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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14 ✦
일과 영성에 관한 몇 가지 질문들
(마태복음 6장 33절)
오늘은 이번 시리즈인 <우리는 왜 일하는가>를 마무리하면서, 일과 영성에 관하여 실제로 사람들이 질문한 내용을 함께 다뤄보겠습니다.
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는 말씀을 볼 때 사람들은 흔히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는 것을 떠올리곤 합니다. 정말 그런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서 금은 패물과 의복 등 물품을 받아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원래 이집트 사람들의 것이었으며 그들이 좋아하며 즐겨 쓰던 물건들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을 만드는 재료는 전부 다 애굽의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때는 세상 것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던 일을 무조건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계속하되 일에 대한 동기와 태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심지어 목회자가 되어 사역할 때 자기를 위해 일하는 목회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일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면 됩니다. 즉, 자기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믿음의 공동체를 위해서 일한다는 뜻입니다.
일터에서 온갖 수모를 겪고 수치를 느낄 때가 많아도 참고 일하는 것은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성격대로 하면 그냥 사표를 던지고 나오고 싶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자기 자존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그렇게 일하는데 공동체를 위해서는 왜 못하겠습니까?
이처럼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면, 자신의 일터에서 진심으로 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다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수요예배나 새벽기도에 참석하느라 일에 소홀해서는 곤란하고, 맡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영성은 목숨을 걸 때 생겨납니다. 대충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운동선수가 대충 훈련해서 어떻게 경기에서 이기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대충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목숨 걸고 해야 하는데, 영성에는 그런 치열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은 언젠가 세월 속에 스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제가 온 후 장례를 몇 번 치렀는데, 돌아가신 분들 모두 처음 뵈었을 때는 건강하던 분들이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병이 나거나 연로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건강하지만 언젠가는 다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녹슨 채 없어질 것이냐, 너무 많이 써서 닳아 없어질 것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도 안 해서 녹슬어 없어질 것이냐, 아니면 하도 열심히 해서 닳어 없어질 것이냐? 당연히 닳아 없어지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2. 저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일에는 영업을 쉬고 있지만, 앞으로는 주일 영업을 고려하고 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주일성수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주일에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면 주일성수를 하는 것입니까? ‘주일을 지킨다는 것’, 즉 주일성수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느 식당에서 크리스천인 주인 부부가 다투는데, 주일에 식당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달라서 부부싸움을 한 것입니다. 권사인 아내는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편은 주일에도 장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불편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의견이 합쳐져야 합니다. 주일 영업에 관해 두 사람 모두 마음이 편안하다면 해도 좋지만, 한쪽은 마음이 불편하다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불편한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야 합니다.
주일에도 영업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날 수입은 종업원들이 나누어 갖게 하고 주인이 이익을 취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주일에는 외식도 못 하게 하는 엄격한 교단이 있습니다. 그 교단에서는 주일 저녁에 교인들끼리 식사하면 계산은 월요일에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삶에서 쌓이는 자기중심이라는 독을 해독하라는 뜻입니다. 주기적으로 해독하지 않으면 독성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독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곧 해독하는 시간입니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랬는데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독이 되는 것들이 이전 시대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의미 있는 쉼, 가장 가치 있는 쉼은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보여 주신 것을 저번에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일한 적이 없으십니다. 안식일에 일해서 얻을 유익이 뭐가 있으셨겠습니까? 오히려 비난과 공격을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발견하신 그날 고쳐주신 것입니다. 일부러 안식일에만 고치신 게 아니라 평소에도 고치셨고 안식일에도 고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일로 봤지만, 주님은 진정한 안식으로 보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쉼을 강제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실 때,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을 걷게 하셨습니다. 주중에 이틀분을 걷으면 상해서 그다음 날 먹지 못하게 하셨기에, 만나는 보통 하루치만 걷을 수 있었지만,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치를 걷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40년간 가르치친 것입니다. 시간의 단락을 지어 쉬는 훈련, 그것도 철저히 쉬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안식일뿐 아니라 안식년도 갖게 하셨습니다. 6년 일한 다음에 1년 쉬는 것입니다. 7년 째에는 밭을 갈 수 없습니다. 밭도 쉬어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도 일을 시키면 안 됩니다. 철저히 법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400여 년간 노예로 살아오느라 한 번도 쉬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쉼이 회복되어야 인간성도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50년마다 희년을 허락하셨습니다. 49년간 누적된 경제적 불평등, 얽히고설킨 채권 채무 관계, 엉망이 된 경제 질서를 완전히 원위치로 돌리는 제도가 바로 희년(jubilee)입니다. 희년이 시작되기 전 2년 동안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제48년까지 일하고, 49년과 50년은 쉬어야 합니다. 50년째 되는 해에 모든 빚이 탕감되고,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2년이나 일하지 못하는데,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안식년 전에 6년째에는 2년 치 소득을 허락하셨고, 희년 전에는 3년 치 소득을 보장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간섭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안식을 보장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쉬면 주님이 그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믿음입니다.
