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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20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7

불을 내리시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8 30-46)


 

1.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


옛날 이소룡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혼자서 수십 명을 때려눕힙니다. 한술 , 람보 영화에서는 주인공 혼자 수백 명을 상대하여 자기는 방도 맞고 수백 명을 전부 총으로 죽여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에서나 가능하지, 실제로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혼자서 수많은 적들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야는 혼자서 850명의 적을 상대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였는데, ‘선지자’ 또는 ‘예언자’는 장래 일을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대변인을 세워 말씀을 전하실 바로 대변인을 말합니다. 백악관 대변인이나 청와대 대변인은 아주 멋지고 잘나가는 자리입니다. 권력의 중심부의 대변인이 된다는 것도 그렇게 좋은데,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대변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였습니다. 예언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번씩이나 하나님의 대변인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아합은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공의나 사랑과는 아예 담을 쌓고, 악한 왕비 이세벨의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을 버리고 나라를 우상 숭배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특히 바알과 아세라와 같이 음란하고 더러운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왕과 왕비의 보호를 받으면서 나라의 권력과 경제력을 쥐고 온갖 부패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타락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시고 대변인인 엘리야를 보내셔서 엄하게 아합의 죄를 꾸짖으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고, 실제로 3년이 넘게 비가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기 때문에 조금 불순종해도 되겠지 하고 마음이 때도 있지만, 절대 권력자인 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을 전한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아무리 선한 왕이라도 신하들이 바른 말을 해서 심기를 거스르면 가만두지 않았는데, 더구나 아합처럼 악한 왕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입니다.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한 사라지자, 아합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엘리야를 잡아오게 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깊은 산속에 숨어 있었고, 이방 땅인 사르밧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물이 없는 때에 그릿 시냇가에 있었고, 먹을 없는데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르밧에서도 가난한 과부로부터 음식을 받아서 먹는데,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공급을 받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동안 엘리야가 말한 대로 3 동안 아침 이슬도 내리지 않는 지독한 가뭄이 이스라엘 전역을 덮쳤고, 시간이 지난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아합 왕에게 보내십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1)


드디어 엘리야는 아합 앞에 다시 서고 사람은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습니다.


엘리야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7-18)


사실 아합 자신의 때문에 이렇게 것인데 그것을 엘리야 탓으로 돌립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잘못은 보고 남의 탓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아합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19)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대답하되 말이 옳도다 하니라” (23-24)


엘리야는 왕의 비호를 받던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모두 갈멜 산으로 불러 모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여 누구든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신이 신이라고 결정하자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엘리야로서는 목숨을 내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모든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을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가 가짜 신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피하여 발뺌할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결이 시작되고, 먼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온갖 기도와 춤과 굿을 합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자해해서 피까지 흘리며 기도했지만 불은 전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앞까지의 배경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척박한 땅에 3 이상 가뭄이 드는 것은 죽음 같은 형벌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잘못된 지도자 아합을 따라 바알과 아세라라는 귀신을 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남자 신이고 아세라는 여자 신인데, 신들은 아주 음란하고 피를 좋아했으며, 굉장히 폭력적이고 전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에게 하는 제사는 말이 제사지, 사제들이 음란한 행위를 일삼고 때로는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치기도 하는 피의 제사였습니다. 서로 싸우게 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음란하고 폭력적인 신들을 섬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적 타락과 음란과 폭력에 물들었고, 그것은 심각한 국력의 쇠퇴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특히 심각한 문제는, 백성들이 바알은 비와 풍요의 신이라서 바알을 섬기면 땅이 기름지고 하늘에서 비가 내려 풍년을 이루고 가축들도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 백성들의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거짓에 속아서 잘못되는 것을 그냥 두고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알이 가져다준다는 비를 끊어 버리시고, 3 반이나 무서운 가뭄을 내리셨습니다.


