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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7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43 ✦
“덤으로 주어진 15년 동안 벌어진 일”
(열왕기하 20장 1~21절)
1. 불치병에 걸린 히스기야의 회복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과거로 돌아가 뭔가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어내거나 미래를 바꾼다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또 그런 내용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가 왜 그렇게 인기를 끌겠습니까? 우리 삶에는 항상 과거에 대해 뭔가 아쉬운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가 해버린 말들이나 행동들, 그리고 빨리 내려야 했던 결정들에 대해 아쉬운 기억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랬습니다. 중한 병에 걸려 곧 세상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고, 그래서 15년이라는 시간을 더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달려서 받은 그 15년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생이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시간을 조금 더 주신다면 그 시간을 정말로 후회 없이 잘 쓸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수명의 한계를 넘어갔던 히스기야가 덤으로 주어진 15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면, 거기에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습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1절)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히스기야가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확인시켜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선지자 이사야였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와서 그가 죽을 것이라는 소식을 아주 냉정하게 전해줍니다. “너는 집을 정리하라”라는 말은, 왕인 히스기야 자신이 죽고 난 후의 혼란을 막기 위해 후계자 문제와 같은 중요한 나라의 일들을 마무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사야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은 히스기야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1절 첫 부분 가장 첫 단어가 “그때에”입니다. 문맥을 보면 이때는 지난주에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앗수르 대군의 예루살렘 포위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병에 걸렸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력한 앗수르의 군대가 서서히 유다의 성읍들을 짓밟으며 압박해 오고 있는 아주 긴장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보다도 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잘 이끌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 중심에 있던 남 유다의 왕 히스기야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아도 최악의 타이밍에 위기가 올 때가 많습니다. 가장 돈이 필요할 때 돈이 없습니다. 가장 시간이 없을 때 바쁜 일들이 연속으로 터집니다. 가장 몸이 안 좋을 때 해결해야 되는 일들이 생깁니다. 가장 마음이 안 좋을 때 자꾸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도와야 할 일들이 벌어집니다.
히스기야도 왕으로서 가장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 왕인 자신의 목숨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잔인한 판정을 받았습니다. 맥이 탁 풀리고 그냥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어디 이상한 사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와서 이야기했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지만,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니까 히스기야는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2). 여기에는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과만 대면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서럽고 괴로운 히스기야는 하나님외의 그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3절)
이렇게 기도하는 히스기야의 모습은 참으로 훌륭한 자세입니다. 그는 죽어야 하는 자신의 형편이 너무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따지거나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다의 13대 왕인 히스기야는 다윗 이후 300년 만에 나온 믿음이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했던 여호사밧 이래로 가장 넓고 큰 영적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에 의해 폐쇄되어 있던 성전 문을 열었고, 성전을 복구했고,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또 그때까지 지켜지지 않던 유월절을 나라 전체가 다시 지키기 시작했고, 우상숭배의 근거지인 산당들을 파괴했습니다.
물론 히스기야는 지금 그 모든 선행들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면서, 그토록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쓴 종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겸손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면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기도는 평생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진실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히스기야는 통곡하며 기도했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억울함 때문이 아닙니다. 앗수르의 침공 앞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들을 자기가 두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라의 왕으로서 최고 지도자인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8장을 보면, 히스기야가 그때 하나님께 드렸던 애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 주님을 섬기고 살겠습니다.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저를 낫게 하여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아픔이 평안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 38:16, 새)
그의 기도를 읽어보면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신뢰가 느껴집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는 즉시 응답이 됩니다.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돌아가던 이사야라고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어쩌면 이사야도 마음속에서 ‘하나님, 우리나라의 위기 상황 속에 어떻게 왕이 죽을 수 있습니까? 이건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라는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가 왕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급히 발걸음을 돌려 다시 히스기야에게 돌아와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5-6절)
여기서 하나님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다.” 우리의 기도에도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을 보면 히스기야가 얼마나 간절히 눈물로 주님께 기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주셨고, 히스기야가 마지막까지 걱정하던 앗수르의 침공에서도 구원해주실 것을 확인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왜 살려주신 겁니까? 그렇게 살려주신 것은 단순히 그가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앗수르로부터 유다를 지켜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바로 그것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또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면서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6) 하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히스기야를 살려주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치유해주신 것은, 그가 여러 훌륭한 일들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상 다윗과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 히스기야의 리더십을 통해 앗수르를 물리침으로써, 유다를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 됐다. 내가 세게 기도해서 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영적 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했다거나, 믿음의 조상들의 섬김과 기도의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응답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저 늘 감사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처방까지 제시해줍니다. 한 뭉치의 무화과 반죽을 상처 부위에 붙이라고 합니다(7). 무화과 반죽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약품으로 사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처방은 아주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타일레놀(Tylenol)을 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 타일레놀을 먹인다고 살아납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치유의 기적을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절차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낫게 해주실 수도 있는데 굳이 이렇게 무화과 반죽을 바르라고 하신 것은 사람은 듣기만 해서는 잘 안 되기 때문에, 몸에도 닿게 하시는 것 등을 통해 히스기야가 충분히 치유를 느끼게 해주시는 배려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표가 있나이까 하니” (8절)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였지만, 정작 자기가 이 무서운 병에서 낫는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탓하지 않으시고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어떤 징조입니까?
