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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9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2 ✦
“성령으로 드린 기도의 능력”
(사도행전 4장 23~31절)
[들어가는 말]
우리 크리스천들은 말씀과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말씀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지만, 특히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기도가 있지만,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도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하루 세 끼 밥 먹을 때 식사기도를 하는 게 기도생활의 전부인 분들이 다수인 것 같습니다. 진짜로 그것이 기도생활의 전부라면 나머지 시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체크해 보십시오. 꼭 해야 하는 일 외에 남는 시간을 가만히 따져 보면 참 쓸 데 없는 일을 많이 합니다.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일, 영원한 가치를 지닌 일을 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에게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자 엄청난 특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개 인간이 온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입니까? 우리 중에 대통령과 직통 전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대통령을 욕해도 감히 대통령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기도를 부담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고, 기도를 하더라도 인간 중심일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라는 아르헨티나 출신 목사님이 오래 전에 쓴 베스트셀러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책이지만 크리스천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우리는 주로 이런 기도를 한다고 정확히 지적합니다. “하나님, 저의 가정 복 주시고, 저의 배우자 복 주시고, 저의 자녀에게 복을 주시고, 아 참, 저희 개에게도 복 주십시오.” 그러다 뭔가 좀 찝찝하니까 “주님, 저희 목사님도 좀 살펴주십시오. 아멘.” 하고 끝낸다는 겁니다. 각자 말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자기만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기도는 알라딘의 램프와도 같습니다. 램프를 비비면 요정 지니(Genie)가 나와 소원을 들어주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공산주의의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는 칼 맑스(Karl Marx)가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일종의 탈출구가 되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편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와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그분께 초점을 맞추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난 다음에 모여서 다 같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장면인데, 초대 교회 성도들이 ‘내게 복 주시고, 내 가족에게 복 주시고, 내 자녀에게 복 주시고, 내 개에게도 복 주시고’라고 기도했다는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이 ‘주님께서’ 또는 ‘주님의’라고 하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거의 다 자기중심적이고 주된 핵심 단어는 ‘나’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그런 기도도 잘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기도 중에 건강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다음에 뭘 할 지가 없습니다. 건강한 다음에 못된 짓을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또는 기도했는데 계속 아프면 어떻게 할 겁니까?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직장생활 잘하게 해주세요.’ ‘좋은 학교 가게 해주세요.’ ‘좋은 직장 잡게 해주세요.’ ‘우리 자녀가 잘되게 해주세요.’ 잘되면 어떻게 할 것이고, 또 안 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좀 생각을 하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기도제목이 도대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업이 잘되도록, 돈 많이 벌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 하나님을 떠나 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도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던 중세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이, 온 우주가 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천사들이 모두 내 주위를 돌고 있고 그분들이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분이 태양이시고 우리가 그분 주위를 도는 행성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고, 주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1.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드린 기도
오늘 성도들이 어떻게 기도를 했는가 보십시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3-24절)
여기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놓인 다음에 동료들에게 가서 알리고 함께 기도를 합니다. 이때 그들의 기도의 태도가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한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도한 게 아니라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이 교회에 가서 그 상황을 보고했고, 성도들은 앞으로 정말 박해가 오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더욱 담대한 신앙을 갖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아, 큰일 났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하냐? 빨리 챙겨서 도망가자.’ ‘빨리 숨자.’ ‘맞서 싸우자. 칼을 가져오고 무기를 준비하자.’ 하며 의견이 분분하고 흩어진 게 아니라, 한마음이 되어 기도했습니다. 분열됨이 없이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오히려 교회를 더욱 튼튼하게 영적으로 단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한마음으로”라는 것은 ‘나뉘지 않는 믿음으로, 일치된 믿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합심기도’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함께 기도하고 찬양했지만, 합심기도는 특히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후부터 시작된 기도의 패턴입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마음을 합해서 기도한 것은 성령시대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입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같이 모여야 합니다. 같이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겁니다. 120명이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을 때 오순절에 성령님이 내려오셨고, 성령의 능력을 불 같이 받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입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분열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표시가 기도의 분열입니다. 기도가 무기력해집니다. 교회가 기도하지 않습니다. 의견이 분분하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만 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가 무기력해지면 영적 능력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요 15장).
