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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8일 수요예배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 ✦
가인의 분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면 분노한다
(창세기 4장 1~7절)
[시리즈 전체 서론]
요즘 분노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을 봅니다.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보면, 요즘 내년 3월 대통령 선거에 나갈 후보를 뽑기 위해 각 당에서 경선을 벌이는 중인데, 같은 당이면서도 서로를 향해 분노를 표현합니다.
‘왜 나에 대해 없는 말을 지어서 하느냐?’ ‘왜 해놓고는 안 했다고 발뺌하느냐?’
‘왜 자기 지위를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하느냐?’ ‘당신들도 다 똑같으면서 왜 그러느냐?’
‘누구 말이 옳은지 녹취록을 공개하라.’ ‘왜 내 말을 오해하고 나를 공격하느냐?’
미국도 작년 11월 대통령 선거 때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선거 결과가 나온 후에는 더 많았습니다. 심지어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을 침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보다 몇 달 전인 2020년 5월에는 미니어폴리스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백인 경찰관에 의해 목이 눌려 사망한 사건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때 뉴스를 보니 나온 사람들의 얼굴이 당연히 부드럽지 않고 모두 험악하고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그 외에도 너무 많지만, 그런 외부의 사건들 말고 우리 자신의 삶을 보더라도 크고 작은 분노를 표현할 때가 참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부부간의 갈등이나 부모와 자녀의 갈등 때 소리 지르며 다투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종종 큰소리로 다투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노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 들어 분노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분노는 상한 감정이며 반드시 치유되고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분노에 대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분노하는 인간보다 하나님이 더 분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매일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우리 인간의 분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랑의 뒷모습이어서, 등을 돌리기만 하면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힌 사랑의 얼굴로 변하십니다. 제로 하나님의 분노는 가출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날마다 기다리는 아버지의 초췌하고 피곤한 얼굴입니다.
왜 우리는 분노합니까? 분노의 뿌리를 살펴보면 가인을 만나고 아담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후손은 분노가 어떻게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는지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그 분노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사랑의 손길을 멈추신 적이 없이 당신의 선하심을 이루어 오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분노는 끝내 십자가에서 화산의 용암처럼 분출되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분노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분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지 않은 인간의 분노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떠나서 분노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이념과 사상과 철학이 그분을 외면하고 분노를 정당화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노는 상대를 찌르기 전에 자신을 찌르고, 상대를 태우기 전에 자신을 태웁니다.
몇 년 전부터 분노의 문제에 대해 나누어보려고 했는데, 이것에 대해 잘 정리된 책을 발견했습니다. 한국 MBC 앵커 및 사장을 지냈던 조정민 목사님의 <왜 분노하는가?>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11~12주 동안 이 책을 중심으로 분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온통 분노사회다]
지난 2017년 10월 1일 Las Vegas에서 미국 역사상 개인이 저지른 것으로는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2만 2천 명 이상이 참가한 뮤직페스티벌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근처의 호텔 방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무차별로 총기를 난사해서 60명이 사망하고 86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끔찍한 사건의 범인은 테러리스트나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라, 거액 자산가로 알려진 스티븐 패덕(Stephen Paddock)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왜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릅니다. 범행 직후 그는 자기가 총기를 난사했던 자신의 호텔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최근에 자주 발생하는 ‘묻지마 살인’과 같은 동기가 아닐까 추측할 뿐인데, 그 동기가 바로 다름 아닌 분노입니다. 스티븐 패덕이나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분노라는 심각한 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병을 앓게 되었습니까? 다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습니까? 무슨 일에 그렇게 화가 나 있습니까? 만약 우리 사회가 이 분노를 다스리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지금 당장 이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
이제 분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 각 개인과 집단은 이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분노는 하나님과 어긋난 관계에 있을 때 일어난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분노가 처음 등장하는 시점은 놀랍게도 창세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방식과는 다르게 태어났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흙을 빚어 만드셨고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풀이하면 그들의 존재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인간’이라는 뜻 외에도 ‘흙’이라는 뜻이므로, 아담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이 흙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줌 흙에 불과한 아담을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그가 사람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또 다른 생명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아들 가인은 ‘얻었다’라는 뜻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출산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죄를 범한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형벌 중 하나가 바로 출산의 고통이었습니다.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 인간처럼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유독 인간만 출산의 고통이 심합니다.
