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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9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49 ✦
“절망 속에서 받은 마른 뼈 환상”
(에스겔 37장 1~28절)
1. 마른 뼈가 살아나는 비전
에스겔이 태어난 남 유다는,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강대국 앗수르와 이집트, 그리고 신흥 강대국 바벨론의 사이에 끼어 있던 작은 나라였습니다. 막강한 제국들 사이에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 낀 유다는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마침내 패권을 잡은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면서, 유다의 수많은 왕족과 귀족과 종교 지도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세 번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 사람들은 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 갔는데, 에스겔은 25세의 청년으로 다른 포로들과 함께 제2차 침공 때 끌려갔습니다.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에스겔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깊은 영성과 지혜로운 처신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나라를 이끌 특급 차세대 리더로서 장래가 보장되어 있던 엘리트였습니다. 아름답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끄는 영적 리더가 된다는 것은 항상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꿈을 이루기도 전에 바벨론 제국의 무시무시한 침공으로 예루살렘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머나먼 타국 땅, 이방신들의 우상으로 가득 찬 바벨론에서 에스겔은 자신의 꿈을 잃고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포로로 끌려와 살면서, 그래도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바벨론의 3차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당하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 포로로 끌려왔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게다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나는 너의 눈에 들어 좋아하는 사람을 단번에 쳐 죽여, 너에게서 빼앗아 가겠다. 그래도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아라. 너는 고요히 탄식하며, 죽은 사람을 두고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머리를 수건으로 동이고, 발에 신을 신어라. 또 수염을 가리지도 말고, 초상집 음식을 차려서 먹지도 말아라.’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나의 아내가 저녁에 죽었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에 지시를 받은 대로 하였다.” (겔 24:15-18, 새)
20대 청년 시절 낯선 타국에 포로로 끌려온 지 어느덧 15년이 흘러 40대가 된 에스겔에게, 이제는 조국도, 직장도, 사랑하는 가족도 없어졌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무슨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비전이 있었겠습니까?
시편 137편을 보면,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에게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데, 그것은 술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자신과 처자식의 목숨 때문에 부르고 맙니다.
유다 포로들은 이 한을 갚아 주겠다고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대제국 바벨론의 위용에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엄청난 도시의 화려함과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거대한 우상 신상과 신전들을 보면서 유다 사람들은 압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수를 꿈꾸면서도 너무나 강한 상대의 힘에 기가 질려서 체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 에스겔뿐 아니라 유다 사람들 전체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비전을 보여주시는 장소는 전혀 뜻밖의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죽은 사람들의 마른 뼈로 가득 찬 무덤의 골짜기였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1-2절)
하나님께서는 비전을 주시면서 왜 이렇게 음산하고 기분 나쁜 뼈다귀들만 가득 찬 장소 한가운데로 에스겔을 데리고 가신 것입니까? 매장되지도 못한 채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뜨거운 햇볕 아래 노출되어 이미 살은 다 썩어 없어졌고 뼈들끼리도 서로 분리되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바짝 마른 뼈들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절망적이고 끔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그리로 데려가신 이유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철저히 절망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조국이 망했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인간의 힘으로 돌이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에스겔이야말로 충분히 절망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교만하고 고집이 셉니다. 어지간한 고통에도 쉽게 항복하지 않습니다. 힘들다 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항상 상황을 탓하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조상을 탓합니다.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데 전문가들입니다. 9가지 무서운 재앙을 겪고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전혀 회개하지 않았던 애굽의 바로와 같은 교만한 자아가 우리 모두의 속에 있습니다.
에스겔의 조국인 유다는 한때 중동지역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비참하게 멸망을 당한 것입니까? 그것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우상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버렸으며, 자기가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들은 도덕적으로 방탕하고 더러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회개하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고통이 반드시 인간을 성숙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 겪는 고통은 사람을 더 독하게 하지, 부드럽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더 독하게 나가는 경우를 봅니다.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고 원망만 하지, 그 괴로움의 진정한 원인을 찾아내는 영적 통찰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 가운데 두시면서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도록 하셨습니다.
“에스겔아, 보느냐? 지금의 상황은 나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 그 자체다. 너희들의 힘으로 인생을 살려고 했을 때, 나라를 운영하려 했을 때, 결과는 이런 비참함뿐이다. 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 너희들의 교만 때문이고, 너희들의 주인 나를 버린 죄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왕으로 모시지 않고 버렸기에, 나도 너희를 버린 것이다.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철저히 절망을 느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항복을 선언해라. 그리고 나에게 전심으로 나오라.”
하나님께서 괜히 에스겔의 기분을 비참하게 만드시려고 그를 해골로 가득 찬 골짜기로 데려가셔서 절망을 느끼게 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죽음의 현장을 보여주시는 것은 이제 생명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3절)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것은 인간적 상식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막 죽은 시체도 아니고, 바짝 말라서 사방으로 흩어진 뼈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 생각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상식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이고 앞이 캄캄한 상황이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대안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실 답을 이미 아시면서도 묻고 계십니다. 이때 에스겔의 마음이 얼마나 겸손해져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려 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그것들을 살리시겠다는 의지가 이미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세워지면,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한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나라이든,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 힘들면 무기력한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미래에 대해 아무 소망도 없이 일찌감치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인간적으로 보면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인간이 손을 들고 항복하는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의 능력이 살아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 비전을 줌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며 놀라는 것은,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는, 아니 피하고 싶어 하는 이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들을 향한 계획이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마른 뼈들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시는 기가 막힌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뼈라는 것은 죽음과 절망을 의미하는데, 이 마른 뼈들은 2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죽음 같은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에스겔의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살려주시는 계획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계획만 있으신 게 아니라 그 절망적 상황을 완전히 바꿔버리시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혹시 우리도 절망적인 상황에 있습니까? 아무리 죽음같이 힘든 상황이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낼 계획을 갖고 계시고 또 그렇게 할 능력도 있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돌파구를 열어 주십니다. 마른 뼈를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 비전의 사람들입니다.
