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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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2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1 ✦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들”
(사도행전 4장 13~22절)
[들어가는 말]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이자 평론가였던 폴 발레리(Paul Valery)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앙브루아즈 폴-투생-쥘 발레리(Ambrose Paul-Toussaint-Jules Valery)입니다. 194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 국장으로 그를 예우해줄 정도로 그는 프랑스 국민을 향해 지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수많은 명언들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대가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리라.”
참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있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 가기를 원치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폴 발레리의 말처럼 생각하는 대로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마땅히 가져야 되는 바른 생각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압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막상 그 생각을 삶 속에서 용기 있게 실천하기는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면 내게 손해가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알지만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그 용기는 성격적인 용기나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인간적인 용기가 아니라 믿음의 용기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용기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바르게 살 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원래 용감한 사람이라 용기 있게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용기가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1. 당황한 종교지도자들의 위협 (13~18절)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3절)
담대하게 말했다는 것은 전혀 두려움 없이 말했다는 뜻입니다. 정말 용기를 가지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길을 운전하고 가다가 경찰차가 불을 켜고 뒤에서부터 소리를 울리며 오면 죄도 안 지었는데도 뜨끔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검찰청에 불려 들어가기만 해도 주눅이 든다고 합니다. 사도들이 말하던 그 당시 유대인의 공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산헤드린 공회 안에 발만 들여놓아도 벌벌 떠는 곳이었습니다. 기가 죽어서 아는 말도 잘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배경도 알려져 있지 않은 어부 출신 베드로와 요한이 전혀 두려움 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그 권력을 가진 자들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힘으로 눌렀는데 힘이 통하지 않을 때 두려워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이때 그들이 느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도들이 한 말은 성령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때 성령이 오신 후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행 2장). 하나님의 큰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 논리가 아니라, 어떤 철학이나 경험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큰일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성령의 언어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흘러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서 넘겨줄 때에, 너희는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무엇이든지 그 시각에 말할 것을 너희에게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막 13:11, 새)
성령께서 주시는 말은 보통 인간의 말과 차이가 느껴집니다. 그 권위와 능력과 깊이가 듣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성령께서 이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을 때 바로 그 차이가 공회원들에게도 느껴진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제일 높은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예수를 죽인 사람들에게조차 그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이 상황에 가장 필요하면서도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훨씬 뛰어넘는 말을 성령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교만한 산헤드린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할 때 이 ‘범인’은 범죄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학문이 없는 일자무식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정통 랍비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말씀을 선포하니까 거기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공회원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씀을 보면서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하는 느낌이 확 들면서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두 달여 전에 잡아 죽인 예수의 냄새가 이들에게서 나는 겁니다.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했던 베드로,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숨길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향기가 났고 파워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굳이 광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잘 믿는 사람이야. 나는 이렇게 기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큐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야.’ 하고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거고 저렇게 하는 거고’ 하면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과 늘 교제하며 동행하는 사람은 주님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다들 느낍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십니까? 지난주 추기성 선교사님이 그것을 잘 표현해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능력, 주님과 동행하며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파워가 어떻게 나오는가? 바로 따뜻함으로 나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따뜻함으로 나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고 교만 떨고 교만하고 오만하고 ‘내가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은 결코 성령 충만함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따뜻한 사랑으로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때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파워로 놀라운 말씀들을 선포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처음에는 이들이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이라고 깔보았는데, 이것만 보아도 못 배운 사람, 무식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평소에 얼마나 무시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랍비의 교육과 지식과 유대 종교와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았지만, 그것은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남도 구원하지 못하는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뛰어나서 사용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을 뛰어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크신 분을 붙들기 때문에 우리가 크게 되는 것이지, 원래 우리 자신이 큰 것이 아닙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교육도 못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평생 자기들은 성전에서 교육받고 훈련된 종교의 전문가였는데, 자기들도 못하는 일을 시골 어부 출신 베드로와 요한이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거나 체계적인 훈련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 위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기도의 삶>을 했고 이제 또 <생명의 삶>과 <말씀의 삶>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지만, 지식적으로 과정 하나 마치는 것으로 끝나면 죽은 지식입니다. 이런 말씀 공부 위에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결국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기도와 말씀은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체계적인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 위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는 기도생활이 필요합니다.
