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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7일 수요예배
✦ 우리는 왜 일하는가 4 ✦
일과 쉼의 균형 맞추기
(마가복음 6장 41~46절)
1. 일의 전문가이신 주님께 여쭤보라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인 동시에 일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건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통해서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신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우리가 일을 반복하게 되면 그 일이 우리의 마음을 빚어 가기 시작합니다. 선한 일을 하면 마음도 선해지고, 악한 일을 하면 마음도 악해집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기보다는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어떤 태도로 일할 것인지 먼저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을 건너뛰면 우리 인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가장 큰 고민은 평생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주어진 기회가 잘 맞으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재능이 있어도 그것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어렵고, 막상 재능을 살려서 직업을 가져도 평생 기쁨을 맛보며 일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직장을 얻고 난 다음에는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빡빡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면서 한 주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주말에 잠시 숨을 돌리고 나면, 금방 다시 치열한 일터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나마 주말마다 쉴 수 있는 일터는 나은 편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의 성격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쉴 수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게 일에 매이고 짓눌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의욕이 사라지고 무거운 피로감에 찌든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소위 일이 잘 풀린다는 사람들이나 잘나간다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정신없이 일합니다. 성공한 사람 치고 일을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숨돌릴 틈도 없이 밀려드는 일을 지치지 않고 해치우는 것을 능력과 성공으로 여기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일이 많고 적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계속해서 과중한 일이 주어질 때 잘 감당해야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의 리듬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렇게 날마다 쏟아지는 일에 열심히 매달리다가 덜컥 제동이 걸리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뜻밖의 사고가 일어나거나, 생각하지도 못했던 음해를 당하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관계가 깨지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갑자기 그런 일을 겪으면 당황하고 낙심하며, 때로는 분노하게 됩니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그런 일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 때문에 더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리가 일터에서 경험하는 그런 어려움을 과연 예수님이 아실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디지털 문화나 IT 직종이 없었고, 경제 상황이 지금처럼 복잡하지도 않았으니까, 예수님이 지금 나의 상황을 다 이해하실 것 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가정과 일터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일하시면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돈을 많이 뜯기셨을 것이고,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놓고 갚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충을 아십니다. 비록 문화와 사는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힘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특히 내게 답이 없는 일은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왜 성경을 읽어야 합니까? 주님과의 관계에서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어떻게 쓸 것인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에 참 지혜가 있으니, 거기서 지혜를 얻는 것보다 쉽고 안전한 길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빈 그물로 돌아와 그물을 손질하고 한숨 자러 가려던 때, 예수님이 그의 배에 올라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런 후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속으로 웃었을 겁니다. ‘제가 어부이거든요. 선생님은 목수 출신이잖아요. 물고기 잡는 일은 제가 전문가입니다. 이렇게 해가 뜨고 나면 물고기는 더 이상 안 잡힌다고요.’
물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투덜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눅 5:5, 새번역)
이때 두 마음이었을 겁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권위에 놀랐을 것이고, 그래서 이분이 하신 말씀이라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 말씀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그물을 다시 한번 던져 드리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눅 5:8, 새번역)
“예수님,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 주십시오.” 물고기를 많이 잡았으니 기뻐서 춤이라도 춰야 할 판인데 덜컥 겁을 냅니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럽니까? 속으로 비웃고 투덜댔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으로 잘난 척만 했지,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구나.’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성경 속에 가둬 두면 신앙과 삶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이 한 권의 고전에 불과하다면 책을 한두 번 읽은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생명이고 지혜이며 빛입니다.
2. 너무 바쁜데 일과 쉼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도시 문명은 우리를 잠시도 그냥 내버려 두거나 한가한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는 보고 들을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스마트폰 알람에 맞추어 일어나고, 눈만 뜨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미디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더구나 바쁜 일상의 리듬에 젖어 들면 그 리듬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리듬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바빠야 안심이 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연말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어야 편안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년에 오랜만에 한국에 가보니까, 예전에는 지하철을 타면 연세 드신 분들 대부분이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졸곤 했는데, 요즘은 어르신들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루종일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종일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쉼입니다. 쉼이 일을 지탱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쉬어야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언제 쉽니까? 휴가를 떠나면 쉴 수 있습니까? 사실은 휴가지에서도 연결을 끊지 못합니다. 휴가를 가면 젊은 사람들은 주로 뭘 합니까? 사진을 찍어서 자기 SNS에 올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휴가를 하면서도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게 휴가지에 가면 느슨해지기는 해도 연결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는 24시간 이메일 체크를 강요하거나 즉각적인 카톡 응답을 요구합니다. 저도 큰 교회 목사님이 휴가 가서도 계속 부목사들에게 목회를 지시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삶에 한적한 곳이 사라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시간과 장소를 잃어버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의 능력만 생각하지, 쉼의 능력은 곧잘 잊어버립니다. 아니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기계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지만, 사람은 쉬지 않고 일하다가는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하다가 사고를 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과 쉼이 균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기계는 일이 능력이지만, 사람은 쉼이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일과 쉼의 균형을 잃어버린 사람은 관계의 축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고는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삶의 기술은 균형의 기술인데, 예수님은 이 균형의 예술가이십니다. 