그것을 반대로 말하면,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은 기도를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지난 번 컨퍼런스를 앞두고 40일 특별기도회를 했을 때, 여러 분들이 아침에도 또 저녁에도 오셔서 같이 기도했습니다. 기도했을 때 놀라운 결과가 왔습니다. 기도하니까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관계가 부서지고 팀워크가 무너져 있다면, 혹시 어떤 사역을 하거나 목장에서 마음이 흩어져 있다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회복이 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 부부간에 문제가 있고 자녀와 뭔가가 안 된다면, 함께 붙들고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 됨이 일어납니다.
진짜 하나 되는 교회는 분위기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오래 전 신학생 시절 전도사로 섬겼던 교회가 있는데, 항상 그때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 “우리 교회는 참 분위기가 좋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오면 서로 환영하고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별로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얼마 후에 결국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분위기가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둘째로 이들은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한국교회가 익숙한 ‘통성기도’입니다. 통성기도를 안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를 그렇게 요란하게 해서 되겠는가? 경건하게 해야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묵상기도가 유일한 기도의 스타일인 분들이 꽤 있습니다. 특히 우리 장로교회에는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들이 많은데,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선호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조용히만 해야 한다고 하면 문제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시끄럽게 기도했습니다. 물론 항상 시끄럽게만 기도해야 한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조용히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조용히 기도할 때도 있고 크게 소리를 높여 기도할 때도 있는 겁니다. 내가 갑자기 교통사고가 났거나 물에 빠져서 죽을 위기인데 조용조용히 “나를 좀 살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거기 가시는 분.”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사람 살려!” 하고 소리 지르는 겁니다. 불이 나면 “불이야!”라고 외치는 겁니다.
정말 시끄럽고 크게 합심해서 소리 높여 기도할 때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합심해서 한마음으로 기도했다는 것과 소리 높여 기도했다는 것이 따로따로 벌어진 게 아니라 항상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겁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콘서트나 아이돌 그룹 공연을 보면 대단합니다. 막 소리를 지르고 몸을 흔듭니다. 이렇게 어떤 일개 그룹이나 음악가가 공연을 해도 큰 박수를 치고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치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너무 조용하게 성의 없이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높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교회에서 너무나 필요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대 주재여”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Sovereign Lord라는 말입니다. 원래 종이 주인의 권위를 높여 부르던 호칭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그날 남자만 5천 명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고, 산헤드린 공회는 어쩔 줄 모른 채 위협만 하고 놓아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기 위해 한 말이 “대주재여”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일은 단 하루 만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들을 체험하면서 이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들도 모르게 “대주재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이끄시는 기도, 성령으로 드리는 기도를 할 때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내 안에서 나도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가 나오는 겁니다.
이들이 또 뭐라고 하면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라고 선포합니다. 바로 이것이 찬양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높여 드리고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노래로만 아니라 이렇게 말로, 기도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찬양의 기도입니다. 이처럼 올바른 기도는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시작을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의 시각이 굉장히 좁아집니다. 온통 문제에 갇혀서 굉장히 소극적이 되고 눈이 편협해집니다. 다른 것을 못 보고, 자기 문제 밖에 안 보이는 겁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 밖에 안 보입니다. 내 문제가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드리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심을 기억하게 됩니다.
만약 주님이 정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 하나만 믿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믿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문제 위로 올라가 내려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시듯이, 우리도 위로 올라가 이 상황을 점검하며 내려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볼 때,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2. 말씀에 따라 드린 기도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5-26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놀랍게도 다윗의 시편을 인용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 부분에 ‘주’가 달려 있을 겁니다. 그것을 보면 시편 2:1-2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시편 2편의 인용문입니다.
이들은 말씀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감정대로 한 게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는 항상 같이 가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그분의 생각과 마음을 알려주시고, 우리는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어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하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겁니다.
