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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9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11 ✦
사랑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들어가는 말]
일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실적입니까? 사실 세상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 누구나 열심히 일합니다. 특히 한국 사회의 60세 이상은 소득 1만 불을 목표로 아주 힘들게 일했던 세대입니다. 지금은 더 높아진 목표에 따라 사회 전체가 더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가 달성되면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집니까? 경제 목표를 달성하면 사회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다 압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성취해서 반세기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보면 사회 곳곳은 폐해가 산적해 있고, 사람들의 내면은 어둠과 공허로 가시덤불이 되었습니다.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정신없이 살다 뒤돌아보니 과연 경제성장만이 추구해야 할 가치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가?’ 우리는 자신이 어떤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사는 존재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생이란 한마디로 ‘고해’(苦海)라고 말하곤 합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사는 것이 왜 그렇게 고통스럽습니까? 이런저런 수많은 일이 끝도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입니다.
1970~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직장을 잡는 것이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정규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일터를 찾아 이력서를 여기저기 수도 없이 내고 어디선가 불러 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불안한 알바를 끝내고 정규직으로 일터에 출근하는 얼마 동안 젊은 직장인들의 발걸음은 아주 가볍습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가끔 직장을 배경으로 나오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비인격적인 대접, 모욕적인 언사, 끊임없이 윽박지르는 직장 분위기, 잠시 쉬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 현실 등, 일에 치이며 자기가 깎여가고 소모되는 것 같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나 갈등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터에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창출해냅니다. 그들은 일터에서 정점을 향해 힘차게 올라가면서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임원이 되고, 부사장이 되고, CEO가 되고, 회장이 됩니다. 그래서 산하 기업들을 이끌며 많은 직원을 거느립니다. 그 사람은 분명 일터에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직장 신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좁은 문을 거쳐 성공의 정상에 오른 극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일해서 세운 회사가 얼마 못 가서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무엇을 위한 일인지 생각하라
인생에서 남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평생을 던져서 일구어낸 기업이 허공에 사라진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전에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기업 회장들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그들은 자기 재산도 명예도 다 잃고 감옥까지 다녀왔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수모를 겪고도 살아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 사람들만 그렇겠습니까?
같은 일터에서 20년, 30년 아니 평생을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치 그 일이 자기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승진 시기가 되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울고 웃습니까?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한국의 보통 직장인이라면 부서가 바뀔 때마다 마음을 졸였다고 합니다. 왜 저 사람은 저리 가고, 이 사람은 이리 왔는지 동료들끼리 뒷얘기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밤늦도록 술 마시며 분노를 달래보며 이따위 직장 때려치우겠다고 외치지만,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 때문에 섣부르게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다음 날 또다시 퇴근 후 모여 앉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직장 얘기인데, 사실 말이 직장 얘기지 대부분 윗사람이나 동료들의 험담입니다. 술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집에 돌아가면, 때로 옷을 입은 채 소파에 쓰러져 잠들기도 했습니다. 아마 요즘은 그런 직장인들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왜 일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입사 후 처음 몇 달간 생각하고 다짐했던 것들은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그대로 잊힙니다. 매일 아침이면 습관적으로 출근하고, 주말이면 잠시 숨을 돌렸다가 또다시 한 주를 맞이합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5년, 10년, 20년을 보내는데, 정말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어느 날, 문득 어쩌다 이 직장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왜 떠나지 않고 10년, 20년을 다니고 있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만 하는 시점을 맞습니다. 자의가 되었건 타의가 되었건 반드시 그런 순간이 옵니다.
일이 무엇이며, 일터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왜 일합니까? 왜 꼭 그 일을 해야만 합니까?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계속해서 자기에게 던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제대로 묻지 않고 일을 시작하면, 인생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일해야 먹고 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노동이 있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 이름을 지어준 것이 바로 일 아닙니까? 그렇게 원래 에덴동산에서는 노동이 즐거운 것이었는데, 죄가 들어온 이후 노동은 인간에게 형벌처럼 내려졌습니다. 땀을 흘려야만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죄를 범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일을 해도 제대로 열매를 거둘 수 있을지 없을지 보장이 안 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지, 저주를 받아서 일하게 된 게 아닙니다.