우리만 바쁜 게 아니라, 2천 년 전 예수님 역시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에 파묻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은 하루종일 말씀을 선포하셨고, 이제 각자 집으로 흩어져야 할 저녁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고픈 군중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저녁을 굶어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에 일일이 관심을 가질 수 없고, 모두 자기 사정에만 급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군중 가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단 한 명 있더라도,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주실 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에는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했고, 허기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때를 기다리셨습니다. 바로 이때 먹고사는 문제가 누구에게 달렸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순간은 왜 먹고사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가르치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 먹고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하는 사람들에게 광야에서 내린 만나처럼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나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능력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것처럼 한 어린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 많은 사람들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에서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삶에서 역사하실 때 아무것도 없는 데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내놓는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사용하십니다.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41~44절)
예수님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축복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는 성인 남자만 5천 명이었고, 그 가족까지 합치면 2만 명 이상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많은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의 수가 열두 명이라 열두 바구니만 거두어 온 것이지, 더 많은 음식이 백성들 사이에 남아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기적을 맛본 사람들의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정신없이 먹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제자들은 또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들의 생각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5~46절)
먼저 제자들을 배에 태워 갈릴리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건너가라고 쫓아내듯이 보내시고, 예수님은 군중을 해산시키십니다. 제자들과 군중을 분리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제자들도 군중과 함께 덩달아 흥분했기 때문입니다. 군중이나 제자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적만 보았을 뿐이고, 기적에 담긴 메시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기적을 베푸는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지,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의 의도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누구도 보인 적이 없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누구보다 주목받을 일을 하셨고, 사람들이 몰려들 만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군중과 떼어 놓고 사람들을 흩으신 후에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기도하셨고,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으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더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쁘고 분주한 일과 가운데 어떻게 쉼을 누리셨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로 일과 일 사이의 쉼을 삼으셨고, 기도로 일과 쉼의 고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곧 쉼이고 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는 일과 쉼 사이에 균형을 잡아 주는 균형추와도 같았습니다. 기적과 기적 사이에 특별한 기도가 있고, 일과 일 사이에 일상적인 기도가 있고, 일과 쉼 사이에 습관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막 3:20)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식사를 자주 거르셔야 했습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이 일하셨다는 말입니다. 많은 일로 얼마나 피곤하셨던지 배를 타고 가다 엄청난 폭풍이 몰아닥쳤는데도 잠에서 깨지 않으시고 계속 주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막 4:38, 새번역)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그 난리가 났는데도 주무셨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은 이런 과중한 일을 다 감당하셨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영성을 지키셨습니까?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과 대면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밤을 새워야 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에 따라 밤늦도록, 또는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일의 목적이 분명한 만큼 예수님은 기도를 놓치지 않으셨고, 그 때문에 예수님은 일중독에 빠지거나 일이 많아서 탈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제자들에게도 한적한 곳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한적한 곳”이라고 일컫는 장소는 어떤 곳일까요? 먼저,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외딴 장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헬라어로 ‘에레모스’라 하는데, 구약의 ‘광야’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는 유대 광야를 지칭하는 네게브, 즉 이스라엘 남쪽의 광야 지대를 ‘에레모스’로 번역했습니다. 그 이전에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방랑한 광야를 ‘에레모스’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이 바로 한적한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라볼 것이 없는 곳, 그래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이 광야이며 한적한 곳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쏟아지는 정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라볼 것도, 의지할 것도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살지만, 예수님은 그럴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일과 쉼의 관계에 대한 답
일과 쉼에 관한 답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첫째, 일과 쉼의 관계는 균형이 원칙입니다.
쉼이 없으면 일도 없습니다. 일이 없다면 진정한 쉼이 아닙니다. 인간은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쉬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일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쉼으로써 유지됩니다. 쉴 줄 아는 것이야말로 능력 중의 능력입니다.
둘째, 단순히 일을 멈추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쉼이 극대화됩니다.
이것이 안식의 원래 목적입니다. 쉼은 거룩함의 회복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고,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는 타인 중심일 때 지켜집니다.
예수님은 쉼의 회복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섬김의 삶은 ‘나 중심’이 아닌 ‘너 중심’입니다. 누군가를 섬길 때 회복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쉼은 단순히 일을 멈추는 것 이상입니다. 남의 필요를 채우는 ‘일’은 휴식보다 더 강력한 쉼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쉼은 한적한 시간, 한적한 곳에서 기도로 완성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회복됩니다. 그러나 온전한 회복은 하나님과 대면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온전한 회복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한적한 곳에서 드려야 합니다. 인적이 끊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곳,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하나님만을 의식할 수 있는 곳,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며 한적한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광야, 한적한 곳에서 우리 쉼이 온전해집니다. 그 한적한 시간을 가리켜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소원을 아뢰는 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기대할 것을 사람에게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 의하여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만 온전한 회복이 있습니다. 기도는 어느 때보다도 쉼과 회복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일과 쉼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기적과 몰려드는 군중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잃지 않으셨습니까? 새벽에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인기가 최고조에 이를 때 오히려 사람들을 피해서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을 온전한 쉼의 시간, 회복의 시간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써 온전한 쉼과 회복을 경험하는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