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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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8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9 ✦
“기적을 일으킨 능력의 이름 예수”
(사도행전 3장 11~26절)
[들어가는 말]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이야기 두 가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지금 말씀드리고 또 하나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여 년 전 뉴스를 뜨겁게 달구던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보스턴의 유명 컨설팅회사인 CEE 사의 존 도노번(John Donavan) 사장과 그의 다섯 자녀가 1억 달러에 가까운 재산을 놓고 싸움을 벌인 사건입니다. 미국 동부의 엘리트 가문으로 통하는 이들이 벌이는 싸움은 살인, 협박, 성폭행 등 할리우드 영화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버지 도너번 사장은 그 유명한 MIT의 교수 출신으로, HP, Oracle 등 쟁쟁한 기업들을 고객으로 두었습니다. 자녀들을 대표해서 아버지와 소송을 벌이고 있는 첫째 아들 제임스 도너번 역시 하버드대학교 법대를 나온 최고의 엘리트로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중역으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자수성가한 도너번 사장은 자녀들 앞으로 막대한 돈과 땅을 물려줬으나 자신의 허락을 받아야만 재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애초에 재산을 물려줄 생각이 없고 단순히 세금을 회피하기 목적으로 재산을 자기들의 이름으로 해놓았다고 맞섰습니다. 특히 자녀 다섯 명은 모두 도너번 사장이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자녀들이었는데, 그 당시 도너번 사장은 셋째 부인과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재산이 전부 셋째 부인에게 갈 것을 염려한 자녀들이 고소한 것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고,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고소했다고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습니다. 도너번 사장은 집안 여기저기에서 식칼과 ‘살인자(killer)’라고 쓰인 종이가 발견됐다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자작극이라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경찰의 자택 접근금지 명령을 받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는데, 이렇게 최고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고 억만장자 집안의 진흙탕 싸움이 공개되면서, 도너번 사장의 사업도 악화되었습니다. 이 가족의 오랜 친구였던 전 예일대 학장이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주말마다 함께 교회로 향했던 행복한 가족이었는데, 재산 문제로 싸우게 된 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다.”
돈 앞에서 원수처럼 싸운 그들은 우리처럼 주일마다 교회를 찾아 예배드리던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아버지나 자녀 어느 한쪽만 교회에 다닌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 중 한두 명만 그리스도인이었던 것도 아니라, 그들 여섯 식구는 주일이면 모두 교회를 찾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건을 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자식 간에 그처럼 피 터지게 재산 다툼을 벌인 그들에게 믿음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었는가? 주일마다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교회를 찾았을까? 단순히 사교를 위한 것이었을까? 자기만족이나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부적처럼 교회에 한 발을 걸치고 세상에 한 발을 걸친 것이었을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였고, 그들에게 과연 예배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돈이 많아서 그런 싸움을 싸웠지만, 우리는 그 정도로 돈이 없으니까 안 하는 것뿐이지 우리도 그렇게 돈이 많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믿음이란 정말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1. 예수의 이름의 능력 (11-19절)
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걷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걷고 뛰고 찬송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10). 도대체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1절)
솔로몬의 행각은 벽이 없고 기둥이 세워지고 지붕만 있는 형태입니다. 야외 강연장 같이 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강연을 하곤 했던 곳입니다. 이 사람이 나아서 이제는 ‘나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붙잡았다’는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는 ‘붙들어 매다’라는 뜻이지만, ‘어깨에 매달리다’, ‘등에 기대다’, ‘등을 껴안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단어를 생각하면서 이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 하고 외치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그가 걷고 뛰고 찬송하며 날뜁니다. 그리고 자기가 항상 구걸하던 미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너무 감격스러워하고 너무 기뻐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자기를 쳐다봅니다. ‘네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나을 수 있었냐’ 하는 표정으로 주목해서 쳐다보는 겁니다.