엘리야가 나라의 위기 앞에서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 되심을 분명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듯,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분명히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포한 엘리야의 목소리에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21, )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한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완전히 놓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였습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가리켜 양다리 걸치고 머뭇거리는 것이라며 통렬하게 꾸짖고, 신을 섬기라고 호통을 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인간적인 방법들이나 세상의 원리들도 도입해서 살면 잘될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야 그렇게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기 시작하면 이것도 저것도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세상 사람으로 살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신앙인답게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중간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차례가 되었을 , 무너진 하나님의 단을 다시 고쳐 쌓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0)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했으면 예배드리던 장소가 이토록 엉망이 되었겠습니까? 지독한 가뭄으로 나라가 고통당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엘리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일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열두 개를 취하니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세아를 만한 도랑을 만들고” (31-32)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단을 고쳐 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민족이 화합되고 하나 되는 역사가 동시에 일어날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2.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이제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6)


이것을 보면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여 실천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믿음의 원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순종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을 알라딘의 램프 안에 들어 있는 요정처럼 대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상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우상은 사실 무서운 아니고, 편리대로 믿는 우상입니다. 따져보면 우상을 위해서 믿는 아니라 나를 위해서 갖다 놓은 우상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믿고 섬기는 ,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성경을 보면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하고 되어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무슨 말인가? 우상 숭배는 우상을 위한 아니라 우상 숭배자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런데 우상은 군데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자기가 뭔가를 필요로 자기가 편리한 시간에 가서 섬기면 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 식이 되니까 우상 숭배의 다른 특징은 다신론입니다.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어느 시대나 민족을 막론하고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모두 다신론입니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는 배를 타고 항해할 바다의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때는 전쟁의 아레스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작년 여름 제가 방문했던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이름의 어원이 바로 ‘아테나’로서, 거기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나 신전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기 필요에 따라 신에게 뇌물을 주고 신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마치 신을 자기 부리듯이 이용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욕심대로 인생의 계획을 짜놓고, 하나님을 불러다가 일이 이뤄지도록 힘만 빌려 달라고 떼를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무당굿 때나 귀신을 대할 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상 숭배의 태도로 믿는 것입니다. 와서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하는데 내가 편리할 때만 뿐이고, 삶은 내가 알아서 살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우상 숭배와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을 결코 그런 식으로 업신여길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에 따라 우리의 뜻을 맞추고 순종해 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끌어내려서 자기 계획에 뜯어 맞추려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강력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7:21-23)


주님을 정말 믿는 분들은 말씀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했고 귀신도 쫓아냈고 권능도 행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인가? 행한 자체가 뭐였냐 하면, 자기 맘대로, 자기 뜻대로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해서 아니고, 자기 유익 때문에, 멋지게 보이려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로만 “주여, 주여” 해서는 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대해 드려야 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해석하고, 제한된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려 해서는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인 것을 압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섬겨라, 원수도 사랑하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압니다. 그러나 그건 주님의 말씀일 뿐이고 나는 삶에서 내가 알아서 맘대로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과도 같이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기도를 드리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보십시오.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이르되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3-35)


엘리야는 4개에 물을 가득 담아 와서 단에 붓기를 3번이나 하도록 합니다. 지금 불을 붙여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물을 부으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것은 결코 엘리야가 무슨 객기나 오기나 자기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을 가지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불사를 , 일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똑똑히 보고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혹시 불에 타면 날이 너무 뜨거워서 마른 나무에 저절로 불이 붙었다고 할까봐, 아예 확실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간사해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 밖에 없는 것처럼 매달리지만, 정작 일이 이루어지게 되면 자기가 노력해서 것처럼 혹은 우연의 일치였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로 하나님이 아니시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것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렵다, 힘들다 하면서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아직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어떻게든 바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불가능하고 절망이라고 생각하도록, 물이 부어지기를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 30:18-19)


이제 엘리야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백성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7-38)


기도가 끝나자마자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서 제단의 물과 제물을 순식간에 불태워 버립니다. 반나절이 넘도록 미친 듯이 춤추고 자해하며 기도해도 아무 소용없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는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단순하고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슨 광적인 예배 의식이나 희생이나 강요로 얻어지는 아닙니다. 엘리야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자신을 정결케 하며 순종한 사람이 번만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 응답의 키워드는, 겸손과 정결과 순종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가장 적대적이고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39-40)


여기서 모든 백성이 엎드렸다는 것은 두려움이 사로잡혀 하나님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하면 거룩한 두려움이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와 모든 교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불입니다.


시대의 교회들은 좋은 조직과 체계와 건물과 프로그램이 있고 아주 지성적입니다. 좋은 장비들도 있고 훌륭한 인재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토록 좋은 것들을 갖춘 시대의 교회가, 별로 갖춘 것도 없었던 1세기의 초대교회 때보다 영향력이 훨씬 없습니다. 파워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차가워져 버렸고, 우리의 마음은 굳어져 버렸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위선과 무기력함을 보고 조롱하며 비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도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불을 주시옵소서! 그럴 교회가 정말 제대로 교회가 되고, 우리가 정말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게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내려주신


그런데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불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불은 무섭고 강력하며 타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내려올 인간의 죄와 적당주의 신앙이 정결케 됩니다. 하나님의 불이 내려올 타락한 도덕이 회복됩니다.


