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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5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1 ✦
“자기 식대로 믿은 가짜 믿음의 최후”
(열왕기상 12장 25절 - 13장 10절)
1. 여로보암의 죄
사자성어 중에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습니다. 둘 다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보며 배우고 자기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잘못을 보고도 여로보암은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솔로몬처럼 뛰어난 리더이자 지혜로운 왕을 벌하셔서 나라를 갈라 여로보암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말년에 타락하여 이방의 아내들을 통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 역사를 만들라고 부르심을 받은 여로보암이 똑같이 죄의 길로 가니까, 아니 더 엄청난 죄의 길을 가게 되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은 첫 단추부터 잘못 낀 잘못된 리더가 되었습니다. 일단 여로보암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30마일 떨어진 세겜을 수도로 정합니다(12:25). 이곳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 12:6-7)
나중에 세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그 자체로서는 좋았는데, 여로암이 그 다음에 행한 일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이후로 30년 이상 그곳이 모든 백성들의 예배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생각해보니, 비록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북쪽 백성들은 1년에 몇 번씩 절기를 지키러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갈 것이 뻔했습니다. 그리고 자꾸 그렇게 가다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르호보암 편이 되어 언젠가 자기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12:26-27)
이것을 보십시오.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누가 실제 그런 정보를 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 혼자 생각에 그랬다는 겁니다. 이처럼 생각이 너무 많아도 문제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생각만 너무 많이 하게 되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현실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이렇게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순전히 자기 상상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부정적인 상상력에 근거하여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결정을 해버렸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성전을 대신할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12:28-29)
남 유다와의 경계에 위치한 벧엘과 가장 북쪽에 위치한 단에 제단을 세우고, 언약궤를 대신할 금송아지도 만들어, 백성들이 번거롭게 예루살렘까지 갈 것 없이 가까운 벧엘이나 단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나 예루살렘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당장 쉽고 편하니까 약식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래 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로 산에 올라간 사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준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제사하던 우상 숭배의 죄와 똑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진짜 하나님의 방식대로 순종하며 따르기에는 너무 불편하니까, 자기들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움으로써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멀리 남쪽의 예루살렘까지 가지 않고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주 편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광야생활 때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분명히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신 12:13-14)
여기서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식대로, 자기가 편한 대로, 아무렇게나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루살렘이 아닌, 벧엘과 단에 자기 마음대로 제단을 만들고 자기 식으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 빠져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편리를 위해 주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을 바꾸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편리와 자신의 왕위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12:30)
이것을 보면, 여로보암만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여로보암의 그러한 제안을 듣고 안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얼씨구나 좋다고 하며 따랐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들도 그게 편리하고 쉬우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을 선택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죄’(30)라고 선언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인들 가운데 가장 만연한 것이 바로 이 편안한 신앙생활입니다. 편한 것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하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거기에 넘어갑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합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고, 자기가 다른 것을 해야 할 것이 있으면 안 옵니다.
