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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25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

(사도행전 222~36)

 

[들어가는 말]

 

지난주에 있었던 “VIP와 함께하는 말씀잔치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 큰 은혜와 도전을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정말 시간 시간마다 너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들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지혜의 말씀을 전할까 도전과 감동이 되었습니다. 많은 내용들이 <생명의 삶>에 나오는데, 그것을 최영기 목사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들으면서 이게 이래서 이렇게 된 거구나하고, 그 배경이 되는 내용을 이해하게 되어서 더 좋았습니다.

 

여러 말씀이 있었지만, 그 중에 인생은 출장이다라는 말씀이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출장을 다녀본 분들을 아시겠지만, 출장을 가서 그저 내가 재미있는 것만 찾아 다니며 놀거나, 맛있는 음식만 찾아다니거나, 관광만 즐기다 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됩니다. 출장 가서 자기 일만 하고 와도 안 됩니다. 출장은 회사에서 목적이 있어 보내는 것이고, 출장을 간 사람은 회사가 이 출장을 통해 자기에게 맡겨준 일을 하고서 돌아오는 겁니다. 그게 출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데에는 바로 그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출장 보내신 것입니다. 아직 안 믿는 분들은 그것을 모를 수 있지만,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왜 지금 이곳에 두셨는지를 깨닫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명을 이루는 출장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생을 출장이 아니라 관광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출장을 왔으면 회사에서 나를 보낸 목적을 이루고 사명을 다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어떻게 하면 내가 즐겁게 지낼까, 어떻게 하면 내가 재미있게 지낼까,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출장의 특징은 회사에서 나를 보낸 목적(사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언젠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장 중에 갑자기 명령이 떨어져서 다 일정을 끝내지 못했지만 돌아가야 할 때도 가끔 있습니다. 그 귀환 시기는 내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정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마치는 것도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귀환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는 즉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회사 일은 안 하고 관광만 즐기다 갑자기 돌아간다면 완전히 낭패입니다. 물론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에 우리는 즐기면서 관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확실하게 인생을 출장으로 살았던 분들입니다. 자기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았고 그것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곳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주어져 있는 동안 다른 짓을 하지 않고 오직 최선을 다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   예수 사건의 연속인 성령 사건

 

2주 전 본문에서 베드로는,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여러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된 것은 그들이 술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미 구약의 요엘서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설교한 첫 번째 핵심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술에 취한 것도 아니며, 몇 백 년 전에 요엘을 통해 주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가 또 다른 주제로 설교를 계속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2)

 

이것을 보면 성령님의 사건과 예수님의 사건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가리켜 사도들이 행한 일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에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령행전이 아니라 예수행전’ 2부입니다. 1부는 복음서이고, 2부가 사도행전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성도들이 능력을 체험하고 방언으로 말하게 된 엄청난 사건은 예수님이 행하시던 능력이 그분이 가신 후에도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70년대, 80년대에 부흥회를 하며 성령 운동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교파 중에도 성령을 강조하는 오순절 계통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성령 운동을 하는 분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고 너무 성령의 능력만 강조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언, 예언, 병 고침, 투시 등등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 운동을 하는 분들이 부흥회에서 안수기도를 하면서 쓰러뜨리는 것을 많이 합니다. 초점이 예수님에게 있어야 하는데, 쓰러뜨리고 병이 낫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현상에 너무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결과로도 나타나지만, 진짜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을 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쓰러뜨리는 부흥사가 영광을 받고 주목을 받고 유명해지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마를 때려 넘어뜨리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것은 가짜입니다. 하지만 진짜로 손도 안 댔는데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마다 예수님이 높임을 받으시는가 아닌가를 보면 이것이 진짜 성령의 역사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비슷한 역사가 악령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구분합니까? 누가 영광을 받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영광을 받는가? 그것을 보면 이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똑똑하기 때문에 아주 비슷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예수 사건 없이는 성령 사건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설교한 두 번째 핵심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선포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분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22). 예수님은 30세까지 개인적인 삶을 살며 준비하시다가, 그때부터 3년 정도 공적인 사역을 하셨습니다. 3년 정도의 사역 기간 동안 하신 일이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큰 권능으로 이루어진 생애였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일어나고, 맹인이 눈을 뜨고, 못 듣던 사람이 귀가 뚫리며 말도 하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도 쫓겨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나와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즉 죽음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3)

