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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8일 수요예배

우리는 왜 일하는가 9

갈등의 원인을 발견하라

(마태복음 2020~28)

 

[들어가는 말]

 

종종 가족 간의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을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 하고 누구보다 사랑해야 할 관계가 가족인데, 어떻게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자매 간에 살인할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깝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경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알려줍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형제의 살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고, 두 형제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각각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동생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 안에서 자라나는 분노를 어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분노에 걸려 넘어질 것을 조심하라고 말씀해주셨지만, 결국 살인의 길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1.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1)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상처는 무서운 힘을 지녔습니다. 깊은 상처의 골 위에 분노가 쌓이면 언젠가는 폭발하며, 분노는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욕하고 비웃으며 조롱하는 것도 살인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6:21-22)

 

우리가 일터에서 비인격적인 일들을 겪더라도 그것 때문에 직접 살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로 인한 살인의 동기가 우리 안에 꾸준히 축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어떻게든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서 축적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냥 두면 이 분노는 기어이 사건을 일으킵니다.

 

교회에서도 분노를 쌓아두면 안 됩니다. 그런데 특히 왜 일터에서는 분노의 싹과 같은 갈등이 일어나는 일이 그토록 잦습니까? 갈등이 빚어지는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이어서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반드시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17-19). 그런데 그때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0-21)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왕위에 오르실 테니 두 아들을 챙겨 달라는 부탁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청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좌우편 자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마실 수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정말로 너희는 나의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히는 그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22-23, 새번역)

 

이때는 예수님이 십자가 이야기를 세 번이나 들려주신 다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한 열두 제자들은 하나같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왕이 되시면 누가 이인자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의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먼저 선수를 치니까 분노합니다.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 (24, 새번역)

 

열두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그들은 서로를 경쟁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마음속으로 자기들 중에서 과연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 앉을지 따져보느라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입니다.

 

이처럼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분노가 그 골짜기를 채우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계속 갈등해오던 제자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합니다.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바로 앞에 다가왔는데 제자들이 다투고 있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갈등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갈등을 빚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다툼을 권력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 사이의 모든 다툼은 권력 다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선언함으로써 갈등을 원천적으로 해결할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25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25-28, 새번역)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권력은 남을 부리는 힘이고, 권력자는 높은 자리를 원하는 법이다. 그러나 너희가 갈 길은 권력의 길이 아니다. 그 길을 가서는 안 된다. 권력의 길은 남보다 더 크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지만, 내가 갈 길은 그와 전혀 다르다. 나를 믿고 따르는 너희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되지 않고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싸움의 본질은 누가 더 큰지를 다투는 데 있습니다. 내가 더 중요하고 더 크다고 생각할 때 항상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군가가 남들보다 더 크고자 할 때, 남들에게 섬김을 받고자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가정에서도 왜 다툼이 일어납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권력 다툼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도 본질은 권력투쟁입니다. 형제자매끼리도 그렇고, 일터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왜 다툼이 일어납니까? 자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권력 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곳은 성전이 아니라 갈등의 현장이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뒤 수도원처럼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도를 닦지 않으시고, 갈등과 싸움의 현장인 인간 사회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에 맞서 싸우지 않으셨고, 종교 기득권 세력을 때려 없애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순순히 내놓으시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피를 뿌리셨습니다.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또는 갈보리)는 죽음의 언덕입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쏟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생명을 흘려보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갈등과 불만이 없는 일터는 없습니다. 일하다 보면 갈등 상황에 놓일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누가 얼마만큼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해 모두가 기쁘게 합의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체제마다 각기 다른 해결 방식을 주장하지만, 어떤 방식이든지 사회 구성원 전체를 만족시키는 해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는 갈등을 벗어나 기꺼이 한마음으로 합의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요구하거나 부탁한 적이 없는데 자기 집이나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는 사건이 잇따랐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스스로 자기 소유를 포기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사실 공산주의가 초대교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인데, 공산주의가 해법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문제를 해결해 주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만, 권력에 의한 공산주의식 분배는 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검증이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답입니까? 아닙니다. 자본주의보다 탐욕을 부추기는 이념은 없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그럼 사회주의는 어떻습니까? 정부의 규모와 역할 논쟁에 끝이 없습니다.

