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8325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0

고난의 시작과 믿음의 선포

(사도행전 41~12)

 

[들어가는 말]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 전략을 짜기 위해 모였을 때 사탄이 모든 부하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무슨 계략으로 인간들을 사로잡으려고 하는가?” 한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의심을 넣겠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우리는 그 전략을 오랫동안 써 봤는데 이제는 잘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에 종교는 부인하면서도 신은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본능이 있기 때문에,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하나님을 찾는 열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는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악령이 말했습니다. “나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집어넣겠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지옥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그 대답에 사탄이 또 대답했습니다. “그 전략도 통하지 않을 거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무서운 지옥 같기 때문에 지옥을 항상 두려워 할 거야.”라며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악령 하나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크리스천들만을 집중해서 공격하겠습니다. 그들에게 끊임없는 고난을 주어서 예수를 믿으면 재앙이 온다는 의식을 집어넣고 필요할 때에는 죽는 고통까지도 주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탄은 정색하면서 말했습니다. “그 방법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야. 이전에 우리가 완전히 실패한 전략이기 때문에 절대 사용해서는 안 돼. 우리가 지난 역사를 통해 크리스천들과 선교사들에게 많은 핍박을 하고 죽이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박해받는 성도들을 보며 주님을 위해 당하는 죽음을 영광스럽게 여기더군.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고 있어.”

 

그때 구석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악령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 모든 것을 다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급히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믿으면 되고 적당히 믿으면 된다는 마음을 집어넣겠습니다.” 그러자 다들 기립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 하는 말이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고 합니다. No pain, no gain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삶에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영혼의 성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통해 성장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예수님과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괜히 자기가 욕심으로 잘못해서 당하는 어려움이 아니라, 정말 주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런 고난은 우리를 아름답고 정결하게 하며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1.   첫 번째 박해 속의 놀라운 부흥 (1-4)

 

1)  박해의 시작

 

처음 생긴 초대 교회가 장밋빛 꽃길만 걸으며 쉽게 성장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과 핍박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 강해지고 더 뜨거워졌습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더 진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경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 어둠의 세력의 저항도 강했습니다.

 

지난번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가 능력 있는 설교를 했을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하루에 3천 명이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고, 성전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켰을 때 놀라운 역사가 본문에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하던 그때 사탄도 아주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서 더 강하게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려고 할 때 사탄의 공격도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서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며 강하게 나가면, 그렇게 강하게 성령으로 나가는 우리를 사탄이 맞서는 게 아니라 뭔가 빈틈이 없는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참 은혜를 받고 변화되려 할 때, 신앙생활이 잘될 때, 기쁨이 충만하고 교회 사역이 잘될 때, 교회가 막 성장하고 교제도 잘되고 기분도 좋을 때, 사탄이 작은 틈을 노리고 그곳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작은 약점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한 틈을 막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40일 특별기도회를 하면서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기분 좋고, 다 잘되고 있고, 잘 풀리고 있을 때, 작은 틈을 노리고 사탄이 들어옵니다.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될수록 더욱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며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1-2)

 

지난주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죽 합니다. “왜 이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가 아니고 예수의 이름의 능력이 이 사람을 고쳤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싫어했습니다. 영어로는 hate가 아니라 disturbed입니다. 굉장히 마음이 불편했다는 겁니다. 지금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전하고 부활을 전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주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막으려고 온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크게 세 종류입니다.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 때부터 제사장들이 있어 왔습니다. 원래는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이때는 돈을 주고 사거나 정치적으로 로마가 임명하면서 그런 질서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가 제사장들인데, 그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대제사장입니다. 당시에는 로마에서 대제사장을 임명했는데, 6절에 안나스와 가야바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했고,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했던 바로 그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한 명인데 여기는 계속 안나스와 가야바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을 재판할 때도 먼저 안나스의 집으로 갔다가 가야바의 집으로 갑니다. 그들을 동시에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퇴임 압력을 받아 일단 자리에서 물러난 안나스가 자기 사위인 가야바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주었는데, 뒤에서는 그가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권력 암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장인과 사위가 겉으로는 협력하는 것 같은데 뒤로는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겉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지만 실권은 안나스가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도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갔고 그 다음에 가야바에게 갔습니다.

 

두 번째로 성전 맡은 자인데 성경에 주가 달려 있는데 경비대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장군, 통치자, 총독 등의 의미로서, 최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치안과 경비는 24개 그룹으로 나뉘어 담당했는데, 그 총책임자가 이 사람입니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의하면, 그는 대제사장 바로 다음 자리인 유대교 서열 제2위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높은 사람이 왔습니다.

