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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1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47 ✦
“남 유다의 비참한 최후”
(열왕기하 23장 31절 ~ 24장 16절)
[들어가는 말]
1453년 5월 29일, 천년 제국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이 도시는, 전체 구조가 삼각형으로 되어 있고 그 중 두 면이 바다여서 그것을 이용한 성곽 방어 구조를 통해 천혜의 요새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10만 대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천 년 동안 동방 기독교 예배의 중심지로 군림해 오던 콘스탄티노플이, 이제 이슬람 군대의 손에 짓밟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 년을 버텨 오던 기독교 제국 비잔틴의 최후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타락하면, 아무리 외형적으로 기독교 문화가 웅장도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들의 손에 의해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1.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유다 최후의 성군이었던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유다의 17대 왕이 되는데, 그는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고작 3개월 밖에 다스리지 못합니다(23:31). 그래서 그는 유다 왕들 중에 가장 단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거나 스스로 물러나서가 아니라, 요시야를 전투에서 죽게 만든 애굽 왕 바로 느고가 그를 폐위시켰기 때문입니다(23:33). 바로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타당한 것은 이것입니다.
BC 612년에 앗수르는 수도인 니느웨가 바벨론에게 함락되고, 하란을 거쳐 갈그미스까지 쫓겨 가서 멸망당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3년 후인 BC 609년에 바벨론과 갈그미스에서 전투를 벌이는 앗수르를 돕기 위하여 올라가던 바로느고는 요시야의 저항에 부딪쳐서 그를 물리치고 가느라 늦게 도착했는데, 결국 바벨론이 앗수르를 이긴 다음에야 도착합니다. 그래서 결국 앗수르는 몰락하고 바벨론이 패권을 잡게 되기 때문에 바로느고는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한 유다에 대해 화가 나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자기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왕을 세운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바로 여호아하스의 악행 때문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23:32). 여호아하스는 그토록 몸부림치며 나라를 거룩하게 개혁하려고 했던 자기 아버지 요시야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이전의 악한 왕들이 했던 것처럼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정화된 예루살렘을 하루아침에 다시 더럽혔습니다.
애굽의 바로느고가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유다의 18대 왕으로 세운 왕은 요시야의 맏아들인 엘리아김입니다(23:34). 폐위된 여호아하스와 이복형제인 그는 바로 느고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느고는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쳤는데, 이것은 유다가 자신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동시에 애굽은 여호야김을 새 왕으로 세우면서 엄청난 벌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23:33). 이것은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경우 내는 보상금을 말하는데, 요시야가 애굽을 대적한 데 대한 괘씸죄를 물어 배상금을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애굽에 의해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 벌금이 엄청난 액수였더라도 여호야김은 거절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징수합니다(23:35).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여호야김은 자신이 거할 초호화판 왕궁까지 건설하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열왕기에는 안 나오지만, 예레미야를 보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렘 22:13-14, 17-19)
실제로 유다 왕들 중 유일하게 매장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람이 여호야김입니다. 어떻게 죽어서 장사지냈는지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왕인데도 그렇다면 얼마나 비참한 겁니까?
그는 안 그래도 여러 외세의 침략과 약탈로 찌들대로 찌든 백성들의 고통과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어두운 미래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자기 왕궁을 짓다니 정신없는 왕입니다. 당연히 그런 악한 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 우리야도 죽였습니다(렘 26:20-23). 여호야김이 다스린 11년은 그렇지 않아도 급격히 기울어 가는 나라의 멸망을 더욱 재촉하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36-37).
