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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8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0 ✦
“왕국의 분열”
(열왕기상 12장 1-24절)
1. 개혁을 요구하는 백성들
왕위에 오르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지혜를 선물로 받은 솔로몬은, 그 후 성전을 완공하고 탁월한 국가 경영 리더십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을 아주 큰 강대국으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늙어 가면서 그는 화려한 업적들에 도취되어 서서히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또 무리한 건축 공사들을 벌이고 세금을 많이 걷어 들여서 백성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경고를 보내셨지만 그는 별다른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을 괴롭히는 적들을 일어나게 하셨고, 이스라엘이 솔로몬 다음 대에 갈라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어떤 사인을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럴 수 있고, 설교를 통해 그럴 수 있고, 목장의 나눔을 통해서, 또는 상황을 통해서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시하고 그냥 나아가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에도 말년에 대적들의 공격으로 힘들었지만, 특히 가장 안 좋은 것은 그가 죽은 다음에 나라가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때 자기의 잘못으로 고생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내가 간 다음에 내 자식 때에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고 고생하는 것은 얼마나 안 좋은 일입니까. 나는 물론 죽어서 못 보겠지만, 내 자녀손 때 그렇게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이제 솔로몬에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강력한 통치 아래 잠재되어 있던 여러 가지 문제들과 지파 간의 갈등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실 이것이 이때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에 베냐민 지파가 거의 멸절될 뻔했고, 다윗 때에도 사울에 이어 왕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헤브론에서 다스리다가 나중에야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윗과 솔로몬을 이어서 가다가 르호보암이 잘못하니까 또 갈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후계자인 르호보암이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어디로 갔는가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1절)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르호보암이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수도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세겜까지 가야 했습니까? 여기에는 복잡한 이스라엘의 속사정이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당시, 이미 솔로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여러 번 대적들의 침략을 받아 이스라엘의 국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국경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요즘 테러가 한 번 일어나도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런ㄷ 그때는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늘 불안에 떨었고, 그래서 그때 불만 세력의 핵심은 모두 북쪽에 모여 있었습니다.
1절에서 “온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이것은 북쪽의 열 지파를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때까지는 이 북쪽의 열 지파가 새 지도자 르호보암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나라를 분열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엄청난 영광을 함께 누렸고 또 인정한 그들이기 때문에, 섣불리 그들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깨고 나누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 통치 시절에 시작된 무리한 노역과 무거운 세금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르호보암의 왕권을 인정하는 문제를 두고 북쪽 열 지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지파이며 여호수아의 가문인 에브라임 지파의 중심지 세겜으로 로호보암을 불러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남쪽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밖에 지지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세겜에 가서 북쪽 10지파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감히 왕인 나를 오라 가라 해?’ 하고 생각하면서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솔로몬 시절 반역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애굽으로 도망갔던 여로보암이 돌아와서 그 북쪽 지파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2-3절)
사극을 보면, 역사책을 읽을 때는 덤덤하게 평면적으로 읽었던 이야기들을 굉장히 실감나게 그립니다. 역사에 나오지 않는 것까지 가미해서 재미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성경도 그런 식으로 읽어보면 굉장한 드라마입니다. 이때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갑니까? 여로보암이 애굽에 있고, 북쪽에서 사람을 보내어 여로보암을 올라오게 하고, 그 가운데 음모가 있고....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세겜으로 모이는 북쪽 열 지파의 지도자들은 애굽에 피신해 있던 여로보암을 불러서 자신들의 대표로 세웁니다. 이 열 지파들은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 줄 리더가 필요했고, 능력 있는 지도자였고 솔로몬 정부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는 여로보암이 거기에 딱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여로보암을 새 왕으로 세운 것은 아니고 대표로 세운 것입니다.
