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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2일 수요예배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13 ✦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
1. 몸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이번 사도신경 시리즈도 막바지에 우리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의 열두 개의 ‘나는 믿는다’라는 고백 가운데 열한 번째인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몸의 부활과”
이것은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우리가 부활할 때 우리의 영혼만 아니라 몸도 부활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지고 보는 물리적 존재인 몸이 부활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물리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할 때 우리의 몸도 부활한다는 뜻이라면, 부활하는 그 몸은 어떤 형태의 몸을 말하는 겁니까? 그 몸은 죽기 직전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린아이 때 죽었으면 어린아이의 몸으로, 나이가 들어서 죽었으면 나이 든 몸으로, 사고를 당해서 죽었으면 사고 난 몸의 상태로, 병들어서 죽었으면 마지막 죽기 직전의 그 병든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곤란하다 보니 어떤 이단들은, 부활할 때의 몸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가장 좋았을 때인 이팔청춘 때의 모습으로 부활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가장 젊고 생기가 넘치고 예쁘고 멋질 때의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식의 주장은 어려서 죽은 사람의 경우를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또 이팔청춘 즉 열여섯 살 때가 가장 예쁘고 멋진 때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열여섯 살(고1) 때를 생각해보면 그때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그때 사진을 보면 여드름도 나고 얼굴이 아직 변할 때였으니까 여러 가지로 그때의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인생에서 언제 자기 몸이 가장 멋지고 아름답습니까? 그건 사람마다 각자 다르기 때문에 그 시기를 획일적으로 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16세라고 주장하면 말이 안 됩니다.
몸의 부활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피터 럭크만(Peter Ruckma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완전히 이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극보수 근본주의에 속한 사람으로서 오직 King James Version만이 참된 성경이고 다른 번역들보다 우월한 계시를 담았다고 주장해서 문제가 많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부활할 때 모두가 다 ‘33세 남자’의 몸을 갖는다고 단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천사들이 자기 생각에 33세 남자이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의 몸이 33세 남자였으니 그렇다는 겁니다. 심지어 여자들도 부활할 때 예수님과 같이 33세 남자의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그냥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할 때 더 문제가 되는 점은, 왜 이런 신앙 고백을 하는지, 이러한 신앙 고백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사도신경의 목적은 단지 어떤 영적 진리를 선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신앙 고백으로 드려진 영적인 진리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가운데 지금 이 세상에서 사도들처럼 바르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사도신경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몸의 부활’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신앙 고백은 지금 여기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어떤 면에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 부분을 설명하는 신학자들은 보통 이 신앙 고백의 중요한 이유를 ‘영지주의’ 이단에서 찾습니다. 영지주의는 초대 교회 당시 교회를 뒤흔들던 주요 이단이었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헬라 플라톤 철학 사상의 이원론에서 나온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실제가 아니라 일종의 환상일 뿐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도 실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를 미혹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이 영지주의였습니다. 이런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반박하기 위해 열한 번째 신앙 고백으로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 당시에는 그런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이 사도신경 신앙 고백의 주된 이유와 목적이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 열한 번째 고백은 공허한 외침이 됩니다. 특히 1세기 당시는 그랬을지 몰라도, 영지주의 이단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지 않은 지금 우리에게는 이 신앙 고백이 별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정확히 모르겠고, 그 이유와 목적 또한 마음에 와닿지 않는 신앙 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무슨 의미로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겠습니까? 성령님은 모든 성도가 사도들을 따라 이 고백을 할 때 어떠한 영적인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소위 ‘부활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에 대하여 정확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2-44절)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사도들의 신앙 고백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육의 몸이 있듯이 영의 몸이 있고, 그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신앙 고백을 그대로 받아 동일하게 고백하는 의미와 목적도 바로 이것입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44절, 새번역)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심은 것들이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심은 것이라면, 반드시 신령한 몸으로 다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직접 본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엄청난 고난과 무지막지한 채찍질을 당하셨고,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매어 달리셨으며, 죽음 후에는 창에 옆구리가 찔려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랬던 그분의 몸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부활했는지를 사도들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고 놓칠 수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에서 육의 몸을 온전히 드렸을 때, 그것이 그대로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하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의미이고 이유입니다. 몸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몸이 죽었다가 그 몸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러한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자연적인 몸으로 사는 동안 믿음으로 심은 것들은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영적인 열매로 맺힐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육의 몸’, ‘자연적인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나중에 보니까 신령한 몸,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신비이고 엄청난 은혜입니다.