 

여기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새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고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온 대로 그것은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된 것입니다. 갑자기 잡혀서 죽은 게 아니라, 미리 알고 계시다가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신비한 일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는데, 즉 하나님께서 미리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를 이미 이야기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계획해놓으신 것인데, 십자가는 또한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인 것이 됩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것인데 또한 인간의 손에 의해 행해진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법 없는 자들이라는 것은 율법이 없는 로마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비록 뒤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조종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로마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 하시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너희가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과 하수인들을 이용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이다. 그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너희들이 죽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이 바로 거기에 있던 유대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예수를 다른 사람들이 죽였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데, ‘네가 죽였다고 하면 마음이 섬뜩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진행되었는데 로마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해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4)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에 계속 머물러 있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망의 고통에서 풀서 살리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형태의 고통이나 죽음도 예수님을 영원히 묶어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지만, 예수님은 원래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이야말로 성령 사건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확실하게 보인 때가 바로 오순절인데, 그러므로 진정한 오순절의 능력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예수님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오순절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에게도 나타나는 부활의 능력인 것입니다.

 

 

2.   다윗의 부활신앙

 

베드로는 여기서 아주 절묘하게 구약 성경에 나와 있는 다윗의 부활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성경(히브리서, 로마서 등)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BC 2000년경에 살던 사람인데, 자기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죽여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아들을 통해 수많은 후손들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이 아들이 지금 죽으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고 그래서 그를 통해 수많은 후손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확실한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1000년 후인 BC 1000년경에 살았던 다윗이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 본문이 놀라운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오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고, 오순절을 이야기하고, 구약의 사건을 두 번이나 인용하고,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베드로가 개인적인 능력으로 했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한 메시지입니다.

 

베드로가 다윗의 부활신앙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시킵니다. 이런 지혜가 어떻게 베드로에게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원래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지, 머리가 잘 돌아가고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영적 안목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말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25절부터 28절이 시편 168-11절의 인용입니다. 그런데 시편 16편을 읽어보면 사도행전 본문의 말씀과 약간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시편은 원래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을 번역한 것이고,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는 인용은 원래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어가 약간 다릅니다. 하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부활신앙을 확실히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5)

 

다윗의 부활신앙이 여기서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자기 앞에 항상 주님이 계시다고 합니다. ‘항상 계신 분을 내가 뵙고 있고, 모시고 예배하고 찬양하며, 그분은 마치 공기처럼 항상 함께 하시며 나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으신 분이시다. 내가 그분을 뵈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분이 내 우편에 계시다라고 합니다. 오른편이라는 말은 권능과 능력의 자리를 말합니다. 능력으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다윗은 시편 121편에서 주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영원히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6)

 

첫째, 다윗은 내 마음이 기뻐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기쁜 일만 있겠습니까? 지난 번 말씀잔치에서 최영기 목사님이 행복합시다라고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사실 행복의 성경적인 표현은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기쁜 일만 있겠습니까? 눈물 흘릴 날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고, 오해를 당하는 일도 있고, 여러 가지 실수할 때도 있고, 영광스러운 날도 있지만 굉장히 수치스러운 날도 있지 않겠습니까? 건강할 때도 있지만 병들어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런 힘든 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 풀리고 있든지 잘못되고 있든지, 아주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마음이 기뻐할 뿐 아니라 혀도 즐거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입술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다윗은 여러 시편에서 고백을 합니다.

