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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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7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6 ✦
“또 다른 핍박 앞의 담대한 선포”
(사도행전 5장 17~32절)
[들어가는 말]
이제 부모들, 특히 일하는 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자녀들 대부분이 기나긴 여름방학을 맞이했습니다. 이 미국의 아이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방학 때마다 듭니다. 그 기나긴 방학 동안 숙제가 없습니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어릴 때는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 방학 때마다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특히 제일 싫어하는 숙제가 일기 쓰기였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나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 겨울방학이었습니다. 그때도 물론 일기를 써가는 숙제가 있었는데 제가 거의 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시 살던 아파트 단지 옆 동에 살던 아주 착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제 어머니가 그 아이의 어머니를 잘 아셨기 때문에 그 아이의 일기장을 빌려다 주셨습니다. 그걸 보고 베끼라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알아서 쓰되 날씨는 알 수가 없으니까 그 아이의 일기장을 보고 날씨를 적으라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예 일기장을 거의 통째로(?) 베끼다시피 했습니다. 물론 여자아이니까 상황이 달랐고, 그것을 적당히 바꾸어 썼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문장 실력(?)이 계발되었던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아무리 베꼈어도, 방학 내내 놀기만 하다가 개학을 하루 이틀 앞두고 거의 두 달 분의 일기를 벼락치기로 쓰다 보니까 별로 쓸 게 없고 늘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습니다. 매일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이빨 닦고 세수하고 밥 먹고 놀았다.”라고 썼습니다. 여름방학 때는 그나마 밖에서 놀기도 하고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수영장도 가고 그러는데, 겨울이라 나가 놀 수가 없으니 더욱 쓸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친구의 이름을 바꿔가면서 썼습니다. “오늘은 A와 놀았다.” 그 다음 날은 “B와 놀았다.” 또 다음 날은 “C와 놀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중에 “너는 친구가 그렇게 많으니?” 하고 물으실 정도였습니다. 정말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생각나는 게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빨 닦고 세수하고 밥 먹고 놀았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이 그것과 얼마나 달라져 있습니까? 지금은 어른이 되어서 ‘아침에 일어나 이 닦고 세수하고 밥 먹고 놀았다’라는 내용 이외에 특별한 무엇이 더 있습니까? 지금은 ‘놀았다’ 부분만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이 닦고 세수하고 밥 먹고 직장에 다녀왔다’, ‘사업체에 다녀왔다’, ‘집안일 했다’, ‘인터넷 했다’, ‘드라마 봤다’, ‘스마트폰 했다’ 등이 추가되었을 뿐이지, 이전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매일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살다가 그 끝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기의 마지막 호흡을 마치는 그 순간, 살아온 삶에 대해서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 바울처럼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별 의미도 없이 살아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못 해서 후회된다. 내가 인생을 헛살았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인간의 사망률은 100%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젠가 다 죽는데, 죽는 그날 뭘 이야기하고 이 땅을 떠나시겠습니까? ‘아이고 후회된다. 그렇게 살지 말 걸’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 이루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것을 잘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사실 일상을 생각해보면 다 반복입니다. 목장에서 감사의 제목을 나눌 때도 ‘항상 똑같다’고 할 때가 많은데, 겉으로 보면 똑같아 보입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직장 또는 사업체에 가고, 일하고, 아이들 보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나고, 1년이 지나고... 다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생이 반복이라고 해서 반복의 의미가 다 똑같은 게 아닙니다. 인생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무엇을 위해 반복하는가, 누구를 위해 반복하는가에 따라 반복의 의미와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배우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1. 고난 후에 기적을 베푸신 목적
1)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도들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6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6절)
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해서 의사에게도 갈 수도 없는 사람들, 간이 침상을 가져와서 길에 누이고 베드로나 사도들이 자나갈 때 그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온 그런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다”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축하할 일입니까? 누가 그 동안 이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다 나음을 받았다면 얼마나 기뻐할 일이고, 또 그렇게 낫게 해준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쓰임 받은 사도들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보면 정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서 굉장히 불편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7-18절)
당시 제사장 대부분이 사두개파였습니다. 당시 양대 산맥을 이루던 종파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였고, 대제사장 쪽은 주로 사두개파였습니다. 성전에서 일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적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사두개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두개파의 가장 큰 특징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하며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현세주의자, 세속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이 후의 삶은 없으니까 이 세상에서 재미있게 살고, 쾌락을 위해 살고, 자기만을 위해 살자는 주의가 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의 심기가 아주 불편해졌습니다. 사도들이 병자들을 ‘다’ 낫게 했는데, 이 사람들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아닙니까?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제사장들도 있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핍박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사도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축복해주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축복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도들을 핍박하고 공격하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시기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왜 시기가 가득했겠습니까? 자기들은 못하는데 사도들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인 자기들이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사도들에게 모든 백성들의 칭찬이 가고 있고 모든 주목을 사도들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기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기가 가득한 마음으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18절에 나오는 “옥”이라는 단어는,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권력자의 집에 있는 사설 감옥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 감옥에 해당되는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감옥은 단순히 개인이 지켜서 탈출도 가능한 감옥이 아니라, 굳이 나라에서 관리하는 공적인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삼엄한 경비와 감시가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겁니다.