잘 감이 안 오십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하루는 꿈을 꿨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부터 은퇴할 때까지 산과 바다와 강을 다니며 예쁜 돌을 찾아서 집에 모아놓아라. 그러면 30년 후 네가 은퇴할 때 그것이 금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꿈이 너무 생생하기도 하고 또 예쁜 돌을 모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 집 마당에 통을 하나 마련해놓고 돌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서 은퇴할 때까지 30년 동안 꾸준히 거기에다 예쁜 돌들을 가져다 넣습니다.
이제 은퇴하게 되어서 그 통을 열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겠습니까? 돌들입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산과 시내를 돌아다니며 예쁜 돌을 찾아 넣어놓아도 30년 후에 통을 열어보면 상식적으로 돌이 들어 있지 금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통을 열어보니까 진짜로 그 돌들이 금으로 변해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옆집 이웃도 내가 하던 것을 보며 자기도 예쁜 돌을 모으겠다고 똑같이 30년 동안 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바쁘고 다른 취미활동을 하느라 가끔 생각날 때마다 조금 모아서 30년이 지난 후 보니까 5개 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매년 산책할 때나 휴가 갈 때마다 열심히 돌을 찾아 모아서 1년에 100개씩 가져다 넣었습니다. 그래서 3천 개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옆집 이웃도 금덩이가 5개 생겼으니 굉장히 기뻐했겠지만, 나는 무려 3천 개의 금덩이가 생겼으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육의 몸’,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게 바로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돌을 모았는데 엄청난 금덩이가 된 겁니다. 솔직 돌을 모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고 돌에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돌을 엄청난 금이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돌이 금으로 변하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꿈이니까 될지 안 될지 확실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분명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믿음으로 심은 모든 것이 놀랍게도 그렇게 신령한 열매로 바뀌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잃으면서 보여 준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은 다른 어떤 것보다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신앙이 있었기에 그 엄청난 고통을 이기고 아름다운 신앙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두 아들의 장례 예배에서 나누었던 소위 ‘아홉 가지 감사’라는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아홉 가지가 다 몸의 부활 신앙에 해당하지만, 특히 여섯 번째와 여덟 번째 감사의 고백은 그야말로 육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믿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믿음이란, 바로 이 육의 몸을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2. 몸의 부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
그렇다면 몸의 부활, 즉 이 세상에서 사는 육의 몸을 심고 천국의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서 고백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남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42절, 새번역)
이 세상에서의 몸은 우리가 아무리 소중하게 여기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음식을 잘 조절하고 건강식품을 잘 챙겨 먹더라도, 결국은 다 썩어 없어집니다. 그렇게 안 될 몸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물질도 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린 명예와 권력도 그렇고, 세상 지식도 그렇습니다. 다 없어집니다. 그러한 것들 중 우리가 천국에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죽는 동시에 다 끝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참된 믿음은 이 썩을 것을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썩어 사라질 시간을 드리고 영생의 복을 얻어야 합니다. 썩어 없어질 물질을 드리고 천국의 보화와 풍요를 얻어야 합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성공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적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고, 천국의 영광과 면류관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 바로 사도들과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2)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남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43a절, 새번역)
여기 ‘비천한 것’(욕된 것)은 헬라어 원어로 ‘수치, 치욕’을 말합니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욕망이 바로 이 ‘욕된 것’, ‘비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 욕망(desire)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욕망은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성적인 것, 물질의 소유에 대한 것, 자기 자랑과 권력에 대한 그 모든 것이 원래는 나쁜 것이 아닌데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가 받은 수많은 상처와 거절과 실패 그리고 우리의 죄가 다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결국 인생은 마음에 부끄러움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몸이 부끄러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욕된 것’, ‘비천한 것’을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 그것으로 인해 주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끄러움 때문에 자비와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부끄러움을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3)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남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43b절)
우리는 정말 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몸도 약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의 감정은 너무나 약해서 수시로 무너지고 흔들립니다. 요즘은 멘탈이 흔들린다고 말하는데, 감정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함 때문에 주님을 찾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강함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한 육신을 드려서 그 강한 천국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바로 그 신앙이 몸의 부활을 믿는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은 이 세상에서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참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그래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사람들로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겠습니까? 우리가 육의 몸, 자연적인 몸을 입고 활동하는 모든 것들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겠습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주신 몸과 시간과 물질과 명예와 성공과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천국 상급을 풍성하게 쌓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