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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7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8 ✦
“승리 뒤에 찾아온 침체, 그리고 회복”
(열왕기상 19장 1-18절)
1. 엘리야의 영적 침체와 그 원인
21세기를 사는 인간의 가장 무서운 문제 중 하나는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대개 슬픔, 무관심, 절망감, 불면증, 식욕 저하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울증에 걸리면 집중을 잘하지 못하며, 심각한 경우에는 잠적하거나 자살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질병으로서의 우울증과 우울한 증세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잠깐씩 우울해질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울한 증세가 계속되고 항상 우울한 현상을 침체라고 합니다. 때로는 가장 경건한 영적 리더들도 이런 우울증과 영적 침체 현상에 빠집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꾹 누르며 참고만 있게 되면 결국 자신과 가족과 하는 일 모두를 파괴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엄청난 승리를 거둔 엘리야가 그 승리 직후에 영적 침체에 빠지고 맙니다. 엘리야의 영적 침체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1) 과다한 사역과 스트레스
많은 경우 영적 리더에게 있어 최악의 영적 침체는 최고의 영적 승리 바로 다음에 옵니다. 18장에서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혼자 싸워 이겼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수많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처형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다시 기도하니 3년 반의 가뭄을 끝내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그는 폭우 속에서 왕의 마차보다 더 빨리 뜁니다.
이 모든 엄청난 사건들은 전부 다 하루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러니 엘리야가 얼마나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지쳐 있었을지는 안 봐도 훤합니다. 바로 그때 악한 아합 왕보다 더 악한 왕비 이세벨은 사람을 보내어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2절)
이때 엘리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기적을 체험한 후니까 ‘네가 나를 죽이겠다고? 그래, 또 붙어 보자. 나와라.’ 하고 담대히 나아갑니까? 정반대입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3절)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에 놀라서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단숨에 6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브엘세바까지 도망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쳐 있었는데 그렇게 단숨에 도망쳤으니 도착한 뒤에는 완전히 탈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이전에 경험한 것이데, 어떤 영적 업적을 이룬 다음에 이상하게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그것은 평소에 QT를 제대로 안 했거나 사역에 실패해서가 아닙니다. 일은 잘 돌아가고 있고, 사역에서 협력도 잘되고 있고, QT와 기도와 예배도 잘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기운이 빠지고 답답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혹시 그런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그럴 때 ‘하나님을 믿는 내가 왜 이러지?’라고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야 같이 위대한 영적 리더에게도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렇게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작은 말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아합 왕과 850명의 우상 선지자들과 홀로 담대히 맞서 이겼던 그가,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협박 하나로 공포에 질려 도망가고 있습니다.
2) 지나친 확대 해석
탈진하여 예민해진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0절)
공포에 사로잡힌 엘리야가 호렙 산까지 도망을 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지금 너무 두려워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다 나만 미워합니다. 모두가 나를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가 아니라 이세벨 딱 한 사람만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이세벨도 실제로 엘리야를 죽이려 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엘리야를 진짜 죽이려 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자객을 보내어 처리하면 되는데 왜 굳이 사람을 보내어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너를 죽이겠다.”라고 했겠습니까?
이세벨은 머리가 아주 빨리 도는 여자였습니다. 갈멜 산에서 엘리야를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야를 두려워하고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확 돌아선 민심을 이세벨은 모를 리 없기에 그런 상황에서 엘리야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는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켜 궁전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괜히 더 크게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경솔한 행동을 하기보다는, 심리전을 택한 것입니다. 이세벨은 엘리야가 지쳐 있다고 생각했고, 그럴 때는 올바로 사고를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협박하면 엘리야가 도망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엘리야도 결국 자기 목숨만 아끼는 겁쟁이라고 생각하며 실망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돌아선 민심을 다시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세벨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녀의 작전이 그대로 적중합니다.
많은 경우 목회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신실한 신앙인들이 똑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현실이 힘드니까 당장 닥친 상황을 너무 확대해석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으면 항상 부정적인 쪽으로 상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자기가 힘드니까 작은 일 하나에도 확대해석을 하며 과민반응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하고 물을 때, 건강하냐는 질문인데, 괜히 혼자서 ‘내가 아프기를 바라나?’하고 상상을 합니다. “요즘 다 평안하시죠?”라고 하니까 ‘왜? 내가 불편하면 좋겠냐?’ 하고 의심을 합니다. 또 지나가는 말로 “잘 지내시죠? 시간 나면 제가 한 번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하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하며 불안해합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3) 쓸 데 없는 비교의식
엘리야의 침체의 또 다른 원인은 남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4절)
“여호와여 넉넉하오니”라는 말은 영어로 “I have had enough, Lord.”입니다. ‘새번역’에는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할 만큼 했다는 말입니다.
