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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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3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4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
(사도행전 5장 1~11절)
[들어가는 말]
지난 2015년 여름 안식월을 가졌을 때 한국에 가서 오랜만에 제가 이민 오기 전 다녔던 교회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열 명 쯤 모였는데 그 중 다른 한 친구와 제가 목사였고, 나머지도 모두 교회에 열심히 나가며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몇 명이 목사인 저와 그 친구에게 부탁하자고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제발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 분야 저 분야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 성경 이야기만 해 달라. 잘 모르면서 경제 이야기, 정치 이야기 같은 걸 자꾸 하고, 우리 전문 분야들에 대해 아마추어 수준에서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아닌 것도 많으니까 그렇게 안 해주면 좋겠다.”라고 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제발 설교할 때 헌금 이야기 좀 그만 해라.” 당시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지 10년이 조금 넘은 때였는데, 지난 10년 동안을 돌아보니까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좀 의아했습니다. ‘왜 저런 말을 할까?’ 알고 보니, 한국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헌금하라는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헌금과 연결이 된다고 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이 헌금, 저 헌금 등 명목을 많이 갖다 붙인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로 강해설교를 하는데, 강해설교에는 지금 제가 하는 방식처럼 ‘연속 강해설교’가 있습니다. 성경의 책을 한 권 정하여 순서대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또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본문을 정하여 그 본문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적용하는 ‘주제별 강해설교’도 있습니다. 연속 강해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본문을 설교자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죽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헌금에 대한 설교는 듣는 성도님들도 부담이 되겠지만 전하는 설교자도 부담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순서대로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과연 헌금에 대한 본문일까요? 사실은 헌금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나니아의 거짓말과 죽음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교회를 좀 다닌 분들은 많이 아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본문에 충격적인 사건이 나오는데, 헌금을 부분적으로 숨겼다가 그저 벌 받고 매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어버린 사건입니다.
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헌금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내려다가 인간인지라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떼어 놓고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세 시간 간격으로 부부가 그대로 죽었습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설일 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조금 전 제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 본문이야말로 많은 설교자들 또는 부흥사들에 의해 가장 악용된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 봐라. 헌금을 제대로 안 하면 죽는다. 그러니까 제대로 헌금해라.’ 하고 위협하는 설교 본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이 사건이 갖는 위치는, 단순히 헌금을 내고 안 내고 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그냥 빨리 읽으면 헌금을 제대로 안 내서 죽었다는 사고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결코 헌금과 관련된 사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믿음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건이라고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에 가장 처음 만드신 완벽한 공동체가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시고 거기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죄가 들어와서 에덴동산이 파괴되는데, 그 원인은 결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많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또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다고 그 다음 사람들도 계속 죄인이 되는 것이냐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쉽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끔 영화를 보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발견되는데 어떤 사람이 그곳에 여행을 갔다가 감염이 되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옵니다. 같이 비행기를 탄 사람들에게 다 전염되고, 그 사람들이 다 흩어지니까 다 전염이 되고, 그래서 온 나라가 뒤집히고 세계가 뒤집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기가 착하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있으니까 그냥 번지는 것입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죄가 그냥 번져버린 겁니다.
다시 신약으로 와서,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서 가장 첫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합니다. 이 교회는 정말 놀랍고 황홀한(fantastic) 공동체였습니다. 위로부터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방언을 하는데 그것도 외국어로 방언하여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자기들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해서 부족한 사람이 없고,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구분 없이 서로 다 나누어 쓰는 놀라운 공동체였습니다.
인류 역사에 이런 공동체가 다시 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4장에 나타난 초기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공동체에 무서운 죄가 들어왔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1-2절)
4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 요셉이 있는데, 별명인 바나바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와 헌금을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에 큰 감동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헌금을 하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당연히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도 존경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바나바가 헌금을 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주목을 받는 것을 질투하고 시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였습니다. 이들도 속으로 ‘우리도 땅이 있으니 팔아서 헌금하자. 우리 땅을 팔아서 바나바보다 더 많이 헌금을 하자. 그러면 사도들과 성도들이 우리를 인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부랴부랴 땅을 팔아 돈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자기 집이나 땅을 팔아 헌금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재정이 필요하다고 할 때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귀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부부는 대단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적과 동기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제일 중요한데,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 겁니다.