왕위에 있는 동안 계속 애굽의 눈치를 보며 백성들을 압제했던 여호야김은, 통치 말년에는 신흥 강대국 바벨론의 압박까지 받게 됩니다. BC 605년에는 당시 국제 정세의 판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을 죽였던 애굽 왕 바로느고가 다시 갈그미스 전투에서 신흥 강대국 바벨론과 맞섰는데 참패한 것입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앗수르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애굽은 근동의 패권을 바벨론에게 빼앗긴 채 약한 나라로 전락해 버립니다.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 강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점령하였음이더라” (24:7)
이 전투에서 애굽을 무너뜨린 바벨론군의 총사령관은 젊은 왕자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그는 이 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왕이 됩니다. 그러니까 BC 605년이 그가 왕이 된 제 1년입니다. 신 바벨론 제국의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의 아들인 느부갓네살 2세는 무적이라고 일컬어지던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이번에는 강력한 라이벌인 애굽 군대마저 굴복시킨 후 세계 최강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는 뛰어난 장군이었을 뿐 아니라 굉장한 국가 경영 리더십을 가졌던 왕입니다. 관제를 정비하고 궁전, 저수지, 대운하 등을 건설하여 위대한 바벨론 제국의 틀을 놓았습니다. 또 정복한 나라들에서 젊은 엘리트 인재들을 포로로 잡아서 바벨론으로 데려와 최고의 시설에서 훈련시키고 나라의 요직에 골고루 등용하는 개방 정책을 폈습니다. 특히 유다에서 잡아간 포로 출신 다니엘을 최고 책임자인 총리에 발탁할 정도로 파격적인 인재 등용 정책을 실시하여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BC 605년을 생각해보면, 갈그미스 전투 이후 바벨론은 승승장구하며, 지금까지 애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서진정책을 밀어붙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그 세력을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강 하수까지 확장함으로써, 애굽에 속했던 땅들을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이제 자기 본토에 갇혀서 바벨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 바벨론의 제 1차 침입과 제 2차 침입
느부갓네살은 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24:1)
여기 느부갓네살이 올라왔다는 것이 제 1차 바벨론 침입 사건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이 한 번에 이뤄진 게 아니라 3차에 걸쳐 이뤄집니다. 이때 첫 번째로 포로로 잡혀가는데, 이 1차 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이때 유다의 여호야김은 하는 수 없이 3년 동안 조용히 엎드려 바벨론이 시키는 대로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3년 후 갑자기 바벨론을 배반하게 됩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요?
BC 602년에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기지로 삼아 애굽을 공격한 일이 있습니다. 고대 바벨론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때 애굽군의 필사적 저항에 부딪힌 바벨론군은 공격에 실패하고 바벨론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을 지켜본 여호야김은 나름대로 애굽이 아직 더 강하다는 판단을 내리고(오판이었음) 바벨론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야가 바벨론을 거역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했지만, 여호야김은 친애굽파의 말을 듣고 바벨론을 배신했습니다. 여호야김으로서는 상황을 나름대로 판단하여 스스로 유리한 쪽으로 행동한 것인데, 이것은 아주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맙니다.
사실 그때 애굽이 바벨론을 이긴 것이 아니고, 죽기 살기로 싸워서 간신히 자기들의 본토를 지키는 데에 성공한 것뿐입니다. 바벨론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놔두면 점점 약해질 적을 무리하게 쳐서 이기느라 아까운 병력 손실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물러났던 겁니다. 그러므로 애굽은 멀리 유다 땅까지 군대를 보내서 여호야김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또 바벨론이 애굽 본토 점령에 실패했다고 해서 유다를 못 칠 정도로 약해진 게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야김은 상황을 완전히 잘못 판단해서 바벨론이 물러난 틈을 타 금방 애굽 쪽으로 붙어 버렸으니, 여호야김의 이 배신은 느부갓네살의 분노를 더 자극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바벨론은 자기 군대가 중심이 된 연합군을 결성하여 유다로 쳐들어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24:2)
바벨론의 갈대아 부대를 중심으로, 아람, 모압, 암몬의 군대가 총동원되어 괘씸한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몰려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한 유다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24:3-4).
하나님은 이사야, 미가, 훌다, 하박국, 예레미야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유다의 멸망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특히 므낫세는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일 정도로 잔인했고, 여호야김도 예레미야를 토굴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왕들의 악행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어리석은 왕 여호야김은 이때 느부갓네살의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인 비참한 모습으로 바벨론으로 잡혀갑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 (대하 36:6-7)
느부갓네살은 이때 여호야김을 잡아갔을 뿐 아니라,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가져가서 바벨론 신당에 보관해 둡니다. 훗날 벨사살 왕은 이 기구들을 가지고 술잔치를 벌이다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고 죽게 됩니다.
여호야김이 죽고 난 후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유다의 19대 왕이 됩니다. ‘여고냐’라고도 하는 여호야긴은 왕이 되어 딱 100일을 다스립니다(24:8).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어리석고 악한 아버지 여호야김의 모든 악한 행위를 그대로 따라했다니 답답한 일입니다(24:9).
