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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2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10 ✦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누가복음 10장 38~42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일할 때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일이 아니더라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은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일어나는 부산물입니다. “자칫하면 사람을 죽일 뻔했어요.”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만큼 억울했고 엄청난 분노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 현실 가운데 이런저런 일로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제가 안식월로 한국을 방문했던 2015년 7월에 경북 상주 어느 마을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83세 할머니가 사이다에 농약을 타서 마을회관 냉장고에 넣어 두었는데, 그것을 마신 동네 할머니들 중 2명이 죽고 4명이 중태에 빠진 사건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투 놀이를 하다가 싸운 끝에 원한을 품고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한 마을에서 60년 이상 알고 지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1. 일하다 발생한 갈등을 풀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 간에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네가 다르기에 선이 있고, 선이 있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선은 넘지 말아라.’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긴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갈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 간에 늘 있는 긴장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일하다가 생기는 갈등을 푸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38-39절)
예수님이 하루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시던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물론 혼자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런데 미리 알리고 가신 것 같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베다니)에 오신 것을 안 마르다가 급히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 같습니다.
이제 갑자기 찾아온 일행 때문에 집이 소란해졌고, 큰 손님 일행을 맞았으니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동생 마리아도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찾는데 동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얘가 어디로 갔나?’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가만 보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한가롭게 말씀을 듣고 있는 겁니다.
그 순간 마르다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순간 심호흡하며 호흡 기도를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계속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직선적으로 말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0절)
“주님, 제 동생 마리아가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저는 혼자 쩔쩔매며 일하고 있는데 전혀 돕지 않고 여기서 한가하게 말씀이나 듣고 있으니 말이에요. 마리아에게 당장 일어나 저를 도와주라고 명령을 내려 주세요.”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마르다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일손이 필요하면 동생을 직접 불러서 시킬 겁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일부러 예수님께 와서 말한 겁니다. 예수님께 두 가지를 알려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지금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동생 마리아가 자기와는 달리 얼마나 이기적인 아이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 간에 일어나는 갈등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욕구가 뒤섞여 있습니다. 마르다도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와, 마리아를 깎아내리려는 욕구가 같이 있습니다. 보통 이 두 가지 욕구는 쌍둥이처럼 붙어 다닙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은연중에 다른 사람 비난도 많이 합니다. 또한 남을 자주 비판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를 좋아합니다.
일터에서도 이런 일들은 쉴 새 없이 일어납니다. 상사를 찾아가 동료를 고자질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41-42절)
“마르다야, 일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단다.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 가지만 해도 된다. 마리아는 지금 가장 좋은 것 한 가지를 하고 있지 않니?” 이 말씀이 조금 이상합니다. 눈앞에 일이 쌓인 게 보이는데 일을 하든지 말든지 하라시니, 예수님이 좀 무책임하신 게 아닙니까? 스스로 일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예수님도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식사할 겨를도 없이 아주 바쁘게 일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감당하느라 중심의 평안을 놓친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또 내면의 질서를 지키시면서, 내면의 평안으로 외부에서 오는 분주함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짜증이 날 때가 많으십니까? 그런데 짜증이 난다는 것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그럴 때 바로 충전하지 않으면 사고가 터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내면의 질서를 늘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내면의 질서가 바로잡히면 갈등 지수가 훨씬 낮아집니다. 우리의 영성 지수는 곧 관계 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자주 일어난는 것은 영성 지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바른 영성, 좋은 믿음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좋은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이 바른 영성입니다.
왜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화가 났습니까? 자기의 관계 지수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관계 지수가 떨어지니까 갈등 지수가 높아졌습니다. 지금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동생 마리아와는 언젠가 또 다른 일로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갈등 지수가 높으면 누구와도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2. 갈등은 흔들린 중심 때문에 일어난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주인이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말씀을 시작하시면 그 말씀을 듣는 것이 모든 일 중에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설교가 시작되면 꼭 밖으로 나가는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가서 전기밥솥을 꽂고 예배 후에 성도들이 식사할 밥을 짓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잠깐 들어와 찬양하다 다시 나가서 식탁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일이고,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정말 희생적인 태도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던 그분의 마음에 계속해서 불만이 차올랐다는 점입니다. 회의 때마다 왜 자기만 밥을 해야 하느냐고 짜증을 부렸습니다. 사실 아무도 그분에게 밥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겠다고 해놓고는 그렇게 하면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밥을 짓는 것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에 예배드리러 왔으면 무엇보다 먼저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나간다는 것은 분명 앞뒤가 바뀐 일입니다. 그 결과 말씀을 듣는 본질을 놓침으로써 자기 안의 갈등 지수가 높아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갈등 지수는 자기 내면의 우선순위가 뒤바뀜으로써 높아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왜 화가 났는지 아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의 중심이 흔들린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마음이 흔들려서 화가 난 것인데, 이 일 때문에 동생을 탓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대부분의 갈등은 내 마음의 중심, 내 생각의 축이 흔들려서 벌어진 일입니다. 상대방 때문이 아닙니다.