2) 사도들이 감옥에 갇히게 하시고 나서 이끌어내신 이유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19절)
그들은 도저히 나올 가능성이 없는 공공 감옥에 사도들을 집어넣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는 아무런 제한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옥문을 여시고 사도들을 끌어내셨습니다. 이때는 전체 사도들이 다 잡혀 들어갔는데 주의 사자(천사)가 끌어낸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꼭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들로 하여금 감옥에 가지 않게 하실 능력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종교지도자들이 와서 사도들을 잡아갈 때 못 잡아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갑자기 잡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번개를 내려서 타죽게 하시든지,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져 거기 빠지게 하시든지, 어떻게든 못 오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잡혀가지 않게 하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잡혀가게 하시고 옥문을 여셔서 풀어주셨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급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 같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한 대로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길로 되거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응답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정확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왜 허락하십니까? 거기에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정확한 때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무 때나 오신 게 아닙니다. 400년 동안이나 유대인들이 고난을 겪다가 예수님이 오시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지만,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야곱의 가족 70명이 이집트로 들어갈 때 400년 이상 있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가나안을 정복할 때 첫 번째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돌라고 하셨고, 마지막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소리를 지르라고 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은 6일째까지도 안 무너졌습니다. 7일째에도 여섯 바퀴까지 돌았을 때는 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일곱 바퀴째 돌고 소리를 지르니까 무너졌습니다.
이전에 수요예배 때 살펴보았던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려서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에게 왔는데, 엘리사가 그에게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 몸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나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부하들이 그래도 해보자고 하여 들어갔는데, 여섯 번까지 나병이 안 나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들어갔다 나오니까 나았습니다.
시편(121편)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거나 졸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상황을 너무 정확히 아십니다. ‘왜 하나님이 제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십니까?’라고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막아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들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그 후에야 기적으로 나오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0절)
바로 이것입니다. 주의 사자가 전해준 이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이것을 위해서 감옥에 들어갔다가 기적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감옥에서 놀라운 기적으로 옥문이 열리고 철통같은 감시를 뚫고 나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메시지입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
왜 감옥에서 건져내셨습니까? 감옥 안에 계속 들어가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계속 거기 두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갔다 기적으로 나옴으로써 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이 생명의 말씀이 전파될 수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항상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뒤에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까? 가서 사명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내 기도를 안 들어주시나?’ ‘하나님은 왜 내가 원하는 걸 안 해주시나?’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을 때, 좋은 일을 허락해주셨을 때, 왜 그것을 주셨는지 다 잊어버리고 그냥 가서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들을 감옥에서 건져내신 이유는, 성전에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명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구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약속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직장을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사업이 잘되도록, 성공하도록, 자녀가 좋은 학교 가도록, 좋은 직장 잡도록,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이루도록, 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건강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그 ‘다음’에 무엇을 하겠는지,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팠는데 기도해서 하나님이 낫게 해주셨지만, 건강해진 다음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높아지게, 사업이 성공하게,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그렇게 해주셨다면, 왜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이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잊어버리고 이상한 삶을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게 아니고, 그것을 들어주셨다가는 큰일 나기 때문에 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흔한 예이지만, 어린 아이가 날카로운 칼을 갖고 놀겠다고 하면 그것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을 주었다가는 자기도 찌르고 남도 찌르고 큰일 나기 때문에 안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리사에게는 날카로운 칼을 줄 수 있습니다. 요리사는 그것으로 요리를 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는 의사에게도 수술을 위해 날카로운 칼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위해서 이것이 필요한가가 중요합니다. 그냥 달라고 할 게 아니라, 그것을 주시면 뭘 할 건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십니다. 그게 없으면 우리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안 주십니다. 아니면 그것을 다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왜 감옥에 집어넣었다가 기적으로 빼셨습니까? 그냥 하셨어도 되는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게 되어 더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두 종류의 사람들
