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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9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3

주님의 은혜로 얻은 승리

(역대하 13 1-22)

 

 

1.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선포한 승리

 

세상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자리가 바로 나라의 대통령 자리인 같습니다. 누가 되든지 엄청난 욕을 먹고 비판을 받습니다. 야당이었을 때는 대통령이 잘못하는 점을 보면서 그냥 비판만 하면 되고, 내가 자리에 앉으면 훨씬 잘할 같습니다.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아 보면 마음대로 되는 별로 없음을 느낍니다. 몰라서 못하는 아니라, 자리에 가보면 이전에는 모르던 변수들이 많고, 모든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비야가 유다의 왕이 됩니다. 왕으로서의 임무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에게 엄청난 어려움이 닥칩니다. 아마 그는 자기 아버지보다 자기가 잘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왕이 되자마자 문제가 닥쳐옵니다.

 

여로보암 열여덟째 해에 아비야가 유다의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미가야요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이더라 아비야가 여로보암과 더불어 싸울새” (1-2)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는데, 르호보암이 죽고 다음에도 전쟁이 계속됩니다. 좋은 것을 물려주어도 시원치 않은 상황에, 전쟁을 자식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 때는 이곳저곳 국경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서로 치고받은 작은 분쟁의 형태였지만, 아들 아비야 와서는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동족끼리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6.25 전쟁과도 비슷합니다.

 

이때 군사적으로 아비야의 유다 군대는 여로보암의 이스라엘에 비해서 열세였습니다. 병력 차이만 봐도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비야는 싸움에 용감한 군사 사십만 명을 택하여 싸움을 준비하였고 여로보암은 용사 팔십만 명을 택하여 그와 대진한지라” (3)

 

당시 지파 밖에 없었던 유다군의 수는 40만이었고, 지파였던 이스라엘의 병력은 2배인 80만이나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의 5년에 유다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애굽 군대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르호보암이 17년을 다스렸으니까, 애굽의 침공이 있은지 12 정도 지나서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되었고, 얼마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군사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왕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경험이 부족한 젊은 아비야는 노련한 전략가 여로보암을 상대로 하여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들어가기 직전, 아비야는 적군들에게 소리로 연설을 합니다.

 

아비야가 에브라임 스마라임 위에 서서 이르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들으라” (4)

 

당시 고대 사회에서 전투 전에 양군의 최고 지도자들이 나서서 자기들에게 전쟁의 명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심리전이 중요한데, 그러한 연설을 통해 자기편 군인들에게는 자기들이 의로운 전쟁을 하는 거라는 자신감을 주고, 상대의 마음은 위축시키는 효과를 있습니다.

 

아비야는 여기서 무엇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아비야가 말하는 것은 크게 가지입니다.

 

첫째, 왕국의 정통성은 유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아니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자기의 주를 배반하고, 난봉꾼과 잡배가 모여 따르므로 스스로 강하게 되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대적하였으나 때에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그들의 입을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5-7)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왕권을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셨고, 왕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소금 언약’이라고 표현합니다. 결코 파기될 없는 언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 왕조를 여로보암이 배반함으로써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그때 르호보암은 아직 어리고 마음도 약하여 능히 여로보암의 반란을 막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7).

 

사실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다윗과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먼저 것은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나라를 갈라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여로보암의 반란을 막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흥분해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러 가려는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막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야의 말은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상황을 해석한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상황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틀린 내용이 있는데도 자기는 스스로 그것이 맞는다고 착각하거나 우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비야처럼 흥분하여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사건 해석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잘못도 반은 됩니다.

 

그러나 아비야가 지적한 둘째 이유는 정확히 맞았습니다.

 

이제 너희가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무리요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들이 너희와 함께 있도다. 너희가 아론 자손인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들의 풍속을 따라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누구를 막론하고 어린 수송아지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 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들의 제사장이 있도다” (8-9)

 

아비야는,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왜곡시키고 영적 리더십의 기준과 권위를 망가뜨린 죄가 커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말합니다. 또한 전쟁에서 유다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짓 신인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이 주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쫓아내고는, 뇌물만 갖다 바치면 아무나 제사장으로 세우는 죄를 범했다고 지적합니다.

 

아비야는 여로보암이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처리했는가를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에 비해 유다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대로 세우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레위 사람들이 수종 들어, 매일 아침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등잔대가 있어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10-11)

 

아비야의 말을 보면, 말씀대로 순종할 영적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을 있습니다. 아비야는 세상적인 조건으로 보면 모든 면에서 여로보암에게 비교도 되게 열세였습니다. 나이도 어렸고, 군사적으로도 약했고, 전쟁을 지휘한 경험도 전무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몰라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만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지금 배나 되는 강력한 적군 앞에서 그토록 담대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비밀을 깨달은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 18:1-3)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데서 나옵니다. 문제가 와서 두려운 아닙니다. 상황이 어려워서 염려가 되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으니까 두렵고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최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숫자 채우러 나오라는 아닙니다. 각자 QT 하고 기도하는 것이 크리스천이니까 억지로 의무감 때문에 하는 아닙니다. 목장으로 모여서 서로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도 싫은데 억지로 하라는 아닙니다. 공부를 통해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해도 되는데 억지로 시키는 아닙니다.

