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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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6일 수요예배
✦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15 ✦
“비뚤어진 권력욕이 가져온 비참한 결말”
(열왕기상 15장 25-34절)
[들어가는 말]
고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라고 하는 로마의 역사를 보면, 몇몇 위대한 황제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전부 왕권을 빼앗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암투로 가득한 것을 봅니다. 3세기 초부터 특히 그랬는데, 겨우 10년을 넘기는 세월 동안 황제가 4번이나 바뀐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최측근의 배신으로 처참한 죽임을 당하면서 그랬습니다. 심지어 황제가 살해당하고 강물에 버려진 적도 있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는 파워게임이고, 그 과정에서 폭력과 음모와 살인이 난무합니다. TV 사극 같은 데를 봐도, 파워는 겉으로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뒤에서는 수많은 추잡한 음모와 싸움이 있습니다. 세상 권력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는 법인데, 그래도 사람들은 그 권력을 한 번 만져보겠다고 불나방처럼 달려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던 이스라엘도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후부터, 갈수록 세상 나라와 똑같이 닮아갑니다. 오늘은 아사 왕과 동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을 다르셨던 왕들의 끊임없는 파워게임을 통해 세상이 주는 권력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
남 유다에서는 그래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왕들이 가끔씩 나왔는데, 북 이스라엘에는 첫 왕인 여로보암 때부터 마지막 19대 호세아까지 선한 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상 권력의 추악함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 바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25절)
유다의 아사 왕 2년에 여로보암이 죽고 그 아들 나답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나답은 왕이 된 직후부터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을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이어간 것입니다.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26절)
여로보암이 자기 대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냥 죽으니까 그 자식도 똑같이 악의 길로 걸어갑니다.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이것은 나답이 악을 행한 것이 그 아버지 여로보암의 영향을 받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북 이스라엘 왕들도 한 명만 빼고 모두 여로보암의 악한 길을 갔다고 나오는데, 그 한 명이 착했다는 게 아니라 여로보암의 길을 오히려 우습게 알고 더 악을 행했습니다. 그게 바로 아합 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죄악을 대물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대에서 해결할 것은 분명히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회개할 것은 확실하게 회개하고, 해결해야 할 죄는 아픔을 겪더라도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영적 패턴으로 변화될 때 죄악이 대물림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답은 통치 2년 만에 바아사의 반역으로 죽게 됩니다.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27-28절)
당시 나답은 블레셋의 도시인 깁브돈을 점령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포위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나답의 군대장관인 바아사가 이 전쟁 중에 칼을 들어 거꾸로 자기 주인인 나답 왕을 향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바아사가 나답만 죽인 게 아니라 그 집안 전체를 몰살시켰다는 점입니다.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29-30절)
아무리 원수라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는 하지 않는데, 어제까지 왕으로 모시던 사람의 집안을 이처럼 무참하게 죽이고 멸한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선포하셨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죄의 결과는 결국 자기 아들 대에 와서 가문의 씨가 마루는 끔찍한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이것은 사실 자기가 죽는 것보다 더 비극입니다. 물론 여로보암 자신은 이런 끔찍한 일을 눈으로 안 보고 죽었지만, 그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죽을 때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차라리 자기가 당하고 말지, 자기 아들에게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죽으니 편안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내가 죄를 범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을 듣고 그대로 내게 이루어져 죽는 것과, 내 아들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들은 상태에서 죽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끔찍하겠습니까? 둘 다 무서운 일이지만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로보암은 나답보다 더 무서운 재앙을 받은 사람입니다.
죄의 결과는 영원한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는 길 외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2. 여로보암 가문을 멸하고 세워진 바아사 왕조
1) 바아사
여로보암 가문을 진멸하고 왕위에 오른 바아사는 북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조를 세웁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었다고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하는 짓은 똑같이 악했습니다.
“아사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32절)
여기 보면, 바아사 때에도 남유다의 아사와 항상 전쟁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아사가 반란을 일으킨 때는 아사의 3년이었는데, 당시 아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상을 몰아내고 나라를 정결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새 왕인 바아사는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릅니다.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사 년 동안 다스리니라.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33-34절)
어떻게 보면 이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자기가 씨도 안 남기고 도륙하여 진멸한 여로보암 집안의 악한 길을 자기도 그대로 따랐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고 욕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기도 똑같은 잘못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1-5)
우상 숭배의 죄를 행한 여로보암의 가문을 멸망시킨 바아사도 여로보암과 똑같은 죄악의 길로 행했고, 하나님은 그의 집에 대해서도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후를 보내셔서 바아사에게 준엄한 심판을 전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이르시되,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16:1-4)
2절의 “티끌에서 들어”라는 표현은 원래 비천한 신분이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아사는 왕이 될 만한 인물이라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아사는 여로보암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왕이 된 것인데,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룬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행함으로써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악을 행한 여로보암의 후손들을 진멸하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여로보암이 행한 죄악은 제거하지 않고 그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은 여로보암 가문에 내리셨던 심판을 그대로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혹시 이 세상에서 좋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일이 잘 풀리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의 겸손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지금 일이 잘되고 좋은 직장 잡고 돈이 잘 벌리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그 자리에 올려주신 것입니다.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단 어떤 위치에 올라가면 교만해지고 자기가 잘나서 된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있던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며 깎아내리지만, 자기도 똑같은 잘못을 범하거나 오히려 더 잘못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올려주신 자리임을 깨닫고, 그 자리를 이용해서 더 죄를 짓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있게 하신 뜻을 헤아려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2) 바아사의 아들 엘라
바아사가 왕이 된지 24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됩니다.