진정한 기도는 단순히 ‘지금 내가 힘드니까 이 상황을 해결해주세요. 치워 주세요.’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여쭈어보는 게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이 질문을 해보십시오. ‘지금 이 상황에서 좋은 것은 무엇인가?’ 조금 더 나아가면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인가?’ 그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대화로 알려드리는 겁니다. ‘하나님,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히 내 마음을 괴롭히고 불편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면 꼭 그렇게 여쭤보십시오. ‘하나님, 이 상황에서 지금 하나님이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뜻을 찾아보는 겁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라는 것이 시편 2편인데, “열방”(25)이나 “세상의 군왕들”(26)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정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리들”(26)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사주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볼 수 있고, “족속들”(25)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선동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군중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전부 한 편이 되어서 “주와 그의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메시야, 구원자)인 예수님을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시편 2편, 그러니까 약 천 년 전에 이미 예언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와 시편이 쓰인 때는 약 천 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 년 전에 이미 이것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7절)
천 년 전에 예언된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진 것을 이들이 성령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천 년 전에 예언이 된 그대로 “과연”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를 통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사실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원수였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로마인으로 유대 총독이었고, 헤롯은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곳에 로마의 총독이 와서 다스리니까 정치적으로 얼마나 라이벌 관계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손을 잡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그 당시 유대 종교의 양대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주로 서기관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주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였는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이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합세했는데, 유대인들과 이방인인 로마인들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로마 사람들이 자기들을 압제하는데 어떻게 유대인들이 그들과 합세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거스르기 위해서 빌라도와 헤롯이 합세했고,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했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합세했습니다. 정상적으로 하면 있을 수 없는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것을 ‘야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무리들의 하나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오래 전부터 이런 악한 연합이 이루어질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8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이 바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은 그들의 악한 음모의 결과였지만, 그들이 그렇게 악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악함조차도 사용하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요한복음 10장에서도 말씀하시는데, 로마와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를 알지 못하고 힘이 없으셔서 가만히 있다가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길, 즉 십자가의 죽음만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3. 성령으로 드린 세 가지 기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세력들이 예수님을 못 박았던 자들이고, 자신들의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당하면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고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 고난을 없애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크게 세 가지 기도를 합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29절)
첫째로,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라고 기도합니다. ‘지금 이 상황을 심각하게 잘 봐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핍박을 약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고, 핍박하는 악한 자들을 해치워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이신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잘 살펴보시고 이들의 핍박에 맞설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영적 전투에서 적의 공격이 굉장히 강하지만 우리는 물러설 생각이 없으니까 더 확실하고 더 많은 지원을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힘든 상황,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박해의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상황을 바꾸어 달라거나 쉬운 데로 보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을 뚫고 나가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한 겁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보통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십시오. 이것을 치워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꼭 나쁘거나 잘못된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데 ‘저 사람을 좀 치워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더니 실제로 그 사람이 이사를 갑니다. 그러면 ‘할렐루야, 내 기도가 응답됐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더 강력한 사람이 옵니다. 그러면 그게 기도의 응답입니까? 또는 내가 도망을 갈 수도 있습니다. 이사를 가거나 내가 다른 데로 움직입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더 강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결국 문제는 ‘나’입니다. 상황이 바뀌어도 내가 안 바뀌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이 올 수도 있고 다른 데 가봐야 또 다른 사람이 거기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망갈 게 아니라 이겨낼 수 있도록, 내가 변화되도록, 나에게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우리의 능력에 맞는 사명만 주세요.’라고 기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주 비슷해 보이는데 완전히 다른 겁니다. ‘하나님, 나는 요 정도인데 요기에 맞는 걸로 주세요.’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 정도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저 정도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에게 그 수준의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완전히 다른 기도입니다. 내가 크게 되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애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두려움을 혼동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유,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나요? 