들 때, 그것을 떨치고 일어나야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삶 가운데서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예배할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순간은 거의 없습니다. 예배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사실은 힘들 때도 예배가 힘들지만 너무 편안한 것이 방해가 될 때도 많습니다. 예배를 드리려면 정말 스스로를 향한 도전이 필요하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혹시 예배가 잘 안 될 때가 있으십니까? 그럴 때 바로 오늘 불렀던 <아름답고 놀라운 주 예수> 찬양을 불러보십시오. 노래하기가 힘드시면 오늘이나 다른 때 이 찬양을 불렀던 동영상을 틀어 놓고 같이 부르셔도 좋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정말 예배하러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다 귀찮고, 다 필요 없고,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드러눕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럴수록 더욱 일어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바로 그렇게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때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세운다는 것은 그렇게 일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일어서보지 않고는 그것이 어떨지를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내 감정은 예배를 할 수 없을 것 같고 또 오늘은 정말 하기 싫다고 느끼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예배자의 사명을 따라 결단하고 일어서면, 그때부터 예배가 세워지고 열리게 됩니다. 예배 중에 성령님이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예배입니다.

 

일단 그렇게 일어서야 하고, 일어선 다음에는 견디고 버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어서기는 했지만 바로 다시 넘어진다면 미약한 작대기에 불과합니다. 벽은 세워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서 버티고 견디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도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며 견디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예배가 안 되는 것 같고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버티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코로나 사태 이후 목장 사역이 그렇습니다. 같이 모여서 드리는 공 예배도, 목장 모임도, 코로나 사태 때문에 많이 위축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참석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마 가장 힘이 빠진 분들이 목자 목녀 분들일 것입니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거나, 다른 것이 더 급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 상황 가운데 이사를 가셨는데, 그래서 별로 모일 사람도 없을 때 이것을 계속 해야 하나?’라는 회의가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지키고 서서 견디며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장 방문을 할 때 어느 목자님 한 분의 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버틸 때인 것 같아요.” 이 코로나 상황에 목장식구들이 많이 안 모여서 힘이 빠지셨을까 봐 염려가 됐는데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버틸 때입니다. 바로 이것이 서다라는 말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입니다. 널판을 통해 벽을 세우는 것은 이렇게 버티고 서서 예배를 세우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3.   구별된 예배자로 서다

 

이렇게 일어서서 버티며 예배를 세우는 데 있어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 받침입니다.

 

스무 널판 아래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지니 이쪽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저쪽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지며” (19)

 

이 은 받침이 정확히 어디에 어떻게 설치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는, 널판이 땅과 직접 닿지 않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널판이 넘어지지 않고 서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받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은으로 만들까요? 성막 전체에 있어 은이 사용된 부분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다른 것은 다 금이나 놋입니다. 오직 이 벽의 받침만 은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은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막을 금으로 쌈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그것이 예배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바로 거룩함과 성결함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은 인간적인 면에서 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으로 보면 구별됨’, 거룩과 성결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은 나팔입니다.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10:2)

 

성경에 나오는 나팔은 대개 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입니다. 그런데 백성을 움직이고 소집할 때는 은 나팔을 붑니다. 양각이 아니라 은으로 나팔을 만들게 한 것은 은의 의미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는 나팔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 받침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 벽의 밑에 굳이 다른 것이 아닌 은으로 받침을 만들게 하신 것은, 바로 그 벽 즉 예배를 세우는 사람들이 무엇을 기초로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외에는 진정한 의미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배드리니까 신자다.’라는 말은 이교적인 접근입니다. 정확한 것은, ‘신자니까 예배를 드린다.’입니다. 예배에 참석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성도(거룩한 무리)가 되어야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함과 성결함의 기본이 은 받침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와 이 시대의 예배를 비교하면 정말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자의 사명과 특권에 대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배자의 사명과 특권에 대해 아주 철저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니까 당연히 예배를 드릴 사명이 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최고의 특권이라는 것을 정말로 실감하며 누렸습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너무 많이 흐려져 있는 것을 봅니다. 믿는 사람이라면서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명 의식이 너무나 희미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특권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미약합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이 시대 교회가 타락한 핵심 모습입니다.

 

은 받침을 하고 서 있는 널판들을 통해 주시는 예배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되려면 먼저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바로 그 거룩함과 성결함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배를 온전히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강조한 것이 17절입니다.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 (17)

 

여기에 사용된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드라는 단어인데 이라는 뜻입니다. 이 촉은 널판을 은 받침에 고정시킴으로 널판이 서서 버티게 하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이라는 의미의 야드라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 성도가 온전히 예배를 세우는 참된 예배자가 되려면 바로 이 은 받침이 의미하는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된 성도됨을 온전히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갑니다.’라는 것을 견고히 붙들 때, 우리의 예배가 든든히 설 수 있게 됩니다.

 

 

4.   같은 신앙으로 함께 드리는 예배

 

일어서서 버티며 예배를 세우는 데 있어 중요한 두 번째 것은 입니다.

 

너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지니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이며, 널판 가운데에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26-28)

 

성막을 세우는 널판들을 세우기 위해 다섯 개의 띠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 중 가운데 있는 것은 전체가 하나가 되도록 완전히 연결하는 띠, 즉 중간을 관통하는 띠였습니다. 이것은 널판들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설 수 있고, 버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막을 세우는 48개의 널판들은 완전한 하나로 연결되어 서 있었습니다. 다섯 개의 띠로 아주 견고하게 하나가 되어 함께 선 것입니다.

 

이 띠는 우리의 동일한 신앙 고백을 의미합니다. 같은 믿음의 정서, 같은 영성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 때 찬양이 중요하고, 그래서 말씀이 중요합니다. 같은 찬양을 부르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말씀의 영성도 같아야 합니다. 말씀에 아멘할 수 없으면 그것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마음으로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같은 신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일한 신앙 고백이 없이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같은 신앙으로 묶여야 함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 띠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섯 개나 됩니다. 견고한 신학, 견고한 신앙 고백, 견고한 복음 진리, 같은 영성, 서로 하나 된 공동체 의식, 무엇보다 사랑으로 하나 된 마음 등, 이들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의 하나 된 공동체를 싫어하는 사탄은 가장 먼저 우리의 예배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 무엇보다 우리의 하나 됨을 무너뜨리기를 시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력하게 하나로 묶여야 합니다. 함께 설 때 참된 예배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널판으로 벽을 세우는 모습을 통해 또 하나의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온전한 예배를 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막의 널판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예배를 세우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받들어 날마다 거룩함과 성결함으로 예배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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