너무 영적으로 침체되니까 엘리야는 자신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에 비해 자기는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자책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정도면 모세에 비해서 어떤가? 여호수아보다 잘했나? 사무엘보다 못 한가?’라고 계속 비교했다는 말입니다.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비참하게 또는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지혜롭지 못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이 많습니다. 그 중 무엇보다, 각 사람은 다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능력이 다릅니다. 그런데도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흉내 내려 한다면 금방 우울해질 것입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그것이 영적 침체를 막는 예방약이 됩니다.
4) 불필요한 자책감
엘리야의 영적 침체의 또 다른 원인은 불필요하게 자기 잘못도 아닌 것들까지 책임지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었지만, 엘리야가 호렙 산에 이르러 동굴에서 밤을 지낼 때 하나님이 물어보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때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10절, 새)
이 말을 잘 보면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제단을 헐며 예언자들을 죽이고 반역한 것을 자기 탓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예언자로서 열정적으로 섬겼지만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건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책임감을 갖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불필요한 자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다들 경험하셨겠지만, 사람들이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옵니까? 자기가 낳은 자녀조차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럴 때마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왜 안 되지?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왜 저 사람이 안 변하지?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왜 내 아이는 내 말을 안 듣지?’라고 괴로워하며 자책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기억하고 자기 자신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 하나님 노릇을 하려 합니까? 나의 자녀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VIP를 섬기다 보면 내 맘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이제 이 정도 섬겨줬으니까 이렇게 나와 주겠지.’라고 기대해보지만, 번번이 우리의 기대를 깨뜨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려 드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왜 하나님의 역할을 하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그렇게 애를 써도 안 변하니까 그것을 보며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자리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 영혼을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신실하게 또 묵묵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끝까지 다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결과가 당장은 없을지라도 복을 내려주십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하지만 열매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알아서 거두십니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괴로워하거나 자책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고 맡겨야 하는 것이지, 별로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 무조건 다 맡긴다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그 일을 신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실패했다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느낌이었을 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실제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감정 때문에 사실을 왜곡합니다.
작년에 우리 교회에서는 한 명도 새로 믿고 세례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돌려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한 명도 안 믿은 것 자체가 실패인 것이 아니라, VIP들이 주님을 믿도록 우리가 애를 쓰지 않았다면 그것이 실패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주인에게 칭찬을 듣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야단을 맞습니다. 그 차이는 돈의 액수가 아닙니다. 사명에 대한 신실함입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마 25:15-19)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주인의 돈을 가지고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이윤을 남겼기 때문에 칭찬을 받은 게 아니라 주인이 왜 이런 엄청난 돈을 자기에게 맡겼는지를 잘 깨닫고 가서 주인의 돈으로 주인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가기는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서 주인의 돈을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주인의 일을 땅에 묻은 것입니다.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는데, 그 오랜 기간 동안 이 세 종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각기 다섯과 둘 맡은 종들은 주인의 일을 했고, 하나 맡은 자는 주인의 일은 땅에 묻어 두고 자기 일만 한 겁니다. 그것이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마 25:26-27)
주인이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주인의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종은 주인을 오해하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더라도 주인은 자기의 돈을 맡겨서 이자라도 받아 늘려놓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주인을 위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이 종은 그것도 하지 않고 주인의 돈을 땅에 묻은 채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가서 했습니다.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며 나갈 때, 천국에 갔을 때 내가 알지 못한 사람을 전도했다는 것을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치유 방법
1) 육체적 필요를 채워 주심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브엘세바까지 한걸음에 도망간 엘리야가 탈진하여 나무 밑에서 잠이 드니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십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5-6절)
엘리야는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서 다시 잠이 듭니다.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까 천사가 다시 말하기를 일어나 또 먹으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7-8절)
지친 엘리야를 다루신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잠을 자고 잘 먹고 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믿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문제를 너무 영적인 시각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영적 상태는 육체의 상태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잠을 제대로 못자고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쉬지 못하면 사람은 예민하게 되어 짜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예민해집니다.