그때 이 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그 두 사람을 뒤에서부터 껴안은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것은 ‘이 사람들 때문에 내가 나았습니다.’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사람들이 전해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내가 치유되었다’ 하는 답도 되고 간증도 됩니다. 이 나은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그가 붙들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을 때 지금 너무 기뻤는데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 너무 고마운 겁니다. 평생 못 걷던 사람이 이 사람들 때문에 걷게 되었으니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워 그들을 붙들고 울었을 겁니다. 그렇게 그가 우는데 베드로와 요한도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일어나 걸었고, 이 사람이 자기들을 붙들고 울며 감격스러워하니까 자기들도 감격스럽습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을 나누면서 한 동안 서로 붙들고 있는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는 것은 그들이 그에게 등을 내어준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뭔가를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리고 우리가 붙잡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의해 이렇게 붙잡힐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무엇에게 붙잡혀 살고 계십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손을 내밀어 붙잡고 있는 게 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붙잡고 누구를 붙잡고 있는가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드러납니다.
이때 이 사람이 나음을 얻었지만,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지 않고 다른 것을 붙잡았다면, 자기가 구걸하던 통을 붙들었다면, 이 사람은 낫긴 나았지만 영혼의 치유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제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통해 역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든 것입니다.
결국 내가 붙잡고 있는 게 무엇인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욕망을 붙잡게 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더 큰 쾌락을 찾아서 붙잡게 됩니다. 또 불의한 사람은 불의한 사람에게 매달리고, 거짓된 사람은 거짓된 사람과 어울립니다. 그런데 나를 붙드는 사람도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면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나를 붙들게 되고, 내가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나를 붙들게 되고, 내가 불의한 사람이면 불의한 사람이 나를 찾아오게 되고, 내가 거짓된 사람이면 거짓된 사람이 나를 찾아옵니다.
결국 내가 누구를 붙드는가? 또 나는 누구에게 붙들려 있는가? 내가 지금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이고 내가 시간을 보내는 게 뭔가를 체크해보십시오. 그게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항상 기도의 자리를 붙든다면, 또 주님의 말씀을 붙든다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정말 기도하며 말씀 가운데 주님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 그런 사람들이 붙들게 됩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붙드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무엇을 붙들며 누구에 의해 붙들림을 받고 있는지 체크해볼 일입니다.
2)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
이때 베드로가 사람들이 왜 자기들에게 몰려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자신들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2절)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는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입니다. 하나님께는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기적이 당연합니다. 사람에게는 기적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핸디캡이 얼마냐 하면서 골프를 치는데, 거기에 PGA 프로 선수가 와 있다고 해보십시오. 수준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칠 때는 불가능한 샷이라고 하는데, 프로가 오면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게임 때마다 치는 샷입니다. 사람도 그런데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는 일상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면 하나님 앞에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왜 놀랍게 여기느냐?”였고, 두 번째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입니다. ‘이 사람은 고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를 주목할 필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이 치유 사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역사한 것이지 베드로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합니다.
평생 다리를 못 쓰다가 순식간에 치유를 받고 정상인이 된 이 사람은 성전 안을 걷고 뛰고 춤추고 찬양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감격스럽고 고마워서 베드로와 요한을 꼭 붙잡고 놓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준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았겠습니까? 너무 고마우니까 자연스럽게 그들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인데 사람을 붙들고 떠받든다는 겁니다. 어떤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은 분들은 그때 말씀을 전했던 설교자를 굉장히 떠받듭니다. 유명한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을 보면 마치 스타가 출현한 것처럼 어디 식사만 하러 가도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일어납니다. 물론 존경하는 마음은 귀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역사하신 것이지 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우상시하면 결국은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아주 중요한 교훈입니다.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나은 것을 보고 몰려온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서 봤듯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그 일을 행한 사람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런 것들 때문에 무너지는지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게 ‘야,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하다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귀의 덫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공할 때 그런 것을 통해 우쭐하게 만들고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하며 ‘우리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럼 누구인가? 그는 이것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3-15절)
이때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지 얼마 안 되었던 때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성전인데, 성전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고 그것도 아주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사건을 웬만하면 아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요즘 말로 ‘돌직구’를 날립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 관계를 이야기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 안에 있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아주 경건한 사람들인데, 그래서 베드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면서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역사 속에 살아 계시면서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모르는 딴 신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다. 우리 조상 때부터 우리를 돌봐주셨던 그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고, 너희는 그 예수를 죽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죄는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로마 사람인 유대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놓아주려 결의했는데, 너희가 그것을 거부했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 빌라도는 예수가 죄가 없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반역죄로 몰아서 처형시켜달라고 했습니다.