“이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왕에게 한 징표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뒤로 물러갈 것이니이다 하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 (9-11절)
이사야는 해시계 위의 해 그림자를 10계단, 즉 10도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고 뒤로 물릴 수도 있으니,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히스기야에게 묻습니다. 이 해시계는 아하스 왕 때 만든 것이었는데, 해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재기 위해 당시 궁전 12계단 옆에다가 기둥을 세워놓고 그 그림자가 계단을 따라 진행되는 정도에 따라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였습니다.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시간에 따라 앞으로 진행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뒤로 물러가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10). 해 그림자가 10계단이나 뒤로 후퇴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이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데, 실제 해의 위치가 변경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역회전을 했다면 시간이 돌아가는 것뿐 아니라 지구 전체에 엄청난 환경적 문제들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의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여호수아의 승리를 위하여 태양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히스기야를 위하여 해 그림자를 뒤로 물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능력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조화 속에서 그 자녀들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 크신 하나님께 접속하여 그분의 능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 15년 연장된 인생의 빛과 그림자
1) 유다의 번영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게 된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나라를 크게 번창시킵니다.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 (대하 32:27-30)
히스기야는 탁월한 경제정책을 펼쳐 온갖 보물과 산물을 둘 거대한 창고를 세워 가득 채울 정도로 국가 재정을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아주 중요한 자산이었던 가축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을 수용할 외양간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윗 성으로 거대한 지하 수로를 연결하여 물을 공급하는 공사도 잘 이뤄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자신감이 지나쳐서 교만으로 되어 나중에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2) 바벨론 사절단의 방문과 히스기야의 실수
유다 왕 히스기야가 중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게다가 병에서 일어난 히스기야가 대단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소식 역시 여러 나라에 빠르게 퍼졌습니다. 그 중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도 그 소식을 듣고 유다에 사신을 보냈는데(12),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왕에게 이웃 나라의 왕들이 축하 사신과 선물을 보내는 것은 외교적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브로닥발라단에게는 이것이 표면적 이유였고, 그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전통적인 강대국인 애굽이나 앗수르와는 달리, 그 당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 세력이었습니다. 몇 번에 걸쳐 앗수르에게 반란을 시도했다가 아직 힘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바벨론은 또 다시 앗수르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름대로 군사력을 기르는 가운데 반 앗수르 성향을 가진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 히스기야의 회복은 아주 좋은 명분이 되었습니다. 앗수르에게 과감히 대항하는 히스기야 왕과 날로 커져가는 유다의 경제력은 바벨론에게 이용 가치가 충분했던 것입니다.
뛰어난 왕이었던 히스기야가 그런 바벨론의 숨은 속셈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앗수르의 위협에 시달리던 유다에게도 바벨론 같은 강력한 동맹 세력이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바벨론이었기에 결코 유다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바벨론의 접근을 허용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14-15절)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나라의 보물 창고와 무기고를 활짝 열어서 이렇게 다 보여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바보라서, 또는 너무 흥분해서 즉흥적으로 그런 게 결코 아닙니다. 유다가 바벨론과 동맹을 맺게 된다면, ‘우리도 이 정도로 힘이 있고 가진 게 많다’는 것을 과시하여 처음부터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다 보여주었는데, 사실은 그것이 나라의 핵심 기밀을 그대로 드러낸, 아주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행동이 히스기야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대하 32:25)
여기서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라는 말은 ‘그가 받은 은혜에 걸맞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바벨론 사신들의 방문을 받고서 취한 그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 밖에 없는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지만, 막상 위기를 넘기고 나면 자신이 잘나서 된 줄로 착각하기가 참 쉽습니다. 어려운 시절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성공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히스기야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치병에서 치유를 받았기 때문에 나라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공로를 자기가 취하려는 교만을 품었습니다.