여로보암을 대표로 한 이스라엘 북쪽 열 지파 대표들이 세겜에서 르호보암에게 요구한 조건은 단순합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4-5절)
이것은 결코 백성들이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솔로몬이 무리하게 진행한 건축 공사들로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 현실적인 고통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사실 이제 막 왕위에 오른 르호보암에게 이것은 첫 번째 중대한 고비이며 시험대였습니다.
40년 동안 찬란하고 화려한 이스라엘 왕국의 영광을 직접 보고 자라며 마음껏 누려왔던 르호보암은, 왕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몰랐을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되었으니까, 솔로몬이 왕이 된 처음부터 죽 이때까지 온 겁니다. 그러니까 그는 고생하고 힘든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찬란한 영광, 화려한 왕궁, 멋진 옷을 입고 다니는 귀족들과 왕족들만 보고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왕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몰랐습니다. 그저 영광만 받고 누리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지은 화려한 왕궁과 셀 수 없는 금은보화, 아리따운 아버지의 후궁들과 첩들, 그리고 수없이 몰려드는 여러 나라의 주요 인사들과 그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아버지 솔로몬의 영광을 보면서, 그 권세가 너무나 멋지게 보였을 것입니다. 자기도 왕이 되면 저렇게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저렇게 위에서 군림하며 모든 영광을 다 받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내가 이 영광을 누릴 차례다’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왕위에 오르고 보니 가장 먼저 들이닥친 것은 그 동안 참았던 불만을 터뜨리는 백성들의 목소리였습니다. 솔로몬에게 아내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자녀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어떻게 왕을 정했는지는 안 나오고 그냥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다고 나오지만,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암투가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12지파 중 10지파나 되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왔으니, 젊은 왕 르호보암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너무 달랐던 것입니다.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떤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에 올라가게 되니까 온 백성이 다 고통을 당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자기들끼리 있을 때 뛰어나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올라가는데, 막상 리더의 자리에 올라가보아야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리더를 비난하거나 평가하기도 힘듭니다. 자기가 되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르호보암은 솔로몬과는 달리 전혀 지혜로운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솔로몬은 처음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는데, 르호보암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갔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그가 한 가지 잘한 것은, 이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3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그 자리에서 즉시 답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생각할 여유를 갖기 위해 시간을 요청한 것은 아주 잘한 결정입니다.
우리도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기도를 해보고 깊이 생각한 다음에 결정을 하는 겁니다. 특히 지혜로운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혼자서 막 결정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해도 하나님은 분명히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나 잘못된 결정에 대한 대가는 내가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의견을 듣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2. 자문을 구하는 르호보암과 그의 조언자들
일단 3일의 시간을 번 르호보암은 두 그룹에게 가서 의견을 구합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솔로몬 시대부터 있었던 원로들이었습니다.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6-7절)
왕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리더십 포인트입니다. 대개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를 섬길 것을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십은 내가 먼저 백성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그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면 그들이 리더를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또 “좋은 말”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랫사람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며 무례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분이 쓴 글을 보았는데, 그분은 대학교 교수입니다. 사람을 슬쩍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가장 조심하는 종류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보다 어리다고 무조건 반말을 하는 사람은 경계한다고 합니다.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에서 식당에 가서 보면, 식당의 종업원에게 민망할 정도로 막 반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인격을 의심하게 만드는, 자기를 깎아내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드럽게 백성들에게 말할 때 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원로들이 사람들의 요구를 무조건 다 들어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왜 그들이 이런 요청을 하는지 그들의 사정을 파악해서 합리적으로 처리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들이 말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고 용기 있게 조언을 해줄 원로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나 르호보암을 위해서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르호보암은 이 현명한 원로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의 조언이 지혜로운 것이기는 했지만 영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이 백성의 말대로 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라고 했으니까, 백성들이 왕의 종이 되게 하기 위해서 조언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지를 조언했겠지만, 그들은 그냥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대답은 르호보암의 마음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같이 성장한 젊은 참모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자문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8-9절)