그처럼 불이 하나님의 공의를 땅에서 이루었다면, 비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짐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만 집행하신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비가 내리게 하는 열쇠가 됩니까? 믿음의 사람의 기도입니다. 41-44절을 보면, 엘리야는 기도하면서 자기 사환에게 가서 보고 오라고 합니다. 일곱 번을 그렇게 시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내립니다.


불도 엘리야의 기도로 내려왔듯이, 비도 그의 기도로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땅에 임하는 ,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에 달렸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땅에 부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개인과 가정의 위기 앞에, 교회의 위기 앞에, 세상의 위기 앞에 있는 가장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5)


엘리야가 기도한 3 만에 억수 같이 비가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아합 왕이 마차는 갈멜 산에서 이스르엘로 먼저 떠났는데, 사이의 거리는 15마일이 넘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46)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합니까? 허리를 동이고 빗속을 달리는데 얼마나 빨리 달렸나 하면 왕이 마차를 앞질러 갔습니다. 왕이 마차라면 나라에서 가장 빠른 말들이 끌었을 텐데, 어떻게 인간이 그런 말들보다 빨리 달릴 수가 있습니까? 엘리야는 사람의 힘으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달린 것입니다.


그래도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은 좋은데, 뛰었느냐는 겁니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랬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축제의 달리기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850 1 싸움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 3 동안 닫혀 있던 하늘의 문을 여시고 억수 같은 해갈의 비를 주신 하나님에 대해, 엘리야는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가득하여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함을 지르며 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후에도 아합이 회개하고 사람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현실은 아직도 냉랭하고 답답하고 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백성들 앞에 드러났습니다. 엘리야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빗속을 뚫고 달리면서 승리의 축제를 혼자서 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체험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감격이며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개하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악한 세상 위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는 내립니다. 일이 풀릴 세상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고 자기들이 잘나서 알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했을 내려주신 비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 3:2)


이렇게 기도할 주님의 능력과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기에, 여전히 무관심하고 냉담한 세상 앞에서 빗속을 달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불을 내리시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빗속을 달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우리 각자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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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승리 뒤에 찾아온 침체, 그리고 회복 (왕상 19:1-18)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8 (1/27/16) kpccoh 2016.01.28 4234
» 불을 내리시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왕상 18:30-46)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7 (1/20/16) kpccoh 2016.01.21 3167
32 최악의 시대에도 빛이 비추다 (왕상 16:29-17:7)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6 (1/13/16) kpccoh 2016.01.14 1866
31 비뚤어진 권력욕이 가져온 비참한 결말 (왕상 15:25-34)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5 (1/06/16) kpccoh 2016.01.07 2470
30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 (신명기 32장 9-14절) - 새해맞이연합예배(12/31/15) kpccoh 2016.01.01 3267
29 믿음으로 나아가다 불신으로 끝난 아사 (역대하 14:1-5, 16:7-10)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4 (12/16/15) kpccoh 2015.12.17 3359
28 주님의 은혜로 얻은 승리 (역대하 13:1-22)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3 (12/09/15) kpccoh 2015.12.10 2268
27 반짝하다 끝난 르호보암 (역대하 11:5-12:16)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2 (12/02/15) kpccoh 2015.12.03 2818
26 자기 식대로 믿은 가짜 믿음의 최후 (왕상 12:25-13:10)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1 (11/25/15) kpccoh 2015.11.26 2175
25 왕국의 분열 (왕상 12:1-24)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0 (11/18/15) kpccoh 2015.11.19 3539
24 솔로몬의 타락과 그 결과 (왕상 11:1-13)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9 (11/11/15) kpccoh 2015.11.12 7314
23 파멸로 이끄는 성공을 경계하라 (왕상 9:1-9)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8 (11/04/15) kpccoh 2015.11.05 3080
22 성전 봉헌식과 솔로몬의 기도 (왕상 8:1-11)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7 (10/21/15) kpccoh 2015.10.21 4117
21 성전 건축의 과업을 완수하다 (왕상 6:1-13)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6 (10/14/15) kpccoh 2015.10.14 3201
20 "제자의 부르심" (요한복음 15장:8절) - 이갈렙 선교사 kpccoh 2015.10.08 1100
19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왕상 5:1-18)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5 (9/30/15) kpccoh 2015.09.30 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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