학창시절에 미션스쿨을 다닌 분들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크리스천 학교를 다니면서 채플에 가곤 했던 것이 지겨웠는데, 그런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식이 쌓이다가 나중에 그것을 계기로 주님 앞에 나오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오히려 거부감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다 믿는 집안이고 가족들이 다 교회에 다니고 친구들도 다 믿는데 정작 복음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경이 크리스천 집안인데 복음을 끝까지 거부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데 주님은 얼마나 더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우리는 ‘저 사람은 안 되나보다’ 하고 포기하는데 주님은 절대로 포기를 안 하십니다. 이 사람이 안 되면 저 사람을 보내시고, 저 사람이 안 되면 또 다른 사람을 보내십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분들이 꽤 있는데, 그런 분들의 스토리를 보면 전혀 교회를 안 다니다가 목장에 오고 교회에도 오고 <생명의 삶>을 듣고 결단하여 믿고 세례 받은 줄 알았는데, 이전에도 다 뭔가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한 사람들이 있었고, 사랑으로 친절하게 대해준 크리스천들이 있었습니다. 벽돌을 쌓은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우리도 여기에서 믿게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끝까지 안 믿고 떠나는 경우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놀랍게도 그런 분들이 거기에 와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우리가 지금 벽돌 한 장을 놓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고, 사랑으로 어떻게든 주님께 나오게 하려고 애쓸 때,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길 때,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갔을 때 그 사람이 와서 ‘고맙습니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야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들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죽였다고 하는 게 아니라 ‘너희가 죽였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를 보면, 예수가 기독교의 머리라는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런데 늘 제3자의 입장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저 사람들이 믿는 예수이고,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너희가 죄인이지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마음에 와 닿는 겁니다. ‘아, 내가 죄인이구나. 저 사람들만 죄인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고, 오히려 내가 더 죄인이구나.’ 하고 깨달아지는 겁니다. 이제는 제3자가 아니라 내가 그 장본인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와 닿을 때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예수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면 저쪽에서 ‘거짓말 마라. 웃기지 마라. 예수가 죽고 시체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반대로 나오면 되는데 아무도 반대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거기에 반박을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증인이다’라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고 전도할 때 다른 게 아니라 이걸 하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지만, ‘내가 증인이다. 나를 봐라. 예수님이 역사하신 것이 바로 나를 통해 이루어졌다.’라고 간증하는 것이 가장 큰 파워가 있습니다.
3)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낫게 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6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 것이 중요한데, 사실 믿음 자체보다도 누구를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부적을 믿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은 허상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확실한 대상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믿음 그 자체가 능력의 근원인 게 아닙니다.
믿음이 최고라고 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 긍정적 사고방식과 다를 게 없습니다. 누구를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천, 그리스도인,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게 믿음이고,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전혀 다리를 못 쓰다가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까 일어나 절뚝절뚝 하며 간신히 걸은 게 아닙니다. 그것도 엄청난 기적이지만, 그게 아니라 완전히 나았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첫째, 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그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입니다. 그들이 확실히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이들을 통해 역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사람을 일으킬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듣지 말든지’, 또는 ‘일어나도 좋고 걸어도 좋고 그냥 있어도 좋고’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걸으라고 아주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의 확실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 믿음은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의 믿음도 분명히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도 아니고 대단한 믿음도 아니며 예수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구나 하고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에게 명령하면 옮겨진다고 하셨는데,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을 때 ‘웃기지 마쇼’ 한 게 아니라 붙들고 ‘아멘’ 하며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환자가 먹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일어나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났습니다.