“바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디르사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엘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 (16:6-7)
나답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여기를 보면 성경은 엘라보다도 그 아버지 바아사의 죄를 또 다시 언급하며 그 집안이 멸망하게 된 원인을 다시금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아사에게 진노하신 것은, 여로보암 가문에 왜 망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바아사가 그것으로부터 전혀 배우지 못하고 똑같이 악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슨 지식이나 경험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로 저렇게는 안 한다.’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자기 앞에 있던 사람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더 못하는 것이 세상의 리더들입니다.
사람은 지식이나 경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새롭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생과 역사를 제대로 보고 해석하는 통찰력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어떤 일에 실패하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실패한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 진짜 심각한 문제입니다.
3. 역사상 가장 짧은 시므리 왕조
바아사의 아들 엘라는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쿠데타로 살해됩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육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그 왕위에 있으니라.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왕궁 맡은 자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하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지휘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시므리가 들어가서 그를 쳐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이라” (16:8-10)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처럼 2년 만에 측근에게 살해당한 것과 그 상황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군대를 블레셋의 깁브돈에 출정시킨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엘라 왕은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파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전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군이던 시므리는 별 의심을 받지 않은 채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고,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엘라를 살해합니다.
반역자인 시므리는 소속 지파나 그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이것으로 보아 그는 유력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병거, 즉 전차부대의 절반을 통솔하는 지휘관이었던 것을 보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또 다른 장군이며 그의 라이벌이던 오므리는 블레셋 지방의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 중이었고, 시므리는 그 틈을 이용하여 반란을 저지른 것입니다. 엘라는 신하의 집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술에 취해 있다가 자신을 지켜줘야 하는 시위대장 시므리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성경에는 시므리가 왜 갑자기 왕을 배반하고 암살하여 왕이 되었는지 나오지 않지만, 뭔가 불만이 있었으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탐욕도 있었습니다.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니까, 군대를 쥐고 있는 장군들도 다 너나 할 것 없이 ‘너만 되냐? 나도 한 번 왕이 되어 보자.’ 하는 비뚤어진 권력욕을 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시므리 정도면 군인으로서 최고로 출세한 것이었는데도 그는 더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가까이서 왕을 모시다 보니까 그 자리가 탐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군대라는 힘이 있으니까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욕심과 힘이 합쳐지니까 살인과 파괴를 낳았습니다. 그것이 세상 권력의 실체입니다. 얼마나 추악합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권력을 잡겠다고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기도를 부탁받을 때 가장 황당한 경우가 뭐냐 하면, 잘못된 길로 나아갈 것이 뻔한데도, 그것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는 경우입니다. 좀 극단적인 예일지는 몰라도, 술집이나 Liquor Store를 오픈하면서 사업이 잘되게 기도해달라고 하는 경우, 주일을 지키지 못할 사업을 시작하면서 개업예배를 해달라고 하는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 두목이 상대방 조직의 원수를 죽이러 아들을 보내는데, 그 전에 먼저 가톨릭 신부를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영세를 주게 합니다. 아니, 살인을 하러 가면서 영세를 받게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과 같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받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쿠데타를 일으키고 후환이 두려웠던 시므리는, 바아사의 집안에서 남자는 모두 다 잡아 죽입니다.
“시므리가 왕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안 사람들을 죽이되 남자는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여호와의 말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의 아들 엘라의 죄 때문이라 그들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16:11-13)
이렇게 된 것은 바아사와 엘라의 죄 때문인데, 결국 예후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바아사는 여로보암 가문 사람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엘라 역시 왕이 된지 2년 만에 부하장군 시므리의 칼에 비참하게 죽고 그의 온 집안과 친구들까지도 자기가 저지른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학살됩니다.
나중에도 북 이스라엘에서 반복되는 패턴이지만, 피는 피를 부르고 반역은 또 다른 반역을 낳는 비참한 역사가 계속됩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이 개입하여 결국 정권을 바꾸긴 했지만, 힘으로 누르니까 굴복하고 다 끝난 게 아니라, 또 IS라는 괴물집단이 나오고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계속 탈레반 세력들이 테러를 벌이고 있습니다. 보복이 보복을 낳습니다.