성경에도 그렇지만 교회 역사를 보아도 엘리트들을 사용하신 경우가 드뭅니다. 물론 엘리트들도 사용하셨지만, 그것은 그들이 사회의 엘리트이고 높은 사람이고 똑똑하고 학벌이 높고 돈이 많아서 사용하신 게 아니라, 그 전에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다수는 엘리트가 아니었습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4절)
이 사람은 누가 시켜서 온 게 아닙니다.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지금 다리가 나아서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와달라고 해서 온 게 아니라 자기 발로 왔습니다. 공회에서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증인을 왜 데리고 오겠습니까? 어쩌면 그들이 방해를 했는데도 그것을 뚫고 여기 왔는지 모릅니다.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정말 확실하게 체험한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 있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처음부터 명분을 잃어버린 재판입니다. 할 말이 없는 재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낫고, 그것도 평생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나아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더 파워 있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의 살아 계심이 무슨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확실하게 나타난 증거로 와 있으니까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래서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비난할 말이 없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5-16절)
지금 부인할 수 없는 증인이 이 자리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정말이구나’ 하고 믿음으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사도들을 잡아넣을 명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가 있으라고 한 다음 자기들끼리 의논합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이것은 이들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권력이 있고 종교의 지도자인 이 사람들에게도 이 상황은 아주 곤혹스러웠던 것입니다.
당연히 자기들 맘대로 하면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쳐 넣고 사형을 시키고 싶었겠지만, 온 백성이 지켜보고 있고 확실한 증인까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풀어주자니 자기들을 계속 위협할 것 같아서 두렵고,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잡아넣자니 백성들이 다 들고 일어날 것 같고, 굉장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서 병 나은 사람이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진리를 왜 안 받아들였을까?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당장 자기들에게 돌아올 현실적인 불이익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뭔가 손해가 오는 것 같으면 진리인 줄 알면서도 거부합니다. 기적을 보여준다고 믿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여줘도 그 기적이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 같으면 조작으로 몰고 진리라도 거부를 하게 됩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순간에 자기가 패배한다고 생각하고, 인정하는 순간에 자기에게 손해가 온다고 생각하면 바로 문을 닫아버립니다.
이들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7-18절)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말합니다. 지금 분명히 사도들에게 공회에서 나가라고 하고 자기들끼리 의논했는데, 이것이 어떻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까지 알려져서 누가가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라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든지 추측이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원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도 공회원이었고, 공회원 중 나중에 믿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과 메시지가 퍼져 나갈수록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입지가 흔들리고 불리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이 퍼져나가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막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최고 관심사가 그것이었습니다. ‘진리인데 막아야 한다. 진리가 못 퍼지도록 막아야 한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고작 생각해낸 해결책이 사도들을 위협해서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이런 것을 하지 말고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것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타조가 사냥꾼이 쫓아오면 모래에 머리를 박고서 안 보이니까 ‘이제 위험이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어떻게 하면 자기들이 유리한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기들을 인정할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2. 담대한 사도들의 선포 (19~22절)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고 있는데, 정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세상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들의 리더가 얼마 전 사형을 당한 사람들인 사도들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19-20절)
너무 놀랍습니다. 불과 두 달여 전에 작은 여자아이가 와서 “당신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죠?”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벌벌 떨면서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 또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아니라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바로 예수님을 잡아 죽였던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얼마나 담대합니까? 너무나 엄청난 변화입니다. 성령을 받고 이렇게 사람이 변했습니다. 스스로 “옳은가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각자 알아서 잘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영적 지도자가 아니냐? 그러면 잘 판단하라.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꾸 정치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판단을 해보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정치 논리로 판단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정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에 있는 것이지, 무슨 정치 논리나 이익 따지는 경제 논리가 더 위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결단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런 순간이 너무 많이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볼 것 같고, 나름대로 수를 쓰고 방법을 쓰며 세상의 시류를 따라 사는 게 유리한 것처럼 보이는 때가 많습니다. 