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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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1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행전 3장 1~10절)
[들어가는 말]
제 아버지께서는 한국에서 육군 대령 출신이신데, 제가 아주 어렸을 때(2살) 전방에서 근무를 하셨습니다. 1960년대 말이었고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기습하려고 시도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 때로부터 얼마 안 됐고, 게다가 그 무장공비들이 제 아버지가 소속된 사단 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전방은 더더욱 경계가 삼엄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벌한 경계의 분위기 속에서, 두 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던 제가 북한과 접한 최전방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40이 넘어서 얻으신 아주 ‘귀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저를 너무 보고 싶으셔서 부하장병을 보내어 서울에 있던 집에서 저를 데려오게 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그 살벌한 최전방에 어떻게 두 살짜리 아이가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아버지가 연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두 살짜리들은 절대 못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저를 데리고 가는 지프차가 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담당군인이 물었을 겁니다. “저 아이가 왜 여기를 들어갑니까? 못 들어갑니다.” “이 대령님 아들입니다.” “통과!” 아버지의 이름만 대면 살벌한 최전방 검문소들도 다 통과되었던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권력 있는 사람의 이름이 통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은 사람의 이름이나 유명한 학자의 이름이 권위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하늘과 땅에서 가장 권세 있는, 가장 높은 이름을 알려줍니다. 그 이름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만 위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단지 그 이름이 상징적인 가치만 가질 뿐입니다. 아니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만 해도 파워가 없어집니다. 만약 제 아버지께서 제대한 후나 자리를 다른 부대로 옮긴 다음에 제가 그 최전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면 되었겠습니까? 절대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은 죽음 후에 더욱 위력을 나타내게 되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존귀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통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엄청난 파워를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도할 때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이 한 사람을 만나다 (1-6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1절)
여기서 제 구 시란 우리 식으로 하면 오후 3시입니다(성경의 시간에서 6을 더하면 됨).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9시, 낮 12시, 오후 3시, 이렇게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해 뜨는 시간이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해 지는 시간부터 하루가 시작합니다. 그래서 안식일도 토요일이 아니라,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입니다.
여기 나오는 오후 3시는 해가 지기 전 그날의 마지막 기도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3시는 아직 낮이지만 저녁기도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전에 가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적이 누구에게 일어납니까?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기적이 언제 일어납니까? 기도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기도했는데도 안 일어나던데요.’ 물론 기도한다고 항상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만이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평범한 것 같아도 매일 내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단, 어떻게 이 공기가 안 끊어지고 우리에게 거저 주어집니까? 이것부터가 기적 아닙니까? 우리가 마음껏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가는 자체부터 기적입니다. 이 세상에는 숨을 못 쉬어서 인공호흡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껏 숨을 쉴 수 있고 게다가 그렇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기가 있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통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다 감사의 제목으로 느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다 기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기적을 나를 위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사람과의 만남을 허락해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은 영적인 사건을 예비해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엄청난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가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 영적인 사건을 기도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그 영적인 사건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만나는 사건이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2절)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었는데, 그를 사람들이 메고 와서 놓아두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The Beautiful Gate(아름다운 문)입니다. 저번 안식월 때 예루살렘에 갔을 때 성전 터가 남아 있고 벽에 이 미문 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굉장히 높았습니다. 바로 그 미문은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문입니다.
그곳에 이 다리 못 쓰는 사람을 사람들이 날마다 메어 와서 두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구걸하게 한 것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라면 굉장히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돈을 주게끔 구걸을 하도록 그를 거기에 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 봐도 불쌍한 사람 아닙니까. 이 사람은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베드로와 요한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남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의 사건이 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우연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응답인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을 만났다면 그것이 우연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사건이 되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연히 그렇게 되었나 보다. 재수가 좋았다.’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계획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이 잘 풀렸을 때, 생각지도 못한 데서 전화가 와서(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립니다. 아니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데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탁 만나 일이 풀립니다. 그런 기가 막힌 일이 생길 때 ‘아, 내가 재수가 좋구나’ 하면 기도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아, 지금 하나님이 뭔가를 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만나고 있는데, 이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미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두 명일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과의 만남이 그에게는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과 기적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상황을 우리가 짐작해보면, 먼저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잘 살다가 중간에 무슨 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못 쓰게 된 사람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못 걸은 장애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자기가 실수를 해서가 아닙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고 날 때 뭔가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있겠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지금도 부족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장애인들을 우대하고 돌보기 위해 사회가 애를 쓰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도 이전에 비하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세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장애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겁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저주 받았다고 여겨지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다리를 못 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도와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데려다줘야 어디를 가지 혼자는 못 갑니다. 누가 데려가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게 또 얼마나 불행합니까?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고 의지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들고 자존심도 상합니다. 여러 가지로 아주 힘든 사람입니다.
