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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4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6 ✦
“성전 건축의 과업을 완수하다”
(열왕기상 6장 1-13절)
1. 성전의 규모
역사를 보면, 모든 제왕들은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 뭔가 엄청난 과업을 이루고 싶어 한 것을 봅니다. 자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는 의도도 물론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야심과 야망과 명예를 위한 동기가 더 큽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가장 먼저 이루고자 했던 과업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왕들과는 달리, 그것은 솔로몬 개인의 야심이나 야망이 아니라, 아버지 다윗 때부터 내려온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표현이자 거룩한 비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1절)
성전 건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이 되는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록을 남긴 것은 그냥 심심해서 남긴 게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 시절의 성막이 성전을 상징했는데, 이 성전 건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을 더욱 분명하게 상기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시만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것을 상징합니다.
이 성전 건축이 시작된 연도는 솔로몬이 통치한 지 4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정적들을 다 제거하고,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건축 준비를 마치는 데에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성전은 길이가 육십 1)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며” (2절)
1규빗이 1.5 feet(=0.457미터 = 0.5야드)니까, 이렇게 계산이 됩니다.
* 길이: 60규빗 = 90피트 = 30야드 = 27.4미터
* 너비: 20규빗 = 30피트 = 10야드 = 9.2미터
* 높이: 30규빗 = 45피트 = 15야드 = 13.7미터
성전은 보통 집처럼 동쪽으로 입구가 나 있었고,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큰 기둥 사이로 드나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들어가면서부터 낭실(대기실 같은 것)이 있고, 그 다음에 성소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서쪽 끝에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문이 없어서 완전히 깜깜했고, 다만 동쪽에 입구가 있는데 그 입구도 닫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소의 벽 윗부분에는 붙박이 창문을 냈습니다(4). 약간의 빛과 공기가 통하게 하기 위해 작은 크기의 창을 낸 것입니다.
또 성소와 지성소 벽에 붙은 다락을 3층으로 만들고, 그 다락에 골방들을 만들었습니다(5). 골방은 거룩한 방으로,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먹거나 제사 드리기 위한 지성물을 보관하던 곳이었습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성소 남쪽에 있고, 나선형 사다리를 이용해서 각 층으로 올라가게 해놓았습니다.
성소 문은 잣나무로 만든 두 개의 문짝이었는데, 둘 다 각각 반으로 접도록 되어 있었습니다(31-35). 성전 안뜰 주위는, 다듬은 돌 세 줄에 두꺼운 백향목 판자 한 줄의 비율로 쌓아 올린 담으로 막았습니다(36). 이 안뜰에는 제단이 있었고, 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집회를 여는 회막 역할을 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현장의 특징은 연장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듬어진 돌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7절)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의 장소이므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평화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람은 침묵과 경건으로 거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었다’는 말은 완벽하게 치수에 맞추어 돌을 재단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여서 철저히 준비했다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보면, 성전 공사의 구석구석,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어느 하나도 대충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전이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주님의 말씀으로 세우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최고의 정성으로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또 성전 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사역입니다. 예배당 건축도 그렇지만, 주보 만드는 것, 안내하는 일, 헌금위원, 성가대나 찬양 팀 연습, 컴퓨터 사역 등등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대충대충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사역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하는 일을 대충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배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각하지 말고 제때 와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성가대 연습도 제때 모여서 하라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장 귀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가장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베스트와 사람의 베스트가 만나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에 감사하며 나도 최선의 것을 드리며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전된 나의 신앙생활인데, 어떻게 대충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2. 순종으로 지어지는 성전
성전의 외부 공사가 마무리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12-13절)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하는 솔로몬을 격려하시면서, 다시 한 번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정말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서 진행된 이 성전 건축의 대 역사 중간에, 이제 엄청난 외부 공사를 끝내고 속의 내용물을 넣는 내부 공사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너무 좋아서 흥분하다 보면, 자칫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내가 하는 일만 생각하고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도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 자신의 동기와 마음가짐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잘하다가 변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순종을 세 가지로 표현하십니다.
1) ‘내 법도를 따르라’ = ‘내가 정해놓은 길로 걸어가라.’
2) ‘내 율례를 행하라’ = ‘내 말을 실천에 옮겨라.’