 

세 번째로,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 당시 두 종파가 있었는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바리새파를 많이 꾸짖으시며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반대에 있던 사람들이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이유로 정치를 멀리하고 로마를 반대하며 이스라엘의 독립을 원하던 반면, 사두개파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하면 친일파처럼, 사두개파는 로마제국에 찰싹 붙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기들이 장악한 있던 권력과 부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 각계각층의 상위직을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도 사두개인들이었고, 제사장들 대부분이 사두개파였고, 유대교 서열 2위인 성전 맡은 자도 사두개파입니다. 제사장 쪽은 대부분이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언급된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은 다 같은 파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고위층에 있고 권력을 잡고 있던 실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은 현실지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 이 세상이 전부이지 부활이 뭐가 있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세에서 어떻게든 많이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막연한 다음 세상을 믿기에는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의 위력이 너무 크게 느껴졌던 겁니다. 그것이 사두개파 사람들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앞장서서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었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외아들임을 자칭하는 나사렛 출신 떠돌이 랍비 예수를, 자신들의 권력과부를 지탱해주는 기존 사회와 종교의 질서와 자기들의 기초를 흔드는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출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자기들의 허락도 없이 자기들이 맡은 성전 안의 솔로몬 행각에 와서, 자기들이 제거해버린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예수가 부활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만물을 회복하실 심판주다.’라고 가르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떼로 몰려와서 막으려 합니다.

 

제사장은 당연히 백성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간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람들의 어려움과 상처와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인데,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과 부와 권력을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정보력이 많고, 정보원들을 많이 두고, 군인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는 겁니다. 종교적인 데는 별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해치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소식에는 재빨리 움직이는 겁니다.

 

 

2)  놀라운 부흥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3-4)

 

유대 종교 관습에 따르면 날이 저문 다음에는 죄인을 심문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가 아주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안나스의 집에 끌려와 재판을 받으십니다. 그 다음에는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십니다. 해가 지면 죄인을 심문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저지른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재판한 것이 다 불법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이들이 그 법을 지킵니다. 해가 저무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의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에 성전 미문으로 들어가다가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그 사람을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는데, 해질 때까지 두세 시간 이상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저녁 때가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혔지만, 갇힌 후에 남자만 오천 명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믿으라고 권할 때 믿을까 말까 합니다. 그래도 전했으니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감옥에 갇혔는데 잡힌 다음에 남자만 오천 명, 즉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 명 이상의 엄청난 사람들이 믿은 겁니다. 이것이 놀라운 역설입니다. 첫 번째 박해인데 교회는 오히려 부흥했습니다. 그 당시 안 믿던 사람들이 믿어서 부흥을 한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꼭 무섭고 두렵고 나쁜 것이 아님을 여기서 봅니다. 내가 없어도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꼭 내가 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잡혀가도 하나님은 부흥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콜럼버스가 지난 10년 사이에 메트로 지역이 두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많아지고 집값도 많이 올랐습니다. 백만, 이백만 되는 도시에서도 교회가 갑자기 며칠 사이에 만 명이 되면 대단한 뉴스거리인데, 당시 인구밀도도 높지 않던 예루살렘에서 단 며칠 만에 만 명이 넘어가는 엄청난 교회가 이루어진 것이 놀랍습니다. 그것도 사도들이 갇혔는데도 그런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코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해서 일어납니다.

 

 

2.   박해하는 자들의 실체 (5-7)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5-7)

 

이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유대인들의 공회가 소집되었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라는 것은 일종의 국회 같은 것입니다. 로마가 다스리는데 자꾸 유대인들이 와서 종교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니까 그들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세운 기관입니다. 공회는 7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제사장이 의장인 기관으로,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를 다루는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그 대신, 사형을 시킬 권한은 없습니다. 종교 문제만 처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기서 모였다는 겁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인데,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정치와 타협하면 안 된다고 하며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나스와 가야바와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입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같이 모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평소에는 원수였던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되었고, 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지금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나오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처리하는 데에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두 파가 같이 모여서 같은 목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관리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 같고, “서기관들은 바리새파로서 율법과 전통의 전문가들입니다. 안나스는 대제사장이었는데 퇴임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가야바가 이때 대제사장인데, 요한과 알렉산더는 당시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이었고, 대제사장의 문중도 다 참여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이 여기에 다시 모인 겁니다.

