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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7일 수요예배
✦ 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6 ✦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부활신앙”
(로마서 6장 5~19절)
1.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부활 신앙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기로 오신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 기간에 부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약간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부활절에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이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인생에서 참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젊은 청년이 노년의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고, 또 너무나 열심히 착하게 살던 분이 갑자기 암에 걸려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못되게 구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은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으며 오히려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아주 잘 사는데,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성실하게 살던 분들이 돌아가시면 안타까움을 넘어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정말 선하게 살았는데,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남들도 잘 섬겼는데, 왜 하나님은 이분을 이렇게 빨리 데려가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일찍 이 세상을 떠난 분들은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꽃다운 인생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일찍 죽은 어린아이나 청년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고전 15:19, 새)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런 경우들, 즉 어린아이나 청년이 일찍 생을 마감할 때, 또는 열심히 살던 분이 갑작스런 병이나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다른 때보다 더 슬퍼하면서 그들이 정말 안 됐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들이 정말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들인 게 맞습니까?
사실 안 됐다는 표현은 남은 가족들에 대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내 기준에서 안 됐다고, 불쌍하다고 느끼는 것이지, 세상을 떠난 사람은 다 끝나서 평안합니다. 이 땅에서 인생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죽었거나, 고생만 하다가 갔을 때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편안하게 살다 갔거나 고생을 하다 갔거나, 이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것을 믿으시죠?
그런데도 왜 죽은 사람을 안 됐다고 말합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이 더 좋습니까, 천국이 더 좋습니까? 당연히 천국입니다. 그곳은 눈물도, 고통도, 질병도, 슬픔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기쁨을 누리면서 지내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먼저 갔는데도 안 됐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이 땅에서 그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린 또는 젊은 나이에 죽었거나 고생만 하다 죽었다고 해서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가 않는 말입니다. 그 말은 사실 틀린 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불쌍한가, 아닌가는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그가 주님을 믿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수를 다 누리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떵떵 거리고,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좋은 데 다 가보고, 좋은 것을 다 먹었더라도, 주님을 모른 채 죽었다면 어디로 갑니까?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하기를 꺼려하지만,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복음이 다 알려지고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자기가 몰라서 ‘못’ 믿는 게 아니고 ‘안’ 믿는 겁니다. 거부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라고 하며 하나님을 안 믿고 자기가 알아서 살았는데, 그래서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으로 가는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음을 통과한 후에 계속 하나님이 계신 곳, 완전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으로 감으로 우리의 인생이 완성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옥에 가면 거기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고 구더기가 있고, 거기서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데가 지옥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불쌍하다’고 하는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불쌍하게 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도 불쌍하지만, 예수님은 더 불쌍한 분이 되십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평생 남들을 위해 좋은 일만 하셨는데, 억울하게 붙잡혀서 누명을 쓰고 끌려 다니며 고문을 당하고 극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가장 무섭고 잔인한 형벌인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악이 선을 이기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이 세상의 법칙의 전부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더 악하게 살아야 하고, 더 불의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 성공해야 합니다. 또한 내 자녀도 공부를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해야 하고, 공부로 성공할 것 같지 않으면 운동이나 예술을 시켜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남들을 때리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싸움꾼이 되도록 훈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잘 사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옳지 않은 방법으로 자녀를 키우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든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떨 때는 믿음으로 살다가 손해도 보는데 그래도 믿음으로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오늘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두가 다 알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을 알긴 아는데 실제 삶에서 나오지 않으므로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해 선으로 악을 이기셨고 정의로 불의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악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이 부활신앙입니다.