나중에 베드로도 말하지만, 자기 재산인데 자기가 마음대로 쓸 권리가 없습니까? 자기들이 처분한 것 중에 일부는 남겨 놓고 일부는 교회에 바칠 권리가 없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잘못될 것은 없습니다. 땅을 팔아서 ‘이것은 땅을 판 돈의 일부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쓸 곳이 있어서 다 드리지는 못하고 이것만 드립니다.’라고 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일부를 감춘 데에 있습니다. 전부 다 낸 게 아닌데 전부를 드린 것처럼 위장한 데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가? 동기가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랑과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가 성도들로부터 받는 저런 존경과 사랑에 대해 질투가 올라온 겁니다. 자기들도 그것을 받고 싶어서 헌금을 한 겁니다. 헌금을 한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족한 지체들을 돕기 위해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된 동기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팔고 보니까, 원래부터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아까운 생각이 든 겁니다. ‘바나바가 낸 것보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다 할 필요는 없다.’ 하고 판단을 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바나바처럼 자기들도 가진 것 전부 다 낸 것처럼 위장한 것입니다.
사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죄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는데, 사탄은 결코 큰 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겁니다. 큰 거짓말이 아니라 작은 거짓말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결코 엉터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엉망이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유혹이 오면 누가 못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교묘합니다.
‘야, 네가 헌금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헌금을 이렇게 많이 하는데, 너도 이것도 쓰고 저것도 써야 되지 않느냐? 또 이렇게 많이 낼 필요가 뭐 있느냐? 땅을 얼마에 팔았는지 누가 아냐? 너희 부부만 알고 있으면 된다. 자식 교육도 시켜야 되고 시집장가도 보내야 되고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교회에 다 바치느냐?’ 이렇게 작은 데서 모든 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질투와 욕심으로 가득한 이 부부가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드린 헌금은 액수로 따지면 큰 헌금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이 액수만 보았을 때는 ‘야, 대단하다!’ 하고 감탄할 만한 액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성도만 있으면 우리 교회는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이런 성도만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겉으로만 보면 대단하고 문제가 될 게 없는데,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감탄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성령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이건 아니다.’
보통 누가 큰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겠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재벌 회장 앞에 가서 ‘이거 용돈으로 쓰세요.’ 하고 재벌에게 10,000불을 줘보십시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 10,000불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런데 재벌이 그걸 보면 감동을 받겠습니까? ‘이게 뭐야? 껌 값이네.’라고 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큰 부자이시고 재벌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신 분이신데,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그저 소위 ‘껌 값’이지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액수에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십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돈도 없는 어린 자녀가 이런 어머니날 같은 때에 자기 나름대로 카드를 쓰고 1-2불짜리라도 선물을 사서 엄마를 줄 때 감동을 받는 것이지, 아이가 갑자기 만 불을 훔쳐다가 선물할 때 감동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돈이나, 아무 헌신이나 받으시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은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거짓된 헌신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을 받지 않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었습니다. 순수하지 않은 헌금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닌 거짓된 방식으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면, 사람들은 감동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전혀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돈 때문에 교회는 시험에 들게 됩니다.
놀랍게도 비슷한 사건이 구약에 하나 있는데,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가 죽고 나서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가나안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첫 번째 성이 아주 강력한 여리고 성이었는데, 그들은 전쟁을 하지도 않고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다가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와’ 소리를 지르니까 성이 무너져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다음 성은 그에 비하면 아주 약한 아이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 성 전투에서는 패배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전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딱 한 번인데 그게 바로 아주 약한 아이 성에게 진 것입니다. 그때 아간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첫 번째 여리고 성에서 얻은 것들은 다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너희가 다 가져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은 그것을 어기고 몰래 훔쳤습니다. 그래서 자기 장막 바닥의 땅을 파고 그 속에 훔친 물건을 깊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나님도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구약이 원래 히브리어(아주 일부가 아람어)로 되어 있고 신약은 헬라어(그리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BC 250년경에 이집트에서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거기에 유대인 공동체가 컸기 때문에, 프톨레미 왕이 번역을 명령하여 유대인 학자 70명을 불러 번역했다고 “70인역”(Septuagint)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인데 히브리어가 아니라 헬라어 성경입니다.