 

모든 것은 남을 위해서 하거나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체험하고 시각을 언제나 하나님께 고정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임재하심을 느끼며 그분이 동행하고 계심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움이 떠나고 염려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의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 하여 전쟁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 (12)

 

아비야의 마지막 결론은 정말 대단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객관적 전력이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유다 아비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자기들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자신들의 전력이 훨씬 약한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와 싸우면 너희들이 다치니까 싸우지 말라’고 하며 막강한 적군을 오히려 걱정해주는 여유를 보입니다. 그러니 말을 들은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군대는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사람의 언어는 이처럼 항상 긍정적입니다. 승리를 확신하면서, 절망 속에서도 된다고 말합니다. 입으로 절망이 아닌 소망을, 낙심이 아닌 비전을, 패배가 아닌 승리를 선포합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힘든 상황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말대로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는 잘될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고 선포해보십시오. 이것은 무턱대로 긍정적인 말을 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적극적 사고방식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예배하며 그분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12).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하나님을 삶의, 가정의, 일터의 머리가 되시도록 선포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전쟁에서 승리를 맛보게 것입니다.

 

 

2.   아비야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정통성이 약한 여로보암은 아비야의 말에 대응할 생각을 포기하고 바로 전쟁에 들어갑니다. 경험이 많고 노련한 여로보암은 병력만 많은 것이 아니라 군사적 전략에서도 아비야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비야가 한참 외치고 있을 복병을 보냅니다.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고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13)

 

여로보암은 유다의 앞뒤로 빈틈없이 이스라엘 복병들을 배치하여 아비야의 유다 군대를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들어왔습니다. 아비야는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막상 실전에서의 경험이 없었고, 이제 상식적으로 생각할 유다 군대는 그대로 전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유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뒤의 적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부니라” (14)

 

앞뒤에서 공격을 받은 유다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아니라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이때 제사장들은 나팔을 붑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과의 예배가 살아나야 했습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나가면 전쟁에서 승리할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가 아니라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이 전쟁의 중심부에서 나팔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끌던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도, 여리고 성을 때도, 항상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에서 앞장을 섰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는 전쟁이라면 군사력과 군대의 수로 판가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전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며 나아갔습니다.

 

아비야는 적어도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재능이 많고 돈이 많고 권력이 많은 사람이 무서운 아닙니다. 그럼 누가 무서운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재능이나 돈이나 권력이 많아도, 많은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강한 자는 우주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붙어 있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이고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유다 군대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제사장들이 나팔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 이스라엘이 택한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진 자들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15-17)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대군을 순식간에 쳐서 패하게 하십니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이스라엘을 치시고 유다가 이기게 하셨습니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 자손이 이겼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18)

 

이처럼 하나님이 오시면 인간들이 서로 다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 벌어집니다. 순식간에 모든 상황이 종료됩니다. 지금 고통 중에 있습니까? 자신을 둘러싸고 압박해오는 적이 너무 강하게 느껴집니까?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벗어날 없는 상황입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매어 달려야 합니다.

 

지금은 조용히 침묵으로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간절히 매어 달려야 때입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도 편안하게, 안일하게 있을 있습니까? 적군이 쳐들어와 절박한 상황에서 어찌 그리도 느긋합니까? 주님께 간절히 나아올 유다 군대처럼 기적의 승리를 체험하게 줄로 믿습니다.

 

여로보암이 입은 군사적 손실은 엄청났습니다. 이스라엘 병사 50만이 그날 전사했습니다. 그냥 보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50 명이라는 것은 엄청난 숫자입니다. 끔찍한 3 동안의 한국 전쟁에서 죽은 국군병사가 25만이 조금 넘고, UN군은 15만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니까 6.25 죽은 한국군과 UN 숫자를 합쳐도 이날 전사한 이스라엘 병사들이 숫자가 많다는 말입니다.

 

당시 인구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 이것은 엄청난 타격이었습니다. 거의 세대의 젊은 남자들의 씨가 마를 정도의 손실이었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엄청난 패배의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몰락하게 됩니다.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20)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라는 말과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로보암은 다시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주님께 벌을 받아서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입은 패배는 회복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치셔서 오는 패배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그분이 쳐서 흩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토록 무섭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시조로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끔찍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던 막강한 힘에도 불구하고 패하였으며,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고, 자기 아들 대에 가서는 가문이 몰살당하는 화를 당하게 됩니다. 불순종의 길을 가면 당장은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가문이 아예 끝장나고 맙니다.

