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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3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9 ✦
“은혜를 베푸실 때 빨리 돌이키라”
(열왕기상 20장 1-22절)
[들어가는 말]
흔히 하는 말 중에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뿌린 것도 없는데 거두는 경우가 생깁니다. 물론 열심히 뿌렸는데 열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뿌린 게 없는데 열매를 거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도 아니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은 그렇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당신의 영광을 위해 복을 주십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은혜를 베푸실 때 빨리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를 받고도 제대로 돌이키지 않으면 언젠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빨리 올 수도 있고, 천천히 임할 수도 있습니다.
1. 아람의 1차 침공
1) 아람의 공격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은, 엘리야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앞에서도 회개하지 않았고, 그러한 그의 재임 기간에 엄청난 국가적 위기가 닥칩니다. 이스라엘의 적국인 아람 왕 벤하닷이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 온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계속 악한 길로만 가던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 다시 한 번 스스로 돌아볼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아람 왕 벤하닷의 침략 전쟁은 엄청난 규모로 진행됩니다.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32개 나라의 왕들을 다 불어 모아 엄청난 수의 연합군을 이루어서 이스라엘로 쳐들어옵니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1절)
여기를 보면 벤하닷 연합군의 전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숫자도 많았을 뿐 아니라, 당시의 첨단무기인 “말과 병거들”도 있었습니다. 이 무서운 침략군이 수도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공격을 퍼붓습니다. 이 공포에 질릴 만한 상황 속에서 벤하닷은 사자를 보내어 아합 왕을 협박합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3절)
이 말을 보면 오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미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말을 합니다. 다짜고짜 이스라엘 왕의 모든 재산과 처자식이 자기 것이라니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아합은 벤하닷의 무례한 협박에 꼼짝도 못하고 비굴한 자세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4절)
아합은 벤하닷의 엄청난 대군의 공격 앞에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벤하닷의 사자들이 와서 전한 오만한 말에 꼼짝을 못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이처럼 굴욕적인 모습으로 쩔쩔 매는 아합 같은 왕을 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쌍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굴욕외교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 모욕을 받고도 아합이 약한 태도로 나오니까 벤하닷은 더 강하게 위협합니다.
“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5-6절)
아직 싸움은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사람들을 사마리아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 보물들과 여인들을 취하겠다는 기막힌 통보를 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의 요구에 처음부터 강하게 거부했어야 했는데, 겁에 질려서 비굴한 태도로 나가다가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합은 엘리야를 통해 그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고도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적의 위협 앞에서는 벌벌 떨며 무기력한 태도를 보입니다.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우상 숭배자 아합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동안 그가 그토록 섬기던 우상들의 도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평소에 그토록 시간과 돈과 힘을 들여서 투자하던 우상들은, 위기의 순간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평소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며 사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비굴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비굴한 왕 아합이었지만,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는 너무 지나치다고 느껴졌는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나라의 장로들을 모아 의견을 묻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7절)
이 말을 보십시오.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그리고 왜 벤하닷이 악을 도모한다고 하는가 하면 ‘내 것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면서도 자기가 두려워 거절하지 못했다는 것을 신하들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신하들이 왕에게 강경대응을 주문합니다.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8절)
이에 용기를 얻은 아합은 사람을 보내어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 거절하는 말도 아주 비굴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9절)
벤하닷을 가리켜 “내 주 왕”이라고 부르고, 자기는 “종”이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비참한 열등감일 뿐입니다. 이때 아합의 대답을 들은 벤하닷은 공격해서 진멸해 버리겠다고 또 위협합니다.
“그 때에 벤하닷이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사마리아의 1)부스러진 것이 나를 따르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하매,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10-11절)
벤하닷의 위협에 대해 아합은 마지막 자존심이 상했는지 맞받아칩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뜻이며, 진짜로 붙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으니 전쟁을 하기도 전에 큰소리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아합이 의외로 강하게 나오니까 벤하닷은 드디어 연합군에게 공격을 하도록 명령합니다.
