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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6 수요예배

크리스천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3

폭풍 속에서도 편안히 있는 믿음

(누가복음 8 22~25)


 

1.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불안한 사람들


가정마다 부모와 자녀가 있는데, 모든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줄 때도 많지만, 속을 썩이는 자녀들도 많습니다. 좋은 부모와 함께 산다고 무조건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듯,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따를 때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지만, 언제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는 결국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면 삶의 어려움이 해결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행’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같이 있는 것이 동행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안에 같이 있었지만 풍랑을 보고 두려워한 제자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은 동행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뿐 아니라,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우리 인생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위로와 평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 16:33, )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가 환난을 당할 것은 분명하지만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쉼과 평화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면서도 쉼과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2 교회 역사를 통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정도로 오래 신학적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입니다. 교회사에서 4세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심했던 시기였고, 5세기 초반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던 시대였습니다.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대주교가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확실히 분리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행동과 어떤 것은 신성에 의한 것이고, 어떤 것은 인성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431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파면되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에우티케스(Eutyches)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한 뒤에는 신성이 인성을 지배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성품은 사실상 신성 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중 에우티케스의 입장도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결국 451 칼케돈(Chalcedon)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분명히 정의했습니다. 신성과 인성은 서로 섞이거나 혼돈되지 않고,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게 결합되었다고 확정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마침내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로 논쟁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게스 논쟁은 이후에도 다른 모습으로 조금씩 변형되어 나타났습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치열하게 이루어진 논쟁을 통해,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신학적 주장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것입니다.


신학적 논쟁들을 조금 쉽게 풀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아들을 보내실 일반적인 부부관계를 통하지 않으시고 마리아라는 처녀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아버지는 신성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어머니는 인성을 가진 마리아라는 여인입니다.


문제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신성을 갖고 계신 반면, 인간인 마리아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가지 어느 한쪽을 주장하는 것을 가리켜 ‘단성론’(Monophysitism)이라고 부릅니다. 2 교회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이단이 바로 단성론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이단 하나인 ‘여호와의증인’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번째 피조물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성론을 주장하게 되면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면, 구원은 하나님만이 이루어주시므로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쉽게 증명할 있지만,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겠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인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의 모든 문제와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하시며 해결해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은 좋지만, 결국 그분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하고 창조주의 능력을 행할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단성론을 주장하면, 다시 말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풍랑이 몰려온 가운데 배에서 주무신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런 신학적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해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등장하는, 성경의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방법과는 다른 창조주의 방법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가라사인의 땅으로 이동하실 배를 타고 가셨습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2-23)


이것을 지리적으로 보면, 갈릴리 호수 북쪽에서 남동쪽 끝으로의 여행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연이어 이루어진 사역들로 인하여 너무 피곤하셨기 때문에 안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아주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 11:12-1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함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11:33-35)


예수님도 이렇게 피곤할 때가 있으셨고, 배가 고프셨고, 불쌍히 여겨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고충과 아픔을 아는 분이십니다. 반면,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능력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4)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에게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며, 자연까지도 복종하게 만드시는 창조주의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엄청난 폭풍이 불고 파도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가지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이 창조주이신 동시에,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연약함이 무엇인지,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 4:15-16, )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주실 아니라,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는 분입니다. ,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아픔을 아시고, 우리의 계획과 방법 이상으로,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폭풍이 부는 가운데 배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접할 우리는 주로 이렇게 해석을 해왔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폭풍이 불고 커다란 파도가 몰려올 ,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야 한다. 예수님만 깨우면 그분이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어려움을 잠잠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체로 아주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해석입니다.


그러한 해석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제자들이 상황에서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광풍(사나운 바람) 호수로 내리 불어서, 배에 물이 차고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럴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뭐라고 합니까?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 8:25, )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 4:38, )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 8:24, )


여기서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에게 그들이 살려 달라고 구하지만, 강조점은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베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게 생겼으니, 선생님도 일어나십시오.”라고 하는 겁니다. 제자들이 상황에서 정말 두려워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깨어 있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예수님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 우리 가운데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워야 하지만, 해석만으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깨어 계시더라도, 인간적인 예수님만 깨어 계신다면, 우리가 그분의 신적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안에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과도 같습니다.