2. 비전이 부흥으로
우리가 자주 쓰는 ‘부흥’이라는 단어가 영어로는 Revival인데, ‘다시 살아남’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도 죽어 가고 있다면 비참한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나라도, 아무리 겉으로 훌륭한 모습을 가졌어도 죽어 가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흥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가능합니다.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부흥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4-6절)
놀랍게도 에스겔이 말씀을 대언하는 동안 사방에 흩어진 마른 뼈들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서 붙기 시작하고, 힘줄이 붙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이면서, 제 형태를 찾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7-8).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너진 인생과 절망스런 현실의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창조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에는 세상이 암흑과 혼돈뿐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입에서 나오면서 하늘과 땅이 나뉘고, 태양과 달과 별들이 생기고, 산과 바다가 생기고, 수백만 종에 달하는 동식물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혼란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며, 절망에서 기적을 이루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결국 절망적인 현실을 돌파하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른 뼈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읽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 직면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요즘 <말씀의 삶> 공부를 하면서 더 느끼는 건데,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말씀을 너무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알긴 아는데 정확히 알지를 못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머리로는 아는데 삶으로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일수록, 상황이 너무 급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달려 나와야 합니다. 가끔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고, 성경을 읽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까? 그 동안 사람의 말에만 너무 귀를 기울였거나,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왔기 때문에 오늘의 난처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영혼의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 6:3)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말씀을 들어야 하지만,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멀리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여기는 것보다 더한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길 때 그것은 재앙으로 인도하는 시작이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을 살펴보면서 배운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갔던 왕들은 자기도 살고 나라도 살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내팽개친 왕들은 자기도 죽고 나라도 망하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까? 다윗도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 죄인이고, 그 외에도 수없이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죄를 범했을 때도 즉시 말씀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면 그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과정에서 마치 뼈에 힘줄과 살이 붙는 것처럼 부서진 인생의 조각들이 다시 붙게 됩니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뼈들이 기가 막히게 자리를 찾아 붙었듯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너진 인생의 조각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가 막히게 회복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생기
에스겔이 본 환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뼈들이 서로 들어맞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며, 다 사람의 형체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생기가 없어서 시체들일 뿐이었습니다. 이 시체들이 살아나기 위해선 두 번째 요소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생기였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9-10절)
히브리어로 ‘루아흐’라고 쓰는 ‘생기’는, 원래 하나님의 영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만드시기 전에 온통 흑암과 혼란으로 가득 찬 위를 ‘하나님의 루아흐가 날아다녔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천지창조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도, 일단 흙으로 형체를 다 만드신 다음에 루아흐, 즉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숨을 쉬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바로 이 하나님의 생기가 골짜기의 뼈들에게 들어가니까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벌떡 일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 일어난 사람들이 “극히 큰 군대”였다고 말씀합니다(10).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원래 모습이었습니다. 군대는 힘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지휘관의 명령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며 나가 싸우는 것이 군대입니다. 강한 군대에는 위엄과 승리가 있고 누구도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합니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에는 세상이 건드릴 수 없는 그런 거룩함과 힘과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런 강하고 힘 있는 군대로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마른 뼈들 같은 비참한 모습으로 살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1절)
이들은 분명히 이스라엘 온 족속인데 왜 이들이 뼈가 마르고 소망이 다 없어져 멸절되기까지 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멀리하고, 교만하여 자기 스스로를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로만 하나님의 백성이었지,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니까 다시 살아서 군대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나아가 싸울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군인마다 각각 따로 싸우는 게 아니라 “군대”로서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군대로 함께 부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론적으로만 머물거나 우리끼리만 즐겁게 지내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들고 험한 세상을 향해 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3. 사랑과 회복
마른 뼈 같이 비참했던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가지신 비전은 우리가 다시 살아나서 극히 강한 군대가 되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나가 싸워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흥의 결론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막혔던 국경이 무너지고 갈라섰던 형제자매들이 다시 하나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5-17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지파들을 상징하는 막대기들과 유다 지파를 상징하는 막대기들을 합하여 하나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족을 통일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남들과도 사랑의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갈라져서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거렸던 이스라엘의 통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둘 다 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흥으로 다시 살아난 민족에게는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약속을 막대기의 연합을 통해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눈앞에서 손에 잡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20-22절)
하나님의 비전을 받은 사람들은 그 비전이 이루어지는 부흥을 체험하게 되고,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화평과 회복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갈등과 반목의 벽이 극복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때에 남과 북이 하나 될 것이고, 동서 화합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부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회복되고, 미워하던 형제자매의 관계도 회복될 것입니다. 갈라졌던 교회들도 서로 하나가 될 것이고, 원수처럼 미워하며 반목하던 지역들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24-25절)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나아갈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할 때 극히 강한 군대가 되어 나가서 함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싸우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나가는 말]
다시 정리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하나가 되어서, 이제 왕이신 주님이 원하시는 일, 즉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을 위해 큰 군대가 되어 같이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우리 각자도 있는 곳에서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는 에스겔이 되어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최종 토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으십니까? 누가 되면 안 되고 누가 되면 됩니까? 아닙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왕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이 세상을 이끄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역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시지 보이는 제국의 왕이 아닙니다.
비전이 부흥으로, 또 부흥이 사랑으로 이어질 것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로서, 그 부흥의 한가운데서 놀랍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