“그 때에 벤하닷이 왕들과 장막에서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진영을 치라 하매 곧 성읍을 향하여 진영을 치니라” (12절)
2) 하나님이 주신 승리
이제 성 앞으로 몰려와 총공격 태세를 갖추는 적의 대군을 볼 때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13절)
하나님은 엄청난 적의 공격 앞에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점이 아주 의아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이런 승리의 약속을 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기회를 통해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깨닫기 원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셨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채찍과 징계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도록 해주시지만, 뜻하지 않은 축복과 성공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내 능력보다 더 큰 성공을 맛볼 때,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열매를 거둘 때, 자만하거나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는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아올 때입니다.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14절)
아합은 뜻밖의 말씀을 듣고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전략이 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방 장관들에게 속한 젊은 부하들을 앞세우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의외의 작전 지시입니다. 전쟁의 경험도 없는 젊은 장수들을 최선봉에 세우라는 것인데, 그들은 베테랑도 아니었고 게다가 그들의 숫자도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 (15절)
지방 고관의 청년들의 수는 고작 232명이었고, 그들을 뒷받침할 이스라엘 군인들의 수도 다 합쳐서 7천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전 전쟁들에서는 몇 십만 명을 동원했던 이스라엘인데, 지금은 대부분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에 능한 용사들이 아닌, 젊은 장교들 232명을 앞세워 아람의 엄청난 연합군을 상대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간단합니다. 이 전쟁을 주관하고 승리로 이끄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상대도 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얻었을 때, 그것은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인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16절)
정오에 이스라엘 군은 선지자의 말에 따라 청년 장교들을 앞세우고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 벤하닷은 장막에서 다른 32명의 왕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취한 상태였습니다. 12절에서도 아합에게 공격하겠다는 말을 전해놓고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때도 또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군대를 깔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얼마나 방심하고 있었는지를 봅니다. 결국 이렇게 방심하다가 패배합니다.
“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정탐꾼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여 이르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17-18절)
이스라엘 군 선봉군이 겨우 2백여 명에 불과한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보고받은 벤하닷은, 설마 겨우 그 숫자로 자기의 엄청난 대군을 상대하러 오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화친을 청하러 오는 사절단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잠언에 계속 반복하여 나오는 말씀 중 하나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벤하닷의 교만이 패배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적은 수의 이스라엘 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엄청난 아람의 대군이 정신을 못 차리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 (19-21절)
결국 이 전쟁에서 수많은 군사들을 잃은 벤하닷은 간신히 목숨을 구하여 도망하게 됩니다.
2. 아람의 2차 침공
아람의 첫 번째 침략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깔보고 나왔다가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기는 했어도, 아람 왕 벤하닷의 힘은 아직 강했습니다. 그래서 의외의 승리로 기쁨에 취해 있는 아합에게 선지자가 다시 말씀을 전합니다.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22절)
아합은 아람이 다시 공격해 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군이 다시 쳐들어 올 시기까지 정확히 알려주시면서 아람의 2차 침공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방심은 금물입니다. 한 번의 성공에 도취해서 안주하면 큰일 납니다.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하고 난 직후를 조심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영적 공격에 당하게 됩니다. 강력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 군대가 바로 다음에 훨씬 더 약한 아이 성 싸움에서는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전해준 말씀 그대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벤하닷은 다시 독한 마음을 품고 2차 침공을 준비합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질 수가 없는 전쟁을 졌기 때문에 그들도 자신들의 패배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들의 상황 파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다음은 자기들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멋대로 해석합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23절)
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은 각자 전문 분야가 있었고 지역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벤하닷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그런 수준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이 사마리아 같은 고산지대에서는 강하지만, 평지 싸움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해석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습니다.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잃어버린 군대를 재정비하고 말과 병거를 다시 준비하여 평지 전쟁을 준비합니다(24-25).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군사력을 강하게 준비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소집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6-27절)
마침내 한 해가 지나고 아람 왕의 대군이 두 번째로 쳐들어옵니다. 이번에는 평야 지대인 아벡에서 양쪽의 군대가 맞붙게 됩니다. 이번에도 또 다시 이스라엘 군은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28절)
아람 사람들은 하나님이 산의 신이라고 하며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의 생각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이 승리를 자신하는 평야 전쟁에서 다시 한 번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도 이건 못하실 거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 들으십니다. 그러면 “내가 이것은 못한다고 했지? 그럼 한 번 당해봐라.”라고 하시며 우리를 아주 어려운 데에 넣으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듣고 알고 계십니다. 생각과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제 서로 대치한 지 7일째에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은 큰 승리를 거둡니다.
“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29-30절)
이스라엘 군이 하루에 아람 군인 십만 명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고, 게다가 아벡으로 도주하다 성벽이 무너져 깔려 죽은 아람 군이 2만 7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도합 약 13만 명의 아람 군대가 궤멸된 것입니다. 3년 동안의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전사자를 다 합치면 25만 명 정도인데, 하루에 13만 명이 죽었다는 것, 특히 요즘처럼 미사일이나 대포나 총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수가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산의 신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이 드러났습니다.