고통당하는 우리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성, 신적 능력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어도, 예수님을 깨워서 일어나셔도 여전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25)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던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창조주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창조주로 인정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문제 해결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힘들어합니다. 자기 방법대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만을 믿는 오류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 방법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3.  인성의 믿음 vs. 신성의 믿음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믿는 신앙이 신성을 믿는 신앙보다 강한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의 진로를 위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인성의 믿음은 주님을 좋은 학원 선생님 정도로 생각하게 합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성적이 좋아지고, 그래서 결국 좋은 학교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성의 믿음이 있다면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순지 성적을 올려주실 있는 분이 아니라, 학교 자체를 없애 버릴 수도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가득한 학력주의, 학벌주의를 없앨 있으신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그런 믿음이 있다면, 성적이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신성의 믿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의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 공부 그리스도인의 신분 배울 파이 사고방식(Pie Mentality)’ 깨야 한다고 것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여유를 나타내기 위해서 깨야 것이 바로파이 사고방식(심리)’, 영어로 ‘pie mentality’입니다. 피자를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8조각짜리 피자를 4명이 함께 먹는다고 해보십시오. 사람이 2조각씩 먹으면 되는데 사람이 남들보다 빨리 먹어서 자기 몫인 개를 먹고 개째 집으면, 누군가 개를 먹게 되는 사람이 생기면서 싸움이 납니다. 12조각짜리를 8명이 먹는 경우도 같습니다. 4명은 2개를 먹고 나머지는 1개를 먹게 됩니다. 내가 빨리 먹어야 하나를 먹고, 느리게 먹으면 하나 밖에 먹고 끝납니다.


직장에서는 사람이 승진되면 내가 승진이 되고, 가게도 가게가 되면 가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pie mentality입니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당연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유 있게 살지를 못합니다.


“1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신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 4:1-3, )


대부분 기도에 대해 배울 2 뒷부분부터 3절을 인용합니다. 하지만 1절부터 봐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왜 자꾸 하나 놓고 서로 싸우고 그러느냐?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능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한다면, 피자 판을 놓고 누가 먹고 누가 먹는지 따지고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먹으면 내가 먹으니 된다. 공평하게 똑같은 개수로 먹어야 한다. 하면서 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자 하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자 놓고 남들과 서로 먹겠다고 싸우는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피자 하나를 가지고 아무리 나누어 봐도 자기에게 돌아오는 최대 양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꾸 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를 주십니다. 남들이 머리 굴리고 계산하면서 슬쩍 것을 가져가면 ‘왜 것을 가져가느냐?’라고 머리 터지게 싸우지 말고, “더 먹고 싶어? 그래, 마음껏 먹어. 하고 양보하는 겁니다.


자기들끼리는 자기가 먹겠다고 싸우고 있는데, 나는 양보하고 나와서 “아버지, 걸로 주세요.”라고 하면 내려주십니다. 사람들은 서로 누가 먹느냐 하며 싸우는데, 나는 여기서 혼자 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내게 와서 것을 먹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 “그래, 먹어, 먹어. 하면서 여유 있게 내어주고 저리로 가서 기도합니다. “아버지, 보셨죠? 저들에게 나눠줬어요. , ! 하면 내려주십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이런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회사에서도 승진을 놓고 내가 올라가면 사람이 올라가고, 사람이 올라가면 내가 올라간다고 하면서 싸우지 말고, 남을 성공시켜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리 하나 만들어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부서를 하나 만들어주시든지, 다른 데서 올라가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기만 하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재미가 바로 그런 겁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할 때는 전혀 길이 보이고 막혔는데, 생각지도 않게 갑자기 어떤 계기가 생기고, 우연찮게 누구를 만나기도 하면서 일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자녀다. 나는 풍성한 하나님이다. 너는 그런 나의 자녀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구하지 말고 나에게 구해라. 그럼 내가 테니 그것으로 풍성하게 베풀며 살아라.

 


4.  인성을 넘어 신성을 바라보는 믿음


폭풍이 불고 엄청난 파도가 몰려와서 죽게 만한 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있습니다. 그러한 위험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달라져야 합니다.


폭풍이 부는 바다의 안에서 예수님은 주무셨고,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평안하셨는데 제자들은 죽을까 불안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믿음의 현상이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똑같이 예수님과 동행해도 우리에게 큰일이 닥치면 행동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의 문제 해결 방법은 창조주답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향해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폭풍 속에서도 잠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신적 능력을 믿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닥칠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울고불고 외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의 생각과 방법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믿음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파이 사고방식’에 갇혀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정말 믿는 것인지 의심이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너무 힘들어 울면서 인생길을 가는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시는 인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인성을 뛰어넘어 신성을 바라보고 붙들 있어야 합니다.


사실은 작년에 우리가 비슷하게 연습을 적이 있습니다. 2016 예산을 상황은 좋았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청소년과 대학생들을 위한 교역자를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가진 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예산위원회에서 그것을 짰습니다. 이것은 황당한 일일 수도 있고, 믿음으로 했지만 맹목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놀랍게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조심할 것은,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 나아가는 것이 신성의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과 경험과 지식을 초월해서 역사하실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들 , 그렇게 수만 있다면 어떤 폭풍이 몰려와도 편안히 잠을 있습니다. 어떤 인생의 문제가 일어난다 해도 우리는 평안 속에 거할 있습니다. 그렇게 폭풍 속에서도 편안히 있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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