하와는 첫아이 가인을 낳으면서 출산의 고통이 클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렸을 것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이 아이가 하나님이 주신 아들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와에게 있어 출산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이름에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라는 하와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1-2절)
하와가 가인을 낳은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얻었다’라는 뜻인 가인의 이름에서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다는 하와의 고백을 붙잡을 때 우리 자녀의 생명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붙잡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오지만, 부모의 뜻대로만 살거나 부모를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실 생명은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와는 이 고백을 통해 마침내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그분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되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예배가 그것입니다. 예배는 나를 위한 의식이 아닙니다. 내가 은혜를 받으려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영적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통로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인하는 유일한 태도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3-5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님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 떼 중에서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과, ‘아벨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제사를 드린 사람과 그의 제물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은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은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히브리서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 11:4)
성경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아벨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가인의 내면은 혼돈스럽고 무질서했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물은 형식이자 겉치레였기에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받을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거절하실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의 태도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의 수가 많든 적든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변함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참된 예배자입니다.
2. 분노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을 때 가인이 보인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처음으로 분노한 이유는 하나님께 거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5절, 새번역)
가인은 몹시 분노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부끼리도 싸우면 서로 시선을 마주하여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그렇습니다. 가인도 하나님에게서 얼굴을 확 돌려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6절)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애써 외면하면서 하나님께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노의 표현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이 다시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볼 방안을 말씀해주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절)
선을 행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선이신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고 자신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고 하십니다.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죄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겁니다.
죄가 왜 자기를 노려봅니까? 재산을 노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생명, 그의 영혼을 원하는 것입니다. 죄는 분노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분노를 왜 처리해야 합니까? 분노를 처리하지 않으면 죄가 그 문으로 들어와 나를 압도하고 장악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처리하지 않았을 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가인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아우를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분노의 원인과 처리 방법을 알려주시면서,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며 경고하셨지만, 가인은 그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가 끝까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보여줍니다.
분노를 통해 문 앞에 엎드려 있던 죄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살인입니다. 슬프게도, 창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토록 무섭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찌감치 이 분노의 문제를 경고하셨습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집단 학살이 일어나고, 갖가지 테러 공격이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시작된 살인은 그 후 더 끔찍하고 심각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근원이 분노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노는 그 순간에 다스리지 않으면 빠르게 커져서 죄를 불러들이고, 죄를 통해 나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3. 먼저 분노를 처리하라
예수님은 공생애 후 첫 번째 설교에서 이 분노가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1-24)
예수님은 분노하는 것 자체가 심판 받을 만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에 앞서서 먼저 분노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면 공회에 잡혀갑니다. ‘라가’는 머리가 비었다는 말인데, 요즘 한국말에 딱 맞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무뇌충’입니다. 또한 ‘미련한 놈’이나 ‘바보 같은 놈’과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원망 들을 만한 일을 했다면 속히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욕하고 원망을 살 만한 행동을 해서 상대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살인의 동기를 심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동은 그 자체로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분노하게 했다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손에 피를 묻힌 채 예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예배드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노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차장이 넓어서 그럴 일이 없지만, 한국이나 LA나 뉴욕 같은 데는 주차장이 좁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올 때 주차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런데 서로 자기가 먼저 주차하겠다고 경쟁하거나 소리를 지르고 와서 거룩한 척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오후예배가 있어서 예배에 오기 전에 식당에서 종업원들을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하고 와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또한 직장에서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무시하는 말을 하고 와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살인의 동기를 심고 와서 거룩한 척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분노를 처리해야 예배자가 예배자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의 분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죄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법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법은 죄를 응징할 뿐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살인한 사람을 살인죄로 처형한다고 해서 죄가 해결됩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왜 분노를 처리하지 않은 채 예배만 드리고 있습니까? 어떻게 남에게 살인의 동기를 심어놓고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지금 당장 분노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노는 어떻게 처리할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해서 분노했습니다. 분노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 관계가 어긋난 것입니다.
선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길입니다. 이 선이 선행되어야만 이웃과 화평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분노를 조절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를 화해로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가 죄로 치닫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 될 때 우리는 분노에서 자유로워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 하나 잘되고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지수가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는 세상에서 그 분노의 열기를 식히는 조절자로서, 화해자로서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있는 분노를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 내 안의 분노를 처리하고, 나아가 분노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피스메이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