4) 모르고 했으니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 다음으로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심을 촉구하는 권면을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7-18절)
베드로가 ‘너희가 죽였다’ 하고 끝났으면 기분이 나빴을 텐데,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위로를 해줍니다. 얼마나 다정히 이야기했겠습니까?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베드로도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라고 하는데,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지식적으로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여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이미 다 알려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왕으로서의 메시야’만 생각했기 때문에,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어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사야나 요엘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난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미 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19절)
‘회개하고 돌이켜라’ 합니다. 이전에 죄를 범한 것이 몰라서 그런 것인데, 거기까지만 하면 안 되고 회개하여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동의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시면 죄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한자어도 똑같습니다. ‘회’는 ‘후회’이고 ‘개’는 ‘개선’ 즉 고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베드로의 목적이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너희는 나쁘다. 악하다’라는 게 아닙니다. 회개는 빨리 살라는 말입니다. ‘죽으면 안 된다. 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말입니다. 사랑하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두 가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첫째는 ‘죄 없이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냥 죄 용서를 받는다고 하지 않고 ‘죄 없이 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영어로 wiped out입니다. 홍수가 나서 다 쓸려가는 것처럼, 죄가 흔적도 없이 다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로, 새롭게 되는 날을 주십니다. 이전 번역에는 ‘유쾌한 날’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Times of refreshing이라고 합니다. 아주 새롭게 해주는 통쾌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는 것은 기분 나쁘고 안 좋은 게 아니라, 죄 없이 함을 받고 또한 유쾌하고 통쾌하며 새롭게 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2.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하신 구원
1) 예정하신 그리스도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0-21절)
여기 “예정하신 그리스도”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결코 즉흥적으로 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창세 전, 즉 모든 것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우리를 구원하려고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생기기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 수준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이해가 안 가도 하나님에게는 이해가 되십니다.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신 일이 때가 되어 이루어졌습니다. 아주 정확한 때에 예수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과 계획과 방법을 가지고 시간을 기다려서 정하신 때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신구약 중간기를 공부해보시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이후에 세례 요한이 올 때까지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하며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그 시기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때는 로마가 길을 닦아 놓은 다음입니다. 언어를 하나로 통일해 놓은 다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후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통해 하나로 통일해놓은 언어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아무 때나 오신 게 아니라 정확한 때에 보내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곳곳에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를 흠이 없게 하려고 하셨다’ 등의 말씀이 나오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나를 택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안 믿는 분들이 계실 텐데, 벽돌 한 장 쌓는다고 한 것처럼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미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를 안 믿는데 왜 여기 와 계십니까?
그러니까 이런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해석됩니다. 그 동안 내가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자랐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 많은 남자들 중에 왜 하필 내 아버지였는가? 그 많은 여자들 중에 왜 하필 내 어머니였는가? 감사하는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들이 원망하고 저주합니다. 더 좋은 부모 밑에서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생각해보십시오. 그 수많은 남녀 중에 두 사람이 만나서 나를 낳을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옛날에는 선을 많이 봤는데, 하필 왜 둘이 만났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결혼한다고 다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내가 걸렸나? 남자라면, 왜 내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인가? 여자라면, 왜 내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가? 내가 천 년 전이나 오백 년 전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왜 지금 태어났는가? 왜 지금 미국 땅에 있는가? 한국이나 중국 땅에서 났는데 왜 지금 여기 사는가? 미국에 도시도 많은데 왜 하필 이 콜럼버스인가?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왜 내가 지금 이런가?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답이 얻어지는 겁니다. ‘아,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나시고, 조상이 그렇게 되었고, 또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시고, 다 나를 만들려고 그렇게 된 것이구나?’라고 깨달아지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사도 바울도 이런 신비를 느껴서 ‘아담과 하와 때까지’라고 했다가 ‘아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라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고백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에게 바로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선택하셨다. 나는 우연히 된 게 아니다. 어쩌다 보니 여기 밀려온 게 아니다. 나는 실수로 태어난 게 아니다.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이 땅에 보내셨고 지금 여기에 두셨다.’ 그것을 위해 예수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2) 오래 전 구약에 이미 예언된 그리스도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2-23절)
베드로는 예정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난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다윗과 아브라함과 연결시켜 설명합니다.
