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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17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1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없는 하나님의 심판

(열왕기상 22 1-40)

 

1. 아합과 여호사밧의 동맹

 

지난주 우리는 그토록 악한 아합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겸비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겸비한 마음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천적과 같은 아람과의 갈등 때문입니다.

 

결국 아람과 전쟁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심판이 임합니다. 아무것도 잘한 게 없이 오히려 죄의 길로 가는데도 뜻하지 않게 주시는 은혜는 무한정 계속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고도 불순종의 길로 계속 가면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아합은 이 전쟁이 자신에게 마지막 전쟁이 될 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어리석고 악한 리더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20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람과의 새 전쟁이 일어나게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합 자신이었습니다. 이때로부터 3년 전(1절), 하나님께서 엄청난 아람의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치게 하시고, 아람 왕 벤하닷을 제거하여 화근을 없앨 기회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어리석음과 교만으로 불순종하여 벤하닷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때 벤하닷은 빼앗은 성읍들을 모두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고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에 아합의 이름으로 거리까지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벤하닷은 빼앗은 성읍들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기간에 복수의 칼을 갈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합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특히, 벤하닷이 돌려주기로 한 성읍들 중에서 요단 동편에 위치한 길르앗 라못은 솔로몬 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로서는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아람을 징벌하고 그 땅을 되찾아올 것을 결심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3절)

 

그러나 아람의 전력이 강했기 때문에 아합은 남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여호사밧이 흔쾌히 동의를 합니다.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4절)

 

선대 왕 때까지만 해도 원수처럼 싸우고 대치하던 유다와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런 화해 무드로 바뀌었습니까? 그것은 아합의 딸 아달랴가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해서 사돈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이런 협력관계를 이룬 것은 아람뿐 아니라 날로 세력이 강해지는 강대국 앗수르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혼인을 통한 동맹과 협력은 힘을 합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한다는 점에서는 아주 바람직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 논리의 관점입니다. 이런 정치적 계산 이전에 남과 북의 리더들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펴야 했습니다.

 

사실 남 유다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좋은 왕이었습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개혁을 단행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내리셔서 여호사밧의 리더십 아래 유다는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호사밧이 나라의 안전을 위해 우상 숭배자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악한 아합과 사돈 관계를 맺고 협력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나중에 재앙의 불씨가 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동맹을 맺고 군사협력을 하기 전에 그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계산만으로 서로 연합하게 되니까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가 유다로 번져 나가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를 유다도 그대로 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모든 연합이 다 선하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연합은 해가 됩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서로 원수였던 빌라도와 헤롯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서로 적대관계였던 사두개파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연합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말씀의 원칙에 근거한 연합만이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람을 상대로 한 전쟁은, 진작 아합이 하나님께 순종했으면 안 해도 될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불순종하여 벤하닷을 살려 보냄으로써 다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나아가면 똑똑한 것 같고 당장 이득을 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안 해도 될 싸움을 하게 되고 안 흘려도 될 피를 흘리게 됩니다.

 

순종하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잔머리 굴리고 계산하면서 적당히 순종도 하고 불순종도 하며 나아가면 당장 이익을 보는 것 같아도 결국은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작은 일부터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놓고 자기는 그대로 했다고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2. 거짓 예언과 참 예언

 

1)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예언

 

유다 왕 여호사밧의 협력을 얻은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신실했던 유다 왕 여호사밧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를 원합니다(5).

 

동맹을 해준 여호사밧의 제안에 아합은 할 수 없이 선지자 400명을 모아 의견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진정한 선지자가 아니라 왕이 원하는 것만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히 아합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6절)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철저히 인간 중심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왕과 백성이 들어야 할 말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합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왕이나 백성들이 듣고 싶은 말은 당연히 승리한다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과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여호사밧은 정확한 영적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이 하나 같이 승리를 장담하니까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머뭇거리다가 한 명 더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8절)

 

여기서 새번역으로 보면 아합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주님의 뜻을 물어 볼 사람으로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나는 그를 싫어합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인가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고, 언제나 흉한 것만 예언하곤 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이 말합니다. “임금님께서 예언자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얼마나 민망하면 여호사밧이 이렇게 이야기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아합은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미가야가 왜 흉한 일만 예언했겠습니까? 아합이 하나님 앞에 혼날 짓만 하니까 그렇습니다. 미가야는 아합을 미워해서 흉한 것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겁니다.