결국 그는 왕이 된 지 100일 만에 바벨론의 제2차 침입을 겪게 됩니다. 이미 여호야김 때 다국적군을 동원하여 유다를 공격했던 느부갓네살이 이번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24:10-11). 그리고 여호야긴도 아버지 여호야김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바벨론은 이미 이전에 점령했던 예루살렘을 다시 침공하여 공격한 것입니까? 그 답을 알려면 열왕기에 기록된 연대상의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여호야김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때가 BC 602년이라면, 그리고 18세의 아들 여호야긴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음 100일 만에 다시 바벨론의 2차 침공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면, 바벨론의 2차 침공인 BC 597년과 연대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여호야긴이 유다를 다스리게 된 것은 아버지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약 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이 기간 동안 끌려간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석방되어 유다로 돌아와서 다시 왕으로 다스렸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돌아온 여호야김은 어리석게도 다시 한 번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애굽과 다시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저항한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느부갓네살이 이번에는 직접 대군을 몰고 유다를 응징하러 왔고, 이것이 바벨론의 2차 침입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유다 침공이 있기 직전에 왕위 계승이 잇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호야긴이 그래도 100일 동안 왕으로 있었던 것은, 바벨론의 대군이 준비를 갖추고 예루살렘까지 오는 데 걸렸던 시간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군은, 믿을 수 없었던 여호야김을 먼저 처형하고, 이번에는 아들 여호야긴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갑니다. 여호야긴은 나이 든 모친까지 앞세워서 느부갓네살의 동정을 사보려 하지만, 오히려 모친까지 다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24:12).
비록 여호야긴이 직접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해도, 부친 여호야김의 배신으로 마음이 상한 느부갓네살의 분노가 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끌려간 여호야긴은 바벨론 감옥에서 무려 37년 동안이나 갇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유다 왕조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 기가 막힌 축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감옥에 그토록 오래 갇혀서 포로 생활을 한 것이, 유다 왕조의 맥을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을 우리가 단편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바벨론의 2차 침입 때도 유다의 핵심적인 고급 인력들이 수도 없이 많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 중 선지자 에스겔도 있었고 에스더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도 있었습니다. 이때 끌려간 포로가 1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뛰어난 군인들, 기술자, 또는 학자들이었습니다(24:14-16).
그러니 유다가 입은 손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나라의 핵심 인력을 싹쓸이해서 포로로 데려간 바벨론은, 유다의 남은 자들의 힘을 약화시켜 다시는 감히 바벨론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회복을 준비하고 계셨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게 됩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기울어가는 유다의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지난주일 설교 때도 같이 나누었지만, 요즘 너무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겉으로는 다 믿는 사람들이고 거룩의 모양도 있는데, 실제로는 거룩한 삶이 빠져버린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 문화에 너무 익숙하고 예배 순서도 잘 알아서 뭐 다음에 뭐가 나오는지 다 압니다. 성경의 내용도 웬만큼은 다 압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지는 않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이 시대 교회의 위기입니다. 저를 포함한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들을 보십시오. 행동들을 보십시오. 정말 믿는 사람답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사랑을 이야기하시고 용서를 가르치셨는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있습니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비난하고 욕하고 미워하고, 절대 용서하는 법은 없고... 아니, 어떨 때 보면 불교신자나 이슬람교도보다 도덕적으로 더 못할 때가 많아 보입니다.
우리가 정말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만 내려줘야 하는 산타클로스 정도 밖에 안 되시는 것 같습니다.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계속 지적하셨던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겉으로는 너무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데, 실제로 속은 다 썩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모습은 있었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도 않고 다른 민족들과 똑같이 우상을 섬기며 죄를 짓다가 결국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습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 진짜인 사람을 찾으십니다.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롬 2:28-29, 새)
겉으로만 크리스천이 아니라, 삶 속에서 크리스천다운 모습이 있어야겠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우리가 사랑할 때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시며, 사람들도 우리를 진짜라고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주님 앞에 나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히 깨달은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8-10)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 된 가장 뚜렷한 표시입니다. 이 사랑이 없어서 사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다 망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재판을 굽게 하다가, 사랑이 없으니까 정의가 사라지고 그 죄악 때문에 망했습니다.
사랑이 이렇게 중요한데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살리는 희생의 사랑을 말합니다. 단순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도 사랑인데 그것은 소극적 사랑입니다. 그런 소극적 사랑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써가면서까지 남을 섬기는 적극적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 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내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써가면서, 희생하면서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는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며 섬기다 보면 필연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나도 손해 안 보고 남들을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제대로 섬기다 보면 마음 아파하고 눈물 흘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삶이 우리 예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며 주님의 제자입니다.
힘들지만 그러나 영광의 길인 그 길이기에, 우리 모두가 주님의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 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