그 70인역의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 물건을 훔쳤다는 단어가 ‘노스피조’(nosphizo)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 2절에서 아나니아가 얼마를 ‘감추매’라고 한 것이 똑같이 ‘노스피조’입니다. 그러니까 아간이 훔친 물건을 땅 속 깊이 감추었던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역시 얼마를 깊이 감추었다는 뜻입니다. 아간이 범한 똑같은 범죄를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꾸짖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3-4절)
“땅이 그대로 있을 때”라는 것은 아직 팔지 않았을 때입니다. 당시 첫 번째 교회 성도들의 헌금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따라 너무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린 헌신이었습니다. 누가 강요해서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너무 은혜를 받았으니까 자기도 뭔가 갚고 싶다고 하며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어떻게 성령을 속일 생각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생각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먼저 계획이 있은 다음에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으로 증오하며 ‘죽이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살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있지만, 돈도 아니고 학위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네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감히 계획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런 거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첫 번째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부흥하고 있었습니까? 한 번에 3천 명이 들어오고,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고친 다음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오니까, 120명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수만 명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방언, 예언, 온갖 은사, 기적, 구제, 봉사, 나눔, 사랑 등 얼마나 놀라운 공동체였는지 모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말씀 공부도 했고, 같이 뜨겁게 합심해서 소리 높여 기도도 했고, 외부로부터의 핍박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내부로부터 이런 문제가 올라오는 겁니다.
요즘 중요한 것이 반도체인데, 아무리 잘 만들어도 거기에 먼지가 들어가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지가 안 들어가게 하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교회도 아무리 수가 늘어나고, 성경공부가 많고, 제자훈련과 사랑의 나눔이 많고 훌륭해도, 거기에 거짓의 영, 속이는 영이 들어오면 그 모든 놀라운 것들이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많은 교회들이 거짓된 것이 하나 들어오면서 무너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하나님은 진리이시지만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탄의 이름의 뜻이 바로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처음에 사람이 선악과를 먹도록 꼬이던 때부터 사탄은 거짓말하는 자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안 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뭘 해도 쓸 데 없는 거짓말을 섞어서 농담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얀 거짓말’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나를 가리려고 하는 게 거짓말입니다. 가볍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 가볍게 한 거짓말에 사탄이 들어붙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거짓말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겠다는 결심을 처음부터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5-6절)
베드로의 꾸중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나니아가 쓰러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즉각 죽음으로 심판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큰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 감춘 것을 아내도 알았다고 했는데, 이 부부의 문제는 전 재산을 안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더 깊이 내려가 보면, 결국 ‘내가 하면 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 내가 하면 된다. 내가 주인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하면 된다. 하나님이 필요 없고 내가 하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온 것은 강요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기뻐서 한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못 했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재산권을 자기가 갖고 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치려고 했다가도 무슨 사정이 생겨서 다 바치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 이렇게 됐습니다. 이것만 바치겠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결국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해드리고 하나님 앞에 그냥 나갔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돈이 아닙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부자이신 분이 무슨 우리의 푼돈이 필요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주인이냐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누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하라고 하신 것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만 살면 우리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좋고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해가 되는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상숭배나 악한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이다. 하나님 필요 없고 내가 알아서 한다.’ 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그리로 못 가도록 막아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한다. 하나님 필요 없고 이 순간에는 내가 주인이다. 하나님도 모르시겠지.’ 하고 나가다가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 삽비라의 비극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7절)
이 표현이 참 절묘한데, 2절에서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라고 합니다. 남편이 행한 악한 일, 다시 말해 세상의 악에 대하여, 슬쩍 감추고 거짓된 것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 욕망에 눈먼 사람은 사탄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몰라도 상관없는 것에는 지식이 해박했는데, 몰라서는 안 될 생명의 법칙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8절)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아나니아가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알면서 왜 물어보느냐? 그냥 이야기하지 왜 알면서 모르는 척 마음을 떠보느냐?’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남편이 죽었다고 당연히 아내도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너라도 빨리 회개하고 돌아와라.’ 하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 하나님의 것을 훔친 다음에 아이 성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당연히 이겨야 할 전투였고 아주 약한 성이었는데도 졌습니다. 그 까닭을 하나님이 알려주셨습니다. 누가 훔쳤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범인을 찾게 되었는데, 사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십니까? ‘야, 저기 아간이 훔쳤다. 당장 끌어와라.’라고 알려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지파의 대표가 나와 제비를 뽑습니다. 그랬더니 아간이 속한 유다 지파가 뽑힙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족장들이 다 나와서 뽑으니까 아간이 속한 세라 족속이 뽑힙니다. 세라 족속에 속한 가문의 대표들이 나와서 뽑으니까 아간이 속한 삽디 가문이 뽑힙니다.