그렇게 예배를 안 드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자기중심의 예배입니다. 예배하지 않으면 마음이 좀 찝찝하니까 의무적으로 해치워 버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짜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식대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인데, 가짜 예배는 자기가 편안한 식으로 ‘보는’ 예배입니다.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는 와 있지만, 진짜 예배자가 아니라 그저 구경꾼인 것입니다. 예배를 보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우리가 관객석에 앉아서 예배를 구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예배는 재앙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로보암이 어쩌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죄를 “계획하고”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잘못된 동기로 오랜 궁리 끝에 나온 준비된 죄악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주신 왕권을 자기 힘으로 유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죄를 계획했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왕권을 강화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격입니다.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처음부터 파멸의 길로 몰고 간 일입니다.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제단을 쌓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을 우상 숭배의 길로 인도한 것뿐 아니라,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레위인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은 것입니다.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12:31)
율법에는 레위 자손들만이 각 성에서 종교적인 일을 감당할 수 있고, 제사장은 오직 아론의 후손만이 섬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러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임명합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여로보암의 악한 종교정책에 반발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담스러우니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제사장을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 바꿔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고 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범죄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보면, 누구든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다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 때문에 재앙을 당하고 멸망하게 됩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절기마저 자기 마음대로 정해버립니다. 그것도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정하는 것을 봅니다.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12:32-33)
가짜는 항상 진짜와 비슷하게 합니다. 가짜라고 처음부터 확 표시가 나게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나 진짜가 아닙니다. 흉내만 내는 겁니다. 경건한 표정과 옷차림으로 예배당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다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가대 가운을 입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한다고 해서 다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와 ‘비슷한’ 거짓 경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고, 언제나 하나님께 붙어 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스스로 조심해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경고
하나님은 이러한 여로보암의 참람한 범죄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13:1)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에서부터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러 옵니다. 이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예언자들이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산당에서 직접 제사를 주관하고 있는 여로보암에게 무서운 경고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13:2-3)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이 제 멋대로 드린 예배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은 300년 뒤에 그대로 성취됩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왕하 23:15-16)
우리가 예배 시간에 참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예배, 잘못된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지 않는 예배, 자기중심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여로보암은 분명히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거짓 예배였고,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런 거짓된 예배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참된 예배입니까? 그것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결단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이사야나 선지서들을 보면, 바로 그런 거짓 예배를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다윗도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렇게 기뻐하셨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있는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배 때마다 말씀 앞에 결단이 있는, 그런 예배를 드리기 바랍니다.
하지만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선지자를 대적하려 듭니다.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13:4-5)
여로보암은 감히 왕인 자기에게 대적하는 선지자에게 손을 내밀며 “저 놈을 잡아라!” 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의 오만한 태도는 더욱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선지자를 향해 편 그의 손이 그대로 말라 버립니다. 말라 버렸다는 것은, 내어 뻗은 그의 손이 마비되어 다시 굽힐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언대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져 내립니다. 이러한 일들에 깜짝 놀란 여로보암은 자신의 손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13:6)
손이 마비되고 제단이 무너지는 상황에는 그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자신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왜 이런 일들을 일으키셨는지 전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보통 일입니까? 지금 자기 손이 즉시 마비되어 굽혀지지를 않고,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의 재가 쏟아지는 이런 일들이 어떻게 보통 일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했는데, 그 뜻을 전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는 눈에 당장 보이는 현상에만 허겁지겁 반응할 뿐입니다.
이런 정도의 일이 벌어졌다면 여로보암은 마땅히 이 모든 것이 자기 죄 때문임을 깨닫고 옷을 찢으며 그 자리에서 엎드려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다윗도 무서운 죄를 범했지만, 그는 죄를 지적받았을 때 즉시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윗을 붙들어 주셨고 “내 마음에 합한 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잘못한 것보다 더 무서운 죄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여전히 잘난 척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벌을 받으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여로보암처럼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반응하여 호들갑을 떨며 비명을 지르는 어리석음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즉시 마른 손을 다시 정상으로 고쳐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자비가 그 위에 임한다는 뜻입니다. 회개만 하면 용서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여전히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매수하려 듭니다.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13:7)
여로보암은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선지자에게서 영적인 가르침을 받겠다고 나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선지자에게 자기와 함께 집으로 가서 피곤을 풀자고 하며, 그러면 선물도 주겠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끝까지 인간적으로 반응합니다. 지적받은 죄에 대해 무감각한 그는 오직 자기 왕권을 굳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메시지와 기적 앞에서 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고, ‘이런 능력의 선지자를 내 밑에 두면 굉장하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고도 한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이런 제안을 할 것을 아시고 선지자에게 미리 지침을 주셨습니다(13:8-9).