 

그들은 모두 성전 문 앞에서 다리 못쓰던 사람이 일어난 사건을 들어서 압니다.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메시지의 핵심은 자기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도 정보원들을 통해 다 들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들은 청중들이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서 남자만 5천 명이 믿었다는 정보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죽여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제자들이 나와서 더 큰 영향력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충격을 받고 패닉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비상대책회의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모였습니까? 첫째는, 시기심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나면서부터 다리 못쓰던 사람을 고친 것 같은 큰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모인 그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가르치는데 백성들이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사실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킨 엄청난 능력을 사람들이 보았으니까 거기에 몰려드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백성들의 관심이 가는 게 싫었던 겁니다. 인정과 존경을 빼앗기는 게 싫었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자기들이 종교 지도자라고 옷도 멋지게 걸치고 다니고 거룩하게 보였는데, 그 체면과 권위가 말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다 물러나야 하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이적을 행하신다면 종교 지도자들인 자기들을 통해서 하셔야지,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러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니라고 몰아가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어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조작과 조종에 능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까지 올라와서 기득권을 잡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조작해서 모략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고서 자기가 올라가려는 흑색선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려면 우리를 통해 해야 한다. 설교로 은혜를 주시려면 우리를 통해서 해야 한다. 사람들이 변화되고 살아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스타가 되는 게 중요하다. 차라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우리가 드러나야 한다.’ 이런 것이 그들의 입장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이들은 모든 것을 파워 게임으로 봅니다. ‘누가 더 강하냐?’ 지금까지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유대인들의 정치와 경제의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런 기적을 보면서 지도자들이 잘못되었고 진짜는 사도들이라고 하며 시위가 일어나면, 로마 정부가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다른 사람들로 대체하게 됩니다. 실제로 로마 정부는 사람들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군중의 소요나 무질서 사태에 대해 책임을 엄중히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행했느냐?” 그러자 예수님도 한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으로서냐, 사람으로서냐? 그럼 내가 대답해주겠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왜 안 믿었느냐고 할 게 두려웠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백성들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을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느냐 할까 봐 두려웠기에 우리는 모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대답을 안 해주셨습니다.

 

그 질문을 여기서 또 하는 겁니다.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너희가 왜 까불어?’라는 겁니다. 마치 조폭들이 우리 구역에서 누구 허락 받고 장사 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뒤를 봐주는 세력이 누구야?’라고 하는 식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때 나 몰라? 나 총독 조카인데?’라고 했다면 깜짝 놀라며 두려워하면서 조사를 해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은 항상 사람을 이용합니다. 마귀가 갑자기 빨간 옷을 입고 뿔을 달고 꼬리를 달고 삼지창 들고 나타나서 찌른다고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항상 세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지금 사탄에게 이용당해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는 베드로도 이전에 사탄에게 이용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어야 하고 부활할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럼 안 된다고 말렸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누구든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공격합니다.

 

특히 사탄이 잘 이용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벌레는 깨끗하고 청소를 잘하는 데 생기지 않습니다. 벌레가 생기고 거미줄이 쳐지는 곳은 청소를 안 하는 곳, 더러운 곳입니다. 우리 마음도 똑같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와 말씀으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꼬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질투, 시기, 미움, 음란, 욕심, 교만, 폭력이 있는 사람의 마음은 사탄이 아주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급급하고 스스로 성경 지식을 자랑하며 교만하게 나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은 사탄이 조종하고 역사하기에 너무 좋은 마음입니다. 아주 사탄이 갖고 노는 놀이터입니다.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고 있는데, 그들의 권력욕과 돈에 대한 욕심을 이용한 사탄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겸손함으로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순간이라도 우리가 방심하면 바로 이렇게 됩니다. 오랫동안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한순간만 방심하면 마귀가 바로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매일 왜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공부해야 합니까? 귀찮은데 하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안 하면 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뜻을 따라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매일 우리의 마음 밭을 가꾸고 청소하며 주님을 붙들어야겠습니다.

 

이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의 말씀 전함을 너무 불편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들 자체가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가르쳤는데, 사도들이 와서 부활이 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라고 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니까 자기들의 영적 권위가 떨어질 것을 아주 두려워합니다.