못 하죠.’라고 하는 것을 보통 겸손이라고 생각하는데, 겸손이 아니라 사실은 두려움입니다. 믿음이 없는 겁니다. 겸손은 ‘내 힘으로는 당연히 안 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될 수 있습니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겸손한 사람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일단 기도해보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신다는 마음을 자꾸 주시면 자기는 할 수 없지만 순종합니다. 그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두 번째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핍박을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핍박이 셀수록 오히려 더 말씀으로 강하게 맞서도록 기도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면, 영적전쟁에서 유일한 공격 무기가 성령의 검, 즉 말씀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방어용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검(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공격 무기입니다. 결국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설교가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자신의 말씀 생활의 모든 것이 되면 곤란합니다. 설교는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조차도 졸고 있으면 말씀 생활이 아예 없는 게 됩니다. 설교 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 교회를 향한 뜻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또 삶 공부를 하면서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여 그 뜻을 찾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도 큐티를 하고 성경통독을 하며 말씀의 검을 평소에 날카롭게 갈아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의 검을 주셨는데 평소에 갈아놓는 게 없어서 막상 영적전쟁이 벌어졌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말씀의 검을 휘둘렀는데 사탄이 껄껄 웃습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날이 뭉뚝합니다. 갈려 있지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해봐야 타격을 입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말씀의 검을 갈아놓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요즘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많은 교회들이 말씀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 이벤트 중심, 행사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제대로 나아가야만 영적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중심으로 한다고 해서 말씀을 공부하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큐티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묵상합니다. 성경통독도 꾸준히 합니다. 삶 공부를 통해서도 말씀을 배웁니다. 또 이렇게 설교를 통해서도 말씀을 붙듭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말씀을 한 가지 붙잡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큐티를 하든, 성경 통독을 하든, 삶 공부를 하든, 설교를 듣든, 한 가지를 잡아서 실천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실천을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서 목장이 중요합니다. 목장에 나가서 ‘내가 지난주 이 말씀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잘됐습니다.’ 아니면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습니다.’라고 나누는 겁니다. 잘됐다고 하면 칭찬하며 더 잘하라고 격려하고, 잘 안 됐다고 하면 괜찮다고 위로해주고 기도해주며 격려해서 말씀대로 살도록 서로 체크해주는 겁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주님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0절)
첫 번째는 ‘저들이 위협하는 이 상황을 굽어살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말씀대로 살면서 전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십시오.’입니다.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남자만 5천 명, 그러니까 수만 명이 영혼 구원을 받는 일로 이어졌는데, 교회가 처음 생기던 그 당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이처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선포하는 기적의 사건들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기적의 능력을 계속 보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학벌이나 지식이나 경험 같은 것이 아니라, 결국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여기 사도행전 당시에는 병 고치는 것과 표적과 기사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자기가 손을 펴면 능력이 나가고 자기가 했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도의 응답이 이뤄지면 ‘내가 세게 기도’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4. 성령으로 드린 기도의 결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1절)
그들의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이 진동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진동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는 바다의 큰 파도를 뜻하는 헬라어 명사에서 왔습니다. 바다에서 큰 파도가 몰려온 것과 같은 모습이 이 ‘진동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온 천지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심을 확인하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맡긴 성도들의 삶 속에, 어떻게 이런 은혜의 파도, 능력의 파도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정말 그들이 기도한 대로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입으로도 전하고, 그 전하는 말씀이 그들의 삶을 통해 뒷받침되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기도했다고 해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가난과 위협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며 힘들었고, 그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했지만 그들을 위협하던 대적들은 여전히 거기서 살기등등하게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했다고 상황이 바뀐 게 아닙니다. 기도하기 전이나 기도한 후나 그들이 처한 상황은 똑같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지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그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난도, 핍박도, 환난도, 죽음도, 결코 성도들의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 동행하게 하고 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렇게 성령으로 기도한 결과 다 성령 충만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결론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담대히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말씀대로 살면서 그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저와 전도사님과 설교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실 때 이렇게 기도해주십시오. 전한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아니 사는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어떤 분들이 목장에 대해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습니다. ‘목장에는 성경공부도 없고 말씀이 없다.’ 그런데 삶 공부에서는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고, 목장에서 할 일은 말씀을 또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삶 공부에서 공부한 그 말씀, 예배 때 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나가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하며 말씀대로 살아보고, 그 살아본 말씀을 가지고 와서 그 살아본 말씀을 나누는 겁니다. 그것이 목장의 역할입니다.