사업 계약을 체결할 때라든지, 아이 교육에 대한 것이라든지, 직장을 선택하는 것, 학교를 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잘 따져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여기는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대로 가지 않으면 세상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잘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 귀가 엷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 저 말을 듣고서 잘못된 말을 듣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 매스컴, 인터넷, 드라마 등의 논리가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내가 알아서 잘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지 않으면 그런 것들의 영향으로 잘못 가게 되는 게 연약한 우리들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해줄 때 듣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장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말을 해줄 수 있고, 때로는 그 사람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쓴 소리를 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냐 아니냐를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기도하면서 간증도 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이야기해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어떤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가 여기에 있는지 잘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와 같은 목사를 비롯해서 교회의 리더들이 교회 일을 결정하며 나아가다 보면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인가?’ 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다 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 힘들다 할지라도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어렵더라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비록 방해가 있고 손해를 보더라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1절)
공회 지도자들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민심이 더 두렵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불법 재판을 하고 심문을 하여 죽였던 사람들이라 사도들도 같은 방법으로 얼마든지 처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와 케이스가 달랐습니다.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일어나서 그 자리에 있습니다. 너무 확실한 증거가 거기 와 있고, 그것을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 와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가 일어나는 것을 봤습니다. 매일 자기들이 보던 사람입니다. 구걸하고 다리를 못 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 있고 뛰고 거기 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모든 눈이 집중되어 있는 재판이기 때문에 자기들 뜻대로 막 밀어붙이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위협하여” 놓아준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7절에도 ‘위협했다’고 나오는데 21절에서는 ‘다시 위협’을 했습니다. 결국 할 말 없는 사람은 항상 이렇게 윽박지르고 폭력적으로 나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입니다. 나중에 7-8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니까 그때 사도들을 죽이고 핍박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때 도저히 사도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놓아주고 맙니다. 얼마나 통괘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22절)
이 끝에 누가가 왜 이 말을 집어넣었습니까? 왜 뜬금없이 40여 세나 되었다고 합니까? 40여 세나 되었다는 말은 그가 40세가 넘었다는 말입니다. 40여 세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나 청소년이었다면 뭔가 훈련을 통해서 다리를 다시 쓸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40여 세였습니다.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의 평균수명이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심지어 40세가 안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 당시의 평균수명을 이미 넘긴 사람입니다. 40세가 넘도록 다리를 평생 못 쓰던 사람이 갑자기 다리가 나아서 일어나 걸을 수 있다는 확률은 0입니다.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다리 못 쓰던 사람이 40세가 넘어 일어나 걷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 놀랐습니다. 몇 십 년 동안 자기들이 보았던 구걸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나으니까 너무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사람의 용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40세가 넘었다는 말은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걷게 되었으니, 그 동안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다른 데 안 가고 여기 와 있습니다. 두 사도가 재판을 받는 산헤드린 공회 재판정에 왔습니다. 누구의 권유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두 사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만류했을지 모릅니다. ‘가면 너도 죽을 수 있다.’ 그리고 권력층들이 그가 못 오도록 얼마나 방해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 자진 출두했습니다. 엄청난 용기입니다.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두 사도의 증인이 됨으로써 어떤 생명의 위협을 당하더라도 좋다는 용기를 낸 것입니다.
40대가 되도록 다리를 못 쓰고 있다가 일어나 걸은 지 겨우 만 하루도 안 되었지만, 당시 평균수명을 넘은 사람으로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자기를 치유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직접 체험한 주님의 진리를 위해서라면, 하루 만에 죽어도 상관없다는 용기를 낸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용기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40세가 넘은 그 사람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삶에서 이런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내게 손해가 올 것 같으니까 슬쩍 회피하거나, 정직하게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슬쩍 고쳐서 써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순간 이 사람의 용기를 우리는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자신의 욕구를 좇아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용기를 다해 믿음으로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고 나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 가운데 용기를 가지고 생각한 후에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렇게나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초반에 언급한 폴 발레리가 또 다른 명언을 남겼는데,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느 시인이 거기에 착안해서 한마디를 더 붙였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바람이 불든 불지 않든, 상황이 어떻든 간에 아무렇게나 살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말 용기를 내어 믿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겠다는 말과 통하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늦은 나이에 온 몸으로 체험한 이 사람은, 이후에도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바람이 불든 안 불든 상관없이 믿음으로 살아갔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일원이 되어 열심히 섬겼을 수 있습니다. 사실 평생 다리를 못 쓰고 불행하게 살던 그가 이제 나음을 입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 동안 자기가 못 하던 섬김을 초대 교회에서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 이러한 용기,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