 

또 베드로는 예수 안에 죽은 자들도 다 부활한다고 합니다. 불과 두 달 정도 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 예수가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면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러면 종교지도자로서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막아야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라도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데, 체면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지도자들은 재판을 통해 일단 베드로와 요한의 기를 꺾어놓아야 했고, 말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이들에게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 막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곤란했던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말은 막을 수 있지만 이미 일어난 기적은 막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일어났고 사람들이 다 봤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가 안 믿는 분들을 인도할 때 제일 좋은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혹시 말은 좀 막힐 수 있지만 변화된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다리 못쓰던 사람은 가는 곳마다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누가 봐도 예수의 능력이 역사한 증거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변화된 우리의 모습이 가장 좋은 전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3.   담대한 믿음의 선포 (8-12)

 

1)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8)

 

졸지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된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자기들은 도망가고 부인했는데, 그때 예수님은 이 자리에 서서 억울하게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때 큰 감격과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했는데, ‘주님이 서셨던 자리에 내가 서다니!’ 하며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때 보통 사람이면 굉장히 위축되고 겁에 질릴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전에 도망갔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순간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입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 아무 말도 못할 텐데, 베드로의 비결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베드로가 한 게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신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 ‘성령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말재주로 할 수가 없는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담대히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씀을 할 것을 언제 계획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할 말을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미 이럴 때가 올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10:19-20)

 

이 역사가 베드로에게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시기심과 분노와 두려움이 충만해서 말했지만,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해서 말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의 지혜로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할 말을 주십니다. 베드로가 이전에 목숨을 빼앗기는 게 두려워서 벌벌 떨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는데, 지금은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2)  제대로 된 질문을 하라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9)

 

베드로는 이 사건을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에게 아주 유익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이 뭡니까? ‘지금 너희는 백성의 종교지도자라고 하면서 사랑이 없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썼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냐?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났다. 그러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찬양하고, 또 이 불쌍한 사람이 회복되었으니 축하해주는 게 당연한데, 이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 사랑이 없다.’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너희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라고 합니다. 이들의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이라고 합니다. 누가 했고 누구 권세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일으키셨는가? 하나님이 해주셨구나.’ 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지, ‘누구 권세로 했냐? 너희는 권세도 없는데 왜 함부로 이 일을 했느냐라는 데 왜 관심을 갖느냐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뭔가 이적을 행하신다면 우리를 통해 하셔야지, 너희들이 뭔데 함부로 하느냐?’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베드로는 초점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무슨 권세로 되었는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하셨으면 되는 것인데, 본질을 제쳐놓고 왜 자꾸 비본절적인 문제를 가지고 문제의 핵심을 흐리느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니까 바울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이 전파되기만 하면 나는 기뻐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전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기 위해서 나가지만, 반드시 우리 교회를 통해서만, 나를 통해서만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통해 역사하시면 감사한 일이지만, 다른 형제자매들을 통해 그런 역사가 일어나면 감사한 일입니다. 다른 교회를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막 나타났다면 배 아파야 할 일이 아니라 감사한 일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 교회들을 통해서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3)  능력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0)

 

베드로는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렇게 말이 단순하고 분명하고 담대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선포합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예수님이시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 자신이 일으켰으니까 영광이 자기에게 와도 가만히 있을 만한데, 철저히 자기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1-12)

 

율법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공사장에서 쓸모없는 돌을 버리듯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우리 구원의 머릿돌,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핵심이 되는 돌입니다. 그 당시에는 건축할 때 머릿돌이 없으면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예수님을 빼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빼면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되어야 합니다. 설교나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 위한 게 아니라,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고 합니다.

 

오래 교회에 다니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아멘할 만큼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분이나 교회에 처음 나온 분이 들으면 너무 배타적이고 불편한 내용입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왜 다른 길도 있는 것 같은데 예수만 유일한 길이라고 하느냐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쇠가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많지만 맞는 열쇠는 단 하나입니다. 만약 모든 키가 다 통하면 문제 아닙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분이셔야지, 여러 분이면 문제 아닙니까? 내 컴퓨터를 여는 암호가 어떤 것을 쳐도 다 되면 문제 아닙니까? 하나만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요즘 iPhone X이 나오면서 얼굴 인식을 해서 비밀번호를 해제하여 들어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쌍둥이면 둘 다 통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쌍둥이가 아닌 형제도 그냥 통과된다는 겁니다. ‘, 잘됐다. 진리는 여러 개라도 되지.’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만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만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개가 다 되면 문제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꼭대기는 하나이지만 올라가는 길은 여려 개가 아니냐? 꼭 기독교만 유일하고 예수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너무 배타적이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산꼭대기는 어느 길로 올라가도 괜찮다고 하는 말이 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말인 것을 아십니까?