피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자신이 피를 흘려 희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로마 군인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다 해치워버릴 수 있으셨지만,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증오와 멸망의 고리를 끊으시고 사랑과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 26:52-54)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끔 교회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날 때 서로 때리며 폭력사태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 뿐이지 절대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폭력의 씨를 뿌리면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둘 날이 오게 됩니다. 특히 남을 향해 겨누었던 칼은 반드시 나를 향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피눈물 나게 하면 내가 피눈물 흘릴 날이 옵니다. 내가 안 당하면 내 후손에게라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바아사가 휘둘렀던 칼이 그의 아들 엘라에게로 되돌아온 것과 같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복수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공격하려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삽니다. 안 그러면 내게 복수가 또 임하거나 내 후손에게 임합니다. 이 미움과 악의 고리를 내 대에서 끊어야 합니다.
시므리의 반란으로 바아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되었지만, 시므리의 통치는 겨우 7일 천하에 그치고 맙니다. 시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엘라 왕과 그 집에 속한 모든 남자들을 죽였다는 소식이 블레셋 깁브돈에 진 치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에 전달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은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왕으로 삼고 시므리가 있는 디르사로 진군해 갑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 일 동안 왕이 되니라 그 때에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을 향하여 진을 치고 있더니, 진중 백성들이 시므리가 모반하여 왕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지라 그 날에 이스라엘의 무리가 진에서 군대 지휘관 오므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매, 오므리가 이에 이스라엘의 무리를 거느리고 깁브돈에서부터 올라와서 디르사를 에워 쌌더라” (16:15-17)
시므리에게는 권력에 대한 탐욕 외에는 그 어떤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시므리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므리의 군대가 몰려왔고 이제 곧 성이 함락될 것을 느낀 시므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시므리가 성읍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요새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가운데에서 죽었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16:18-19)
불타는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자기가 모시던 왕을 죽이고 그 집안을 모두 살육한 시므리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였고, 그는 겨우 7일 만에 최후를 맞았습니다.
4. 이스라엘의 네 번째 왕조를 세운 오므리
시므리가 자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왕위가 잠시나마 비게 되는데, 왜냐하면 거침없이 디르사로 진격해 온 오므리도 즉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둘로 나뉘어 그 절반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라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하고 그 절반은 오므리를 따랐더니, 오므리를 따른 백성이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른 백성을 이긴지라 디브니가 죽으매 오므리가 왕이 되니라.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16:21-23)
디브리라는 새로운 리더를 따르는 백성들이 일어나서 오므리의 군대와 서로 대적합니다. 시므리가 자살한 것은 유다 아사 왕 27년이라고 했는데(16:15), 오므리가 왕이 된 것은 아사 왕 31년이라고 했으니(16:23), 디브니와 오므리의 싸움이 4년 정도 지속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므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힘든 과정을 거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내란은 오므리의 승리로 끝나고 오므리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죽음 이후 26년 동안 벌써 4번이나 왕조가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내일을 알 수 없는 나라의 불안정함 속에서 그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리더십,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리더십의 특징은 끊임없이 불안하다는 점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도 불안하고, 못 잡은 사람도 불안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도 불안하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의심과 초조함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므리는 디르사에서 6년을 다스린 다음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16:24)
그는 세멜이라는 사람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위에 성을 쌓아 요새화시킨 다음 이곳으로 이스라엘의 수도를 옮깁니다. 이 사마리아 언덕은 해발 90미터 높이의 산이었기 때문에 침략군들은 산 위쪽으로 공격해야 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또한 남북 간의 통행로로 알맞은 곳이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오므리는 신흥 강대국인 앗수르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훗날 그들의 침략에 미리 대비하여 수도를 이런 요새로 옮기는 선견지명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므리 왕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군사적 면에서 아주 훌륭한 능력을 지닌 왕이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다스리며 강력한 왕조를 세우고, 모압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어서 그 지역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주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대국인 앗수르에서도 적이지만 만만하게 보지 못했고, 나중에 오므리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가리켜 ‘오므리의 집’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오므리는 아주 유능하고 강력한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으며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16:25)
성경은 그렇게 훌륭한 그의 통치를 단 여섯 절(16:23-28)로 정리하면서, 그는 악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아무리 세상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업적과 상관없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와 그 자손을 버리시고 심판하십니다. 성공한 왕과 실패한 왕을 구분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막 8:35-37)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하나님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사람도 천하를 얻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안 믿어도 세상에서 잘되고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단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뜻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여 지옥에 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또는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그분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나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고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것을 바라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여기 우리 중에 100%가 다 그렇게 됩니다. 바로 그날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