“심지어 바빌로니아의 사절단이 와서 그 나라가 이룬 기적을 물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인품을 시험하시려고, 히스기야가 마음대로 하게 두셨다.” (대하 32:31, 새)
바벨론 사절단은 분명히 “그 나라가 이룬 기적”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중병에서 살아났는지, 어떻게 이런 부강함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잠시 물러서셔서 히스기야가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히스기야는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간증하고, 유다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벨론 사신들 앞에서 당당히 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는 대신, 보물 창고와 무기 창고를 보여주며 자신의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바벨론 사절단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보다 세상의 보물과 무기들을 더 자랑스러워하고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 됩니다. 하나님의 종인 그가 다른 나라 왕들과 전혀 다를 게 없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한다면 그것은 잘못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돈, 명예, 성공, 학벌 등). 솔직히 주님을 안 믿는 사람들 중에 더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밖에 성공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성공한 것을 자랑하면 교회나 사회나 똑같은데 뭐하러 교회에 오겠습니까?
그의 이러한 태도에 결국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들을 환대하면서 나라의 보물고와 무기고를 다 보여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사야는 즉시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말합니다(14-15). 여기서 이사야는 세 가지 질문을 하는데,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 스스로 행한 일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첫째,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는가?’
이 질문은, 바벨론 사신들이 히스기야가 체험한 기적의 치유에 대해 물었을 텐데, 왕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세상적 힘을 과시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질책입니다.
둘째,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이것도 몰라서 물은 게 아닙니다. 바벨론은 앗수르와 다를 바 없는 사악하고 교활한 세력인데, 그 실체를 아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철없이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하는데, 나중에 알게 되듯이 거리와 상관없이 바벨론은 유다를 멸망시키러 쳐들어오게 됩니다.
셋째,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이것은 앗수르 못지않게 악한 제국인 바벨론에게 나라의 보물고와 무기고를 다 보여준 히스기야의 어리석고 경솔한 처사에 대한 책망이 담겨 있는 질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교만해지면 순식간에 이런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히스기야의 대답을 들은 이사야는 곧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7-18절)
이 말씀은,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대항하여 동맹으로 삼으려는 바로 그 바벨론에게 유다가 오히려 멸망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가 자랑하며 과시했던 그 많은 보물은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며, 히스기야의 아들들 중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환관이 되는 자가 있을 정도로 비참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을 히스기야는 겸손히 받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19절)
이 말씀만 보면 히스기야가 좀 엉뚱하게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자기 대에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대하 32:26)
히스기야는 그래도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즉시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이 히스기야 생전에는 내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지만, 때로는 심판의 말씀, 듣기 거북하고 껄끄러운 말씀일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런 말씀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무섭게 질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반항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가 임하게 됩니다.
4) 악한 아들 므낫세의 출생
그 일 이후에 산헤립이 이끄는 앗수르 대군의 예루살렘 포위 사건이 일어납니다. 앗수르의 침공을 무마하기 위해 히스기야는 왕궁과 성전에 있는 보물을 다 털어서 앗수르에게 뇌물로 바쳤습니다. 다 받고 나서도 앗수르는 유다를 침공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로 18만 앗수르 대군이 하룻밤 사이에 전멸하고 유다는 기적같이 살아남게 됩니다.
앗수르가 물러가자 그 소문이 퍼지면서 여러 나라들이 다시 온갖 보물을 가지고 히스기야에게 경의를 표하며 몰려왔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히스기야는 15년의 보너스 인생을 받은 보람이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덤으로 받은 15년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아들 므낫세의 출생입니다. 히스기야가 죽고 므낫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가 12세였으니까, 그가 불치병에서 치유를 받은 3년 뒤, 즉 42세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죽을병에서 나음을 얻은 다음에 얻은 아들이었고 그것도 42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하며 키웠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므낫세가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 됩니다. 므낫세는 무려 55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아버지가 정리했던 우상 신당들을 다시 세우고, 백성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게 만드는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므낫세의 악행은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결정적 원인이 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병이 나음으로 덤으로 받은 15년 사이에 낳은 이 아들이 자기 나라를 파멸로 이끌 일들만 골라서 하는 악한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복을 받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답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저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가는 말]
히스기야가 덤으로 받은 15년의 인생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나 자신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말하고 행동했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 돈, 학벌, 성공 등, 내가 가진 세상 것을 자랑하지 않고 늘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는가? 자녀들과 신앙의 후배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뿐입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을 늘 마음에 품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이 기뻐하실 일만 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