 

이제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아비야는 북이스라엘로부터 성읍들을 취하게 됩니다.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의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벧엘과 동네들과 여사나와 동네들과 에브론과 동네들이라” (19)

 

숫자는 많지 않지만, 중에 여로보암이 제단을 세우고 금송아지를 벧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십시오. 벧엘은 여로보암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제단을 세워 금송아지를 예배하게 만든 우상 숭배의 본거지였습니다. 그곳을 여로보암에게서 빼앗았다는 것은, 전쟁이 거짓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3.   아비야의 안타까운 말로

 

그러나 이처럼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한 아비야도 죄의 길로 가고 맙니다.

 

아비야는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모두 그대로 따라 갔으며,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는 달라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셔서, 예루살렘에다가 등불을 주시고, 그의 뒤를 이을 아들을 세우셔서, 예루살렘을 굳게 세워 주셨다.” (왕상 15:3-4, )

 

역대하에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나오는 아비야가, 열왕기상에서는 그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비야가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나머지 임기 동안 악을 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넷을 거느려 아들 스물둘과 열여섯을 낳았더라” (21)

 

아비야도 역시 강해지니까 타락합니다.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강해졌고, 그렇게 되니까 교만해지면서 변질된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르호보암의 말년처럼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장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3 만에 일찍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역대기 기자는 아비야의 그러한 어두운 면을 빠뜨린 것일까요? 역대기의 핵심 주제는 다윗의 언약과 성전의 예배입니다. 유다의 역사를 종교적인 측면으로 기록했습니다. 전쟁 전에 아비야가 여로보암 군대에 대해 행한 연설에도 언약에 대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8).

 

역대기 기자는 아비야 자신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무엇을 하셨는지에 더욱 관심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아비야처럼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보이기만 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희망이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비야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아비야 같은 사람도 쓰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비야와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강해서 승리한 결코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붙잡음으로써 승리한 것입니다. 아비야 자신은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하여” 그에게 등불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왕상 15:4). 여기서 ‘등불’은 다윗 왕조를 이어가는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왕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왕위를 계속 잇지 못하고 쿠데타를 통해 전혀 다른 가문의 왕조들이 계속 들어서는데 비해, 유다는 계속 다윗의 후손으로만 왕위가 이어져 나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잘해서가 아니라,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성실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온전함을 기억하시고 그와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아비야가 악을 행했기 때문에 여로보암처럼 다음 대에 가문에 며망하고 왕조가 바뀌는 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여전히 아비야의 아들 아사가 계속 왕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 다윗의 후손들은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단추를 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자녀와 자녀의 자녀와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원래 신앙의 패턴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아비야의 승리는 참으로 이상한 승리입니다. 모든 객관적, 상식적 조건이 열세이면서도 엄청난 적을 단숨에 꺾어 버렸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제압한 것과 같은 기적의 승리였고 그것은 사실 은혜의 승리였습니다.

 

우리도 솔직히 자신을 보아도 내가 잘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복을 누리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잘했다고 하나님이 지금과 같은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전 1:26-31, )

 

다윗을 기억하셔서 자격 없는 다윗의 후손들을 그대로 보존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분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점이 많고 실수도 많이 하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염치가 없어도 예수님을 붙잡고 의지하기만 하면, 주님 앞에 엎드려 겸손하고 진실하게 은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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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 (신명기 32장 9-14절) - 새해맞이연합예배(12/31/15) kpccoh 2016.01.01 3267
29 믿음으로 나아가다 불신으로 끝난 아사 (역대하 14:1-5, 16:7-10)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4 (12/16/15) kpccoh 2015.12.17 3359
» 주님의 은혜로 얻은 승리 (역대하 13:1-22)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3 (12/09/15) kpccoh 2015.12.10 2268
27 반짝하다 끝난 르호보암 (역대하 11:5-12:16)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2 (12/02/15) kpccoh 2015.12.03 2818
26 자기 식대로 믿은 가짜 믿음의 최후 (왕상 12:25-13:10)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1 (11/25/15) kpccoh 2015.11.26 2175
25 왕국의 분열 (왕상 12:1-24)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0 (11/18/15) kpccoh 2015.11.19 3539
24 솔로몬의 타락과 그 결과 (왕상 11:1-13)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9 (11/11/15) kpccoh 2015.11.12 7314
23 파멸로 이끄는 성공을 경계하라 (왕상 9:1-9)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8 (11/04/15) kpccoh 2015.11.05 3080
22 성전 봉헌식과 솔로몬의 기도 (왕상 8:1-11)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7 (10/21/15) kpccoh 2015.10.21 4117
21 성전 건축의 과업을 완수하다 (왕상 6:1-13)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6 (10/14/15) kpccoh 2015.10.14 3201
20 "제자의 부르심" (요한복음 15장:8절) - 이갈렙 선교사 kpccoh 2015.10.08 1100
19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 (왕상 5:1-18)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5 (9/30/15) kpccoh 2015.09.30 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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