예배 때의 말씀의 역할은 듣고 나서 ‘좋은 말씀이다.’ 하고 그냥 집에 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 내용 중에 하나를 잡아서 ‘오늘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하고 나아가 그 말씀대로 살아보는 겁니다. 그때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 때 능력이 있지, 살지는 않고 말만 해서는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보고서 목장에 와 서로 체크를 받는 겁니다. ‘어떻게 하셨어요? 저는 이렇게 했습니다.’ 하고 서로 체크를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는 잠깐 와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서로 아무 상관없이 그냥 돌아가는 데가 아닙니다. 서로서로 말씀으로 체크해주는 것이 진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십니다.
[나가는 말]
오래 전 우간다에 이디 아민(Idi Amin)이라는 악명 높은 독재자가 통치하던 시절에, 교인이 14,000명이나 되는 Redeemed Church를 담임하던 케파 샘팡기(Kefa Sampangi)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종 정부의 불의함을 책망하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하루는 부활주일이 되어서 7천 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부활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샘팡기 목사가 교회 사무실로 들어오자 5명의 비밀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는 국가의 명령으로 반국가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해 왔다.”라고 하면서 목사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샘팡기 목사는 아주 담담하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지만, 나에게 2분만 시간을 주신다면 잠시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내 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총을 쏴서 죽이겠다는 순간 2분의 시간을 달라고 한 겁니다. 2분의 시간을 허락 받은 샘팡기 목사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의 통치자 이디 아민을 용서해주십시오. 그의 명령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받들어야 하는 불행한 이 다섯 명의 형제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과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를 마쳤을 때 케파 샘팡기 목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기도를 듣던 경찰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중 리더가 무릎을 꿇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목사님은 빨리 피신하십시오. 교회에 계시지 않는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 주십시오.”
그 후 샘팡기 목사는 1973년 우간다를 탈출해서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우간다 기금(Fund for Uganda)이라는 단체를 세워 그 대표로 미국에서 우간다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작은 소책자가 있는데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IVP 간)이라는 책입니다. 샘팡기 목사가 가졌던 부활의 믿음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게 했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올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똑같이 위협적인 상황이 닥칠 수 있고, 암도 걸리고, 교통사고도 나고, 부도도 만날 수 있습니다. 믿든 안 믿든 똑같이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당하는 환난과 예수 믿는 사람이 당하는 환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는 결국 이 땅의 것이 그 삶의 목적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복이 있으면 행복하지만 그것이 사라지면 그 행복도 같이 사라져서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겁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과 어려움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고난의 순간들을 주시는가? 왜 그렇게 어려운 순간,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도 때로는 겪게 하시는가? 저 영원을 바라보도록 훈련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저 영원을 얼마나 바라보며 매일 살아가고 있는가?’ 솔직히 돌아보면 전부 이 땅의 것에만 집중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다 끝날 것들에만 목을 매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나와 영원히 함께 해줄 가치를 지닌 것에 얼마나 투자하며 살고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어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그런 어려움을 주시고, 그 어려움을 통해 당장 이 땅에서 다 끝날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바라보고 거기에 헌신하며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올해는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는 해입니다. 6월이면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립니다. 국가대표를 소집할 때 해외파와 국내파를 통틀어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을 뽑는 게 국가대표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과표를 보면 아침 6시에 기상을 하여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아침 운동, 오후 운동으로 나누어 훈련을 시킵니다. 선수들을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제일 잘한다는 선수들이지만, 오히려 뽑은 다음부터 진짜 훈련을 시킵니다. 개인 훈련도 시키고 단체로 전술 훈련도 시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욱 영광스러운 승리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름 받은 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이 땅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즐기라고 부름 받은 게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목표,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 그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만들어지도록 우리를 용광로에 넣어서 단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쓸 데 없는 일을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 값과 바꿔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는데, 그토록 우리가 소중해서 그렇게 해주셨는데, 우리를 멋대로 살라고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아무렇게나 살다가 인생이 망가지라고 두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고달프고 힘든 삶을 사는 게 정상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 안 믿을 때는 별 것이 아닌데 예수 믿고 보니까 더 힘들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훈련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저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초대 교회 성도들은 바로 그 영원한 가치를 보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기도하며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결코 ‘이 상황을 모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하나님 말씀대로 나아가 살게 해주십시오.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성령으로 드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