하나님은 이 선지자에게 미리 말씀을 주시기를, 여로보암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 외에 다른 일로는 절대 북 이스라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고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3장 11-32절을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서 그가 주는 떡과 물을 먹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게 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3. 여로보암의 계속된 불순종과 하나님의 징계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직접 들었습니다. 손이 마비되었다가 고침을 받는 하나님의 능력도 몸소 체험했습니다. 또 자기 눈앞에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기적도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아무나 제사장으로 삼는 죄를 범하며 나아갑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13:33)
어떻게 그토록 계속해서 경고의 말씀과 기적을 체험하고도 변하지 않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이나 예언이나 입신이나 어떤 영적 체험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참된 회개와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하고 새로운 마음이 있어야 변화가 됩니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왜 맞는지를 모르면 결국은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여로보암은 결국 파멸하고 맙니다.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13:34)
14장을 보면, 회개하지 않는 여로보암에 대한 징계로 그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듭니다(14:1). 아들이 죽을병에 걸려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게 되니까 그제야 강퍅한 여로보암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치유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악한 여로보암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옛날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준 선지자 아히야를 찾게 됩니다(14:2).
그러나 자기가 여태껏 한 짓에 대해 양심이 찔렸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 그랬는지, 직접 아히야 앞에 가지 못하고 아내를 보내는데, 그것도 변장을 시켜서 보냅니다. 여로보암의 아내, 즉 왕비라는 사실을 숨기고서, 선물을 들고 보통 여인인 것처럼 가서 자기 아이가 어떻게 될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14:3).
이것을 보면, 아비야의 병이 당시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불치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도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에 닥치고 보니까, 금송아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를 찾고 있습니다. 진짜 급해지니까 누가 진짜인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작부터 자기가 세운 것은 가짜이고 하나님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로보암의 부인이 변장을 하고 왔고 아히야는 눈이 어두워 보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은 미리 아히야에게 말씀을 주시고 준비를 시키신 상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는 정직하고 겸손하게 와야 하는데, 끝까지 그렇게 거짓된 모습으로 나오는 여로보암과 그 아내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선지자 아히야가 전해준 하나님의 메시지는 여로보암이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악한 마음과 삶은 바꾸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살짝 알려고 하는 여로보암에게 엄청난 재앙이 선포됩니다. 그것은 비참한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14:10-14).
하나님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말하면, 여로보암의 집이 아주 철저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을 뿐 아니라, 시체를 제대로 거두지도 못하고 개와 새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그 어미가 성에 돌아가는 순간 죽을 것이며, 마침내 여로보암 왕조는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왕을 일으키셔서 여로보암의 집을 끊어 버린다고 하시는데(14:14), 이것은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그의 아들 나답을 죽이고 반역을 일으키게 되는 바아사를 미리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단순히 그 가문에만 영향을 미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14:15-16).
이처럼 지도자의 죄는 그를 따르는 백성들까지도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잘못하면 나와 내 집안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멸망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리더를 택하는 것이 중요하고, 리더가 바로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또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늘 깨어 기도하며 신실한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는 사람들, 가정에서 부모들, 직장에서 아랫사람을 둔 경우, 그러한 우리에게 모두 해당됩니다. 특히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잘되거나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셨습니까? 나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혼이 복의 길로 갈 수도 있고 멸망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아히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여로보암의 아들은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못 보고 즉시 죽습니다(14:17). 회개하지 않으며 22년을 왕좌에서 다스린 여로보암도 쓸쓸히 죽어 사라집니다. 겨우 22년을 누리겠다고 그토록 하나님의 뜻에 거역을 한 것인지,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토록 악한 여로보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중간 중간 경고의 말씀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다고 즉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때로는 징계의 채찍도 때리십니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면 되었는데 여로보암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해도 회개하면 살려주십니다. 죽이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회개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 18:31-32, 새)
우리도 여전히 주님의 뜻에 거역하는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징계의 매를 드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즉시 깨닫고 회개하여 변화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