 

그런데 아합은 회개할 생각은 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미가야의 탓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리더입니까? 그래서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부르면서도 미가야만은 부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에게 미가야와 같은 참된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우리도 잘못 나아갈 때 미가야처럼 바른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축복입니다. 물론 이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부으면서 자기는 바른 말을 하는 것이고 뒤 끝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잘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진리를 말해주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아합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 회피하려고 합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다가 잠시 잘못 나아가는 사람의 경우는 사랑으로 지적을 해주면 처음에는 좀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약간 지나면 스스로 깨달으며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예 불순종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잘 말을 해줘도 화를 내거나 회피합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진리를 몰라서 진리대로 살지 않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진리가 감당이 되지 않아서 도망을 가는 겁니다. 나의 추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해야 하니까 그게 두려워서 피합니다.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람 앞에 서면 자신의 이중적인 삶과 시커먼 속이 다 드러날까 봐 겁이 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만나지 말고 듣지도 말고 도망가려고 합니다.

 

미가야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르지 않은 아합의 심정이 바로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껄끄러워도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도망가면 안 됩니다. 말씀을 직면하여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합처럼 비참하게 되고 맙니다.

 

미가야를 불러오는 동안 거짓 선지자들이 계속 예언을 하는데(10), 그 중에서도 시드기야가 나서서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반복합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11절)

 

시드기야는 거짓 선지자들의 대표 격으로 막강한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참 선지자인 미가야가 오기 전에 왕과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확실히 잡아 놓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쇼를 합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상징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철 뿔까지 흔들며 거짓 예언을 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며 ‘야, 진짜 우리가 이기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드기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말만 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포장을 합니다. 멸망이 다가오는데도 잘될 것이라는 말로 헛된 기대감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욕망을 읽고 그것을 만족시켜 줌으로써 마음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시드기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승리를 예언했을 때, 아합과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안도가 되고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긴다는데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합과 이스라엘 군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사실 위로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로가 누구를 향하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시드기야의 예언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지 못하고 그저 거짓 만족만 누리게 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렘 23:16-17)

 

하나님을 떠난 사람일수록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활개 쳤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득세하지 못했을 것이고 참된 선지자들의 뼈아픈 말씀을 새기며 마음을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 참된 선지자의 불편한 예언

 

미가야는 엘리야와 더불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미가야를 데리러 간 아합의 사신은 미리 정치적 압력을 넣습니다(13). 모두 다 왕에게 좋은 말만 하니까 미가야도 왕이 불편해할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당당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하라고 하시는 대로 말할 뿐이라며 그 요구를 거절합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14절)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하고 싶지 않아도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 같아서 그대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8-9)

 

예레미야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니까 백성들이 싫어하고 자기를 조롱하며 심지어 잡아다가 고문까지 합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어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해보지만, 자기 마음속에서 불이 붙는다는 겁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이런 고민이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말씀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거나 제대로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괜히 바른 소리를 하면 기분 나빠할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것인지, 적당히 듣기 좋은 말만 할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감정대로 말해서는 안 되고, 기도한 후 확신이 올 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 정말 받아들이고 마음을 돌이킨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 저를 싫어하고 회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목회자만 아니라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지 모릅니다. 옆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나가는데 그냥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적당히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정말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제 아합 왕 앞에 불려온 미가야는 자신이 한 말과는 달리 아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줍니다.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또는 말랴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 (15-16절)

 

미가야가 거짓 선지자들과 똑같이 승리의 예언을 해주는데, 사실 이것은 아합을 비꼬면서 한 말입니다. 그것을 느낀 아합은 약이 올라 당장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17절)

 

