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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23일 수요예배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2

증거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생각

(출애굽기 2510~22)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어진 말씀의 내용이나 뜻이 아닌 다른 다양한 것에서도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숫자나 상징이 그러한데, 숫자나 상징은 그 안에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순서입니다. 지혜라는 원래의 개념 속에는 순서가 들어 있습니다. 지혜는 우선순위를 제대로 매기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의 말씀인 성경에서 순서는 숨겨진 메시지와 의미를 발견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특히 순서 가운데서도 처음이나 마지막은 정말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성막의 여러 요소 가운데 가장 먼저 법궤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 순서에 담긴 의미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집을 지을 때는 먼저 집의 뼈대를 세우고 외형을 지은 다음 그 안에 집기를 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입니다. 그런데 성막은 그 순서가 반대입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25:8-10a)

 

하나님은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갈 기구인 법궤를 만드는 방법을 제일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인 순서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집을 이런 식으로 짓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집도 짓기 전에 침대부터 가져다 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 안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깊은 뜻, 즉 파격적일 만큼 중요한 의미와 메시지가 이 순서 안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법궤를 만들라고 하신 이 말씀 속에는 어떤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까?

 

성막이 중요한 것은 그것의 모양보다는 그것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막의 모양을 살펴보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예배에 대한 메시지이며, 우리는 성막에서 바로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막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드리는 예배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인지를 점검하고 예배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1.   예배의 형식이 아닌 내용을 붙들라

 

법궤를 먼저 만들라고 하신 순서 속에서 무엇보다 먼저 잡아야 할 메시지는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다.’라는 것입니다. 성막을 세우는 데 있어 눈에 보이는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갈 집기부터 만들라고 하신 것은, 예배에서 형식보다 내용이 먼저라는 중요하고 기본적인 교훈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의 모든 싸움은 예배에 대한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배에 대해 많은 다툼과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근세의 종교 개혁자들은 공통적으로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라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4:23-24, 새번역)

 

하지만 그렇게 외치고 노력했어도 여전히 형식은 사라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조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로마 국교가 된 기독교의 예배는 시대가 지날수록 형식으로 가득한 예전적 예배(Liturgical Service)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내용은 그것이 영이고 마음의 중심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반면, 형식은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용은 아무나 그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없는 반면, 형식은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에 자꾸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배의 가장 큰 적이자 가장 심각한 병폐가 되었습니다.

 

예배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 생명줄이고 삶의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이것을 방해하는 사탄의 가장 집요한 공격은 바로 예배의 형식화를 통해 일어납니다. 사실 예배를 형식으로 드리면 우리는 참 쉬워집니다. 정해진 대로만 하면 되고, 마음은 어떻든 겉으로만 멋지게 하면 되니까 얼마든지 갈등하지 않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는 개신교 교인 숫자는 주는데 천주교에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멋지고 웅장한 성당 건물에 들어가 앉기만 해도 분위기에 압도됩니다. 안식월 때 갔던 유럽의 여러 유명한 성당들에 들어가 보면 정말 압도됩니다. 그런 건물 안에서 예전에 의해 드리는 미사에 참석하고 있으면 거기 가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경건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데, 사실은 그렇게 된다는 착각입니다. 그렇게 형식을 따라 예배하는 것은 있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용으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예배가 어려워지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악 되고 못된 성품들, 더럽고 추한 생각들, 죄로 오염된 것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에 참된 예배는 그렇게 아프고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성막이 예배이며 그것이 예배를 세우는 것이라면, 가장 깊은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로부터 시작하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껍질이나 형식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먼저 만들라고 하십니다.

 

예배는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드리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시간이나 장소나 모습이나 형식만으로는 이것이 정말 예배다, 아니다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내용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예배는 영과 진리의 영적 역사입니다.

 

비록 시장 바닥 한복판에 있으면서 겉으로 볼 때는 전혀 예배드리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그 중심에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자로 일할 수 있고, 예배자로 운전할 수 있고, 예배자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심지어 예배자로 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 역시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당이라고 부르는 곳에 와서 예배라는 형식을 가진 시간에 참여하고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중심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낫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은 마음과 시선이 함께 갑니다. 마음이 없으면 눈으로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연기를 잘합니다. 별 마음이 없어도 오랜 습관에 따라 적절한 타이밍에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분명히 가짜입니다.

 

그래서 목사인 저 같은 사람이 가장 위험합니다.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도 전하는 가운데, 종종 예배를 드리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갈등이 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깨닫는 것은, 이러한 갈등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갈등이 없을 때 소위 이 되는 겁니다. 목사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에게 이것은 끝없는 싸움입니다.

 

이처럼 예배를 제대로 드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다고,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듣는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정말 깊은 곳, 그 지성소, 그 법궤의 영적인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스스로 속이거나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예배가 안 되면 괴로워하면서라도 그 중심으로 나아가며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언약의 돌판을 붙잡으라

 

두 번째로 붙잡아야 할 메시지는 언약의 돌판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법궤를 말씀하신 것은 예배 혹은 예배자에게 있어 법궤와 그 법궤를 둔 그 지성소가 두 가지 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성소와 그 안에 있는 법궤가 예배의 출발이고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성소와 법궤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고 목표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의 근본과 예배의 목적이 다 지성소와 법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성소는 그 자체로 의미 있다기보다는, 그 안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장소, Holy of Holies)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이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선 법궤 자체는 상자입니다. ‘라는 말 자체가 무엇을 넣는 상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10-11)

 