 

결국 무엇이 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권리 포기만이 답입니다. 어떤 이념이든지 권력으로 강제할 때는 지옥보다 더한 곳을 만들고 맙니다. 그러한 일들은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갈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하십니까? 인간 존재의 목적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속한 존재로서 반드시 창조된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를 잊어버리는 것은 피조물이 겪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은 가장 큰 어리석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의 뿌리이며,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죄의 근원이라고 알려줍니다.

 

1916절 이하에 보면 한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계명을 지키며 살면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십계명의 뒷부분(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신만만하게 자기가 계명들을 다 지켰는데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재차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19:21, 새번역)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준 후에 다시 와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청년은 근심이 가득한 채 돌아갔고,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기 소유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기란 어렵습니다.

 

 

2)  내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갈등을 빚는 두 번째 이유는,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갈등의 원인입니다. 예수님은 20장 앞부분에서 포도원 품꾼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1~16).

 

포도원 주인이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낮 열두 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 세 시에 온 사람이나, 심지어 다섯 시에 와서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줍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훨씬 오래 일했던 일꾼들은 은근히 더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똑같이 주니까 투덜거리며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라고 불평합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5)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내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면 왜 죽을 때 빈손으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잠시 맡겨 주신 것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맡기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맡기셨습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많이 맡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이며, 왜 더 맡겠다고 난리입니까? 잠시 맡고 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얼마만큼 맡느냐를 두고 끝없이 다툽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당을 나눠 주고 떠난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갈등과 다툼이 시작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두 받은 것을 내놓고 일한 만큼 계산해서 합리적으로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예 조를 짜서 시간대별로 출근하자고 제안할지도 모릅니다. 아침 아홉 시에 왔던 사람은 다음 날 오후 다섯 시에 출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쪽이건 주인의 분배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같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말없이 참고 견딜 사람은 없습니다.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포도원 주인이야? 왜 내가 받은 일당을 가지고 당신이 시비야?’ 그들 중 아무도 잠잠하지 않을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자신의 위치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내 몫은 내가 정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인정하고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설득당한 것입니다.

 

 

3)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의 세 번째 원인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의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가 끝이 아니고, 중고등학교나 대학이 끝이 아닙니다. 직장이 끝이 아니며,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인생의 계산은 이 땅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깨닫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를 의식하며 사는 사람과 사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깨닫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왜 갈등합니까?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를 모르고,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또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은 다투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왜 갈등을 빚겠습니까? 철들지 않은 아이들과 왜 싸우겠습니까? 다만 모르는 사람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손발에 못이 박히면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라고 외쳤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자신을 끔찍하게 고문하는 일본 경찰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2.   피스메이커로 살아가라

 

결국 일터에서의 영성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반드시 일한 만큼 받아야 합니까? 받은 만큼만 일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받아야 합니까? 동료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윗사람과 항상 갈등해야 합니까?

 

사람마다 자기 입장이 있는데, 계속 내 입장만 고집하는 것이 곧 갈등의 원인이 됨을 알지 못하면 내 고집에 내가 휘둘려서 결국 더 큰 갈등 속으로 빨려들게 됩니다. 내가 먼저 갈등 구조에서 벗어나야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피스메이커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피스메이커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한 갈등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갈등에서 자유로워져야 갈등 속으로 뛰어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갈등 상황에 놓인 양쪽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길로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손해 보기로 결정하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분명 손해를 각오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 손해를 메우고도 남는 것을 공급해 주시는 손길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물질적인 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이 주어집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가면 세상은 우리를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심 두려워하게 됩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회의 갈등이 점점 더 깊어지고 손만 대면 터질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사회 속 일터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일터에서 시기하고 분노하는 사람, 갈등을 부추기는 사람, 수시로 갈등을 빚는 사람, 말썽꾼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잠잠하게 만드는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피스메이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폭발하기 직전에 이른 세상의 분노 수위를 낮출 수 있고 화평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스메이커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때 나의 일터에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가 바로 나를 통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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