1)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명대로 순종한 사도들
그런데 천사가 옥문을 척 열어주었더니 사도들이 가서 술 마시며 파티를 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데 옥문을 열어주시며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1절)
그 받은 말씀 그대로 사도들은 옥을 나온 다음 새벽에 성전으로 갔습니다. 밤에 풀려난 다음에 바로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성전으로 들어가서 가르쳤습니다. 순종은 이렇게 즉시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두고 미루게 되면 사람은 마음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마음이 뜨거워져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라고 하신다면 바로 그것을 실행하셔야 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풀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끝나자마자 나가서 바로 푸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마음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아침이 되고 한낮이 되면 할까 말까 하다가 ‘사람들도 많고 그러니 다음에 하지’라고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주시고 사명을 주실 때는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새벽에 성전에 가보았자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숫자가 상관이 없는 겁니다. 하라고 하셨으니까 즉시 가서 새벽부터 거기 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사람 눈치를 보는 종교지도자들
여기 대조가 되는 것은, 이런 놀라운 역사가 사도들에게 일어나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뭘 하고 계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겉으로만 종교지도자들이었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빛이신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이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두려움에 떨겠지? 아침이 되면 벌벌 떨면서 설설 기어 나오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회가 소집되어서 모든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아주 살벌한 분위기로 불러서 야단치면 이들이 벌벌 떨면서 ‘알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2-23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들을 끌고 오려고 간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감옥문은 단단히 잠기어 있습니다. 게다가 경비를 선 군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보초를 잘 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감옥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놀랍니다.
땅굴을 파거나, 옥문을 부수거나, 경비병들을 쓰러뜨리고 갔으면 이해가 되는데,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사도들 열두 명이 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정말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이끌어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4절)
‘성전 맡은 자’는 아주 높은 사람으로 대제사장 다음인 2인자격인 사람입니다. 이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보고받고 충격에 빠집니다. 그래서 “의혹하여” 말을 하는데, 충격과 혼란에 빠져 도저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해석인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했고 지식이 많은 이 엘리트들이 도저히 이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과학으로 다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은 이 세상의 아주 일부만 증명을 해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을 말할 것도 없고, 불과 10년 전쯤에는 지금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기로 뭐든지 하고 인터넷도 하고 TV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런 게 있다고 말은 들었지만 진짜 그런가 했습니다. 20년 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를 못하던 것이 되는 게 참 많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을 보면 너무 놀라워서 우리를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것들이 하나도 놀라운 게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해서 놀라운 것이지, 하나님의 수준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으니까 이 종교지도자들은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 중심적이었습니다. 이들이 24절 뒷부분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 일이 어찌될까”, 즉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핵심 동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혹시라도 우리에게 안 좋은 영향이 미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는 겁니다.
사도들의 영적인 영향력이 너무 크고 자꾸 커지니까 시기심도 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인데, 하나님의 기적으로 감옥문이 열리면서 또 다른 기적과 선포할 수 있는 간증거리를 만들어준 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사도들의 영향력이 더 커지고 교회가 더 퍼져 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이 일이 어찌될까”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앞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은 항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매주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아주 애를 썼습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썼습니까? 예수님을 놓아주어야 자기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당시 함께 갇혀 있던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면 자기에게 아주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에 평화주의자인 예수를 놓아주어야 좋으니까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니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은 항상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 하며 사람들의 눈치만 보는 겁니다.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5-26절)
종교지도자들의 부하들은 이미 기가 꺾인 상태로 거기를 간 겁니다. 분명히 자기들이 잡아다가 감옥에 쳐 넣었는데 감쪽같이 없어지고 게다가 성전에서 그들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속으로 두려움이 올라왔을 것입니다.