셋째로, 그는 다리를 못 쓰니까 할 수 있는 게 구걸이었습니다. 그런데 구걸의 수단이 바로 자신의 장애였습니다. 다리를 못 쓰는 것이 밥벌이가 되었습니다. 다리를 못 쓰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고 돈을 줍니다. 불구로 태어난 것도 불행한데, 그것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사서 밥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니까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 더더욱 불행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메고 왔는데 “날마다” 그를 미문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돕는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동업자인데, 조직을 만들어서 그를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겁니다. 그가 돈을 벌면 그 사람들이 돈을 나누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불행한데, 그걸 통해서 동정심을 사 구걸하여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런데 그 돈을 자기가 다 갖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떼어줘야 합니다. 자기가 아마 더 적게 받았을 겁니다. 피를 빨아먹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누가 돈 한 푼을 줘도 자기는 그 중 얼마 밖에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정말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에게는 항상 절망감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고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꿈도 없고 미래도 없고 내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하루하루 나와 구걸하는,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장애인으로서 그렇게 밖에 할 수밖에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 미래가 없고 소망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대개 사람은 쾌락주의자가 됩니다. 미래가 없으면 오늘을 즐기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생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저 한탕주의 아니면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그것 밖에는 자기에게 낙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영화가 하나 나왔는데 불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영화입니다. <신과 함께>라는 영화인데, 지옥에 대해서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원래는 인터넷에 연재되던 웹툰(만화)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불교적인 배경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켜주는 것 같습니다.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가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산 행동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못했으면 벌을 받고 잘했으면 넘어갑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내용을 다 믿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믿고 성경에 나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런 것이 있다고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선을 행하고 착하게 살고 남을 돕는 이유가 바로 그렇게 죽은 다음에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정말 천국이 있어서 그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기쁨 가운데 사는 사람과, 지옥이 있기 때문에 벌을 안 받기 위해서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천지 차이입니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그 기쁨과 소망 가운데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의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지옥에 떨어져서 벌 받게 될까봐 어쩔 수 없이 선을 행해야 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고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지옥에 가기 싫어서 그렇게 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옥에 가서 벌 받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착하게 살아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예배도 나와 주어야 되고, 어쩔 수 없이 기도도 해야 되고 성경도 봐야 되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것은 정말 불행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벌 받을까봐 벌벌 떨며 지금 착한 일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데려가셔서 영원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해주시는 분이신데, 그 소망을 가진 사람은 부담 때문에 착하게 살고 부담 때문에 신앙생활하고 부담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너무 기뻐서 이런 신앙생활을 하며 사는 것이지, 부담 되지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사람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무 미래도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가 40대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되도록 그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3절)
지금 세 사람이 만나는데,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갈 때 ‘한 푼 줍쇼’ 하고 구걸합니다. 그냥 지나가는 행인들 중 두 사람일 뿐입니다. 지금 다리를 못 쓰는 이 장애인 거지의 유일한 관심은 돈입니다. 오직 자기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은과 금입니다. 작은 동전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한 푼 줍쇼’ 하는 겁니다. 본능적인 요구이고 매일 습관적인 말일 뿐입니다.