3)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라’ = ‘내가 인도하는 그대로 따라 살라.’
한마디로 하면, 말씀대로 실천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솔로몬아, 네가 나를 위하여 정성을 다해 이 성전을 짓는 것이 참으로 기특하고 기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네가 나의 말에 순종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렇게 순종하게 될 때 어떻게 되는가? 두 가지 약속이 주어질 것을 또한 말씀하십니다.
1)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12)
2)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13)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적들의 공격이나 질병이나 가난도 걱정이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어떤 외형적인 성공도 진짜 성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그분의 임재를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 도중에 이 말씀을 솔로몬에게 하신 것은,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 바쳐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엄청난 노력과 화려한 건물이 전혀 소용없고 쓸 데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화려한 성전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비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나중에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고 또 훗날 헤롯대왕에 의해 다시 지어졌던 성전도 똑같이 무너졌습니다.
2천 년 교회역사를 봐도 동일한 진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유럽에 가보니까 엄청나게 화려하고 멋진 교회당들이 많습니다. 파리의 노틀담 사원(Notre Dame Cathedral)이나 생샤펠 성당(St. Chapelle Cathedral),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erminster Abby)이나 세인트폴 성당(St. Paul's Cathedral),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전(St. Peter's Basillica)이나 성바울 성당(St. Paul's Basillica), 그리고 비엔나의 성슈테판 대성당(Stephen's Basillica) 등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지금은 텅텅 비어 있고, 관광지로 전락해 있습니다. 물론 아직 예배를 드리기도 하지만, 건물의 주된 존재 목적은 예배가 아니라 관광입니다. 지금의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진정한 성전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그러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함께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간다고 말씀합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5)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화려한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2-23)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불순종이 이렇게 큰 죄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울도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종교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불순종하는 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불순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불순종하면서도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부릅니다. 종은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오로지 주인의 뜻대로만 사는 사람이 종입니다. 제자 역시 자기 뜻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승에게 배워서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사는 크리스천들이 많은 것이 이 시대 교회의 위기의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 주님의 뜻대로 정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 보자는 것입니다. 겉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포장만 하고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소 실행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데에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데에는 희생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피합니다. 가서 제자 삼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서 정말 가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향해, 모든 민족들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면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라고 하셨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재정의 어려움이 있는 건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아갔더니 세상에서 너무 형통하고 잘 풀렸더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해를 당했고 고난을 받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생명까지 잃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망했습니까? 다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상을 받았고 지금도 영광 중에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계 21:14)
요한계시록은 무서운 책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 정말 위로가 되는 책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갈 날을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매일의 삶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3. 성전의 구조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의 두 구역으로 구분됩니다. 성소는 전체 공간의 2/3이고 지성소는 1/3을 차지했습니다. 감람나무로 만든 지성소 문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놓여 있었고, 법궤 안에는 모세 당시 율법을 쓴 두 돌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있었습니다(히 9:2-4).
