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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2 ✦
“반짝하다 끝난 르호보암”
(역대하 11장 5절 - 12장 16절)
1. 집권 초기에 탁월한 리더십을 보인 르호보암
솔로몬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갈라져 나간 북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은 더욱 악한 우상 숭배의 길로 나아가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동시대에 남 유다를 다스렸던 르호보암은 어떠했는가?
반역을 하게 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피해 간신히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온 르호보암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유다와 베냐민의 18만 연합군으로 북 이스라엘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니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지자 스마야로부터 듣고 전쟁을 포기합니다(4).
르호보암의 입장에서 조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잘못 판단을 하는 바람에 할아버지 다윗과 아버지 솔로몬이 피땀 흘려 이룩하고 견고하게 세워놓은 나라를 갈라지게 하고 말았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게다가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나 북쪽 반란 세력에 붙어 버림으로, 객관적으로 자신은 훨씬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은 자신의 경솔한 판단으로 실수한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보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왕이 된 초창기에는 나름대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하여 꽤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봅니다. 처음의 큰 실패가 오히려 약이 된 것입니다.
1) 국방력의 강화
르호보암은 먼저 유다 땅의 방비를 위해 국경지대 성읍들을 요새화합니다.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유다 땅에 방비하는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니” (11:5)
6-10절을 보면, 이 성들은 베들레헴, 에담, 드고아, 벧술, 소고, 아둘람, 가드, 마레사, 십, 아도라임, 라기스, 아세가, 소라, 아얄론, 헤브론입니다. 이들은 모두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어 견고한 성읍들이라”고 했습니다(11:10). 이들은 이미 견고한 성읍들이었지만 르호보암은 그 성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르호보암이 그 방비하는 성읍들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지휘관들을 그 가운데에 두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축하고, 모든 성읍에 방패와 창을 두어 매우 강하게 하니라 유다와 베냐민이 르호보암에게 속하였더라” (11:11-12)
충분한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요새마다 쌓아놓고 무기들도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적들의 침입에 대비했을 뿐 아니라, 분열로 혼란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도 단결시키는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와 베냐민이 르호보암에게 속하였더라”라고 합니다(12). 이것을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르호보암의 왕권 아래 뭉쳐서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르호보암이 아주 잘한 일입니다. 숫자가 적어도 정신을 차리고 정성을 기울이며 소수 정예화 시키면 적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또 그렇게 할 때 자기들 내부적으로도 자신감과 안정감이 생기며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다들 불안해하여 정세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르호보암은 땀을 흘리며 성읍들을 견고히 하고 방비를 함으로써 국내 정세를 안정시킵니다.
영적으로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신앙이 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되고, 강한 믿음을 가졌더라도 더욱 강한 믿음을 다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2) 북 이스라엘에 있던 경건한 사람들의 귀환
비록 나라가 남북으로 갈렸지만, 뜻하지 않은 축복의 사건이 르호보암에게 일어납니다. 그것은 북 이스라엘에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모두 다 남 유다의 르호보암에게로 내려온 일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11:13)
종교인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까지도 고향을 떠나 남 유다로 대거 내려오게 됩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11:16)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11:14-15)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백성들의 예루살렘 예배를 막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금송아지를 섬기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반대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두 해고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뿐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경건한 지도자들까지도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 대거 남 유다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다를 영적으로 세우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 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11:17)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려옴으로써 유다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가 강해지는 것은 단순히 군사적인 힘이나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의식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영적으로 바로 서야만 합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어떤 조직이나 나라이든, 잘 되기 위해서는 경건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 나라에 경건한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도 경건한 신앙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런 방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방향을 추구하며 나아가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부 직분자들만 아니라 함께 동역하는 사역자들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겠다는 성도들이 늘어야 합니다.
2. 르호보암의 교만과 타락
그런데 여기서 3년이라는 시간이 언급된 것은 르호보암 아래 유다의 번영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르호보암과 유다의 지도자들은 이때부터 말씀을 저버리고 불순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 나라를 강하게 하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왕권을 확고하게 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삼 년 동안뿐이었다. 르호보암이 다윗과 솔로몬의 본을 받아 산 것이 삼 년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11:17, 새)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사실은 그의 아버지 솔로몬처럼 그도 역시 많은 처첩들을 거느린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삼았으니 마할랏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이라. 그가 아들들 곧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을 낳았으며, 그 후에 압살롬의 딸 마아가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가 아비야와 앗대와 시사와 슬로밋을 낳았더라. 르호보암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거느려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으나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여” (11:18-21)
르호보암은 아내 18명과 첩 60명, 도합 78명을 두었는데, 그 중 마할랏과 마아가의 이름만 나옵니다. 르호보암이 가장 아꼈던 Top 2 였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르호보암은 마아가를 가장 사랑하여 그녀에게서 얻은 아들 중 장자 아비야를 왕위 계승자로 세웁니다.