이렇게 습관에 따라 아무 소망 없이 그냥 하니까 하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동물적인 욕구에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경우가 요즘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어서 거기 앉아 ‘한 푼 줍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여기서 바라는 것은 영적인 것, 영원한 생명, 소망, 하늘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돈 한 푼만 달라는 겁니다. 그럼 오늘 먹고 산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주목해서 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4절)
이때까지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자기 처지가 그러니까 고개 푹 숙이고 있었던 겁니다.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지나가는 발만 보면서 한 푼 줍쇼 하는데, 베드로는 그에게 고개를 들고 “우리들을 보라”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날마다 여기 있었으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이때 처음 본 것은 아닐 겁니다. 분명히 매일 봤을 겁니다. 기도하러 갈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물론 시간에 따라 없을 때도 있었겠지만,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에 맞춰 거기에 딱 있어야 돈을 벌기 때문에 이런 시간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많이 봤을 텐데, 이 순간 따라 베드로의 마음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겁니다. ‘저 사람이 더 이상 저런 삶을 살지 않게 도와줘라.’ 하는 감동을 받고 “우리를 보라!” 하고 말합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도 매일 똑같은 삶을 살다가도 갑자기 이런 성령의 감동으로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이 사람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5절)
베드로가 보라고 했을 때 돈을 기대하면서 쳐다봅니다. ‘뭔가 돈을 좀 더 주려나? 뭔가 특별한가?’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과의 만남은 그가 바라던 돈 이상, 그보다 훨씬 좋은 것을 얻게 되는 놀라운 순간이 된 겁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건이 임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6절)
이 말은 구걸하던 이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던 말입니다. ‘돈은 없다. 그런데 예수를 주겠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는 이 사람이 구하던 돈(은과 금)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 즉 일어나는 능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일입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100%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다쳐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이렇게 됐는데, 그런 사람이 일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일어나서 걷는다는 개념조차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 느낌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일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조차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일어나 걸으라!”
“네가 지금 원하는 은과 금(돈)은 나에게 없다.” 이때 그가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아니, 돈도 없는 주제에 뭘 쳐다보래?’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겠다.” ‘어, 그게 뭔가? 은과 금보다 더 좋은 건가?’ 그랬더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성령의 역사이고, 믿는 자들 즉 교회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전부 무슨 얘기를 합니까? 전부 은과 금 이야기입니다. 신문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게 뭡니까? 뉴욕 월스트리트(New York Wall Street)입니다. 한국은 코스닥, 코스피 지수입니다. 전부 은과 금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디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지난주 헌금이 얼마인가? 숫자가 뭔가?’ 전부 돈이나 숫자에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사람을 전부 돈으로 평가하며 A급, B급, C급으로 나눕니다. 연예인들도 정말 톱 배우들이 있고, B급, C급으로 나눕니다. 주연급이 있고 조연급이 있습니다. 전부 돈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돈을 벌어주느냐에 따라 톱스타냐 아니냐가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전부 은과 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은과 금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은과 금’이 꼭 돈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말하는데,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도 자꾸 가치 있게 여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과 금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이 부분만 나오면 제가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부터 불렀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은과 금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와 동시에 여기서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예화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예화입니다. 그는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인데, 13세기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엄청난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우리의 교회는 땅도 많이 가지고 있다. 건물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은과 금은 많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어버렸다.”
이것이 이 시대에도 얼마나 적용되는 말입니까? 이 시대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도 세상처럼,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자꾸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겁니다. 은과 금입니다. 주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으로 해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교육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조선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학교들을 많이 세웠고, 병원도 세웠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그런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만약 선교사가 가서 병원만 짓고 학교만 짓고 그냥 왔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하나도 전하지 않았다면 온전한 선교가 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이 갖고 싶어 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주고 싶어 하시는 것과 일치가 될 때 응답이 됩니다. 하나님은 A를 주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는 B를 달라고 하면 맞지 않는 겁니다. 그래 놓고는 하나님이 응답을 안 주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을 구하면 받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주고 싶어 하시는 것과 일치할 때 응답을 받는 겁니다.
교회(믿는 사람들)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나그네를 돌보아야 합니다. 외국인의 인권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구호 단체인 것은 아닙니다. 또 교회는 당연히 교육을 해야 합니다. 한글학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들도 많고, SAT 교실이나 방과 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되는 겁니다. 그런 것을 너무 열심히 하는데 정작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 교회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 교회이지만 의료 기관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개혁해야 하지만 개혁 단체는 아닙니다. 이 시대의 정의를 외치며 부정한 것들과 싸워야 하지만, 교회가 정의 실현 단체는 아닌 겁니다.
요즘 ‘미투’(MeToo)운동이라고 한국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가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 사회에서 좋은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소속 신부 한 분이 성추행을 하고 성폭행을 해서 엄청난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긴 했는데 뒤에서는 그런 일을 했다는 겁니다. 앞에서 정의를 외치며 진보적으로 잘하던 정치인들도 요즘 뒤로는 성추행을 하고 성폭행을 한 것이 드러나 다 내려놓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의를 외쳤는데 정작 자기는 정의롭지 못했던 겁니다.