8절에서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이라고 하고 10절에서는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라고도 하지만, 르호보암이 왕이 될 때 41세였으니까 그들도 비슷한 나이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어릴 때부터 르호보암과 아주 가깝게 지내며 함께 자랐기 때문에 서로 정이 들고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을 잡은 젊은 왕은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이미 자신의 핵심 참모진으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패착입니다. 인재를 등용할 때 능력과 성품을 보고 뽑았어야 했는데, 그보다는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와 친한 사람들을 뽑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항상 정에 약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유능한 사람보다는 좀 능력이 떨어져도 자기에게 편한 사람, 성품이 훌륭한 사람보다는 인간성이 안 좋아도 자기와 친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들은 르호보암과 같이 자랐기 때문에 그의 성격과 좋아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기들과 친한 르호보암이 여러 왕자들을 제치고 왕이 되었으니, 그의 권력에 붙어 자기들도 높은 자리에 군림하면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왕의 마음을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원로들과는 달리, 르호보암의 허영심과 교만을 부추기는 조언을 합니다.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10-11절)
우리도 나와 너무 친한 사람들을 때로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할 말은 해줄지 몰라도 내게 꼭 필요한 말은 안 해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반대로 쓴 약이 입에는 써도 몸에는 좋다고 해서 항상 쓴 소리만 하는 사람도 잘 봐야 합니다. 그 내용이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인간적인 지혜에서만 나오는 조언인지를 잘 살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분별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기도에서 옵니다. 평소에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으면, 그것을 잘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젊은 참모들이 해준 말에서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10)는 말은 르호보암이 아버지 솔로몬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의미의 아첨입니다. 이 말을 들은 르호보암은 어리석은 지도자로서 우쭐했을 것입니다.
나를 칭찬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높여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목사님은 저 목사님보다 훨씬 더 훌륭하세요.” “전임목사님보다 목사님이 훨씬 더 잘하십니다.” “이 교회 오니까 저번 교회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함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부목사로 있다가 떠난 다음에 후임자가 왔을 때 교인들이 저보다 못하다고 하고, 제가 그립다고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훨씬 더 잘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은근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비교의식처럼 사람을 착각에 빠지게 하고 교만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동시에 비교의식처럼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경쟁상대가 누구입니까? 다른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교회 내의 다른 성도입니까? 아닙니다. 또 저의 경쟁상대가 누구입니까? 다른 목사님들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교회들과 다른 목사님들과 다른 교회 성도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복음의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왜 서로 누가 더 잘하나 경쟁을 합니까? 그런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끼리, 목회자끼리 경쟁하면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경쟁상대는 오늘의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경쟁상대는 오늘의 우리 교회이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또 교회를 비추어보며, 날마다 조금씩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설프게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와 비교하는 상대 평가는 우리를 큰 착각에 빠지게 하거나 큰 낙심에 빠지게 합니다.
르호보암은 위대한 리더 다윗과 솔로몬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서 엄청난 부담감을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위대했던 할아버지 다윗과 지혜의 왕인 아버지 솔로몬과 뭔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과 함께 자란 젊은 참모들은 그의 이러한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 딱 드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젊은 참모들은 또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11). 전갈은 독침을 쏘거나 피를 빨아먹는 끔찍한 동물입니다. 이런 괴물과 왕의 리더십을 비교했으니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솔로몬 때의 채찍이 이미 가혹해서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했는데, 이제는 그 피까지 빨아먹는 전갈 같이 더 잔인한 통치를 하겠다니 백성들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조언이 르호보암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으니, 그가 얼마나 어리석은 리더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해 갈라진 왕국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3일이라는 시간을 두고 원로들과 젊은 신하들의 의견을 다 경청하는 신중함을 보이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주 어리석은 판단을 내림으로써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이 말, 저 말을 많이 들어도 결국 마지막 결정은 리더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조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참모들은 바로 그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조언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백성들에게 그들이 해준 말 그대로 전했습니다.