 

내 혀는 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주로 이야기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혀가 저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욕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불평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남을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저주를 하는데, 그러니까 그 혀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즐겁지가 않습니다.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혀는 영적 온도계(thermometer)인 동시에 영적 온도조절기(thermostat)입니다. ,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내 영적인 온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영적 상태가 어떤지를 내가 말하는 것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온도계가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혀는 내 영적 온도조절기도 된다는 겁니다. 너무 더우면 시원하게, 너무 추우면 덥게 할 수 있는 게 온도조절기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내 영적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혀가 중요합니다. 혀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매일매일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의도적으로라도 즐거운 말, 행복한 말, 감사의 말을 해야겠습니다. 감사의 말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장에서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고 하면 하나도 없어요. 똑같아요.”라고 하는데, 똑같은 것 같아도 잘 생각해보면 분명히 있습니다. 똑같다는 말은 생각을 안 해보았다는 말입니다. 감사의 제목을 안 찾아보았다는 말입니다. 한 번 찾아보십시오.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이 늘 똑같은 것 같아도, 매일 똑같은 길을 가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시면 다릅니다.

 

하다못해 내가 길을 걸을 때 땅에 있는 개미가 똑같은 개미가 아닙니다. 흙도 똑같이 그대로 있지 않고 조금씩 움직입니다. 풀도, 꽃도 다 다릅니다. 잘 보시면 감사의 제목을 일상생활에서 찾아낼 수 있는데, 그게 영적인 실력입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감사의 제목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육체도 희망에 거한다고 합니다. 사실 육체는 썩는 것입니다. 생명이 떠나는 순간 썩습니다. 그런데 그런 육체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부활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7)

 

인간의 가장 깊은 즐거움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행복이나 즐거움의 핵심은, 내 눈을 만족시키고 내 귀를 만족시키고 내 입을 만족시키고 내 몸을 만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에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만족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은데, 그런 것을 가지면 일시적으로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좋은 게 아닙니다. 영원은커녕 며칠 못 갑니다.

 

예를 들어, ‘내가 꼭 저 차 좀 타면 좋겠다.’라고 하며 돈을 모아서 드디어 그 차를 사서 탑니다. 그럼 처음엔 너무 좋은데 며칠 지나고 나면 아무 감흥이 없습니다. 그런 게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억만금을 갖다 집어넣어도 만족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런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만약 내게 10만 불이라는 돈이 생겼다고 해보십시오. ‘, 좋다, 기쁘다라고 하는데 바로 그 다음 순간에 불안해집니다. 10만 불이 9만 불이 되고, 9만 불이 8만 불이 됩니다. 그러니까 금방 없어질 거라고 불안해합니다. 그런 돈이 생겼으면 감사하고 좋아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은 그것이 없어질까 봐 불안해지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없을 때 불안이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갖다 놓을 때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영원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에 못 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항상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 땅에서 다 갖추었다 해도 그 불안이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식에 있습니까? 학위에 있습니까? 성공에 있습니까? 사람들의 인정에 있습니까? 그런 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이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잘못되게 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를 지옥 가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하는 분이시다.’ 하는 데에 평화가 있고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특히 전능하신 하나님,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역사하시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도움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동역자로 삼으시고 나에게 일을 맡겨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바로 이러한 사명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지는 겁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8)

 

바로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졌던 다윗의 기쁨입니다. 기쁨이 충만한데 주 앞에서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 다른 데 가서 잠깐 재미가 있을 수 있어도 거기에 참된 기쁨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진정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다윗의 예언과 베드로의 선포


이러한 다윗의 부활신앙에 대해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선포합니까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29-31)


다윗은 분명히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지난번 안식월 때 이스라엘에 가보니까 예루살렘에 지금도 다윗의 묘라고 해서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죽어서 묘 안에 갇혀 있지만,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1절에서 다윗이 미리 본 고로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먼 과거(예수님 오시기 1000년 전)에 살았던 다윗이 믿음의 눈으로 자기 씨에서 날 메시야를 미리 보았다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천 년 전에 보았다는 겁니다.