교회도 정의를 외쳐야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정말 가져야 되는 것은 바로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는 줘야 합니다.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줘야 합니다. 세상에는 돈도 있고 재물도 있고 명예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기에 교회의 본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제쳐놓고 다른 것을 더 열심히 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교회가 다른 것을 잘해서 세상의 칭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주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나는 여기 은과 금이 있는데 이것도 받고 예수도 받고’라고 한 게 아니라, “나는 은과 금이 없다. 그런데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준다. 그것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래서 그에게 정말 필요한 일어나는 것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영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이 사회의 모습이고, 미국의 모습이고, 한국의 모습이고,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서 다른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할 일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다 (7-12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7-8절)
이 사람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는데, 만약 못 일어나고 다시 주저앉으면 얼마나 창피합니까?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나서 ‘바이, 바이’ 하고 갈 수 있습니다. 이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서 역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섬기는 것도 얼마든지 말로 할 수 있고 전도도 얼마든지 말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행동이 따르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확신입니다. 주님을 믿는 겁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해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로도 하지만, 그 사람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는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괴로운 사람을 위로하고, 깨어진 가정을 가서 보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십시오.’라고 말로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달려가서 함께 있어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보듬어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하려는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바쁩니까?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그래서 우리는 따로 시간을 정해서라도 모여서 그런 것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보듬어주고,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도 해주고,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여서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발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귀로 듣고 입으로 기도하며 찬양하지만, 발을 움직여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니까 발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일어나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8). 그는 한 번도 성전 안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문에 앉아 구걸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 사람은 성전에 함께 에배자로 들어간 겁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 사람이 그 동안 성전을 몰랐겠습니까? 너무 잘 알았습니다. 성전 어디에 가면 목이 좋고, 어디에서 돈이 잘 벌리고, 몇 시에 가야 하고,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밥벌이였습니다. 겉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의 핵심을 이때에서야 처음 그가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그날의 성전은 더 이상 밥벌이의 장소가 아니라, 그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는 곳이었고, 은혜와 감격이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보다 기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동안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우울하고 수치스러웠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돈을 원했는데, 돈보다 더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행복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사람은 ‘누가 나를 오늘 성전에 데려다 주려나? 내가 돈 벌면 얼마를 떼이려나?’와 같은 걱정은 하나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비가 와도 상관없고 날이 좋아도 상관없고, 더워도 상관없고 추워도 상관없습니다. 이제는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9-10절)
사람들은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썼던 이 사람을 매일 봐서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걷는 것뿐 아니라 방방 뜁니다. 하나님을 막 찬양합니다. 너무 충격을 받는 일이 된 겁니다.
이 한 사람의 변화가 나중에 보면 5천 명이 하루에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한 사람의 변화가 수천 명의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게 중요합니다. <새로운 삶>과 <기도의 삶> 때도 살펴보지만, ‘나 하나 기도해서 될까?’라고 하는데, 됩니다! 나 하나가 기도를 안 하니까 안 되는 겁니다. ‘나 하나 정직하게 살아서 될까?’ 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무너질 때 성벽을 붙들고 잡아 줄 수 있는 사람 한 명을 찾으셨는데 한 명이 없어서 타락하여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유식한 사람도, 부자도, 권력자도 아닙니다. 잘생긴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어도 되고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오는 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 한 사람이 수천 명의 마음을 바꿔놓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로 그겁니다. ‘나 한 사람이 해서 뭐가 될까?’ 됩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안 내어드려서 그렇지, 시간을 안 내고 돈을 안 내고 가서 섬기지 않아서 그렇지, 나 자신을 조금만 내어드려도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선교를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몽골처럼 광활한 땅이나 중국처럼 10억이 넘는 큰 나라에 가서 두세 명의 팀이 가서 조금 일을 감당할 때 ‘이 큰 나라에서 내가 하는 이게 뭐가 되겠나?’라고 할 수 있는데, 됩니다! 나 한 사람이 가서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나 한 사람의 헌신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서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통로고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겁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받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나니까 삶이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연민과 미련과 상처 속에 아무 소망 없이 살던 사람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 돈벌이를 하던 이 사람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 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를 받았을 때 예수님 때문에 놀랍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게 일어난 첫 번째 기적 사건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눠주었을 때 바로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바로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 이름을 드러낼 때 바로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우리에게도 넘쳐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