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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1일 수요예배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10 ✦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의 의미
(요한복음 16장 7~15절)
1. 성령님을 향한 신앙 고백
사도신경은 열두 개의 ‘나는 믿는다’라는 신앙 고백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제 여덟 번째로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우리를 살짝 당황스럽게 합니다. 너무 짧고 간단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아무런 수식어도 없고, 어떤 설명이나 구체적인 예도 들지 않은 간단한 고백이기에, 우리를 상당히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로 그렇게 구체적으로 고백했는데, 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는 겁니까?
사도신경에 대하여 설명한 어떤 책에서는 그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 즉 기독론에 관하여 아주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고백하게 했지만, 성령님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신학적으로 정립된 것이 없어서 이렇게 간단히 언급만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책의 그런 내용이 더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는 사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 신앙 고백이 너무 짧다고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고백은 절대로 성령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무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이 고백은 결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 즉 성령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도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으로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결코 성령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사역과 그 역사하심을 믿는다는 고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서 성령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이 여덟 번째 고백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뒤이어 나오는 네 개의 고백, 즉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이 고백들이 성령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 네 가지 고백은 ‘교회와 성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따로 분류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바로 그 네 개의 고백을 성령님의 사역으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을 보면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고백에서 ‘Credo’(나는 믿는다)를 사용하고 나서, 그 후에 이어지는 고백들은 모두 쉼표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즉 뒤에 나오는 네 가지 고백은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에 계속 이어지는 신앙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고백은 ‘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믿습니다. 그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정말 사모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2. 성령의 역사하심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님의 역사를 한두 마디로 간단히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성경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에 대한 말씀들, 특히 예수님이 증언하신 성령에 대한 말씀들을 보면, 성령의 주된 역사하심은 세 가지입니다.
1) 관계를 맺어 주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를 못합니다. 성령이 그 안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또한 모든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한 지체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한 가족,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성도 간의 아름다운 교제, 즉 코이노니아가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를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2) 깨닫게 하심
성령님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소개하신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론 성령님은 구약 시대에도 역사하셨지만,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무엇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실 때 그 모든 것을 성령님이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공생애 내내 계속해서 성령님이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처음부터 계셨고, 계속해서 역사하셨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성령님을 소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치 당신의 구원 사역을 마무리하고 마치 육상 계주에서 배턴 터치를 하여 넘기듯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7절)
그런데 예수님이 당신의 뒤를 이어서 사역하실 성령님을 소개하면서 그분의 사역 가운데 매우 강조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다음 절을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8절)
여기에서 ‘책망하다’는 헬라어 원어로 ‘엘렝코’인데, ‘드러내다, 폭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국어 성경에서는 ‘책망하다’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이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책망하다’라는 단어 안에는 지적하고 야단치고 혼낸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구절에서 ‘엘렝코’의 정확한 의미는 ‘깨닫게 하다’입니다. 지적하고 혼내고 야단치는 의미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것을 잘 번역했습니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8절, 새번역)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무엇이 의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닫게 하심’이 바로 성령님의 주된 사역입니다.
선교학에 ‘엘렝틱스’(Elenctics)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선교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가 만든 선교적 용어와 이론입니다. 선교 사역은 복음이 없는 곳에 가서 그들이 그동안 익숙하게 여기며 살았던 모든 것이 죄악 되고 무의미하며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복음의 진리로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엘렝틱스’가 바로 요한복음 16장 8절의 ‘엘렝코’, 즉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인 ‘깨닫게 하심’에서 온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단지 잘못된 것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3절)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마귀의 속임수를 걷어내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말씀의 깊은 의미와 진리를 알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성령님이 깨닫게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으로 역사하시는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3) 회복시키심
결론적으로, 성령님의 결정적인 사역은 바로 ‘회복’입니다. 관계를 맺어 주시는 성령님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멀어졌던 모든 사람 가운데 회개의 영을 불어넣어 주시고 깨닫게 하셔서 관계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영접하게 하시면서 그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통해 모든 삶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소개하면서 그 이름을 ‘보혜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보혜사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안에는 ‘보호자, 중재자, 변호하는 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에는 ‘상담자, 위로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결국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사역의 최종 목표는 바로 우리의 회복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키고 돕고 위로함으로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주된 사역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회복시키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각 사람의 마음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공동체 속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우리의 마음이 회복되고, 우리의 꿈이 회복되고, 우리의 모든 관계가 다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회복하시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국의 찬양 사역자 중 이은수라는 분이 있는데, 오래전 LA에 있는 ANC온누리교회 찬양 사역을 담당하셨던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만든 곡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곡이 <너는 내 아들이라>일 것 같습니다.
그 곡은 이은수 목사님이 작곡했지만, 가사를 쓴 분은 이재왕이라는 형제였습니다. 이재왕 형제는 1967년생으로 선천적 근육병인 근육 디스트로피라는 희귀병을 앓았습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몸이 아파 의사들은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학력은 어머니 등에 업혀서 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친 게 전부였지만, 그는 크리스천으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500편이나 되는 찬송 시를 남기고 결국 33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20대 초반의 어느 날, 한없이 몸부림쳤지만 자기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그냥 죽어 버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맘대로 죽을 수도 없는 그 비참한 순간 무력함과 절망과 허무함과 싸우면서 말씀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시편 2편 7절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그런데 이 말씀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구절이 그 순간 갑자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으로 들려오면서 그의 심령 가운데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아프고 무력하고 비참해서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던 그에게 하나님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낳았다.”라고 귀에 들이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무너졌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존귀하고 행복한 것은 이런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 이런 벅차오르는 감격 가운데 써 내려간 찬송시가 바로 <너는 내 아들이라>입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 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이재왕 형제의 찬송시 <너는 내 아들이라>가 쓰인 모든 과정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시편 말씀을 보면서 그 형제가 그것이 자기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받게 하신 것,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 태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신 것,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 하나님’으로 온전히 회복되게 하신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은 상황, 그래서 하나님에게 잊힌 자인 것 같이 여겨질 때 ‘그렇지 않다. 너는 여전히 내 아들이다. 십자가 그 해산의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는 은혜가 임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된 사건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이며 역사하심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언제나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가운데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강력하게 체험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