흔히 부활신앙은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이나 병으로 죽어가는 중환자에게만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믿음은 단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매일 필요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이 우리 삶의 가치관과 태도를 결정해주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이 부활신앙을 다 알지만, 실제로 실천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삶이 굉장히 바뀝니다. 부활신앙은 이 다음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 땅에서 매일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기준과 방향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2. 세상을 움직이는 세 가지 사상
이 세상은 세 가지 사상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세 사람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칼 맑스(Karl Marx, 1818-1883),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그리고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입니다. 맑스의 유물사관, 프로이트의 심리학, 다윈의 진화론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은 이미 그들의 사상이 오래 되었고 더 뛰어난 이론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세워놓은 이론은 아직도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활동할 당시보다 더 엄청나게 우리를 괴롭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이론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론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그들이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여 자신의 이론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인간과 사회의 죄악 된 모습을 정확히 보고 자기 나름의 이론을 세웠던 것입니다.
1) 칼 맑스(Karl Marx, 1818-1883)의 유물사관 ➜ 물질주의
맑스의 유물사관은 모든 존재에 물질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상입니다. 칼 맑스라고 하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생각하면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을 착취하는 부자들(부르주아)을 물리쳐야 한다고 하는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이 유물사관이 물질주의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모든 것에 물질적 가치를 부여하며 등급을 매깁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든 가치를 물질로 환산해야 이해를 합니다. 심지어 사람도 물질적 가치로 판단하고 매깁니다. 이 사람은 얼마짜리라는 연봉이 있고,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도 그런 등급을 나눕니다(A, B, C, D, F 등). 그런 것이 다 점수가 아닙니까?
물질적인 것만 아니라 시간이나 생각 같은 추상적 개념에도 물질적 가치를 매깁니다. 온통 돈으로 가치를 매기고, 돈으로 가치를 증명하고, 시간당 얼마라고 하며 사람의 가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돈을 추구합니다. 지금 온통 황금만능주의의 시대가 된 것이 바로 맑스의 유물사관의 영향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느라 예배에 빠지는 것도 맑스의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은 예가 됩니다. 자신은 맑스의 유물사관 때문에 예배를 빠졌다고 생각하지 못할지라도, 그게 그런 겁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어 맑스의 생각이 이미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맑스의 생각은 우리 모두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물질주의가 얼마나 더 대단합니까?
2)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심리학 ➜ 육체의 쾌락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 ‘자아(ego)’와 ‘초자아(super ego)’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 심리학자입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내면의 성격이 성적인 욕구의 충족에 의해 형성된다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의 이론이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사람의 모든 행동이 성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심리학은 육체적 쾌락,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발전했습니다.
문제는, 프로이트의 사상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떠나, 이 시대의 사람들이 대부분 성적인 쾌락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날이 갈수록 섹스 산업이 더욱 발전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고, 그 중에서도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성적인 쾌락을 얻기 위해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매춘도 그렇고, 동남아 등지에서는 성노예로 어린이들을 잡아갑니다. 그 나이가 대여섯 살까지 내려갔습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그런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성적인 문제로 가정이 깨어지고 이혼율이 높아집니다. 그런 것들뿐 아니라, 내놓고 그렇게는 못하겠으니까 성을 상품화시키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몇 년 전부터 아이돌 그룹이라고 해서, 남자 그룹은 꽃미남들로 되어 있고 걸 그룹은 아주 예쁘장한 젊은 여성들을 내세워서 합니다. 걸 그룹, 보이 그룹 같은 것들이 다 그것과 연결된 것입니다. 왜 꼭 그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만 나와야 합니까? 그게 다 성의 상품화입니다.
또 ‘얼짱’이나 ‘몸짱’ 열풍, 또 성형 열풍이 다 성적인 것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성적 매력을 더 높여주는 방향을 추구하는 겁니다. 요즘은 성적인 것이 아니고서는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음악도 그런 이상한 음악이나 가사가 많습니다.