가서 사도들을 잡아오는데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해서 폭력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른 때 같으면 막 때리면서 체인으로 묶은 채 길에서 고문을 하며 끌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두려워서 공손하게 데려 왔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 또 다른 핍박 앞에서의 담대한 믿음의 선포
사도들은 도망간 게 아니라 성전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금방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금방 보고가 들어가고, 그래서 데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공식이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떨 때는 기적으로 나와서 담대하게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나게 하실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감옥에서 조용히 있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여주시는 뜻에 매번 순종하며 나아갈 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면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그냥 갇혀 있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이렇게 기적으로 옥문을 여시고 풀어주셔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때그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민감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기도를 하고 평소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보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감옥에서 나온 사도들에게 새벽부터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성전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을 보내서 또 잡혀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7-28절)
이 종교지도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철통같이 감사하고 있던 감옥에서 사도들이 감쪽같이 나왔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혔다 나온 사도들을 다시 잡아왔지만, 지금 주도권은 사도들에게 있습니다. 이 종교지도자들도 이제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도들이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겁니다. 하나님이 상황을 놀랍게 바꾸어주셨습니다. 몇 시간도 안 되는 잠깐의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이 더 큰 영광을 받으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로 삼아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대제사장이 야단치는 말 속에 사도들을 칭찬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가르침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그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아주 담대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29절)
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런 위기상황에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진짜 있는 말, 본심이 나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잡고 있는 진짜 인생관이 나오는 겁니다. 사도들의 핵심 인생관이 뭡니까?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인생관이 뭡니까? 하나님은 상관없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자기들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인생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눈치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교회에서도 서로 눈치를 봅니다. 직장에 가도 윗사람과 옆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사업체에서도 손님 눈치를 봐야 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의 눈치도 봐야 합니다. 자기가 고용한 사람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까 눈치를 봐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국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눈치를 안 보고 막 하다가 전직 대통령들이 계속 잡혀 들어갔습니다.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말조심을 합니까? 영어로 politically correct, 즉 정치적으로 옳은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고, 어쨌든 옳게 들리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의 관계를 잘 세우기 위해서 올바른 말, 아름다운 말,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걸린 문제,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문제라면, 타협하기 위해서 적당히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또 다시 핍박이 왔지만 또 다시 똑같은 믿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30-32절)
베드로와 사도들의 이 말은 지금까지 이들이 선포한 내용과 똑같습니다. 4장에서 본 것과 똑같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4:10, 12)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4:19-20)
똑같지 않습니까? 오늘 여기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먼저, 십자가의 예수, 둘째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바로 그들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자기들을 핍박하는 사람들, 아니 자기들이 따르던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을 이전에도 핍박했고 지금도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감옥에 가둘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이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담대히 선포합니까? 오히려 원수들에게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라.’ 그리고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우리가 직접 보았다.’라고 합니다.
[나가는 말]
우리 보통 인생을 가리켜 ‘일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삶>에서 공부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1생이 아니라 3생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9개월 정도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 1생입니다. 생명이 그 속에서 자라다가 이 땅에 태어납니다. 그것이 2생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두 번째 삶, 2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2생에서 죽고 끝나면 3생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영생(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엄마 뱃속에서의 1생 때 얼마나 건강하게 잘 있는가가 이 땅에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1생에서 어떻게 했느냐가 2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2생에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 다음 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생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1분 1초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은 그들의 인생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데 썼습니다.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다’ 백성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자신들의 1분 1초를 썼습니다.
다 모은 그 시간에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매일 매일이 반복되는 삶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매일 그저 내 욕망을, 내 욕심을, 내 죄를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이 진리와 생명을 전하는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영광중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너는 뭐 하다 왔니?’라고 하시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 닦고 세수하고 밥 먹고 놀다 왔는데요.’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 반복인데, 물론 놀 때도 있고 쉴 때도 있고 재미있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들처럼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일에 우리의 인생을 사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냥 자기의 시간을 다 모아서 시기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고, 악한 일을 하고, 자기 높아지려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데에 낭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우리를 부르십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전하라!” 바로 이러한 일에 쓰임 받는 인생,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다고 칭찬받는 고귀한 인생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