아버지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지혜가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에겐 없었습니다. 지혜의 책 잠언으로 양육받으며 “내 아들아”라고 하는 교훈들을 수없이 들었을 르호보암이었는데도 어떻게 그리도 우둔하고 어리석었는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 (15절)
어리석은 르호보암의 판단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악인의 어리석음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현명했던 르호보암을 하나님이 어리석게 만드시고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조종하셨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것조차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도록 조종하는 분이 아니시지만, 다 알고 계십니다. 인간의 그 어떤 생각과 행동도 하나님을 놀라게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3일 만에 기대감을 갖고 모인 이스라엘 열 지파 사람들 앞에서 르호보암은 오만한 태도로 포학한 말을 합니다. 젊은 참모들의 조언을 그대로 자신의 결정이라고 통보했습니다. 그는 조언의 내용을 그대로 다 외우는 똑똑함은 있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는 지혜는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결정을 통보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났습니다.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는 자기 아버지의 천분의 일도 안 되는 풋내기가, 마음은 훨씬 독하고 잔인하니, 누가 그런 리더를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르호보암의 독설을 들은 백성들은 분노하며 르호보암과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16절)
못난 자식은 집안 전체를 욕먹게 한다고 했는데, 어리석은 르호보암 때문에 위대한 왕인 다윗과 그의 아버지 이새까지 다 이름이 불리며 욕을 먹게 됩니다. 이러한 북쪽 열 지파의 거센 반발에 르호보암은 깜짝 놀랍니다. 그 정도로 그는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심각한 상황을 무슨 장난인 줄 알았습니다. 당황한 르호보암은 부하 아도람을 보내어 상황을 수습하려고 시도합니다.
“르호보암 왕이 역군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8절)
이 아도람은 5:14에 나오는 아도니람인데, 솔로몬 때부터 무리한 건축 공사 현장을 지휘하던 ‘역군들의 감독’이었습니다. 무리한 노동과 세금 때문에 불만을 이야기한 백성들을 어리석은 말로 화나게 해놓고는, 그것도 모자라 건축 현장의 지휘를 하던 아도람을 중재자로 보냈으니, 그를 본 백성들이 얼마나 더 격분했겠습니까? 르호보암은 왜 이렇게 지혜가 없습니까?
순식간에 폭도로 변한 백성들은 돌로 아도람을 쳐 죽이고 르호보암까지 죽이려 몰려들자, 그는 간신히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도망을 칩니다. 이제 르호보암이 도망가자 이스라엘의 열 지파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새로운 왕국 이스라엘을 출범시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20절)
다윗의 직계 가문인 유다 지파와 나중에 합류한 베냐민 지파 외에는 아무도 르호보암을 따라간 지파가 없다는 것을 보면, 민심이 얼마나 르호보암에게서 돌아섰는가를 보여줍니다. 르호보암은 설마 이 정도로 빨리 신뢰를 잃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오직 영광스런 왕위에 앉아 떵떵거리며 다스릴 것만 꿈꾸다가 이런 상황에 닥친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하던 80년 동안 피땀 흘려 이룩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나라가 두 동강 나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전쟁을 치르겠다고 나섭니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21절)
유다와 베냐민 지파 연합군 18만 병력으로 반역한 열 지파를 상대로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게 될 전쟁을 하겠다고 펄펄 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24절)
결국 르호보암과 그 추종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전쟁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나마 이것은 르호보암이 참 잘한 일입니다. 만약 르호보암이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면, 동족끼리 죽이고 죽는, 피 비린내 나는 비극이 또 벌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내 감정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순종할 때 더 큰 재앙을 막습니다. 하나님의 “No”를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존심이나 감정 때문에 말씀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아 더 큰 재앙을 초래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비록 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 순종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맞추며,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어려움 속에서도 은혜를 경험하며 하늘의 복을 받고 누리고 나눠주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