 

그 말은 모든 길을 다 가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길을 올라가다가 막혔는지, 길이 끊어졌는지, 낭떠러지인지 어떻게 압니까? 가 봐야 아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길로 다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자기가 다 가봐야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독선적인 말이 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예수 이외에도 길이 많이 있다고 하면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고 그분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임했습니다. 예수님 중심, 성령의 충만이 교회에게 중요합니다. 또 그럴수록 사탄의 역사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인 승리의 열쇠는 사탄이 공격해올 때 일일이 가서 땜질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 중심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기본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럼 성령 충만함을 주셔서 능히 이길 길을 주십니다.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능력을 주십니다.

 

 

[나가는 말]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가 주님과 교통하며 기도하다가 깊이 잠이 들어 천국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서기 직전에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천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와 함께 영광스런 복음 운동인 감리교(Methodist)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천국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 천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명부를 한참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감리교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웨슬레는 다시 물었습니다. “나의 신앙이 잘못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영광스런 존 칼빈의 5대 교리를 강조하던 장로교인들이 다 천국에 왔나요? 그들은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사가 막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장로교인 역시 한 명도 안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종교개혁이 대단히 실패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천주교인들이 다 온 모양인데 그들은 얼마나 들어와 있습니까?” 이번에도 천사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천주교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웨슬리는 천사의 대답에 너무 괴로워서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왔단 말이오?” 천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이 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교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리교이든, 장로교이든, 침례교이든, 초교파이든, 순복음이든, 가톨릭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12, 새번역)

 

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확신하시고 감격하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들고 나아가 전함으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교회로 더욱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59 지혜 있는 자가 되라 (마 7:24-27; 엡 5:15-21) - 최인순 목사 (06/03/2018) kpccoh 2018.06.03 665
158 또 다른 핍박 앞의 담대한 선포 (행 5:17-3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6 (05/27/2018) kpccoh 2018.05.27 2329
157 복음의 거침없는 전진 (행 5:12-1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5 (05/20/2018) kpccoh 2018.05.20 2545
156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 (행 5:1-1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4 (05/13/2018) kpccoh 2018.05.13 8799
155 한마음과 한 뜻이 된 결과 (행 4:32-3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3 (05/06/2018) kpccoh 2018.05.06 2814
154 성령으로 드린 기도의 능력 (행 4:23-3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2 (04/29/2018) kpccoh 2018.04.29 3096
153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들 (행 4:13-2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1 (04/22/2018) kpccoh 2018.04.22 2499
152 아버지의 마음 (눅 15:25-32) * 일일선교집회 - 추기성 선교사 (04/15/2018) kpccoh 2018.04.15 626
151 왜 우리는 컨퍼런스로 섬기는가? (요일 3:11-18) (04/08/2018) kpccoh 2018.04.08 765
150 숨겨진 왕국 - The Kingdom Hidden (막 16:1-8) * 부활주일 메세지 -스티브 홍 전도사 (04/01/2018) kpccoh 2018.04.01 715
» 고난의 시작과 믿음의 선포 (행 4:1-1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0 (03/25/2018) kpccoh 2018.03.25 2946
148 기적을 일으킨 능력의 이름 예수 (행 3:11-2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9 (03/18/2018) kpccoh 2018.03.18 3460
147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 3:1-1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 (03/11/2018) kpccoh 2018.03.11 3874
146 전혀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행 2:37-4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 (03/04/2018) kpccoh 2018.03.04 2547
145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 (행 2:22-3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 (2/25/2018) kpccoh 2018.02.25 3097
144 염려 없이 사는 비결 (마 6:24-34) - VIP와 함께하는 말씀잔치 3: 최영기 목사 (2/18/18) kpccoh 2018.02.18 1390
143 변화된 베드로의 담대한 설교 (행 2:14-3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 (2/11/2018) kpccoh 2018.02.11 4392
142 바람 같이 불 같이 오신 성령님 (행 2:1-13)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 (2/04/2018) kpccoh 2018.02.04 3973
141 열두 사도의 수를 회복한 의미 (행 1:15-2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 (1/28/2018) kpccoh 2018.01.28 2078
140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행 1:6-1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 - (1/21/2018) kpccoh 2018.01.21 2721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