미가야의 예언의 요점은,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으로 비유하며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합은 화를 내며 여호사밧에게 미가야는 자기 생각대로 항상 흉한 소식만 전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18). 하지만 미가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전합니다. 미가야가 본 환상은 하늘나라의 회의 장면이었습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19-23절)

 

이 환상의 결론은,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속아 아람과 전쟁을 일으키는 아합이 전쟁에서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합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미가야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실체를 밝히자 모두 경악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우두머리인 시드기야는 와서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욕을 합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24절)

 

그러나 미가야는 두고 보라고 장담을 하며 말합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25절)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보면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 역시 분노하면서 미가야를 투옥시키라고 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26-27절)

 

하지만 이때 미가야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28절)

 

미가야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항상 거짓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1-12)

 

미가야도 이 “선지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나로 말미암아”입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면 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미가야는 분명히 하늘에서 큰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아합의 최후

 

미가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합과 여호사밧의 연합군은 길르앗 라못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아합도 실제 전쟁에 들어가니까 미가야의 예언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치사한 일을 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30절)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는 그대로 왕복을 입게 하고 자기는 마치 왕이 아닌 것처럼 일반 병사 복장으로 반장하여 병사들 틈에 숨어 들어갑니다. 적군은 먼저 왕을 집중 타깃으로 공격하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변장을 해서 신분을 감추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머리를 쓰는 겁니다.

 

옛날부터 전쟁이 수세에 몰리면 충신들이 왕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옷을 바꿔 입고 적을 유인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처럼 전쟁이 시작도 하기 전에 왕이 먼저 옷을 바꿔 입으면서 비겁하게 행동하는 것은 참으로 보기에도 민망한 일 아닙니까? 아합은 악한 자였을 뿐 아니라 천하에 비겁한 자였습니다.

 

이 아합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도 스스로 살아보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쓰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니까 이렇게 치사하게 구는 것입니다.

 

이제 전투가 시작되니까 아합의 예상대로 아람 왕은 지휘관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만 찾아 집중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31-33절)

 

아합을 찾던 아람 군대는 여호사밧의 왕복을 보고 공격하러 달려들었는데, 여호사밧이 소리를 치니까 그 소리를 듣고 아합이 아닌 것을 알고 돌이켜 다른 데로 갑니다. 그들은 아합이 누군지를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합은 변장술로 아람의 군사들을 따돌릴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34-35절)

 

아람의 군인 한 명이 우연히 활을 당겨 쏜 것이 일반병사로 위장한 아합의 갑옷 솔기, 즉 갑옷 중에서 가장 취약한 이음새 부분에 명중했습니다. 이곳을 정통으로 맞추는 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심코”라는 말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아람 군사는 아합 왕을 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쏜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아합은 변장까지 하면서 살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의 보호 장치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합이 죽음으로써 그에게 선포되었던 심판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37-38절)

 

아합의 죽음은 악한 자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죄의 길로 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몇 번씩이나 아합에게 과분한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면서 마음을 돌이켜 주님 앞에서 바로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악에 팔려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아합은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겸비하며 나아갔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이 또 자비를 베푸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그는 진정으로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거 봐라, 겸비하게 나가니까 괜찮아지네?’ 하면서 계속 악한 길로 나아갔습니다.

 

아합의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들끓었던 것은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이 습관화된 아합의 책임이었습니다. 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습관이 되니까,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불순종하며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 했던 아합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인간의 술수와 방법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아직 주어져 있을 때 빨리 마음을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 전심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아합이 왜 끝까지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은 한 단어로 요약하면 ‘교만’입니다. 그는 불순종해도 살 만하니까, 자기가 잘나서 그렇다고 착각했습니다. 그토록 우상 숭배를 해도 별 일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오해했습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뿌리 깊은 교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교만해지기 쉬운 왕들에게, 또 어떤 분야에서건 그런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주신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23-24)

 

여러분, 우리는 아합처럼 완전히 불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믿지만, 혹시 지금 내가 아직 내어드리지 못한 채 붙들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아직 내가 포기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것은 없습니까?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무사히 살도록 해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빨리 마음을 돌이켜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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