증거궤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2.5×1.5×1.5규빗(125×75×75센티미터) 정도로 그렇게 크지 않은 상자입니다. 비록 순금으로 안팎을 바르고 나름대로 화려한 장식을 했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안에 무엇을 넣어두거나 그것을 들고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상자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법궤의 중요성은 그 자체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법궤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증거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9:3-4)

 

반면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면 오직 돌판(증거판) 외에는 들어 있는 것이 없다고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왕상 8:9)

 

무엇이 맞습니까? 정확하게 본다면,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16)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17:4)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회막 안에 있는 증거궤 에 놓아두라고 하셨으니까, 지팡이와 만나를 넣은 항아리는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앞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 지난 후 신약시대에 히브리서 기자는 모두 다 그 안에 있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증거궤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증거판을 넣어 두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증거막이라고도 부릅니다. 결국 법궤가 그 안에 증거판을 넣어 두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면, 이러한 중간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예배의 기본과 출발 그리고 예배의 목적과 결론은 모두 증거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거판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의 여러 곳들을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새겨 넣으신 두 돌판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십계명 돌판이나 명령문 판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굳이 증거판이라는 말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그 돌판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 혹은 증거로 생각하실 뿐,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명령하는 법조문으로는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궤를 법궤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법궤는 번역상의 표현일 뿐, 오히려 성경은 증거궤언약궤’(Ark of the covenant), 혹은 여호와의 궤’(Ark of the Lord)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증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예배의 근거는 바로 그 증거에 있으며, 예배의 결론과 목적도 바로 그 증거, 즉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는 것이다.’

 

 

3.   속죄소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

 

그렇다면 그 관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을 증거하는 관계라는 말입니까? 이것을 너무도 확실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증거궤의 뚜껑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증거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17-21)

 

증거궤 뚜껑의 이름이 바로 속죄소(캅포레트, Atonement Cover/Mercy Seat)입니다. 그룹(Cherubim) 천사 둘이 서로 마주보는 조각을 붙인 아주 의미 있는 뚜껑입니다. 그런데 그룹은 어떤 천사입니까? 호위 천사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한 후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그들이 다시 와서 생명나무에 손대지 못하도록 그것을 지키게 한 장면에서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이 그룹들은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접근하거나 함부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무서운 존재이며 심판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이 그룹들을 조각한 그 증거궤의 뚜껑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은혜의 자리, Mercy Seat)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 때문에 쫓겨나 나를 만날 수 없게 한 자리, 나는 여기에 너희가 와서 나를 만날 수 있도록 그 죄를 용서하는 자리를 펴겠다.’ 다시 살리시고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속죄소로 증거궤를 덮었다는 것은 바로 그 증거의 내용, 즉 그 관계의 내용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말릴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불타는 용서와 구원의 마음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히브리어로 테바이고, 증거궤는 히브리어로 아론입니다. 그런데 고대 에티오피아어로는 증거궤를 타보트라고 부릅니다. , 방주와 증거궤를 같은 단어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방주를 만들 때 역청을 발라서 물이 새지 못하게 했는데, 역청은 히브리어로 코페르’, 곧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라는 말의 히브리어인 캅포레트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이것은 물이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히 막아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방주는 범죄한 인간들이 심판 받아 홍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모세의 갈대 상자도 보십시오.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울 때 그 갈대 상자에 역청을 발라서 물이 새지 못하게 했다고 했는데, 그 갈대 상자도 역시 테바이고 역청은 코페르입니다. 당시 역청을 바르던 모세의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를 살리고 싶은 마음, 그리고 물이 아기에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싶은 마음은 방주를 만들 때 역청을 바르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룹 천사들은 심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랑을 선포하며 지켜주시는 이야기, 심판 받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속죄소입니다. 이것이 가장 잘 표현된 장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이며 모두가 죽는 죽음의 자리입니다. 죄인이 죽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대신 위해 죽으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리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며, 그것이 바로 캅포레트(속죄소)입니다. 심판이 우리를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주시는 것이 바로 속죄소의 의미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입니다. 죄를 그냥 두면 안 되기에 심판하시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자녀들을 죄 가운데 그냥 죽게 두실 수 없어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 방주를 만드시는 사랑이 바로 증거궤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죄가 들어와서 그 영혼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그 죄를 덮어주는 것이 바로 속죄소를 두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바로 예배의 기본이며 예배의 근거입니다. 어떤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어떻게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셨기에, 우리의 죄를 덮고 막아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없었다면, 누가 감히 그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복장을 보면 옷 밑단에 방울과 석류 모양을 섞어서 달았습니다. 그것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소리가 안 나면 죽은 겁니다. 그래서 끈을 허리에 묶고 들어갔습니다. 죽으면 밖에서 끌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죽었다면 하나님의 그 거룩 앞에서 죽은 겁니다.

 

결코 죄인의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속죄소가 없으면 다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인인데도 언제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예배의 시작이요,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을 받아서 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기초 없이는 예배가 시작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참된 예배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예배에 성공한 것입니까? 속죄소의 사랑에까지 가 닿음으로 그 사랑 때문에 눈물이 터지고, 그 사랑 때문에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와 상한 것들이 통곡하고 떠나가는 것, 나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쏟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이며 예배에 성공한 모습입니다. 그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 그 사랑을 온전히 다시 한 번 경험하는 것, 이것이 곧 지성소에 증거궤를 먼저 만들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막의 메시지입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바로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목적이요, 결론입니다. 예배는 지성소 안 속죄소로부터 시작되어, 지성소 안 속죄소로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은혜를 맛보며, 그 사랑의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치유 받고 회복되고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그 속죄소의 사랑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춤추며 찬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아서 용서받고 회복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러한 참된 예배자의 감격과 감사와 은혜 가운데 늘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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