또한 꼭 성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육체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전자제품이나 가전제품들을 보면, 전부 다 우리 몸을 편안하게 만드는 쪽으로 계발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기계가 다 해주는 것으로 자꾸 계발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많은데, 그 중 많은 것들이 육체를 위한 운동 때문에, 아니면 피곤해서 휴식을 취하고 싶기 때문에 안 나오고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것이 다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성적인 또는 육체적인 만족을 위해 나아가는 것으로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기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3)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 ➜ 무한 경쟁
셋째가 다윈인데, 그는 우리가 알듯이 모든 생물은 진화한다는 진화론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화론을 생각할 때 그저 창조론에 반해서 ‘모든 생물은 스스로 진화해 왔다’라는 정도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그런 걸 절대 가르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창조과학회까지 나왔습니다. 창조과학 중에도 진짜 과학이 아니고 잘못된 것이 많아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 의도는 좋습니다. 진화론이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교회에서는 창조를 배우고 학교에 가면 진화론에 기초한 과학을 배우기 때문에 헷갈려 하고, 그러다 나중에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의 문제의 핵심은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다윈의 주장의 가장 큰 핵심이 뭔가 하면, 진화가 아니라 진화를 이루는 ‘적자생존의 법칙’입니다. 이게 뭡니까?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논리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무한 경쟁’이 나왔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경쟁하며 사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경쟁하며 사는 방법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할 정도로 경쟁을 너무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경쟁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친구들과 경쟁합니다. 시험을 볼 때마다, 대학을 갈 때마다 경쟁을 해서 남들보다 앞서야 합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학교를 졸업하여 들어간 직장에서 또다시 동료들과 경쟁을 해야 합니다. 한국이나 여러 나라들에서 “5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200대 1,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사업도 다른 사업체들과 경쟁을 해서 이겨야 살아남습니다.
심지어 교회끼리도 경쟁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 좋다!” “우리 교회가 더 크다!” “우리 교회가 예산이 더 많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매년 경쟁적으로 큰 교회들이 자기 교회 예산을 발표합니다. 한 교회가 발표하면 그 다음에 또 다른 교회가 더 많은 예산을 발표합니다. 경쟁의식이 그렇게 있는 겁니다.
이처럼 평생 경쟁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사회는 경쟁사회입니다. 경쟁 그 자체가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쟁에서 이기면 성공했다고 말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경쟁은 진화론에 의해 세워진 삶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경쟁하며 사는 방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진화론 교육에 의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돈을 위해 뛰어다니고, 육체의 만족과 성적인 쾌락을 위해 오늘도 헤매고 있으며, 평생 경쟁이라는 틀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삶의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21세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만능주의와 성적 쾌락의 추구와 치열한 경쟁은 앞으로 점점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새로운 패러다임인 부활신앙
그렇다면 우리 삶의 기준은 돈의 가치 밖에는 없는 것입니까? 육체의 건강이나 편안함과 성적인 쾌락 외에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까? 남들을 눌러야 성공하는 경쟁 외에는 삶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라고 합니다. 다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산다고 해도,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1)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
사람들은 생명이 죽음 앞에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려서 죽어갈 때, 생명이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죽음을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육신은 이 땅에서 끝날지 몰라도, ‘나’는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죽음 이후에 계속됩니다. 다시 살아납니다.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은 우리 자신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후에 다시 살아나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5절)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앞둔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며 인사합니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세상을 떠난 성도님의 장례 때 단순히 ‘장례식’이 아니라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단지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이나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진짜 그렇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실한 신앙고백입니다. 천국으로 먼저 환송을 해드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정말로 곧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8-9절)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도 있고 친지도 있고 친구도 있고 성도도 있습니다. 그분들이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들이라면 부활하여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도 이 땅을 떠날 때 천국에서 다시 기쁨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선이 악을 이긴다
우리는 악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합니다. 언제나 선은 악에게 힘없이 무릎을 꿇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하신 예수님도 너무 연약해 보이셨고, 무기력하게 잡혀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악에게 지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의 악한 계교를 단번에 제압하시고 이기셨습니다. 결국 부활을 통해 선이 악을 이긴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도 악이 더 강하고 악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대로 살면 이 험한 세상에서 살 수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부활신앙이 아닌 겁니다. 정말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정말로 부활을 믿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희생이 생기더라도 선을 따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3-14절)
3)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