“르호보암은 마아가의 아들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웠으니 이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로 삼아 왕으로 세우고자 함이었더라” (11:22)
그리고 나머지 27명의 아들들에게는 각각 성읍을 주어 흩어져 살게 합니다.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그의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온 땅 모든 견고한 성읍에 흩어 살게 하고 양식을 후히 주고 아내를 많이 구하여 주었더라” (11:23)
이것은 왕권을 두고 형제들끼리 싸우는 일이 없도록 미리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지혜롭게 행하여”라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르호보암이 이건 웬일로 슬기롭게 행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지혜로운 처세술이었을지 몰라도, 많은 처첩들을 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신명기에서 왕은 많은 아내를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보게 되지만, 르호보암의 많은 처첩과 자녀들은 결국 유다의 국력을 약하게 만드는 원인들을 제공하게 됩니다.
원로들의 조언을 무시하여 나라를 둘로 나뉘게 한 잘못을 만회하려는 듯, 르호보암은 집권 초기에 열심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가지를 못한 게 문제입니다.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12:1)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이유는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일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매달리다가, 정작 일이 잘 풀리게 되면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아는 게 인간입니다. 르호보암도 자신이 강해지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열왕기상 14장을 보면, 르호보암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행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도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들이 지은 죄는 조상들이 저지른 죄보다 더 심하여서, 주님의 진노를 격발하였다. 그들도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마다, 산당과 돌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다. 그 땅에는 신전 남창들도 있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그들 앞에서 내쫓으신 나라들이 지킨 그 혐오스러운 관습을 그대로 본받았다.” (왕상 14:22-24, 새)
유다 곳곳에 우상 숭배를 위한 산당을 세우고, 남색하는 동성애도 허락했으며, 제사 중에 음란한 성행위를 하는 이방신들의 제사 행위도 따라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내쫓으신 민족들이 행하던 모든 가증한 일들을 그대로 했습니다.
둘째,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그런 악한 행동을 하니까, 그것을 이스라엘이 본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니까 백성들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리더의 나쁜 모습을 온 백성들이 따라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악을 행하면 백성들이 다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지도자들이 성경에서 금하는 일들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다 허락하게 되니까 온 나라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그렇게 바뀌는 것을 봅니다. 이전에는 조용히 숨어서 있던 동성애자들이, 아주 버젓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었고, 심지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크리스천들이 동성애를 거부하면 인권 침해라고 하여 공격하고 벌을 줍니다. 제대로 영적 분위기를 세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가정에서도 이상하게 자녀들은 부모의 좋은 점이 아니라 나쁜 짓부터 먼저 보고 배웁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리더로서 부모의 가장 큰 책임은 삶의 모범입니다. 부모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는 가정의 자녀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녀들은 말로 하지 않아도 자기 부모가 어디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사는지를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정은 자녀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녀들도 섬기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말씀과 기도 생활을 안 하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말로는 신앙인이라고 해도, 실제 삶에서는 성경 말씀보다 드라마 더 좋아하거나, 기도보다 골프 치는 데 더 열심히 하거나,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다른 일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보이면 그대로 따라 갑니다.
리더십의 가장 큰 책임은 삶의 모범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 다음에 내 자녀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양육했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된다는 것, 가정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3. 르호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이처럼 르호보암이 악한 길로 가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통해 그를 징계하십니다. 그 당시 근동의 최고 강대국이던 애굽의 왕 시삭이 엄청난 병력을 이끌고 올라와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그에게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며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12:2-3)
전차만 1,200대이고 기병만 6만이며, 보병은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대군이었습니다. 이러한 애굽의 공격은 결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2절에서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라고 분명히 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십시오. 솔로몬의 아내가 누구였습니까? 애굽의 공주였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정략결혼으로 애굽과 친밀한 외교 관계를 다짐으로써 이러한 전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는데, 1대도 못 가서 애굽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고 침략군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내가 믿었던 사람, 괜찮을 거라고 신뢰하던 관계에서 이런 배신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에 이르니” (12:4)
이것도 보십시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마자 초창기에 그토록 모든 힘을 기울여 원래 견고하던 성들을 더 견고하게 철옹성 같이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한 국경의 요새였던 성읍들이 추풍낙엽처럼 다 나가떨어지고 순식간에 예루살렘까지 점령을 당합니다.
이런 일을 피하려고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성을 견고하게 한 것인데 무용지물이 됩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치려고 작정하시니까, 아무리 자기가 공을 들여 세워놓고 가장 자랑하던 무적의 방어선이라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것, 가장 믿고 의지하던 것,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도 이처럼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23-24)
인간적인 것들을 쌓고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놓고 아무리 강해진다 한들, 얼마 있으면 더 많이 가진 자와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자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세상을 따라가니까 세상의 방식과 기준으로 잠시 성공하는 것 같다가 결국 세상의 방식에 의해 무너지는 것입니다.