첫째로, 모세와 연결해서 예수님을 설명하는 겁니다. 모세가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라고 했는데,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미 1500년 전에 모세가 이 말씀을 한 겁니다. 그 후에 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났지만, 베드로가 이 말씀을 예언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멸망을 받는다’는 것도 신명기 18:19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님이 구약에 이미 예언된 그 선지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예수를 다윗과 연결시킵니다.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4절)
구약의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많은 분들이 사무엘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주인공이 다윗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때’라는 것은 다윗 때를 말합니다. 특히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는 예수를 아브라함과 연결시켜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5절)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너희는 정말 복 받은 백성이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고, 약속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모세와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모든 약속이 너희에게 주어졌다. 그러니 얼마나 복 되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3을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할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이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내 이름을 가지고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망하고 그러면 얼마나 능력 있는 이름입니까? 게다가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축복입니까?
이런 약속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 놀라운 복을 받아서 복의 근원 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이런 모세와 다윗과 아브라함의 축복을 예수님과 연결하면서 바로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26절)
‘악함을 버리게 하셨다’는 것은 돌이켜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어서 확실한 축복 가운데 거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아까 두 이야기가 있다고 했는데, 두 번째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10여 년 전에 한국에서 연쇄 성폭행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포 발바리’라고 했는데, 당시 31세였던 범인이 15개월 동안, 13살 어린이부터 46세 여성에 이르기까지 총 13명의 여성을 성폭행하고, 1번 도둑질을 하여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경찰이 파악한 범죄 이외에도 성폭행을 한 번 더 했고, 강도질을 두 번 더 했고, 7번 더 도둑질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15개월 동안 무려 24번이나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한 달 평균 두 번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사람이 경찰에서 “지난 15개월 동안 내가 붙잡힐까 봐 불안해서 매일 성당을 찾아 붙잡히지 않도록 기도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보름에 한 번꼴로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한 흉악범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당에 가서 ‘안 붙잡히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에게 성당은 무엇이었고, 기도의 의미는 무엇이었고,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는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한 것이며, 왜 기도했던 것입니까? 만약 그가 그런 기도를 하고 나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겠지.’ 하고 평안을 얻었다면 그 평안은 누가 준 평안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주신 평안입니까, 아니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날마다 애쓰며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를 삶의 주인으로 믿고 모신 사람이고, 그렇게 살다 보면 예수님을 닮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고, 기도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처음에 말씀드린 도너번 일가가 이 사실을 정말 알았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정말 닮기 위해 매주일 교회를 찾아 예배드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썼다면, 아버지와 자식 간에 그렇게 피 터지는 재산 다툼을 벌였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일명 ‘마포 발바리’로 불리던 그 흉악범이 날마다 성당을 찾아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참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기도했다면, 정말 주님을 향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기도했다면, 그래도 그렇게 똑같은 결과가 일어났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바른 삶을 위해 기도했다면, 그의 삶은 벌써 새로워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돈 앞에서 아버지와 자녀가 원수처럼 싸우는 그런 사람들처럼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생활이, 매일 성당을 찾아서 단지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지만 붙잡히지 않기만을 위해 기도하던 흉악범과 같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정말 복의 근원된 삶,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삶으로서, 이곳에 있는 우리를 통해 어두운 세상이 밝아지고 또 새로운 역사들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