3. 크리스천이 세상에서 부를 쌓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주님의 비전을 품고 사업한다고 하지만 마음속 욕심이 너무 큰 것은 아닌가 해서 염려가 됩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엄청난 부를 쌓기 위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비난을 받았지만, 생의 마지막에 부를 멋지게 흩음으로써 사회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록펠러센터의 임대 수입금으로 뉴욕 시민의 수도세를 대신 내는 등,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부를 쌓건 흩건 그것이 우리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쌓는다고 해서 죽을 때 가져갈 수나 있습니까? 쌓기만 한다고 해도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쌓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다 쓰지 못하고 가므로 남은 것은 누군가를 위해 쓰이게 마련입니다.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어서 곳간을 더 크게 지은 부자 이야기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
30~40년 부를 쌓은 후에 대학을 세우고 병원을 설립하는 목적을 가졌다면 좋은 일이지만, 오직 자기 집안만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부를 쌓는다면, 하나님이 언젠가 흩으실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부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부를 쌓아서 남에게 줄 것인지, 아니면 날마다 흩으면서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것인지를.
특히 자기 욕심을 스스로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주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돈의 액수가 아닙니다. 왜 절반만 냈는가도 아닙니다. 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정직하게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저는 여전히 욕심이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수십만 달러, 아니 수백만 달러를 벌고 싶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고백하며 열심히 버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를 쌓는 것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쌓는가가 중요합니다. 무조건 쌓다가 돈에 압사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쌓는 것에 짓눌려 살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깊이 파고들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돈만 파다가 돈더미에 깔리면 흙에 묻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만, 목적이 부정직하면 쌓다가 무너지고 맙니다.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 앞에 떳떳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습니다. 죽어라 돈을 벌어놓고는, 쓰기 시작할 때쯤 암에 걸려 죽는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돈 버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기쁘게 벌고, 기쁘게 써야겠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직원들에게 임금을 짜게 주면서 교회 헌금을 많이 할 게 아니라 직원들에게 넉넉하게 주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딤전 6:10, 새번역)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했지, 돈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지혜는 이런 것입니다.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8-9)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야망이나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직업을 선택할 때도 중요하고, 최선을 다해 일할 때도 중요하고, 돈을 벌 때도 중요하고, 돈을 쓸 때도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을 구제해도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 한 일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위한 예배가 있고,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날마다 자기 내면을 점검해야 합니다. 동기가 향하는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4. 크리스천이라면 내가 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복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있는 곳을 복되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좋아야 믿을 수 있는, 즉 신실한 성품이 빚어집니다. 성품과 영성이 뒷받침되면 초조해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봅니다. 실력이 엇비슷하면 믿을 만한 사람을 발탁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군인이 있었는데, 중장으로 진급할 때 동기와 선후배 사이에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다들 어떻게 하든 줄이 닿는 곳에 로비했는데, 그 사람은 아무 데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만이 유일하게 진급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청탁하니까 어느 한 사람의 청탁만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런 청탁도 하지 않은 그 사람이 뽑힌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잘 속지 않습니다. 거짓말인지 바른말인지 알아챕니다. 모르고 속는 사람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속아 주거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내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믿음에서 인격이 빚어집니다. 그러니 좋은 믿음으로 좋은 성품을 가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왕이 된 다윗이 귀한 나무인 백향목으로 왕궁을 지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전은 아직 천막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지만 주님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 있다고 하며(대상 17:1)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에게 “네가 어떻게 내 집을 짓겠느냐? 내가 네 집을 지어 주겠다. 영원한 집을 지어 주겠다. 네 아들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주겠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마음과 사랑만 품어도 주님이 이미 다 받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니 주님께 뭔가를 드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제대로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줄 수 있으신 분입니다. 사실 우리가 드리는 것 중 하나님께 합당할 만큼 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며 살면 됩니다. 그런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뭔가 특별한 것을 해드리려고 하기보다는, 전업주부라면 가사를 열심히 하고, 직장인은 일을 열심히 하고, 사업가는 사업을 열심히 하면서, 각자 자기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빌린 돈이 있으면 제때제때 갚고, 정직하게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5. 일과 영성에 균형이 있어야 하는데, 일과 영성은 반대 개념이 아닙니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대개 기업가들은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것과는 달리, 큰 기업을 경영하려면 많은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경영이란 사람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살아야 일이 되지 사람이 죽으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먼저인 것을 아는 것이 일의 영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면 불량식품 같은 것을 어떻게 팔겠습니까?
허영만 화백의 <식객> 만화에 소개된 전주의 삼백집 식당이 있는데, 콩나물국밥을 하루에 딱 삼백 그릇만 팔아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 만들 수 있는 양이 딱 300그릇 정도이기 때문에 그것만 판다는 것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물을 조금 더 부어서 500그릇을 만들어 팔면 더 돈을 벌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200그릇에 해당하는 수입을 포기하고서라도 가장 좋은 상태의 음식을 손님들에게 양심껏 제공하는 것, 놀랍게도 이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일과 영성의 균형을 잘 이루면서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우리 모두 자기 직장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또 자기 지역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업체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나타나고, 우리 주변이 우리 때문에 살아나는, 그런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