성령님이 이렇게 역사하시고 믿음이 생기면 우리의 과거가 해석이 됩니다. ‘,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이전에 하나님이 그래서 그때 그 일을 허락하셨구나.’ 지금 벌어지는 일도 그래서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그리고 또 앞으로도 이렇게 되겠구나하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해석이 됩니다. 다윗은 천 년 후에 자기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미리 보았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2)


다윗이 미리 보았던 그리스도에 대해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살려주셨고,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천 년 전에 다윗이 보았고, 지금 베드로가 천 년 후에 보는데, 다윗과 베드로가 여기서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령의 역사로 다윗이 예언한 사건을 베드로가 친히 목격하고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다윗이 말했던 그 부활이 바로 지금 우리 때에 이루어졌다. 우리가 그 일의 목격자이고 증인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요한 빼고 다 도망갔습니다. 너무 두렵고 희망이 다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옛날 직업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여자들이 보고 와서 살아나셨다고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까 무덤이 비어 있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개켜져 있습니다. 무거운 돌로 막아놓았는데 그 바위가 옮겨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저녁에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도마가 없었는데, 일주일 후에 다시 나타나셔서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날 희망을 다 잃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고, 그 후에 예수님을 만나고도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서 또 물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앞에 새벽에 나타나셔서 직접 물고기까지 구워주시며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그 후에 일시에 500명이 넘는 성도들 앞에 보이셨습니다.


사도행전이 쓰일 당시나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 부활을 믿기가 쉽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이 믿기가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럼 왜 어려운 일을 왜 일부러 이야기합니까? 살짝 기절했다 살아났다고 하는 게 더 믿기가 쉽지, 왜 진짜 죽었다 살아났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소위 부활 장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쓸 때 사도 바울은 지금 내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다수가 살아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이 진짜가 아니고 가짜였다면 그런 편지를 어떻게 쓰겠습니까? 죽었다 살아났다고 어떻게 이야기하겠습니까? 거짓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기 어려운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이 놀랍게도 다윗이 천 년 전에 미리 내다본 그 부활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보았던 부활의 감격과 기쁨과 승리와 능력이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런 게 어디 있나 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면서 그 능력을 알게 되고 그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 그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까? 바로 오순절입니다. 오순절 때 성령을 받으면서부터 부활의 능력이 이들을 사로잡고 이들을 통해 그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3)


베드로의 설교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을 하나 뽑으라면 33절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망의 고통을 풀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셔서 승리의 주님으로, 부활의 주님으로, 또 인류의 메시야로, 왕으로, 통치자로, 다시 오실 재림의 주로 높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 주셨다고 합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눈에 보이게, 귀에 들리게 나타나셨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나서 보게 되었고, 성령의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도 나오고 예수님도 나오고 성령님도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사건이고 오순절이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일어나는 사건이고, 남들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의 사건입니다. 나의 사건이고 지금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승리와 축복은, 성령을 받으면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런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4-35)


이것은 시편 110: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할 때 첫 번째 는 하나님을 말하고, 두 번째 내 주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편에 앉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6)


결국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사건은 인위적이거나 술에 취했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약속의 사건이다. 그 성령 사건의 주인공이자 핵심이자 성령의 원래 모델은 예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삶,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과 승리와 축복이 바로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은 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죽인 이 예수, 너희가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원래 주와 그리스도가 아니셨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원래 주와 그리스도셨는데 그것을 모두가 알도록 드러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의 끝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불덩어리가 되어서, 그 뒤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이 찔려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여, 하루에 남자만 3천 명이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는 그냥 예수 천당이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분은 부활하셨다. 지금도 살아 계시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의 증인이다.’였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안 믿으시는 분들은 아니지만, 우리 가운데 아주 오랫동안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같이 태어날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도 있고, 몇 십 년씩 믿은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세월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점점 더 이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들쭉날쭉하고 아주 형편없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성령님이 오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성령님은 역사하고 계신데 그것을 받을 우리의 그릇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밖에 소나기가 억수 같이 쏟아 붓고 있지만 우리가 그릇을 밖에 놓고 거꾸로 엎어보십시오. 그러면 물은 한 방울도 그릇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간절함으로 마음을 열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몸부림이 없고, 생명을 걸 애타는 마음과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안 나타나는 것뿐이지, 성령이 안 계신 게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런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 생기기를 원합니다. 내가 정말 이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고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갈증과 목마름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가 그것을 매일 체험하면서 그 능력을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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