예수님은 미움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자기들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외쳤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와 미움, 헤롯 왕의 미움, 로마 군인들의 미움으로 죽으셨습니다. 미움은 사람을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미워하면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똑같이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미워하여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은 스스로의 죄를 알지 못해서 그렇다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이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달은 스데반이, 초대교회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면서 이와 똑같은 기도를 하고 죽지 않았습니까? 상대방의 미움에 사랑으로 대하신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미움을 이깁니다. 미움을 이기는 사랑은 용서와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와 희생의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미움이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보셨습니까? 원수를 갚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보셨습니까? 여기서 가서 때려 부수니까 테러를 하고, 그럼 또 때려 부수니까 또 테러를 하고, 이 악순환이 끝나지를 않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어떻게 끊어집니까? 누군가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랑으로 희생하고 용서하며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생명이 거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4)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거짓말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몄습니다. 말도 안 되는 증거를 내세우고 거짓 증인을 내세우며 결국 예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만이 예수님의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백을 말했을 정도로, 당시 유대의 모든 권력자들은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함께 입을 맞춰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로마에서 온 빌라도에게 자신들의 계략에 동조하지 않으면 로마 황제에게 이르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 19:12)
이 말이 “예수를 석방하면 우리는 너를 고발하겠다.”라는 말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거짓에 결국 동조한 것입니다. 진실하게 사신 예수님은 이렇게 거짓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부활은 아주 극적인 반전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진실이 거짓을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거짓이 이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결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로써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혹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어떤 거짓 때문에 손해를 보고 실패했는데 여기서 만회가 안 되더라도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몇 년만 버티면 됩니다. 결국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심판을 해주십니다.
요즘도 한국의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종종 장관이나 국무총리가 임명을 받기 전에 인사 청문회를 합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참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고위 공직자들 중에서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부동산 투기나 자녀의 부정 입학을 위한 위장 전입은 보통입니다. 지금도 장관을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을 안 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봐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부동산 거래를 할 때 이면 계약, 즉 계약서에 쓴 돈 액수와 실제 거래 액수가 다른 계약은 아주 당연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그런 행동들이 왜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뭐가 잘못이냐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 그들의 내면에는 ‘이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바보’라는 마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악하게 살아야 손해를 안 본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것은 고위 공직자들이나 높으신 분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사실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겁니다.
고위 공직자들이나 유명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하나같이 “그런 적이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르겠다”라고 발뺌하는 것을 볼 때 분노가 생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분노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짓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그렇게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 중에 교회의 직분자들이 많이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하고 부활신앙을 가르쳐야 할 교회 리더들인데도 불구하고, 진실이 거짓을 반드시 이긴다는 부활신앙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4. 우리 삶에서 부활되어야 하는 부활신앙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0-11절)
바로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때 가져야 하는 삶의 기준과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 부활신앙은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고,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고,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는 것이고,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거짓말을 안 해야 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왜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야 하고, 왜 악이 더 강한 것처럼 보이고 선이 더 약해 보여도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까? 부활신앙 때문입니다. 정말 부활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안 살면 뭡니까? 말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부활을 안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셨고, 말씀을 선포하며 사역을 하셨으며,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낙심하지 않고 힘을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용기나 자존심이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축축 처질 때 예수님 때문에 다시 자부심을 갖고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신앙이란, 우리의 삶의 모든 기준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달라지고, 복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눈이 떠져서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보는 해석이 달라지고, 결과적으로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기준이 변화되니까 모든 행동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는 공부가 바로 <새로운 삶> 공부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바꿔보자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보는 훈련을 하는 과정이 바로 <경건의 삶>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미국에서 살아가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악한 세태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이며 주인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부활신앙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부활신앙입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죽음과 타협하지 않고, 미움이나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주는 그 신앙이 부활신앙입니다.
우리가 이 부활신앙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