갈등이 일어났을 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어떤 일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기 내면의 태도가 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일은 빌미일 뿐입니다. 그래서 일할 때 잘 안 된다고 동료를 비난하는 것은 섣부른 결론입니다. 일이 주는 갈등을 그렇게 단순화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그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르다의 분주함은 사실 마리아 때문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흔들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적 내공의 문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엄청나게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내면이 흔들려서 화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자기 내면이 흔들려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영적 내공을 어떻게 기를 수 있습니까? 사실 영적 내공이란 바른 신앙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바른 신앙이 무엇입니까? 바른 신앙에 관한 오해가 많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자동으로 바른 신앙입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기만 하면 신앙이 좋은 것입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훌륭하고 성숙하기 때문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것이 곧 성숙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 열심 때문에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른 신앙이란 내면의 문제이자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갈등 지수를 낮춘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관계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곧 관계이고 인격이고 성품입니다. 좋은 관계에서 좋은 행동이 나와야 하는데, 좋지 않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행동으로 포장하려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한 부부가 하루는 핏대를 세우며 부부싸움을 하다가 전화가 울리자 숨을 가다듬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응답합니다. “네, 네, 집사님. 그럼요. 제가 기도할게요. 요즘 집사님 덕분에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몰라요. 너무 감사해요.”
곧 전화를 끊고 나서는 다시 서로 고함을 지릅니다. 부모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들이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데 서툴지 않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줍니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회심 후에도 그 성격이 남아 있었습니다. 동역자였던 바나바는 관계 지수가 높은 사람이었고, 바울은 일중독자의 특성을 보입니다. 그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롬 12:14-18, 새번역)
이 말씀을 통해 회심 전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박해하는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그는 기뻐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달라졌습니다.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되면서 일에 대한 갈등을 처리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올바르고 진정한 믿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먼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걸핏하면 갈등을 빚던 사람이 이제는 갈등을 조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가능한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열매 맺는 삶이란 일의 성과나 업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크리스천에게 삶의 열매란 관계의 변화입니다.
크리스천이 갈등을 빚는다는 것은 사실 그 정체성에 걸맞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갈등을 원만하게 처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개 대가족에서 자란 사람이 그렇습니다. 가족이 많을수록 갈등 처리 능력이 커집니다.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의 수를 이미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핵가족 시대의 특징은 자기중심주의적인 성향입니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어릴 때부터 자기를 가정의 중심으로 여기며 자란 탓입니다. 그래서 작은 갈등조차 해소하지 못해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갈등 처리 능력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게 됩니다. 일하다가 부딪쳐도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생깁니다. 주님을 알게 되면서 그런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도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크리스천이 있다면 그 일터가 안 변하겠습니까? 사회가 안 변하겠습니까?
지금 이 세상의 문제는 사실 세상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갈등을 처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싸우는 일들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하다가 부딪치는 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칙이 교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에 대한 험담이 들릴 때 ‘그 사람을 잘 몰라서 저렇게 얘기하는 것이지.’라고 흘러버려야 합니다. 나에 관한 험담이 들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는 솔직히 열 받습니다.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러나?’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알면 이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이 욕했겠지. 나를 모르니까 저 정도밖에 욕하지 않지.’ 하며 넘어가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갈등을 회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갈등이 죄의 열매라는 말이 아닙니다. 갈등 지수를 낮추는 피스메이커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고 바른 관계이며 바른 영성입니다.
좋은 신앙인이 있을 때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인일 때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술 마시고 형님 아우 하며 갈등 지수를 낮추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자기 자신과 화해함으로써 갈등 지수를 낮춥니다.
먼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긴장을 낮추어야 합니다. 한 번씩 자신을 쓰다듬어 주고 격려해 주십시오(격려 언어, 인정 언어). 아침이나 밤에 이를 닦으며 거울을 볼 때 자기를 가리키며 이야기해주십시오. ‘너는 멋져! 너는 아름다워!’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상당히 유치(?)한 것 같지만 의외로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용납하고 자기와 화해함으로써 어느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바로 그러한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평화와 소망을 세상에 전달해 주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