돈이나 군대가 나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지켜주십니다. 르호보암은 자기 할아버지 다윗이 노래하던 진리를 왜 몰랐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 (시 20:7, 새)
이집트의 대군은 이스라엘 국경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저항하는 이스라엘 군대를 다 짓밟으며 수도 예루살렘으로 순식간에 밀려들었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르호보암과 나라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별다른 대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선지자 스마야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의 일로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다 한지라” (12:5)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호막을 걷어 가심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르호보암이 강해서 안전했던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안전했던 것인데, 이제 하나님의 보호막이 없어지면 그냥 적군의 밥이 되고 맙니다.
이 스마야는 수년 전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뉠 때 북왕국을 치려던 르호보암에게 싸우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 이 순간 르호보암과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다시 보내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를 통해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은 멸망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하게 하시려는 게 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유다의 타락을 그대로 버려 두셨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은 중간에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그때라도 회개하면 살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스마야의 선포를 들은 르호보암과 지도자들은 놀랍게도 즉시 회개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12:6)
이 고백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맞으시고 자기들은 틀렸다고 인정합니다. 하나님과 동의합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의 첫 걸음입니다. 이렇게 되니 하나님께서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12:7-8)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이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보시고 마음을 돌이키셔서 그들이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7절에서 “조금 구원하여”라는 말씀은, 완전히 멸망하시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구원하시는 것도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즉, 가까스로 멸망만은 면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나라가 완전히 멸망당하기 직전에 시삭의 공격을 멈추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뼈저리게 깨닫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하여 고통을 겪어 보아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애굽의 공격으로 유다는 그 찬란했던 솔로몬 왕궁과 성전의 모든 보물을 빼앗기게 됩니다.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궁문을 지키는 경호 책임자들의 손에 맡기매,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경호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경호실로 도로 가져갔더라” (12:9-11)
특히 화려했던 솔로몬 시대를 상징하는 금 방패를 빼앗기고, 그다지 가치가 높지 않고 볼품도 없는 놋 방패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간신히 목숨은 건졌고, 건물도 불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르호보암과 지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놋 방패를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후회가 되었겠습니까?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면 하루아침에 황금 같은 영광을 잃어버리고 초라하게 추락한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강하고 대단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곧바로 무너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상징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호보암은 나라가 다시 조금 회복되니까 금세 다시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등지는 길을 가기 시작하여 17년의 통치 기간 중 후반부 내내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르호보암 왕은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세력을 굳게 하여 다스리니라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예루살렘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여 그의 이름을 두신 성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르호보암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더라.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 (12:13-14)
르호보암은 애굽 왕 시삭의 침공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자 잠시 스스로 겸비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 죄의 길로 갔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 어머니의 악한 영향력이 컸습니다.
13절에서 “르호보암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더라”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24:21에도 역대하 12:13과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호보암의 통치를 평가하는데 왜 이 말이 계속 언급되겠습니까? 그것은 이방 암몬 출신의 어머니 나아마가 르호보암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는 말입니다.
르호보암의 어머니가 나아마이며 암몬 여인이라는 설명 바로 다음에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12:14)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그냥 무심코 지나쳐버릴 말씀이 아닙니다. 르호보암이 악한 길로 가게 된 데에는 이방 암몬의 사악한 밀곰(몰렉)을 섬기는 어머니 나아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우상들보다도 하나님은 특히 암몬의 밀곰(몰렉)을 미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우상들은 그냥 제사를 하는 것이지만, 몰렉은 자식까지 불태워 제물로 바치게 하는, 아주 사악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주 혐오하시는 우상이었습니다. 그것을 누가 이스라엘에 가지고 들어온 겁니까? 솔로몬의 아내가 된 암몬 여인 나아마였던 것입니다.
나아마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구 혼인하여 불러들인 이방 처첩들 중 하나였는데, 999명이나 되는 다른 여인들을 다 물리치고 자기 아들을 왕이 되게 한 것이니, 얼마나 그 기가 셌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별 생각 없이 암몬과의 관계를 위해 데려온 나아마는 무서운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된 자기 아들 르호보암에게 악한 우상 숭배의 정신을 불어넣어주었고, 하나님 중심의 지도자가 되지 못하도록 애를 쓰며 방향을 돌려놓은 지독한 어머니였습니다.
이 시대에 자녀 교육에 있어 아버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집에서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어머니들도 신앙의 관점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를 자꾸 심어주려고 하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자기 자녀가 세상에서 왕이 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는 선언을 듣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도 많은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평가보다 세상에서 왕이 되는 데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그게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 자녀의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르호보암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행적은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12:15)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하나님을 떠나 악한 길로 가는 자는 결코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르호보암 통치 기간의 특징 중 하나는 계속되는 전쟁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통치 기간 대부분은 평화로 가득했는데, 이제는 전쟁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항상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르호보암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 역시 항상 불안한 삶을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전쟁이 있으니 평안이 없습니다. 두 발 뻗고 잠도 못 잡니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 얼마나 불안했겠고,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잘못된 리더십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확실하게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나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가 알아서 하는 인생은 평생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와 자녀들이 늘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늘 모시고 참 평화를 누리며 살 뿐 아니라 그 평화를 전해주는 주님의 피스메이커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