3. 아합의 잘못과 하나님의 심판
1) 아합의 교만과 실수
무참한 패배로 인하여 아람 군대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다급해진 벤하닷의 참모들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굴한 모습으로 아합 왕 앞에 찾아와 엎드립니다.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31-32절)
여기서 굵은 베와 테두리는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표시로, 상대방의 자비를 구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패했을 때 완전한 항복에 대한 표시로, 승리자로부터 최고로 관대한 처분을 얻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너의 재산과 여인들은 다 내 것’이라고 오만방자하게 굴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세상 권력의 실체입니다. 힘이 있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오만하고, 힘을 잃으면 이렇게 비굴해집니다. 그러면서도 또 틈을 노립니다. 전혀 믿을 게 못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리석은 아합이 이들의 비굴한 연극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의 승리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는 것을 잊고, 마치 자기가 강해서 이긴 것처럼 교만해진 아합은, 이들의 속임수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아람 왕 벤하닷을 “내 형제”라고 부릅니다. 아니 ‘형제’는 무슨 형제입니까? 형제가 그렇게 모욕을 주며 죽이겠다고 합니까?
엄청난 수의 아람 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쳤고, 이제 그들이 비굴한 태도로 와서 애원하자, 아합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은 까맣게 잊고 경솔하게 행동합니다. 아합이 벤하닷을 ‘형제’라 부르니까 아람의 신하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매달립니다.
“그 사람들이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이르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그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33절)
이제 우쭐해진 아합은 마치 자기가 통이 큰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호기를 부리며 벤하닷을 데려오라고 하고, 병거에까지 올려줍니다. 벤하닷은 아합을 보자마자 아합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제안을 합니다.
“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34절)
이 제안의 내용을 보면, 벤하닷이 큰 양보를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빼앗은 성읍들을 돌려주는 것은 패전국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아예 나라 전체를 다 빼앗아가도 할 말이 없는 게 패전국의 처지입니다. 그런데도 아합은 그 말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고, 승자로서 적국의 수도에 자신을 기념하는 거리까지 만들어주겠다니, 너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또 여기에는 아람과 약조를 맺어 항상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 앗수르의 위협에 대비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침략의 괴수인 벤하닷을 즉시 놓아주고 맙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하는 아합에게 과분한 자비와 은혜를 베푸셔서 두 번의 기적 같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무시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의외의 복을 내리시고 성공을 주실 때는 다 뜻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사인입니다. 또한 인간적인 수단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승리를 거두고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나아가게 되면, 그 복과 성공은 헛된 낭비가 되고 맙니다.
아무리 복된 소식이라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실제로 삶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결단하며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적군을 자신의 손에 붙이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믿음으로 끝까지 붙들지 못했습니다. 뜻밖의 승리와 상대의 비굴한 모습에 잔뜩 교만해져서 인간적인 타협을 했습니다. 아합이 이렇게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성공을 주셔도,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 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낭비해 버리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
이처럼 자기 맘대로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에게 즉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동료에게 자기를 치라고 명령하고, 동료는 인간적인 정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꺼려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습니다(35-36).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로, 다른 선지자는 그를 상하도록 칩니다(37). 그 후 그 선지자가 눈을 가리고 변장하여 왕이 지나갈 때 한 사건을 판결해달라고 합니다(38). 어떤 사람이 포로 한 명을 맡으면서 그를 제대로 지킺 못할 경우 그 생명을 대신하든지 은 한 달란트를 내야 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 포로가 없어졌으니 어찌해야 하냐는 것입니다(39-40).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은 아주 쉽습니다. 아합은, 포로를 잃은 자가 약속대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판결합니다(40).
아합은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인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남의 일을 볼 때는 아주 객관적으로 상황 판단을 잘하며 이래라 저래라 하지만, 막상 자기 일일 때는 주관적이 되어서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를 못합니다. 그때 선지자가 수건을 벗으니 비로소 아합이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인 줄을 알아봅니다.
“그가 왕께 아뢰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42절)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지키라고 명령한 포로였으며, 아합이 자기 마음대로 그를 살려준 것은 분명히 죄였기 때문에 이제 아합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그를 놓아준 데 대한 책임으로, 이제 아합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아합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43절)
아합은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고 답답”했습니다. 이 말이 원어로는 ‘분노했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근심하고 답답해 하고 분노할 뿐이지,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으로 죄를 지었을 때도 하나님은 비슷한 방법으로 나단을 통하여 다윗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저 근심하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지적하실 때는 정죄하고 망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지했던 아합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저 근심하고 답답해했을 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그냥 근심하고 답답한 데서 머물러선 안 되겠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자비와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면, 지금이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벌을 받아야 할 상황인데 복으로 채워주고 계시다면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빨리 돌이키라는 사인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깨달으며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