하나님이 범인인 아간을 지목하시며 단번에 ‘저 아간 잡아내!’라고 하실 수 있었는데 왜 제비를 뽑게 하셨습니까? 그 과정 자체가 아간에게 회개의 기회였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끝까지 주시는 겁니다. 한 번에 그대로 죽이실 수도 있었는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간의 입장에서는 제비뽑기가 계속되면서 점점 자기에게 좁혀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거기 훔친 사람은 자기 밖에 없습니다. 빨리 나와서 용서를 빌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가문의 남자들이 뽑힌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뽑히고 나서야 바른대로 말하가고 해서 말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시치미 떼고 있습니까? 회개하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도 모르겠지’ 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지만 그 상황에 되면 ‘설마, 설마, 하나님이 설마’ 하는 겁니다.
결국 아간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와 함께 공범인 가족들을 돌로 쳐 죽이고 돌무더기를 쌓게 되는데, 그곳을 ‘아골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아코르’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골짜기’입니다. 결국 사탄에게 넘어가서 무너진 그의 인생은 괴로움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간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다 잘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었을 삽비라는 아간의 길을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베드로가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했을 때 즉시 ‘사실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말로 ‘삽비라’ 그러면 좀 어감이 이상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Sapphira이고 sapphire와 연관되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생명의 기회를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냥 거짓으로 대신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역시 또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착각 속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내던졌습니다. 누가 막은 게 아니라 스스로 내던졌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간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를 했는데 온 이스라엘이 패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도 단순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개인 문제가 아닌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바나바가 한 일을 잘 알고 자기들도 하고 싶었다면 이들은 요즘 말로 교회의 중직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리더인 이들이 이렇게 했을 때 전 교회에게 부정적이고 나쁜 영향을 미치며 해가 되는 겁니다. 목회자인 저나 장로님이나 중직자가 이상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개인의 문제로 끝나겠습니까? 온 교회가 뒤집어지는 겁니다. 주님은 이 죄를 정결하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결론을 내립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9-10절)
이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6절에서도 아나니아가 죽었을 “젊은 사람들”이 메어 나가 장사했는데 삽비라가 죽었을 때도 “젊은 사람들”이 또 메어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뭔 죄입니까? 갔다 들어왔더니 또 장사지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젊은 사람들, 즉 청년들이 참 귀합니다. 청년들이 이런 굳은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청년들이 많을수록 우리 교회는 참으로 복된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열심히 섬겼던 이 젊은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 욕망을 섬기느라 하나님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삽비라의 생명은 자신이 불러들인 사탄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3절에서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사탄이 역사해서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활짝 열어서 ‘사탄아 들어와라’ 했기 때문에 사탄이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발적으로 사탄에게 마음을 내어줬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속이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 자기 파멸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9절에서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함께 꾀하여”,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중 한쪽만 하나님을 속이려 한 게 아니라 함께 꾀하여 하나님을 속이려 했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이 단어에서 ‘심포니(symphony)’가 나왔습니다.
함께 연주하는 게 심포니인데, 지난 번 4장에서 악한 연합을 보았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원수였는데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서로 앙숙인데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로마 사람들과 유대인들도, 유대인들은 독립을 하겠다고 하고 로마 사람들은 억누르는 관계인데 하나가 되어 예수를 죽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러한 악한 연합을 해서 주님을 속이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외부 세력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이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내부 사람이고 신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1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한창 부흥하던 초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성도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잡혀 들어갔을 때에도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핍박은 함께 기도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사탄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거짓의 영을 퍼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대전쟁사 같은 것을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이 오랑캐를 막겠다고 세운 것인데, 그랬어도 만리장성을 뚫고 들어와 점령했습니다. 매수해서 그랬습니다. 성을 정말 다 무너뜨리고 들어온 게 아니라, 지키던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성문을 열게 하여 들어와 점령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내부에 거짓의 영을 퍼뜨리려 한 것이 사탄의 작전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굉장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무서워서 덜덜 떠는 게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리스펙’이 있는데, respect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경외한다’는 말이 바로 respect한다는 말입니다.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존경하면 그 앞에서 함부로 못 합니다. 존경하지 않으니까 함부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더 존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크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3. 종교심이 아니라 참 믿음으로 나아가라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확 죽이신 것은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물어야 할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그렇게 죽이시는가? 