그런데 솔로몬 때는 두 돌판만 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새겨진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 47장에서 성전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 엄청난 강이 되는 환상이 나옵니다. 그 환상에서도 보듯이,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성전은 돌로 세워졌지만, 금을 입힌 백향목 널판을 내부 벽에 입혔습니다(19-20). 지성소 안에는 올리브 나무로 된 2개의 그룹을 만들었습니다(23). 그룹은 천사들 중 하나인데, 그룹 둘을 똑같은 형상과 크기로 만들어 5규빗씩 날개를 펴서 20규빗(30피트) 길이의 지성소 두 벽에 닿게 했습니다. 이것은 그룹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성소와 성소의 사면 벽에는 그룹들과 종려와 꽃들을 아로새겼습니다(29). ‘그룹’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고, ‘종려’는 기쁨의 상징이며, ‘핀 꽃’은 평화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성전에는 거룩한 기쁨이 가득합니다. 성전인 성도들이 모인 교회도 이처럼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재미가 아니라,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의 다른 것들도 간단히 살펴보자면, 먼저 2개의 놋기둥이 있습니다.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7:21)
이 두 기둥에는 이름도 있는데 각각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야긴’은 ‘그분이 세우신다’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분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겁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기둥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은 성전의 목적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인간의 삶을 안정시키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살아갈 능력을 주는 분도 하나님뿐이신데, 바로 그분을 성전에서 뵙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인 교회는 우리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팔이 교회를 받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나아가는 교회는 주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혹시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다른 교회에 사람이 몇 명 모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교회라면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무리 교회가 형편없어 보이고 어려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교회로서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라면, 자기의 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하려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라면, 교회를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욕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즉 믿는 자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망하는 길이 됩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교회를 해치려고 하다가 잘된 일이 없습니다. 수많은 독재자들과 특히 공산당이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시도했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지금 누가 남았습니까? 교회가 남았지, 독재자들이 남지 않았습니다. 북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가? 주님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팔이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성전 건축의 완성
성전 건축에 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 그 설계와 식양대로 지어졌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성전의 복도와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설계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그가 영감으로 받은 모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설계도를 주고” (대상 28:11-12)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설계도를 주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모세에게 성막의 모양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성전을 짓고자 했던 다윗에게도 똑같이 그 아들이 성전을 어떻게 지어야 한다는 것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주면서 그대로 지으라고 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받아서 그대로 지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전의 비밀도 역시 순종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지으라고 주었는데, 솔로몬이 ‘이건 시시하네.’라고 하면서 더 화려하게 짓겠다고 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러나 지으라고 한 대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의 비밀도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방법대로 세워지고 운영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논리나 세상의 방법이 교회를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교회를 움직이려는 사람들을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좀 엉성하고 부족해 보여도, 주님의 리더십으로 세워지고 이끌려져 가는 교회이기 때문에 어떤 세상의 정부다 기업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정부나 기업이 2천 년을 버틴 적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납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을 합니다(마 25:19). 그때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아 이익을 남긴 종들에게는 칭찬을 합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 25:21, 23, 새)
그런데 한 달란트 맡고 나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묻어 버린 종에게는 야단을 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 25:26, 30, 새)
왜 두 사람은 칭찬을 하고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벌을 내렸습니까? 두 사람은 이윤을 남겨서 칭찬을 하고, 하나를 맡은 종은 원금 그대로 갖고 왔다고 화내며 벌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이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습니까?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두 사람은 주인이 무엇을 원해서 이 엄청난 돈을 자기에게 맡겼는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위하여 즉시 가서 열심히 장사를 하다 보니까 이윤을 남긴 것입니다. 이윤을 못 남겼어도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 감추어 버렸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돈을 맡긴 이유를 몰랐습니다. 아니, 관심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주인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에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입니까? 자기 일만 한 겁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종은 자기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주인의 일만 있습니다. 그게 종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오직 주인의 일만 했습니다. 주인이 준 돈을 가지고 주인의 일만 했습니다. 주인의 뜻을 잘 헤아려서 그 뜻에 순종하여 주인이 준 돈을 가지고 열심히 장사하며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종은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냥 돈을 땅에 묻어 버림으로써 주인의 일은 전혀 안 하고 오직 자기 일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며 “쓸모없는 종”인 것입니다. 사실은 종도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셨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그날을 준비할 기회를 지금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제가 이것을 하다 왔습니다.”라고 들고 갈 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만약 오늘 당장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에게서 어떤 말을 들을 것 같으십니까?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이 말씀이겠습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말씀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께 순종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반드시 위로하십니다. 혹시 이 땅에서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위로하시며 상을 주시며 눈물을 닦아주실 날이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물론 형통하고 다 잘되면 좋겠지만, 혹시 그렇게 못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 줄로 믿습니다.
몇 십 년 반짝 누리는 것보다, 셀 수도 없는 그 영원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습니까? 왜 이 땅에서의 몇 십 년 누릴 것에 그렇게 죽네 사네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하며 살 때, 이 땅에서의 형통은 덤으로 주어집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게 진짜가 아닙니다. 그저 맛보기입니다. 진짜는 천국에 있습니다. 그곳이 우리가 돌아갈 본향이고 진짜 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매일매일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순종하다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혹시 가슴 아픈 희생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옳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자를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전으로서 이처럼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며 매일매일 순종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매 순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면서 살다가, 마침내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잘했다 칭찬받는 주님의 착하고 신실한 종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