그런데 5절과 7절에서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라서 몸이 없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만졌습니다. 우리도 이것이 필요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주변 사람이 도와줘야 합니다. 등을 토닥거리거나 허그를 해주며 만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대로 먹고 마시고 자고 쉴 때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영적 침체에 빠졌다고 해서 무조건 성경을 더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침체 현상이 나타날 때 첫 번째로 점검할 것은 자기 몸의 컨디션입니다.
2) 감정적 필요를 채워 주심
엘리야가 충분히 먹고 마시고 자고 난 다음 40일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합니다. 그곳 동굴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러자 엘리야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습니다. 그것이 조금 전에 읽은 10절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주 감정적이고, 과장이 심하고, 말이 과격하고 비논리적입니다. 엘리야는 그냥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쏟아 놓은 것이지만, 적어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가만히 듣고만 계십니다. 씩씩거리는 엘리야를 야단치지도, 새롭게 명령하지도 않으시고, 그의 분이 다 빠지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엘리야의 상한 감정을 아무런 판단이나 야단침 없이 그냥 들으며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도 다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목장에서 서로 나눌 때 조언을 하지 말고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한 감정을 나누었는데 거기에 대고 이래라 저래라 조언을 한다고 해결이 안 됩니다. 간증이나 질문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아무 판단을 하지 말고 들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영적 필요를 채워 주심
이제 하나님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도록 와서 만나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1-12절)
먼저, 하나님은 엘리야를 산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지나가시는데,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이 먼저 일어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일어나지만 그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불이 있었지만, 그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마침내 불 다음에 세미한 소리,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서야 엘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네 가지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엘리야는 첫 세 가지 현상인 바람, 지진, 불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을 기대했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계시지 아니하며”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거듭 반복되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같은 특이하고 요란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세미한 소리는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세미한 소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용한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통해 영적 재충전을 얻으며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육체적, 감정적 터치를 받은 후에는 영적 터치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질 때 우리는 조용히 개인적인 수련회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홀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조용한 자연 속에서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4) 새로운 사명을 주심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3-14절)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9절과 똑같이 물으시고 엘리야는 10절과 똑같이 대답합니다. 14절은 10절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육체적, 감정적, 영적 터치를 받고 세미한 소리를 들은 후에도 엘리야는 생각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터치를 받아도 그렇게 확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터치를 받기 전과 받은 후에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5-17절)
엘리야를 쉬게 하시고 새롭게 만나주신 하나님은 그 즉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집행할 세 명의 새로운 지도자들, 즉 하사엘(아람 왕)과 예후와 엘리사를 세우는 일입니다. 참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엘리야의 불만에 전혀 대답하지 않으시고 엘리야를 완전히 새로운 사역의 장으로 인도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은 그가 완전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생각은 하나님의 터치를 받고도 이전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터치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주십니다. 왜? 사명을 받아 실행하며 나아갈 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울해지고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은 너무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여 오래 붙들고 앉아 있기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적당한 휴식과 감정의 회복과 영적 재충전은 필요하지만, 너무 오래 그것만 붙들고 있으면 오히려 상태가 악화됩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데 일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영적 리더들이 값싼 자기 연민에 빠져서 언제까지 자기에게만 집중하며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와 열정을 다시 발휘하여 섬기기 시작해야 합니다.
5) 교제를 통한 회복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마지막 처방은 다른 믿음의 지체들과의 교제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8절)
하나님께서 이 말을 왜 엘리야에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엘리야야, 너는 열심히 사역하는 영적 리더가 마치 너 혼자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너와 같은 사람들을 7천 명이나 이 땅 곳곳에 준비시켜 놓았다. 너 혼자만 남았다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외로워하지 말고, 그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가져라. 그들을 찾아서 함께 격려하고 교제하면서 힘을 얻어라.”
하나님의 터치를 받기도 전에 이 말씀부터 들었다면 엘리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터치를 받아 회복이 되니까 이 말씀이 들리게 됩니다.
리더가 외로우면 영적 침체에 훨씬 쉽게 빠져듭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이유입니다. 혼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 말고 같이 섬기라고 우리를 교회로 묶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하면 침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모이기에 힘쓰며, 함께 모여 예배하고 또 목장으로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어렵고 힘든 영적 침체의 순간에 엘리야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해결책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기본적인 육체적 필요를 채우십시오.
둘째, 답답한 감정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
셋째, 세밀한 소리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을 새롭고 뜨겁게 체험하십시오.
넷째, 하나님께서 새롭게 보여주시는 사명을 받아 최선을 다해 일하십시오.
다섯째, 믿음의 지체들과 활발한 교제를 나누십시오.
이 순서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영적 침체에서 회복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