너무 하시다.’ 하는 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라, 여기서 꼭 자기를 향해 질문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도 똑같은데 나는 왜 안 죽나?’ 이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사실 그들 정도의 열심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 정도 헌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헌신되어 잘하고 있는데 이 한 가정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죄를 제거하여 정결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정말 순결하고 정결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많이 지나서 우리는 너무나 세상과 타협하여 더러운 모습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가정에도, 교회에도 잘못된 모습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와 똑같이 지금 하시면 여기에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긍휼을 베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법칙 중에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형 사고가 가끔 터지는데, 그런 대형 사고가 갑자기 뻥 터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터지기 전에는 반드시 어떤 전조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된 수많은 사고와 징조들이 있고, 그런 것이 계속 조금씩 일어나다가 어떤 한 사건으로 크게 폭발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산업 재해가 발생했을 때 아주 크게 다친 사람이 1명 나오면, 그 전에 똑같은 원인으로 가볍게 다친 사람들이 30명 정도, 그리고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정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1:30:300 법칙’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큰 사건은 항상 사소한 것을 방치해놓을 때 발생합니다. 사소한 것이 발생했을 때 잘 파악하고 미리 방지하면 아주 큰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징조가 있는데도 무시하고 괜찮겠지 하며 나아가면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가 난다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음주운전을 했는데 살짝 스친 것 외에는 사고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음주운전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분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제가 미국에 이민 와서 대학생일 때 당시 30대 중반 박사과정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자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날도 술이 약간 취했는데 “내 특기는 술 먹고 운전하는 거야.”라고 하며 가려고 했습니다. 모셔다드리겠다고 했더니 “에이, 난 특기가 음주운전이니까 괜찮아.”라고 갔습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음주운전을 했는데도 몇 년 동안 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입니다. 그렇게 계속 살면 언젠가 뻥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유명한 골프선수 중에 타이거 우즈(Tiger Woods)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몇 년 전에 아주 엄청난 바람둥이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몰락했습니다. 지금 재기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고 있는데 옛날의 그 엄청난 실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최근에 약간 잘하는 것 같더니 들쭉날쭉 하면서 그냥 평범한 선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야구 좋아하는 분들은 한국의 강정호라는 선수를 아실 겁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Pittsburgh Pirates) 팀 소속으로 메이저리그(Major League)에서 아주 잘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 시즌이 끝나고 휴가로 한국에 갔다가 음주운전을 해서 잡혔습니다. 그래서 미국 비자가 거부되어 못 들어왔습니다. 바로 몇 주 전에 간신히 풀려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 실력이 나오겠습니까? 옛날 실력을 찾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전에도 음주운전을 몇 번 했는데, 다행히 누가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기둥에 부딪치고 도망가다 잡혔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조현상이 다 있는 겁니다. 그때 빨리 마음을 잡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대개 사람들은 조금 해봐도 괜찮으니까 ‘괜찮나 보다. 하나님도 모르시나 보다.’ 하며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내부 사람들이었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었고, 그것도 중직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이들이 당시 초대 교회에서 열심히 했는지는 몰라도, 결국 이들이 가졌던 믿음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종교심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교심과 참 믿음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심은 출발도 끝도 다 ‘자기’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자기가 구도를 하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겁니다. 자기가 뭔가 하려는 마음이 들면 열심히 찾고, 그런 마음이 안 들면 안 합니다. 그게 종교심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시작도 끝도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비록 나는 지금 별로 하나님을 찾을 기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먼저 내게 와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먼저 해주신 것에 감사해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신 것에 감사해서 ‘감사합니다’ 하며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시키시기도 전에 ‘하나님이 뭘 원하시지?’ 하고 미리 알아보며 나아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가진 것은 참 믿음인 줄 알았는데 그냥 종교심에 불과했다는 것을 오늘 보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이 모습이 혹시 나에게는 없습니까? 정말 믿음이 아니라 종교심인데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신데도,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데도,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으로 혹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필요할 때는 찾고 필요 없을 때는 내 마음대로 하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종교심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찾기도 전에, 알기도 전에 먼저 나를 아셨고 먼저 나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서 반응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예배는 억지로 교인이니까 어쩔 수 없어서 나와 하는 게 아닙니다. 헌금은 박스가 있으니까 체면상 하거나 교인이니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 그냥 놓아두었으면 저 영원한 멸망으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던 나를, 아니 그리로 가고 있던 나를 붙들어서 저 영원한 천국으로 불러주신 그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나와 예배하는 겁니다. 감사해서 헌금도 드리는 겁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도 하는 겁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제자의 모습대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참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