범죄 이후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인간의 어깨에 일이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간에게 일은 산꼭대기로 돌을 밀었다가 떨어지면 다시 밀어야 하는 시시포스(Sisyphos)에게 주어진 형벌과도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합니까? 그런데 열심히 일해도 얼마 되지 않는 월급 때문에 또 마음이 얼마나 힘듭니까? 또 언제 이 자리마저 잃게 될지 모르는 불안함도 있습니다. 별로 존경하기 힘든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며 기쁨도 맛보지 못하는 이런 삶을 왜 사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일의 목적, 일의 기준, 일터의 환경을 점검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일하며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일보다 큰 뭔가가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평생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절)
이것은 사도 바울의 놀라운 통찰이자 믿음의 고백입니다. 죽도록 일하고 모든 것을 쏟아붓더라도, 일하는 목적이 사랑이 아니라면, 자기가 하는 일 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이력서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원래 바울은 사랑 없이 스펙을 많이 쌓았던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한 일이라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교회를 박해하는 데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비로소 자기가 하던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해도, 그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리를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사랑 없이 쌓아온 경력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은퇴할 때쯤에야 깨닫습니다.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어땠겠습니까? 일터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 일찌감치 눈을 떴더라면 다른 인생을 살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띤 토론이나 논쟁을 벌이고 서로 다투기까지 합니까?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섬겨도 사랑이 없이 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진작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신약 복음서들을 읽어 보면, 예수님이 서른 살 때까지 목수로 일하셨다는 기록은 단 한 줄로 나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막 6:3)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 목수 일을 잘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목수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목수 일도 그렇게 적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목수 시절에 대패나 망치나 끌로 목재를 가차 없이 깎아 내고 반듯하게 만들었던 경험을 살리셔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다짐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제자들을 깎고 다듬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목수가 되겠다.’
하나님께 붙들려서 동기가 새로워지고 삶의 목적과 의미가 새로워지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내 모든 삶의 배경과 능력과 경력을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이전에 나의 유익을 위해 살던 삶에서 돌이켜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지시고 고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왜 그 일을 하느냐?” 하고 끊임없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닦은 실력과 경험을 그대로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왜 써야 하고 무슨 목적으로 써야 하는지 깊이 묵상하며 깨닫는 시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으시지만, 사용하시는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양을 돌보는 것,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치라.” 하고 부탁하신 뒤에 그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사명을 맡기실 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시는지 확인하게 하신 후 당신의 양을 맡기셔서 돌보게 하십니다.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2. 사랑 없는 모든 일이 헛되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전에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사랑 없이 일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적개심과 증오심과 시기와 질투로 일했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하며 일했지만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일뿐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사랑 없이 하는 일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 비로소 일의 참된 목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목적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일을 통해 성장하지만, 사랑 없이는 성숙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없이 일하는 사람은 아이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절)
사랑 없이 하는 일은 결국 나만을 위한 일이고 남을 힘들게 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사랑하기에 일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일하며, 사랑 때문에 일을 잘 마치라고 하십니다.
사랑받을 때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또한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받고 또 사랑할 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면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사랑받지는 않고 주기만 하면 고갈되어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목장 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연습을 하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끝없이 남의 약점을 들춰내고 심지어 사과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할 때는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남을 짓밟고 올라가려 하지 않습니다. 내게 실수해도 사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화 <러브스토리>의 대사처럼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과 태도가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4-7절, 새번역)
일을 잘한다고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라도 아이처럼 유치하고 아이보다 더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참된 어른이란, 어디서든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에 들어서면 모두가 잘살게 될 줄 알았습니다. 소득 3만 불이 되면 대부분의 사회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4만 불, 5만 불을 목표로 쫓기듯이 달렸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소득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떻게 하면 소득과 행복이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죽도록 일해서 돈을 벌어도 가정이 깨지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밤새워 공부해서 명문 대학에 들어가도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자녀가 직업을 어떤 기준에서 선택해야 합니까? 그들이 택한 일터에서는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명대사를 남긴 <러브스토리>는 당시에 너무 빤한 사랑 이야기여서 처음에 할리우드에서 거절되었던 시나리오였습니다. 결국, 작가 에릭 시걸(Erich Segal)이 그것을 책으로 먼저 낸 뒤 나중에 영화화되었습니다. 그 빤한 이야기가 1970년대 젊은이들의 텅 빈 마음을 울렸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많이 방황하면서 곳곳에 히피가 등장했고, 그들이 반전과 평화와 자유를 외치는 동안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은 월남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 위에서 비록 약간은 진부하지만 순수한 사랑 이야기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것입니다. 영화의 폭발적 인기를 반영하듯 1970년에서 1985년 사이에 태어난 여성들의 이름 중에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이름인 제니퍼(Jennifer)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그 영화가 인기였습니다.
사랑과 고향은 인생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일에 중독될수록 사랑을 갈망합니다. 이름이 알려질수록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하늘나라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또한 일의 목적은 사랑이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이 땅에서 일을 마치면, 우리에게는 돌아가 쉴 수 있는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고향을 발견하기까지는 진짜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곳은 없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풀어 가는 방식이 다른 것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보는 관점과 문제 해결 방식에 있어 사람의 가치를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관점과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웃과 관계를 맺고 갈등을 풀겠다고 하면 성도가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고, 성도가 성도 되어야만 세상과 구별됩니다.
우리를 세상과 구별해주는 유일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러브스토리>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동기와 방법보다 강렬하고 뛰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결국 모두 하나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무슨 일을 하다가 귀가하시겠습니까?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적어 놓은 것들을 차례로 해보다가 가시겠습니까? 과연 그런 것들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거기에 적힌 것이 온통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에만 그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다가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하다고 하신 일을 먼저 하기 원합니다. 바로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버킷리스트입니다.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그리고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입니다. 성경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절)
사랑이 최고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도 없고, 사랑하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로서 매일 사랑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